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54화 (55/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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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 펼쳐진 수로의 중심부.

중앙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그곳으로 여러 갈래에서 모인 물들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그 위로는 수로 청소나 보수 공사를 하는 인부들이 쓰기 위해 만들어 놓은 철제 구조물 여러 개가 얼기설기 위치해 있었다.

제대로 된 다리를 만들기에는 돈이 아까워서, 극한의 절약을 곁들여 만들어 놓은 조악한 철근 다리였다.

양발을 겹쳐서 서면 꽉 찰 만큼 좁디좁은 철근을 다리라고 불러도 되는가는 약간 고민이 되는 문제였지만, 생각보다 훨씬 부실한 구조는 도진 입장에서 매우 반가운 것이었다.

‘무너뜨리기 어려우면 어쩌나 했는데 이 정도로 사람 죽기 딱 좋게 만들어 놨을 줄이야.’

적이 길을 잘못 들어서 헤매는 동안 도진은 수로 중심부에서 전투를 위한 준비를 했다.

물이끼가 잔뜩 끼어 미끄러운 사다리를 타고 위아래로 움직이며, 중심부는 물론이고 적의 예상 진입로에 마석 폭탄을 잔뜩 설치해 둔 것이다.

돈지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미친 코스트를 자랑하는 전투가 되겠지만, 도진은 아낌없이 인벤토리를 털어 수로 중심부 전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이번 전투는 회귀한 후 겪는 최고 난이도의 위기였고, 도진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걸 무기로 쓸 생각이었다.

말 그대로 쓸 수 있는 모든 걸.

“오오오……! 저 태어나서 이렇게 생긴 구조물은 처음 봐요! 자연적으로 생긴 구멍 위에 이런 시설을 짓고, 이런 식으로 활용하다니. 역시 중앙대륙분들은 응용력이 대단하시네요!”

도진이 비장한 각오로 전투 준비를 하든 말든 엘더는 절벽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물을 삼키는 검은 구멍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조금 회복되었다고는 하나 움직일 수 있는 건 머리통 하나인 주제에 턱으로 기어서 이리저리 다니며 한눈을 파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제발 얌전히 좀 있으랬지?”

“전 엄청 얌전히 있는걸요? 앗! 이것 좀 보세요! 저 이제 목을 이만큼이나 움직일 수 있게 됐어요!”

이것 보라며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엘더.

목 아래로는 미동도 없는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데 머리만 격하게 움직이는 기괴한 모습을 본 도진은 그냥 포기했다.

‘…부유대륙에서 중앙대륙으로 가출한 애한테 얌전함을 바란 내가 바보지.’

심지어 더 옛날에는 하늘 구경한다고 부유대륙 지상으로 올라가서 일광욕을 즐기다 죽을 뻔한 흡혈귀가 쟤다.

그런 애 입장에서 턱으로 기어 다니는 것 정도는 정말 얌전히 있는 걸지도 모른다.

빨리 퀘스트 끝내고 집으로 돌려보내자. 그러면 다시 혼자서 조용하고 행복한 가상현실 라이프를 즐길 수 있을 테니.

도진이 해탈한 표정으로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앗!”

고개를 쭉 내밀고 도시 단위 배수구를 구경하던 엘더가 귀를 쫑긋거렸다.

“웃음소리가 기분 나쁜 분이 길을 제대로 찾은 것 같아요. 이제 조금 있으면 이쪽으로 올 거예요!”

“얼마나 남았어?”

“시간은 아마도 1분쯤? 그 정도 걸릴 거 같아요!”

도진은 철근 다리를 건너고 사다리를 올랐다.

적이 접근해 올 터널은 이미 엘더를 통해 특정한 상태였다.

전투 준비도 철저히 마친 상태고.

“어어, 조심하세요! 저는 저 아래로 빠져도 괜찮지만, 선생님 같은 보통 인간분들은 저 아래로 떨어지면 아주 위험할 거예요!”

“걱정 마. 나랑 떨어지게 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1시간만 버티면 네 태양 중독인지 뭔지는 다 회복될 테니까. 그러면 집에 갈 수 있을 거야.”

도진이 하는 말에, 엘더의 눈망울에는 전에 없던 당혹감이 차올랐다.

* * *

언제부터였을까. 삶보다는 안식을 더 바라게 된 건.

카린은 이제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안식을 바란 지 너무 오래되어서.

중앙대륙의 소설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뱀파이어는 늙지 않는 괴물이다.’라고.

책을 쓴 작가를 본다면 카린은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었다.

‘작가님의 문장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답니다.’라고.

