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보스룸]
[그림자 거미 여왕]
집채만 한 거미 한 마리가 거꾸로 내려왔다.
그 실루엣은 푸르게 빛나는 거미줄로 지탱되고 있었다.
검게 가라앉은 적야와 보스의 여덟 개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거미와 인간, 그 둘이 동시에 움직였다.
《화염창》
도진은 마법을 시전했다.
스스슥.
거미는 은신을 택했다.
꼬리처럼 달린 거미줄을 이용해 위로 솟구쳐 몸을 숨긴다.
어둠이 자신을 가려 줄 거라 굳게 믿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도진의 눈은 천장처럼 보이는, 거미줄로 만들어진 그물 위를 기어 다니는 놈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무려 8개나 되는 실루엣들이.
‘이건 나도 의외였지. 천장 위로 도망가서 계속 회복하고 돌아오는 놈인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8개로 나뉘어 있는 보스일 줄은.’
도전의 탑이 처음 등장한 현시점에 유저 레벨은 높아야 80 미만.
어둠을 꿰뚫고 은신한 적을 찾아낼 정도의 탐색 스킬을 가질 만한 레벨이 아니었다.
그래서 보스 ‘그림자 거미 여왕’이 8개체로 분리된 놈이라는 걸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도진이 회귀하기 전 1회차 인생 때는 물론 2회차인 현생에도 말이다.
‘대공 아저씨,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도진은 어둠을 극복함에 있어 더 이상 사기적일 수 없는 「적야」를 가지고 있었다.
어두운 환경을 활용한 은신 그리고 분체를 이용한 기만이 주요 전술인 그림자 거미 여왕 입장에서는 더없는 천적인 셈.
‘그럼 재수 없게 대놓고 내 머리 위에서 침 흘리는 새끼부터 한 방 먹여 볼까.’
도진의 손이 위로 솟았다.
완성된 화염의 창은 주인의 명에 따라 발사됐다.
퍼엉.
어둠이라는 든든한 아군을 철석같이 믿고 습격을 감행하기 위해 대기하던 쉐도우 스파이더의 분체 하나가 「화염창」에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키이엑- 하는 당황 섞인 울음과 함께 놈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니, 추락한 걸로도 모자라 분체 거미는 그로기 상태에 빠져 버둥거렸다.
아무리 마법사가 한 방 한 방이 강력한 대포 직종이라지만, 마법 한 방에 보스 몬스터가 이렇게 그로기에 빠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번엔 계산이 딱 맞아떨어졌네.’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보스 몬스터의 특징과 약점을 파악하고.
그 약점을 가장 아프게 찌를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한 도진의 철저한 계산 덕분이었다.
‘은신, 기습 같은 단어가 들어가면 일단 HP는 낮고 공격력은 높아진다.’
즉, 이번 보스 몬스터의 HP는 레벨에 비해 낮은 편이다.
‘원래는 한 마리여야 할 놈이 여덟 마리 분체로 갈라져 있다는 건.’
생명력도 나뉘어 있다는 뜻. 여기서 또 한 번 보스의 HP는 분할된다.
‘거기다 나는 혼자 들어왔지.’
솔로 모드이니… 어라, 또 피가 줄어든다.
‘여러 분체가 돌아가며 적을 농락하는 히트 앤 런 전술로 질긴 생명력이랑 회복력을 가진 것처럼 위장했지만.’
그건 위장이고 사기극.
실상은 다른 보스 몬스터에 비해 극히 낮은 HP와 방어 스탯을 지닌 물몸에 불과한 것이다.
‘시한부 인생 자처해 가면서 도핑을 해 댄 보람이 있네.’
모든 걸 포기하고, 그저 마법 공격력에만 올인한 3분.
1회 도핑하는 데 들어간 포션과 스크롤값만 수백만 원이다.
몸뚱이가 견디는 한도 내에서 가장 높은 마공을 확보하는 도핑 조합을 찾기 위해서 쓴 돈은 그 수배.
저놈에게 도전하며 날린 건 또 그것의 수배.
“…뼈 아픈 지출이었어.”
그게 다 너 때문이다, 이 거미 새끼야. 그렇다고 돈 달라는 건 아니고.
