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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은 호크세스 왕국이 멸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벌써 몇백 년 전에 왕국이 멸망했다니… 그럼 내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도대체…….”
한참을 혼란스러워하던 파수꾼은 이내 뼈가 드러난 자신의 목을 만지며 말했다.
“죽은 몸으로 숲을 떠돈 시간이 그렇게나 길었다는 건가…….”
딱히 해 줄 말이 없어 침묵하고 있는 도진에게 파수꾼이 말했다.
“아직도 호크세스 왕국이 멸망했다는 말을 완전히 믿지는 못하겠어. 네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떠나질 않아.”
“네 입장에선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애초에 굳이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좋다. 그럼 왕국이 어떻게 멸망했는지, 그것도 알고 있나?”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에 기록된 대로라면 호크세스 왕국의 멸망은 왕실이 자랑하던 정령술의 몰락에서 시작됐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대로 호크세스 왕실에 충성하던 정령들이 차례차례 등을 돌렸다고 하더군.”
“정령들이…….”
“그래. 호크세스 왕실에게 있어 강력한 정령들의 비호는 일종의 정통성과 같았지. 실질적인 힘과 정통성을 동시에 잃어버렸으니 왕조가 유지될 리가 있나. 왕을 끌어내리기 위해서 여덟 개의 부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호크세스 왕국은 갈라지고 분열됐고, 그 결과물로 남은 게 지금의 팔왕국이야.”
파수꾼은 눈을 감았다.
상상도 못 한 이야기였으나 듣고 보니 그림으로 그린 듯 상황이 눈에 밟혔다.
‘부족장이란 놈들은 하나같이 권력에 미친놈들이었지. 왕이 미친 듯이 힘을 탐한 것도 힘 있는 부족의 반란을 두려워해서였을 정도이니.’
그리고 무엇보다 정령이 등을 돌렸다는 말이 마음에 턱 걸렸다.
‘역시 이곳에서 저지른 일 때문에…….’
이 숲에서 일어난 비극, 아니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파수꾼.
그런 파수꾼에게, 이번엔 도진이 질문했다.
“보아하니 호크세스 왕국이랑 연관이 있어 보이는데……. 너 말고 숲을 돌아다니는 다른 해… 아니, 사람들도 호크세스 왕국이랑 관련된 자들인가?”
조심스러운 질문에, 파수꾼이 피식 웃었다.
“그냥 대놓고 물어봐도 돼. 왜 이런 꼴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가 궁금한 거 아냐?”
말하며 가리키는 건 목 부근이었다.
쓸쓸한 눈으로 제 목을 쓸어 만지던 파수꾼은 이내 도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생각대로, 이 숲을 떠도는 자들 모두가 호크세스 왕국 사람들이다. 그것도 국왕 직속 무력 부대 ‘이름 없는 달’의 전사들이지.”
이건 전생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영원을 노래하는 숲>에 돌아다니는 해골바가지들이 멸망한 호크세스 왕국의 전사들이라니.
“그럼 테그란 베그리프는…….”
도진은 흥미롭다 못해 충격적인 전개에, 무심코 자신의 목표물이자 퀘스트 목표인 보스 몬스터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파수꾼은 그 이름을 듣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파수꾼은 스스로 납득했다.
“…하긴 호크세스 왕국 최강의 정령술사이자 대전사면 역사에 이름 한 줄 남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겠지. 그런데, 테그란 님을 찾는 이유가 뭐지? 그런 걸 들고 말이야.”
파수꾼은 턱 끝으로 도진 옆에 고이 놓여 있는 알을 가리켰다.
“이렇게 된 몸이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정순한 정령력은 보통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이 숲에선 이제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기운이지.”
도진은 어떻게 설명을 할지 잠시 고민했다.
리제니안이란 개념을 모르는 자에게 ‘퀘스트’란 개념을 설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세계의 속삭임을 듣는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이란 걸 어떻게 설명하겠나.
지금까지 한 말까지 싸잡아서 미친놈의 희언으로 취급받기 딱 좋을 텐데.
해서, 도진은 머리를 쥐어짜 그럴싸한 시나리오를 실시간으로 만들어 냈다.
