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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알고 대처했어도, 운이 좋아야 빈사에 그쳤을 강력한 공격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죽음을 맞이했어야 했다.
한데 목숨을 부지한 것도 모자라 지나치게 멀쩡했다.
“…야.”
782번이 자신에게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도진을 보호한 덕이었다.
다그네가 남겨 준 힘은 물론이고, 방금 깃든 다스칸다르의 힘, 심지어 자신을 언데드로 살려 낸 누아의 저주까지.
그녀는 말 그대로 모든 걸 내던져 도진을 지켜 냈다.
“다행… 이야.”
도진의 부름에 힘겹게 눈을 뜬 782번은 가장 먼저 도진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정작 본인 몸에는 멈출 수 없는 균열이 생겨나는 주제에.
도진은 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쩌적 하고 갈라져서 아래로 떨어지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붙잡는다고 부서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이미 그녀의 상태는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든 뒤였다.
“…괜찮아.”
782번은 석고상처럼 분리된 어깨와 팔을 보며 말했다.
“뭐가! 뭐가 괜찮아!”
도진이 화를 냈다.
그것을 본 782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더니, 곧 흉터로 가득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날 위해서 화를 내주는 거야? 나 이런 거 처음인 거 같아.”
천진난만하게 웃음으로 남긴 그 말이 그녀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죽어서는 숲의 파수꾼.
살아 있을 때는 숫자로만 불렸던 소녀가 눈을 감았다.
아주 편안한 얼굴이었다.
입가엔 행복한 미소가 남아 있다.
마치 도진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게 너무나 행복했다는 듯이.
그게 도진을 더 슬프게 했다.
“…….”
도진은 품 안에 있는 782번을 꽉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육신이 붕괴하는 게 먼저였다.
썩지도 않고 숲을 헤매던 주검은 견뎌 온 세월을 한순간에 맞이한 듯 순식간에 가루로 무너져 내렸다.
이런 걸, 아니… 이딴 걸 안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퀘스트]
정령용이 남긴 것
등급: 히든
[누아의…….]
퀘스트 안내 메시지가 떠오르기 무섭게 도진은 모든 걸 치워 버렸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말없이 몸을 일으킨 도진은 사방을 둘러봤다.
저 멀리 소멸해 가는 누아와 다그네가 보였다.
도진은 마지막을 향해 걸어가는 것들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고개를 길게 늘어뜨린 누아의 눈동자가 도진을 담는다.
눈동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제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네 잘못이 아닌 걸 알아. 하지만 꼭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던 거냐? 죄지은 인간들은 고통 받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못난 인간들에게 이용만 당한 불쌍한 아이들도 그리고 너도 굳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할 필요는 없었잖아.”
개소리다.
누아 입장에선 자신을 공격한 모든 게 적이자 원수였을 터다.
누가 악한 자이고 누가 이용만 당한 무고한 자인지 구분할 겨를 따위 있었을 리가 없다.
도진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그저 조금이나마 가까웠고, 함께 밥을 먹었고, 그래서 감정을 이입하게 된 782번에 대한 편애일 뿐이었다.
“…미안하다, 인간의 아이야.”
그럼에도 누아는 사과했다.
고통스런 육체를 움직여 소리를 내어 말했다.
미안하다고.
사슴의 모습을 한 정령의 말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모든 것은 원념에 절어 이성을 잃은 나의 잘못이다. 차라리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대자연으로 돌아갔다면… 너의 말대로 모두가 덜 불행했을 텐데. 나도, 불쌍한 아이들도.”
동물의 형상을 한 정령들은 대부분 어린 존재를 사랑한다.
태어날 때는 평범한 동물이었던 과거의 본능이 남아서 그렇다.
그렇기에 사슴으로 태어나 정령이 된 누아 또한 어린아이들을 숲에서 헤매는 시체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한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괴로웠다.
“이성을 잃은 순간 스스로는 멈출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그건 변명일 뿐. 멈추었어야지. 공포에 떨며 애원하는 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됐어.”
자책하는 누아를 본 도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나쁜 건 욕심 많은 어른들뿐.
782번도.
그녀와 같은 처지였던 다른 아이들도.
다그네와 누아도.
모두가 피해자였다.
“하아…….”
손으로 눈가를 덮으며 지친 한숨을 뱉는 도진.
그런 그를 향해 누아가 힘겹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뒤늦게나마 나를 막아 주어 고마웠다.”
“…너도 이젠 편히 쉬어라.”
누아는 눈을 감고 대답했다.
“내가 망가뜨린 내 고향을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놓고 가야지.”
누아의 전신에서 풀이 자라났다.
그것들은 줄기줄기 늘어나 메마른 땅을 파고들었다.
조금씩 숲이 달라지고 있었다.
숲이 변함에 따라 누아의 육신도 조금씩 썩어 사라진다.
말 그대로 숲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끝까지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군. 속 좁은 사슴 같으니.】
도진이 고개를 돌렸다.
힘을 잃고 소멸해 가는 늑대가 있는 방향으로.
누아의 육성만큼이나 머릿속에 울리는 늑대의 말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누아 입장에선 너도 가해자이긴 하니까.”
【…그렇긴 하지. 그래도 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구속인지 뭔지는 얼마든지 벗어던질 수 있었지만, 그랬다간 아이들이 즉사했을 테니.】
애들이 죽을까 봐 통제를 벗어나질 못했다니. 하여간 정령들이란.
“너도 얼마 안 남은 거 같은데, 남기고 싶은 말은 없나?”