‘넌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돼. 빚은 내가 알아서 받아 갈 테니까.’
남은 시간을 가늠할 것도 없다. 그저 숨이 붙어 있는 한 마법을 쏘고 또 쏘면 그뿐.
퍼엉.
분체들이 당황한 틈을 비집고 도진의 마법이 바닥에 추락한 놈을 다시 타격했다.
꿈틀대던 놈은 온몸으로 단말마를 지르며 경련했다.
그럼에도 놈의 동체는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직 들킨 줄 모르는 건가? 끝까지 나머지 놈들은 숨어 있을 작정인가 보군.’
숨 쉬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이 직접 위로 올라가는 건 아니었다.
나머지 분체 중 두 마리가 열심히 바닥에 떨어진 걸 끌어올리고 있다.
“그래 봐야 시체밖에 못 건질 텐데.”
《화염창》
쩌억.
어둠을 뚫고 날아간 화염의 창이 결국 거미의 통통한 배를 뚫고 지나갔다.
죽음으로 인해 마법 저항력을 상실한 분체의 몸은 화염이 붙어 타닥타닥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냐?”
도진은 자신을 향해 모이는 적대적인 여러 쌍의 거미 눈동자를 보며 씨익 웃었다.
이제야 한 마리만 등장해서 한 마리인 척하는 게 전혀 소용없다는 걸 저놈들도 깨달은 모양이다.
다만 많이 늦었다.
“내가 마나를 다 써서 쓰러지는 게 빠를까? 아니면 너희가 숯덩이가 되는 게 빠를까?”
궁금하지 않아?
작은 속삭임이 어둠 속에 흩어진 순간.
도진의 마법회로가 과부하를 호소했다.
마법회로는 주인에게 이러다가는 파열될 거라며 비명을 질렀으나 도진은 무시했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마법을 난사하는 도진.
여왕의 분체들은 도진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으나 한 놈도 도진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목숨을 담보로 위력을 끌어올린 도진의 마법은 그야말로 한 방 한 방이 필살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키이이익!
퍼엉!
끼이이엑!
같은 소리가 반복됐다.
소리가 사라지고, 남은 건 어둠밖에 없어진 때.
“…죽겠네.”
무릎을 꿇은 채 죽어가는 도진이 앓는 소리를 냈다.
남은 마나가 거의 없을 정도로 긁어 쓴 바람에 속이 울렁거린다.
도핑하면서 함께 딸려 온 각성 효과로 의식이 붙어 있는 게 한계였다.
마법회로는 이미 파열돼서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
과부하로 엉망이 된 마나든 회로든 안정시키려고, 습관적으로 연초를 꺼내 물려고 했으나 소모품 개수 초과로 꺼내지지도 않았다.
‘오랜만이네. 이렇게 망가질 때까지 쏴 댄 건.’
전생엔 자주 있던 일이다.
그땐 마법 좀 쓰면 이런 상태가 되곤 했었거든.
“…어쨌든 끝은 낸 거 같아 다행이네.”
도진은 죽어가고 있었지만, 보스는 다 죽었다. 여덟 마리 모두.
[도전의 탑 8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도전의 탑 챌린지 플로어 최초 클리어!]
[보상 정산 작업을 시작합니다.]
의식이 흐릿해지는 찰나 시스템 메시지가 주르륵 떴다.
그걸 본 도진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그의 육체가 빛으로 화해 흩어졌다.
8층을 클리어했으니, 다음 층의 입구를 향해 워프되는 것이었다.
* * *
“…진아.”
잠시 멍하니 있던 도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
그러자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매니저, 천지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아? 엄청 피곤해 보여. 너답지 않게 멍하니 있고.”
“피곤… 한 건 맞는데. 피곤해서 그런 건 아니야.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대충 대답한 도진은 먹던 샐러드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묻는다.
“근데 방금 뭐라고 했어?”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내가 한 말도 하나도 못 들을 정도면… 기면증 그런 건 아니지?”
“아니라니까.”
픽 웃으며 고개를 젓는 도진.
천지현은 미심쩍은 눈으로 살짝 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이번 영상, 엄청나다고.”
“조회 수?”
“다. 그냥 다 엄청나.”
