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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지 플로어로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도전의 탑 9층.
그곳에 들어선 도진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무력감이었다.
[도전의 탑 9층]
[챌린지 플로어에 입장하셨습니다.]
[새로운 챌린지 플로어 페널티가 추가됩니다.]
[소모품 개수 제한이 적용됩니다.]
[정령종을 제외한 종족은 모든 능력치가 반감됩니다. (-50%)]
8층에서 생긴 페널티 소모품 개수 제한에 더해, 이번에는 정령종이 아니면 능력치가 50%나 감소하는 페널티가 붙었다.
말은 리제니안이 정령과 비슷한 존재라 불리지만, 기본적으로 시스템이 표기하는 플레이어의 종족은 ‘인간’.
도진도 정령이 아니니 능력치의 절반이 증발했고, 그로 인해 몸은 무겁고 체내 마나 활성도도 낮아져 그야말로 무기력한 상태였다.
‘수치도 수치지만, 체감되는 것만 봐도 진짜 어이없는 페널티군.’
전생에 왜 여길 깬 사람이 한 명도 안 나왔는지 납득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길게 생각을 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전방에서 돌풍이 일며 시스템 메시지가 적의 출현을 알린 것이다.
[수호자가 등장했습니다.]
[풍귀(風鬼) 삭풍(朔風)]
[수호자를 쓰러뜨리고 당신의 강함을 증명하십시오.]
시작부터 등장한 몬스터 ‘삭풍’은 무사의 형상을 한 바람의 정령이었다.
후우웅 하고 바람을 한차례 일으킨 삭풍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일렁이는 형태 없는 검끝이 흔들- 하고 움직였다.
직후 도진은 아무 방향으로나 몸을 날렸다.
콰직.
거의 동시에 도진이 서 있던 자리를 날카로운 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보고 피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겠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삭풍이 사라졌다.
거친 바람이 되어 고속으로 접근하는 삭풍.
도진은 이를 악물고 「불기둥」을 시전했다.
그러나 평소보다 느렸다. 마법회로의 처리능력도 반 토막이 난 탓이다.
파악.
어느새 코앞까지 당도한 삭풍.
본래의 모습인 무사로 돌아온 놈이 검을 고쳐 잡았다.
화르륵.
그때, 뒤늦게 완성된 도진의 마법이 바닥에서 불기둥을 일으켰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삭풍을 지졌다.
하지만 위력이 부족했다.
삭풍을 이루고 있는 바람과 기류를 한 번에 흩어 낼 정도가 되지 않았다.
“커억!”
삭풍의 공격을 무위로 돌릴 화력이 나오지 않았다는 건 지근거리에 접근한 놈의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뜻.
도진의 오른쪽 어깨에 삭풍의 검이 틀어박혔다.
어깨부터 가슴어림까지 버터 잘리듯 저항감 없이 갈라진다.
“젠… 쿨럭.”
피가 역류해 기도를 막았다.
‘이건 너무하잖아’ 하는 하소연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겨우 패턴 두 개.’
막막하네.
그것을 마지막으로 도진의 시야는 검게 물들었다.
* * *
“어이가 없네.”
캡슐 안에서 눈을 뜬 도진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패턴 여러 개는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도진은 삭풍에 대해 꽤 자세히 알고 있었다.
삭풍은 드물게도 패턴이 아주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는 몬스터였기 때문이다.
‘조우하면 무조건 「돌풍검」으로 시작하고, 피하든 막든 다음은 「바람 이동」으로 거리 좁힌 다음에 수직으로 참격.’
이후 삭풍은 바람 충전에 들어간다.
평타 공격을 하며 스킬을 쓰기 위한 바람의 기운을 모으는, 일종의 현자 타임이라고 할 수 있는 타이밍이 이때다.
‘바람이 얼마나 충전됐는지는 검에 돌풍이 얼마나 생기는지 보면서 판단하면 되고. 취약 속성은 불. 주의할 점은 생명력이 일정 수치 이하로 내려가면 즉사기를 쓴다는 점.’
그때부터는 즉사기 캐스팅이 끝나기 전에 놈을 죽일 딜만 있으면 된다.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힘드네.’