“이 알을 내게 준 자가 이 숲으로 가면 전설적인 정령사가 있을 거라더군. 이름이 테그란 베그리프라고. 이 알을 어떻게 쓸지에 대해서 그를 찾으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나도 자세한 건 몰라.”
도진의 말을 들은 파수꾼은 꽤 오래 사색에 잠겼다.
그러다 툭 묻는다.
“그 알을 준 자가 혹시 정령술에 조예가 깊은 자였나?”
“…그랬지. 불, 물, 바람 등등 이것저것 정령술을 썼으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알을 남긴 보스 몬스터가 정령술 하나는 끝내주게 쓰는 놈이었으니.
그러나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파수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과 물, 바람의 정령을 다뤘다고? 역시 내 예상대로 호크세스 왕국의 후예가… 혹시 그가 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 아무 거라도 좋다.”
“다른 말?”
워낙 간절하게 묻는 통에 도진은 미간을 좁히고 무언가 떠올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퀘스트 창을 열어 다시 내용을 읽었다.
뭐라도 단서가 될 게 있나 싶어서.
[퀘스트]
정령용이 남긴 것
등급: 히든
[쓸쓸한 주검으로 남아 있던 정령용의 이름은 ‘다스칸다르’.
다스칸다르가 남긴 알을 부화시킬 방법을 알 만한 자가 있다.
전설적인 정령사 ‘테그란 베그리프’를 찾아가 보자.]
단서나 키워드라고 할 만한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다스칸다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일단 질러 보는 도진.
“……!”
효과는 굉장했다.
파수꾼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수호신 다스칸다르……!”
파수꾼이 주먹을 꽉 쥐었다.
“수호신?”
“그래, 수호신! 다스칸다르는 호크세스 왕국의 건국 설화에 등장하는 수호신의 이름이다. 그가 다스칸다르를 언급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확실하다. 그는 호크세스 왕국의 후손이야.”
왠지 모르게 엄청 기뻐하는 거 같은 파수꾼.
방금 전까지 우울해하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흥분한 파수꾼은 벌떡 일어나더니 도진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무얼 숨길까! 우리가 이곳에서 떠도는 이유는 우리가 저지른 죄악 때문이다.”
죄악? 도진이 되묻자 파수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자신의 권력이 영원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영원한 왕권을 위해 힘을 갈구했지. 이 숲에 평화로이 살고 있던 대정령 누아를 노린 것도 그런 이유였다. 신록(神鹿)을 사냥함으로써 영원히 누릴 힘을 얻겠다 했지. 그러나 이는 과욕이었다. 우리가 누아에게 치명상을 입힌 순간 숲은 타락했고, 미궁이 되어 버린 숲은 우리를 말려 죽였다.”
심지어 안식조차 허락지 않는 숲의 저주에 묶여 영원히 떠도는 신세가 됐지.
“모든 게 우리의 과욕이 불러온 참사다. 그래서 죽음에서 눈을 뜬 나는 줄곧 바라왔다. 숲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누아의 원한이 풀렸으면 하고. 그러면 나도 안식을 취할 수 있을 테니.”
그런가. 파수꾼이 마주친 인간을 죽이지 않고 바깥으로 쫓아낸 것도 숲이 더 이상 더럽혀지는 걸 원치 않아서였다고 생각하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도진은 흥분한 파수꾼을 응시했다. 흥분한 망령이 그런 도진을 향해 자신의 바람과 희망을 토해 냈다.
“이런 바람이 나만 품은 바람은 아니었겠지! 정령에게 외면 받는 걸 견딜 수 있는 호크세스의 인간은 없다. 그건 영혼이 오염됐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 그러니 과오를 씻어 내고자 하는 자들이 분명 있을 터. 그것이 그 증거다!”
“이 알이 그 증거라고?”
“그렇다. 그 알에는 엄청나게 거대하면서도 정순하기 이를 데 없는 정령의 기운이 담겨 있다. 그걸 이용하면 이 숲을, 누아의 원한을 달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위해 너에게 그걸 맡긴 자가 테그란 님을 찾으란 말을 했을 테지.”