흡혈귀는 분명 늙지 않지만, 그건 육체에 한정된 이야기.

마음은 켜켜이 쌓이는 시간에 짓눌려 분명하게 늙어 간다.

하물며 공국은 죽음이 멀어진 만큼 마음과 감정도 함께 옅어진 곳.

그런 곳에서 천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살다 보면 마음이니 감정이니 하는 것을 쓸 기회가 많이 없었다.

쓰지 않고 방치해 둔 마음에는 쌓이는 시간에 비례해 먼지가 쌓이고, 그러면 어느새 마음은 회색 먼지에 파묻혀 찾아보기도 힘든 것이 된다.

카린의 마음 또한 그랬다.

그녀는 그게 싫었다.

불사의 괴물이라 불리는 존재가 되었어도, 마음만큼은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중앙대륙의 책을 어렵사리 구해 읽었다.

인간을 닮고 싶어서. 배우고 싶어서.

그런데 부족했다.

너무 메마른 땅에서 자란 탓인지 글을 보아도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가 없었다.

카린은 그때 깨달았다. 자신은 애초에 한 번도 사람으로서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것을.

허무했다.

그래서 지상으로 올라가 하늘만 바라봤다.

태양을 바라보고 바라봤다.

‘어쩌면 내가 인간일지도 몰라. 그러면 태양을 보아도 보아도 죽지 않을 거야.’

…하는 부질없는 바람.

그리고 이 생이 소멸이란 결말로 귀결되어도 좋다는 삭막한 자포자기가 뒤섞인 행동이었다.

처음으로 중앙대륙을 밟았을 때, 흡혈귀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겨야 할 사제가 웃는 낯으로 다가와 도움을 주겠다고 했을 때도 같은 생각으로 응했었다.

만에 하나 진실이면 좋고, 아니어도 그저 이 생이 끝나면 될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해맑게 웃으며 그를 따라갔었다.

‘흡혈 저주를 풀기 위한 모험? 위선이에요. 저는 그저 살아야 할 이유가 필요했을 뿐이에요. 제가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무언가’를 찾을 때까지 살아 있을 이유가.’

언제 소멸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모순.

천 년이 넘게 해 온 고민은 꼬일 대로 꼬여서 이제는 카린 본인도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자신이 찾아 헤맨 것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실마리를 잡은 기분이 들었다.

「걱정 마. 나랑 떨어지게 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1시간만 버티면 네 태양 중독인지 뭔지는 다 회복될 테니까. 그러면 집에 갈 수 있을 거야.」

한 사람의 말에 의해서.

마치 다시 만날 일이 없다는 듯한 말.

카린은 그가 갑자기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당혹스러웠다.

당혹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당혹스러웠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설마 저를 두고 가시려는 건가요? 무, 물론 선생님께서 지금이라도 스스로의 안위를 챙기기로 하신 거라면 전 환영이랍니다!”

말을 하던 카린은 아차 싶었다.

이렇게 말하면 떠나도 좋다는 것처럼 들리게 된다는 생각에 급히 말을 덧붙인다.

“저를 두고 가시면 저는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도 제대로 드릴 수 없게 되는걸요?”

그러면서 자신이 왜 당황하고 있고, 저 사람이 왜 자신을 당황스럽게 하는 건지 이유를 찾아 헤맸다.

‘제가 모두 꺼려 하는 흡혈귀라는 걸 알고도 도와주셔서?’

맞다. 이 이유다. 하지만 그러면 중앙대륙에 오자마자 마주쳤던 사제는?

‘그분은 저를 속였어요. 사실 티도 났던걸요. 저분은 절 이용할 생각이 없으신 게 차이예요! 심지어 저분은 제 이름도 묻지 않았어요. 한 번도 구해 준 대가를 요구하신 적도 없고요.’

친절하진 않아요. 은근히 절 구박하는 것도 알아챌 수 있어요. 그래도 결국 절 구해 주셨어요. 항상 자신의 안위보다 제 안위를 더 챙기는 것도 느낄 수 있었어요.

이유를 찾다 보니 너무 많다. 하나하나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흡혈귀인 저를 아무렇지 않게 대해 준 첫 번째 인간분이에요. 어쩌면 앞으로 다시는 저런 분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요.’

이런 쉬운 사실을 왜 몰랐을까요? 지금껏 업혀 있었는데. 왜 눈앞에서 사라질지도 모를 때가 되어서야 깨닫게 된 걸까요?

“감사 인사?”

되묻는 도진의 목소리가 카린의 복잡한 머릿속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네! 저는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했답니다!”

