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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스케줄이 마무리됐다.
‘됐다’보다는 그냥 ‘했다’에 가깝긴 해도, 나머지는 회사에서 알아서 잘하겠지.
바깥에서의 반응이야 뜨거웠지만, 도진은 그쪽으로는 신경을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고 소속사를 구한 거기도 하고.
‘시기상으로는 이번 주나 다음 주쯤에 발표될 텐데.’
지금 도진의 머릿속에는 코앞으로 다가온 월드 이벤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월드 이벤트.
LOST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말 그대로 로스타니아 월드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커다란 이벤트를 뜻한다.
이런 대규모 이벤트는 규모에 걸맞은 커다란 보상을 동반한다.
그리고 커다란 위기도 동반한다.
‘지금 생각하면 가장 무난한 이벤트였지만, 당시에는 유저들도 아무것도 모를 때라 고생 좀 했다고 했었지.’
직접 겪지는 못했지만, LOST 최초의 월드 이벤트 ‘도전의 탑’에 대해서는 웬만큼은 알고 있었다.
방식은 간단하다.
도전의 탑이 나타나고, 탑 공략에 따른 층 단위 보상이 개인에게 주어진다.
거기에 도전의 탑 공략 진도에 따라 월드 전체에 경험치 버프가 적용되고.
여기까지만 보면 타 게임에서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퍼주기식 경험치 이벤트같이 보이겠지만… LOST는 무언가를 그냥 퍼주는 게임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탑 공략이 지체되면 경험치가 줄어드는 것도 모자라 유저 전체에 디버프가 걸리게 된다. 참… 지금 생각해도 뫼비우스가 변태 집단은 변태 집단이야.’
도전의 탑 공략이 무난하게 진행되면 경험치 버프만 만끽하면 된다.
전 유저의 레벨업 축제가 되겠지.
하지만 공략 진도가 더뎌지거나 멈춰 버리면?
리제니안은 로스타니아의 존재에 비해 더 효과적으로 재앙과 멸망에 대적할 수 있는 ‘이방인’으로서의 이점을 잃게 된다.
쉽게 말해 몬스터에게 주는 피해가 줄어들며, 입는 피해는 늘어나고, 몬스터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경험치와 재화의 양이 줄어드는 디버프에 걸린다.
‘어떻게 된 게 이 게임은 이벤트 때마다 보상보다 페널티가 더 빡센 건지.’
그나마 이번이 처음이라 페널티가 이 정도지.
나중에는 우스갯소리로 월드 이벤트 때마다 ‘무얼 얻을지보다 어떻게 해야 덜 잃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나도 잃는 쪽이었지.’
아, 얻는 것도 있었구나.
그때마다 빚을 얻었지.
“하하하.”
전 회차 인생의 비참함이 떠오른 도진은 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참 비루해서 떠올릴 때마다 맛이 색다르다.
뭐랄까… 이번 회차가 얼마나 고마운 기회인지 새삼스레 깨닫게 해 주는 일종의 조미료라고 해야 하나.
찜찜한 기억을 털어 낸 도진은 현재에 집중했다.
“준비는 충분히 했고.”
이번엔 따는 역할을 할 차례다.
* * *
게임 서비스 시작 이래 소통 비슷한 것도 하지 않던 뫼비우스가 뜬금없는 공지를 게시했다.
멸망의 별이 더욱 밝게 빛나는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정해진 운명이 힘을 얻고, 필연은 한층 더 담담히 칼날을 드리울 것입니다.
새로운 콘텐츠 ‘도전의 탑’이 월드 이벤트 기간 동안 개방됩니다.
도전의 탑이 공략될 때마다 멸망의 별 라베스의 밝기가 억제될 것입니다.
도전의 탑을 공략하고 층마다 주어지는 푸짐한 보상을 획득하세요!
멸망의 빛이 약해질 경우 리제니안은 벨라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획득 경험치 증가
-아이템 획득 확률 증가
-전체 능력치 증가
증가 수치는 월드 이벤트 공략 진도에 따라 적용됩니다.
멸망의 힘이 강해질 경우 리제니안은 운명에 저항하는 힘을 잃고 라베스의 저주를 겪게 됩니다.
-몬스터에게 주는 피해 감소
-몬스터에게 받는 피해 증가
-획득 경험치 감소
-아이템 획득 확률 감소
감소 수치는 월드 이벤트 공략 진도에 따라 적용됩니다.