“그렇다면 좋겠지만…….”
“분명 그럴 거다. 그러니 내가 너를 돕겠다.”
자신이 몇 년을 떠돌고 있는지 인식도 못 한 채 망령으로 살아온 자의 갈망은 지나치게 강렬했다.
‘퀘스트 스케일이 좀 많이 커지는데……?’
알 하나 부화시키러 왔는데 이야기가 어디까지 흘러가는 건지.
하지만 단어와 키워드, 상황 등이 이렇게 얽혀 있는데 무시할 수도 없고.
‘그래, 가는 데까지 가 보자. 하루에 몬스터 10마리 보는 것도 힘든 뻘짓보다는 의미 있겠지.’
도진은 자신을 노려보다시피 바라보는 파수꾼과 눈을 맞췄다.
“좋아. 네 말대로 정말 이게 그런 용도로 쓸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돕겠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이 숲에서 오랫동안 지냈으니 길도 나보다는 잘 알 거고.”
좋다는 말에 기쁜 기색을 보이던 파수꾼이었으나 도진의 말이 끝날 때쯤에는 상당히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왜 그래?”
갑자기 눈을 피하며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도진이 의아하게 묻자 파수꾼은 매우 자신없는 투로 말했다.
“으음, 사실… 나도 숲의 구조나 길은 모른다. 숲을 나가는 방법은 알지만, 그건 말 그대로 ‘방법’이지 길을 아는 게 아니야. 애초에 이 숲은 계속 모습이 바뀌기 때문에…….”
“그래도 테그란 베그리프를 찾는 방법이나 그런 건 알 거 아냐? 여기서 500년을 넘게 살았다며.”
“…처음에 말했잖아. 난 그렇게 오래 떠돌아다녔다는 인식 자체가 없어. 그리고 테그란 님이랑은 마주친 적도 없다.”
“…….”
뭐야. 이거 완전 개쓸모없잖아.
도진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세상에 맙소사. 그 멍청한 카린도 길잡이로는 1티어였는데.
이 무식하게 힘만 센 숲의 파수꾼께선 내비게이션 기능도 없는 깡통이었다.
“알고 있는 건 숲에서 나가는 방법뿐이고, 길을 찾을 줄은 모른다. 심지어 찾아야 하는 테그란이랑은 수백 년 동안 같은 숲에서 지냈으면서 마주친 적도 없다?”
“…….”
도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툭 자신을 잡고 있는 파수꾼의 손을 털어낸 도진은 인벤토리에 알을 수납했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뒤돌아 걸었다.
“자, 잠깐! 나도 돕고 싶어……!”
발을 멈춘 도진이 돌아서서 물었다.
“뭘 도울 수 있는데? 길도 모르고 테그란이 어딨는지도 모른다면서.”
“…….”
우물쭈물하던 파수꾼은 도진이 재차 한숨을 내쉬자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 모습이 왠지 애처롭다.
뭐라도 역할을 안 주면 눈치 보면서 멀찍이서 따라다닐 거 같은 느낌.
잠시 머리를 굴린 도진은 파수꾼에게 적당한 일감을 주기로 했다.
“그래도 혼자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둘이 찾는 게 낫겠지. 발은 빠를 거 아냐? 나보다 먼저 앞으로 가서 뭐가 있는지 찾아보고 돌아와서 알려 줘.”
그러다 뭘 발견하면 그쪽으로 가면 되고, 아무것도 없으면 그쪽은 제외하고 다른 방향을 뒤지면 시간은 절약되겠지.
시무룩해 있던 파수꾼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아까 내가 얼마나 빠른지 봤지? 너랑 완전히 떨어지지 않는 선에서 움직여도 엄청 넓은 범위를 탐색할 수 있을걸?”
역할이 생겼다는 사실이 매우 기쁜 눈치였다.
말투도 무게 잡던 처음과 달리 무게감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불쌍한 애니까…….’
아닌 게 아니라, 생각해 보면 참 기구한 사연을 가진 파수꾼이다.
도진은 짠한 눈으로 자신의 빠름을 어필하는 파수꾼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