들떠 말하는 천지현과 달리 도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이며 방울토마토를 콕 찍어서 입에 넣었다.
“…엄청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 같다?”
“뭐, 다 고생하고 있는 와중에 1등으로 깼으니까.”
미국 국적자가 주축인 스피어 길드를 포함해 내로라하는 공략 팀들이 8층에서 신나게 헤딩을 하고 있는 와중에 그걸 혼자서 깨 버렸으니 반응이 뜨거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회사에선 뭐래?”
도진이 묻자 천지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난리지.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라니까? 회사가 발칵 뒤집혔어. 방송국이든 어디든 다 너 내놓으라고 난리야, 난리. 거기다 이젠 게임 길드에서도 막 뭘 보내는 거 같던데?”
“근데 조용하네?”
“다 실장님 지시지, 뭐. 실장님이 무조건 너 게임하는 거 절대 방해하지 말라고 지시하셨거든.”
그렇구나.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도진은 여전히 기계적으로 샐러드를 씹고 있었다.
뭔가 혼을 빼놓은 듯한 모습에 천지현이 진짜 걱정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도진아 게임도 좋지만, 아니지 일도 중요하지만 건강이 진짜 제일 중요한 거다? 너 지금 상태 진짜 안 좋아 보여. 아무래도 며칠 쉬는 게 좋을 거 같아. 이번에 깬 거, 그걸로 지금 1등인 거잖아. 그럼 좀 쉬어도 되지 않아?”
“진짜 아프거나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래,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8층 보상이 좀 이상하게 꼬였거든.
속으로 읊조리며, 도진은 자신이 봤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챌린지 플로어 최초 클리어 보상으로 ‘보상 업그레이드’ 찬스를 얻었습니다.]
[보상 업그레이드 찬스를 사용 시 8층 클리어 보상은 ‘9층 클리어 보상 업그레이드’로 대체됩니다.]
도전의 탑 챌린지 플로어의 시작점인 8층의 보상은 S급 아이템 랜덤 상자다.
회귀하기 전 8층을 최초로 클리어했던 스피어에서도 그렇게 말했었고, 이후 8층을 깬 수많은 유저들이 같은 보상을 받으면서 증명된 사실이다.
그런데 챌린지 플로어를 최초 클리어하면 주어지는 보상 업그레이드 시스템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었다.
그럼 답은 하나. 1회차 때 도전의 탑 8층 최초 클리어를 한 스피어가 그냥 안전하게 보상 수령을 선택했다는 것.
‘8층에서 거미들한테 그 고생을 했으니 9층을 깰 수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없었던 거겠지. 나랑 달리 5인 파티였으니 의견 통합도 어려웠을 거고.’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매우 좋은 선택이 됐었다.
스피어에 이어 많은 파티와 유저가 8층을 돌파했지만, 9층을 깬 파티나 솔로 유저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
9층, 깰 수 있을까?
정보는 있다.
9층을 깬 팀이 없었던 거지, 공략을 시도하는 영상 자체는 많이 봤었으니까.
가진 정보를 바탕으로 대책도 강구해 두긴 했다.
‘깰 수 있을 확률에 걸고 8층 보상을 9층으로 돌리느냐. 그냥 안전하게 8층 보상을 받고서 9층에 도전을 하느냐.’
기계적으로 먹다 보니 어느새 샐러드 그릇이 비어 있었다.
텅 빈 그릇을 툭, 툭 포크로 건드리던 도진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궁금해서 안 되겠다. 그냥 지르고 보자.’
잘못하면 S급 아이템이 날아가겠지만, 그건 감수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보상 업그레이드를 포기한 상태로 9층을 깨 버리면 영영 뭘 받을 수 있었던 건지 모르고 넘어가야 하는데.
그럼 아쉬운 건 둘째치고 뭘 잃은 건지도 모른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깨면 되지.”
중얼대며 일어나는 도진.
“…도진아?”
천지현이 그런 그를 불렀으나 이미 도진은 캡슐이 설치된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119는 안 되고, 사설 구급차라도 대기시켜야 하나?”
진심으로 도진의 상태가 걱정된 천지현은 스마트폰을 붙잡고 한참을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