도전의 탑은 1일 최대 5회 입장 가능하며, 입장 시 입장권(도전의 탑 티켓) 1장이 필요합니다.
‘도전의 탑 티켓’은 기본 1장 지급되며, 추가 티켓은 월드 몬스터를 사냥해 획득할 수 있습니다.
도전의 탑은 ‘솔로 모드’와 ‘파티 모드’ 중 하나를 선택하여 입장할 수 있습니다. 파티 모드의 경우 입장 인원에 따라 던전 몬스터의 난이도가 변경됩니다.
멸망성(滅亡星)의 힘이 강해져서 로스타니아에 재앙이 드리우고, 재앙에 대항해야 할 존재는 약해지는 시기의 도래를 알리는 공지였다.
유저 반응은 당연하게도 뜨거웠다.
-서비스 시작 9개월 만에 첫 공지라니 ㄷㄷ
-드디어 제대로 된 이벤트 하나 보네. 그래, 뭘 좀 퍼 줘야 후발대가 선발대를 따라잡지.
-퍼 주긴 시발 ㅋㅋ 공지 제대로 읽긴 함? 보상보다 페널티가 더 미쳤던데?
-페널티 생각은 왜 함? 어차피 난이도 적당히 조정해서 나올 텐데 ㅋㅋ
-그냥 설정 떡밥 던지느라 예의상 넣은 거에 겁먹긴 ㅋㅋ
-아;; 저번 달에 연차 몰아서 썼는데 이벤트를 지금 하면 어떻게 해 미친 새끼들아!
LOST판 전체가 펄펄 끓는 철판 위에 오른 것처럼 들끓었다.
유튜브는 도전의 탑 관련 정보 전달 영상으로 도배됐다.
게임 방송을 주력으로 하는 사람들은 너도 나도 바쁘게 도전의 탑 콘텐츠를 준비했다.
[핵과금 유저 연합해서 도전의 탑 도전하겠습니다. 시청자분들 중에서 참여하실 큰손 형님 계시면 제 방송국 게시판에 신청 글 올려 주십쇼.]
[님들도 알다시피 제가 전 프로게이머잖아요? 그래서 이번에 전 프로 출신이신 분들 위주로 섭외해서 팀 한번 꾸려 보려고요. 플랫폼 소속 상관없이. 아, 그래요, 드림팀. 드림팀 꾸린다고요.]
[여성 스트리머 파티 꾸려서 이번에 도전해 보려고요. 최초 클은 당연히 못 하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이벤트 기간 내에 탑 정상 찍기 도전할 거예요.]
여기저기서 경쟁적으로 최초 클리어 도전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라엘 엔터로 도진을 찾는 러브콜이 쏟아졌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주강희는 앞에 놓인 수북한 보고서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할 내용이 많아서 수북한 게 아니라 그냥 도진을 찾는 곳이 하도 많아서 두꺼워진 보고서.
주강희는 자연스레 미간을 문질렀다. 그런 그녀에게 보고하러 올라온 당사자인 마케팅 팀장이 열정적으로 말했다.
“인터뷰 나가고 나서 갑자기 이벤트 공지가 올라오는 바람에 그쪽으로 관심이 확 기울어 버리면 어쩌나 했는데 그건 기우였습니다. 오히려 도진 씨가 이번 이벤트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에 대한 기대 심리 덕에 관심이 더 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명 방송인과 팀을 이뤄서 실시간 방송 송출을 시작하면 정말 엄청난 시너지가 날 거란 게 저희 팀 의견입니다.”
현재 라엘 엔터, 특히 기획마케팅팀 내에서 도진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취급을 받고 있었다.
툭 치면 실적이 우수수 쏟아지는 실적 자판기.
그런 우수한 인재를 이런 시기에 그냥 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마케팅 팀장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보다 한참 어린 상사를 바라봤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사안이기도 하니까 빠르게 결론을 내려야겠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물어보죠.”
그 눈빛에 못 이긴 주강희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팀장은 생각했다.
‘이건 무조건 된다.’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기다리기를 잠시.
주강희가 짧은 통화를 마무리했다.
“매니저한테 물어본 뒤에 바로 문자하라고 지시했어요.”
아, 넵.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또 잠시 기다렸다.
띠링- 하고 울리는 스마트폰.