생각보다 능력치 감소로 인한 움직임 둔화가 심하고, 영상으로 본 것보다 삭풍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능력치 감소로 인한 역체감의 악순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삭풍이 마법사랑 상성이 더럽게 안 좋긴 하지.’
가뜩이나 생존성 떨어지는 유리몸이 마법사인데, 공격력 높고 고속 접근에 능한 데다 간헐적이긴 해도 원거리 공격까지 갖춘 삭풍은 그야말로 역상성 그 자체였다.
마법사 사냥꾼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특징만 빼다 박은 몬스터가 삭풍인 것이다.
‘그래도 뭐… 잡을 수는 있겠지. 문제는 다음 놈들이지만.’
그래. 고생스럽긴 해도 삭풍은 잡을 수 있다.
그냥 머리로 아는 패턴을 몸도 기억하게끔 열심히 구르면 되거든.
문제는 삭풍을 쓰러뜨려도 아직 그놈의 직장 동료가 둘이나 더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석조 문다’와 ‘불뱀 쿠사’.
삭풍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놈들.
오죽하면 삭풍과 문다를 뚫고 결국 쿠사까지 무찌른 사람이 하나도 없었겠는가.
‘클리어 각이 나온다고 평가 받던 파티가 결국 좌절했던 이유는 하나같이 물약 부족. 소모품 제한이 치명적이었어.’
비장의 수단을 준비하긴 했지만, 그걸 쓸 수 있는 건 단 한 번에 불과하다.
조금이라도 클리어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 수단을 쓰기 전에 반드시 문다까지는 자력으로, 피해 없이 처치할 수 있어야 했다.
‘명심하자. 이거 8층 보상까지 걸린 도박이야. 망하면 끝장이라고.’
지켜야 할 게 있는 남자는 강해진다고 했던가.
가족은 있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고, 일단 9층에 저당 잡힌 보상은 꼭 지켜내야겠다.
간절해야 할 이유가 확실한 도진은 결연한 눈으로 다시금 가상현실 세계에 접속했다.
‘오늘 무조건 삭풍 새끼는 조진다.’
1회를 소모했으니, 남은 입장 횟수는 4회.
티켓 한 장 한 장 가격도 만만찮다.
한 번 한 번을 의미 있게 써야 하는 또 다른 이유였다.
도진은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전투에 임했다.
그리고 결국.
“…….”
삭풍을 잡는 데 실패했다.
아무래도 상당한 고난의 시간이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밥이나 먹고 쉬어야지.”
오늘은 어차피 도전의 탑에 입장도 못 한다.
그러니 괜한 미련은 내려놓고 컨디션 관리나 하는 게 이득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천지현은 퇴근한 뒤였다.
잠시 건강식으로 가득 차 있을 냉장고를 바라보던 도진은 고개를 젓고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오늘은 떡볶이다.”
스트레스 푸는 데는 몸에 나쁜 음식이 제일이었다.
* * *
삭풍은 힘든 적이었다.
패턴은 단순하고, 해야 할 일은 명확했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난이도 자체가 높은 그런 타입.
모든 패턴이 빠르고 강력하여 반응부터 판단까지 0.1초 단위라도 밀리는 순간 호흡은 깨지고 결국 죽음이란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 식이었다.
워낙 전투 템포가 빡빡하다 보니 한 번 흐름을 잃는 게 치명적이다.
그럼에도 도진은 하루에 주어진 입장 횟수 5회를 꾸준히 소모해 가며 도전했고, 결국 나흘째에 접어드는 날 삭풍을 쓰러뜨렸다.
[새로운 수호자가 등장했습니다.]
[석조(石鳥) 문다]
[수호자를 쓰러뜨리고 당신의 강함을 증명하십시오.]
그러나 쉴 틈은 없었다. 다음 네임드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문다도 삭풍과 마찬가지로 영상으로 봤던 것과 직접 적으로 만나 몸으로 체험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무슨 놈의 돌덩이가 이렇게 빨라!’
돌로 만들어진 주제에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문다는 온건한 표현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을 만큼 좆 같았다.