【딱히. 보아하니 다스칸다르도 먼저 떠나간 거 같으니 정령의 요람에서 녀석이나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정도? 이제 숲을 떠돌며 고통 받던 아이들도 안식에 들 테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한 셈이지.】
“그런 것치고는 너무 미련이 넘치는 눈이잖아.”
말은 후련한 척하고 있지만, 다그네의 눈은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도진의 생각이 맞았던 것인지 다그네는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말을 꺼냈다.
【…인간,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나?】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는 너를 많이 좋아했다. 너를 떠나보내고 숲에 혼자 남느니 차라리 영원한 안식에 드는 걸 바랄 정도로. 그러니 기억해다오. 널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눈을 감은 아이가 있었음을.】
“…….”
【하나쯤은 있어야지.】
이름도 없이 죽어간 아이가, 아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는 이가.
늑대의 마지막 바람을 들은 도진은 반투명한 늑대의 커다란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무것도 잊지 않아.”
늑대, 다그네의 입가가 찢어졌다. 살벌한 송곳니가 드러난다.
웃는 것이었다.
【이제… 갈 시간인 모양이군…….】
다그네의 말이 메아리처럼 머릿속에 울렸다.
마지막 말이었다.
그때쯤 누아도 숨을 거두었다.
두 정령이 죽고, 두 정령이 대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엄청난 정령력이 해방됐다.
한곳에 존재하는 엄청난 정령력은 숲 전체에 퍼져 있는 모든 정령력을 끌어들이는 인력으로 작용했다.
그렇게 모여든 정령의 기운이 최종적으로 모인 곳은…….
“결국 이런 결말인가…….”
정령용의 알이었다.
현상이 끝남과 동시에 히든 퀘스트가 완료됐다.
어지럽게 떠오르는 메시지.
경험치와 골드가 들어왔다.
부화가 불가능한 죽은 알이었던 정령용의 알이 부화 가능한 ‘정령의 알’로 바뀌었다.
시간이 지나면 부화할 거라는 설명이 덧붙었다.
히든 퀘스트 진행 과정이 완벽했다는 평가도 따라붙었다.
그러나 도진은 그 모든 게 기쁘지 않았다.
얻은 것에 비해 잃은 게 너무 컸다.
남은 건 허탈함과 공허함과 먹먹한 감정뿐이었다.
도진은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하늘, 숲, 땅을 보았다.
그러다가 걸음을 옮겨 782번이 마지막을 맞이한 곳에 가 봤다.
그녀였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을 타고 흩어져 숲으로, 하늘로 날아갔기에.
흔적이라고는 부서진 갑옷 조각 정도였다.
도진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무덤이라도 만들어 줘야지.’
그런데 무덤을 하나만 만들면 외로울 텐데.
혼자 남는 게 무서워 차라리 안식을 바랐다는 녀석이다.
외롭지 않게 해 주고 싶었다.
“782…….”
아니, 파수꾼과 같은 처지였던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될까.
테그란이란 새끼는 한참 전에 힘의 격류에 휩쓸려 소멸해 버려서 물을 곳이 없었다.
그럼 적당히 만드는 수밖에.
결국 무덤을 만드는 것도 살아남은 자의 자기만족이다.
도진은 마음에 걸려 있는 먹먹함과 부채감이 조금이나마 희석될 때까지 파수꾼과 그녀의 친구들의 무덤을 만들기로 했다.
누군가는 의미 없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행위.
하지만 도진은 여러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런 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힘들어진다는 것을.
* * *
모든 것이 끝난 뒤로 꼬박 하루가 지났다.
하루 동안 마지막 전장이었던 공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도진이 그곳을 이 숲에서 희생된 아이들의 무덤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나무를 깎아 만든 십자가를 꽂아 만든 무덤.
그런 무덤들 중 가장 공을 들인 건 가운데에 위치한 파수꾼의 무덤이었다.
「따뜻한 스튜를 좋아하는 나의 친구.」
그녀의 유품을 묻고, 심혈을 기울여 만든 비석을 세웠다.
782라는 숫자는 적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비석을 만드는 내내 고민한 끝에 ‘나의 친구’라 적었다.
무덤을 완성하고도 몇 시간을 그 앞에 앉아 감정을 다스리던 도진은 조용히 그녀가 썼던 그릇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가끔 찾아올게. 너무 외롭지 않게.”
도진은 자신이 새긴, ‘나의 친구’를 쓸어 만진 뒤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도진이 씁쓸히 뒤돌아설 때였다.
[‘정령의 알’이 부화를 시작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인벤토리가 강제로 개방됐다.
그곳에서 튀어나온, ‘정령의 알’.
정령용의 알이 부화 가능하게 변화하면서 얻게 된 히든 퀘스트 메인 보상이었다.
도진은 약간 당황했다.
‘겨우 하루 만에 부화한다고?’
주인이 당황하든 말든 알은 제 할 일을 했다.
흔들거리며 금이 가고, 정령의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빠각.
알이 완전히 부서지며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 * *
소녀는 눈을 떴다.
아니, 뜨려 했다.
한데 눈을 뜨기가 너무 힘들었다.
너무 오랜 시간 어둠을 걷느라 빛이 낯설게 된 건지도 몰랐다.
게다가 너무 졸리기도 했다.
이대로 조금만 자면 안 될까?
소녀가 그렇게 생각할 때.
“늑대잖아……?”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누군가의 얼굴이 들어왔다.
착해 보이지는 않아도, 그 누구보다 착한 게 분명한 사람.
영원히 지속될 것같이 길고 긴, 어둠만으로 가득한 길을 걸어서라도 다시 만나고 싶었던.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