팀장의 시선이 자연스레 스마트폰을 향했다.
“안 한다고 했다네요.”
주강희의 담백한 말.
마케팅 팀장이 눈을 끔뻑끔뻑했다.
이런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가져다 대기는커녕 앉지도 않겠다니.
“왜, 왜요? 정말 좋은 기회인데…….”
“모르죠. 하지만 크리에이터가 안 한다고 정한 이상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제가,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아쉽지만, 아직 실시간으로 방송할 생각은 없다는 게 도진 크리에이터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지금까지처럼 영상 제작할 소스는 나올 테니까 영상 준비를 철저히 하는 쪽으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면서도 팀장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도진 채널에 올라간 영상의 특징은 ‘히든 피스’였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발견하면 독차지할 수 있는 그런 경우.
그런데 이번은 아니다.
모든 유저가 같은 선상에서 출발하는 경우다.
뒤늦게 영상을 제작하고 올려 봐야 이미 대중은 다른 방송으로 월드 이벤트인지 뭔지를 실시간으로 즐긴 뒤가 될 텐데.
축제가 다 끝난 뒤에 축제 녹화 영상이나 트는 꼴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이해할 수가 없네.’
정말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좋은 기회를 걷어차는 도진도, 그걸 받아들이는 상사도.
* * *
도진이 단칼에 라이브 방송 제안을 거절한 뒤로 며칠이 흘렀다.
그리고 드디어 월드 이벤트가 시작됐다.
[로스타니아에 도전의 탑이 등장했습니다.]
수많은 유저가 자신에게 주어진 티켓을 사용해 도전의 탑에 도전했다.
1층은 무난하게 격파됐다.
2층도 마찬가지로 바로 격파됐다.
3, 4, 5, 6층에 이어 7층이 격파되는 것도 금방이었다.
각 층마다 10레벨 단위로 끊어지는 깔끔한 난이도였기에 높은 레벨의 유저 입장에선 일정 부분 스펙으로 찍어누를 여지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ㅋㅋㅋ 이거 몇 층까지인지는 몰라도 오늘 바로 공략되는 거 아님?
-상위권 유저 스펙이 상상 이상으로 높아서 그런 거지 뭐.
-레벨, 장비, 실력 다 되는 애들이 똘똘 뭉쳤는데 당연하지.
공략 방송에 모여 놀던 시청자들은 생각보다 쉬운 난이도에 실망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그건 아주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1층부터 조금씩 몬스터 강해지는 걸 감안할 때 최대로 잡아도 10층 정도 올라가면 끝날 거 같거든요? 일단 바로 다음 층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제 8층 맞지?”]
[“어, 이제 8층이다. 지금까지 패턴을 생각하면 8층부터는 80레벨대야. 대놓고 맞아 가면서 하는 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주의해.”]
[“우리가 평소에 사냥하는 몬스터가 그것보다 강한데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가 있나? 어쨌든 문 연다?”]
방송 중인 파티 중 가장 빠르게 진도를 빼고 있던 <스피어> 길드의 5인 정예 파티가 8층에 진입하고서.
[도전의 탑 8층부터는 챌린지 플로어입니다.]
[챌린지 플로어 구간에서는 새로운 페널티가 추가됩니다.]
[8층부터는 사용할 수 있는 소모품의 개수가 제한됩니다.]
새로운 제한 사항에 대한 시스템 메시지를 보기 무섭게.
[“아아악!”]
[“이런 미친! 뭐가 이렇게 빨- 커헉!”]
[“빠른 게 아냐! 아무것도 안 보여서 그렇지 이거 적이 하나가 아니- 끄르륵……!”]
[“불, 불 켜! 라이트 주문 외우라고!”]
[“시발, 안 돼! 주변에서 빛을 잡아먹는다! 이거 단순히 어두운 게 아니라고!]
[“젠장, 힐러 다운, 힐러 다운!”]
속수무책으로 전멸을 당한 것이다.
심지어 파티 구성원과 시청자들이 본 건 온통 검은색으로 색칠된 암흑천지뿐이었다.
원래 검은색이어서 죽은 뒤에도 별 차이가 없는 거무죽죽한 장면을 보며 시청자 중 한 명이 중얼댔고, 가상현실 채팅 시스템은 그걸 텍스트로 출력했다.
-…시발. 뫼비우스 새끼들을 믿은 내가 병신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