날아다니며 정령술로 땅 속성 공격을 퍼붓는데, 삭풍만큼 빠르고 강한 공격은 아니지만 이놈은 범위가 삭풍보다 넓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급하게 마법을 써서 방어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놈은 훅 치고 휙 빠진 뒤였다.
재수 없는 걸로 치면 삭풍보다 몇 배는 더 재수 없는 문다에게 도진이 고생하는 사이 많은 파티가 8층을 클리어하고 9층으로 진입했다.
도진의 영상을 참고할 수 있었던 덕에 전생보다 더 많은 파티가 거미의 영역을 빠르게 돌파한 것이었다.
[스피어, 드디어 두 번째 수호자 문다 처치! 이번에는 1등 공략 파티 타이틀을 가져갈 것인가?]
그리고 스피어 길드가 문다를 처치했다.
[‘스피어’에 이어 한국 길드 ‘신화’도 문다의 벽을 넘었다. 한국은 다시 한번 게임 강국의 위상을 증명할 수 있을까?]
안정적 조합과 정석적 공략을 추구하는 상위권 공략팀의 약진이 매일매일 업데이트됐다.
멸망성 디버프로 전체 유저가 운명 공동체로 엮여 있는 상황이라 집중된 관심은 역대급.
꾸준히 진행되는 공략 현황에 사람들의 기대 또한 고조됐다.
[진짜 벽은 따로 있었다. 불의 뱀 ‘쿠사’ 앞에 무너지는 공략대!]
[스피어 공식 입장 ‘쿠사는 현재 스펙으로는 잡을 수 없는 몬스터. 어떤 공략팀도 쿠사는 잡을 수 없을 것.’]
[한계까지 끌어올린 화염 내성으로도 극복하기 힘든 쿠사의 영역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진정 없는가.]
하지만 희소식은 잠시뿐이었다.
돌로 만들어진 새를 처치한 파티를 맞이한 것은 불로 만들어진 뱀 ‘쿠사’.
놈의 능력은 전장 전체를 지속적 화염 대미지를 주는 「불의 영역」으로 만드는 것.
모든 능력치가 절반으로 떨어진 상황 속에서 감당하기 힘든 지속 딜이 들어오는 건 악몽 그 자체였다.
힐러? 힐량이 반 토막이 났는데 무슨 수로 커버를 하겠나. 포션? 소모품 개수는 제한돼 있다.
심지어 쉬지 않고 틱댐이 들어오는 상황이다 보니 포션의 회복 효율 자체가 나올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1탱, 1힐, 3정령사 조합도 쿠사 앞에 무너졌다. 도전의 탑은 명백히 난이도 조정에 실패한 콘텐츠.]
여러 대형 길드에서 돈을 어마어마하게 투자해서 급히 새로운 조합을 올려 보내 봤으나 그것마저 실패.
이번에는 일반 유저도 그들을 욕하지 못했다.
방송만 보고 있어도 이건 깨라고 만든 게 아니라는 느낌이 팍팍 들었기 때문이다.
멸망성의 빛이 강해지고, 온갖 나쁜 효과를 퍼붓는 라베스의 저주가 다시 찾아왔을 때도 분위기는 ‘그냥 받아들이자’ 쪽으로 기울었다.
그때쯤이었다.
도진이 한발 늦게 문다를 쓰러뜨린 건.
드디어 도진도 불뱀 쿠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힐러도 없이 쿠사를 상대로 연습 게임은 의미가 없을 거고.’
순식간에 펼쳐진 「불의 영역」이 주는 대미지에 피가 쭉쭉 다는 걸 보며 도진은 생각했다.
한 번에 결판을 내야 할 때가 왔다고.
‘보면 알겠지. 내가 준비한 비장의 수가 강한지, 아니면 저 뱀이 더 강한지.’
이번엔 좀 피곤해서. 다음에 보자.
이글거리는 쿠사의 빨간 눈이 도진을 노려봤다.
거의 동시에 생명력이 다 한 도진의 몸이 검은 숯덩이로 변했다.
정말 화끈한 첫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