간절함을 담아 하는 그녀의 말에 도진이 씩 웃으며 물었다.

“고맙지?”

“물론이에요! 절 구해 주셨는걸요!”

“그럼 됐네. 지금 했잖아. 고맙다는 말. 그거면 충분해.”

카린의 눈동자가 굴러떨어질 것처럼 커졌다.

“아앗! 그럼 안 고마워요! 하나도 안 고마워요!”

필사적으로 감사를 환불받으려고 했으나 부질없는 시도였다.

도진의 눈은 이미 터널 안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카린의 귀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꽂혔다.

* * *

“네놈이냐?”

터널 저편에서 멸망의 졸개가 물었다.

도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망인데. ‘네놈이냐?’라니. 너무 식상한 질문이잖아.”

사제가 웃었다.

작게 시작됐던 웃음은 광소로 번졌고, 이내 실소로 줄어들었다.

“무슨 생각으로 나의 위대하고 신성한 의식을 방해했나 했더니… 단순히 미친놈이었구나. 감히 나의 질문을 그런 식으로 불경하게 받아치는 것을 보니 돌아 버린 게 분명해.”

생각보다 차분한 사제의 모습.

도진은 옅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생각했다.

‘기회는 한 번. 그 기회를 만들 기회도 한 번. 최대한 끌어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단을 맞춰 줘야 하고.

“네놈. 혹여나 싶어 묻는다만, 우리의 존재를 알고 끼어든 것이냐? 바로 대답한다면 죽음까지 가는 길이 조금은 짧아질 테니 잘 생각해서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우리? 내가 알 게 뭐야. 노예 거래 때려잡으러 갔더니 더 살벌한 게 있길래 들고나온 건데. 근데 넌 사제란 놈이 저걸로 뭘 하려고 한 거냐?”

도진은 일부러 상대의 정체를 모른 척했다.

멸망교단 측에서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걸 알게 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웬만하면 저놈을 여기서 죽이고 싶긴 하지만, 죽이는 데 실패할 경우를 생각해서라도 ‘교단’이 드러난 게 아니라 재수 없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는 인식을 줘야 했다.

이런 도진의 의도가 성공적으로 통했는지 멸망교 사제 헥슬리는 눈에 띄게 마음 편한 표정이 됐다.

“후후후, 그렇지. 네놈 같은 버러지가 이 세계가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알 리가 없지. 우문이었다. 사과하도록 하지.”

도진을 워낙 하찮게 보고 있기에, 그의 말을 의심도 하지 않는다.

그런 헥슬리의 모습을 본 도진은 속으로 웃었다.

왜냐하면, 자신을 얕보는 상대는 도진이 가장 선호하는 적이기 때문이었다.

“애석하게도 이제 네놈에게는 볼일이 없구나. 천천히 죽어가며 자신의 우행이나 후회해라, 버러지.”

노골적인 무시가 담긴 손짓으로 방울을 흔드는 헥슬리.

그에 맞춰 그의 주변에 서 있던 마물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와 거의 동시에 도진의 손가락이 튕겨졌다.

퍼퍼펑.

푸른 전류와 함께 연쇄적인 폭발이 일었다.

도진이 미리 배치해 둔 마석 폭탄이 터진 것이다.

그것에 휩쓸려 15마리가 넘는 찌꺼기 마물들이 일제히 소멸했다.

“이이……!”

한두 마리도 아니고, 열다섯이나 되면 버러지가 감당할 수 없으리라 믿었던 헥슬리의 입에서 억눌린 분노가 새어 나온다.

후두둑.

그 분노는 새하얀 사제복에 죽은 찌꺼기가 남긴 오물이 잔뜩 묻으며 정점을 찍었다.

“이 바퀴벌레만도 못한 기생충 새끼가아아아아!”

“바퀴벌레라니. 그건 좀 말이 심한데.”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며, 도진은 바닥에 몸을 숙였다.

그리고 한참 전부터 준비한 주문을 풀어헤쳤다.

《섬광창》

빛이 부족했던 공간에 강한 빛이 깃들었다.

하나 날아간 빛의 창은 부질없이 부서졌다.

현저한 레벨 차이를 보여 주는 단면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진 도진도 다 예상한 바.

섬광창은 그저 성능이 조금 더 좋은 섬광탄 대용이자 적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던진 미끼에 불과했다.

《화염구》

필사적으로 달린 도진은 오른손에 커다란 화염구를 만들어, 그것을 마치 주먹처럼 휘둘렀다.

“어이가 없군.”

그에 맞춰 헥슬리는 우악스레 손을 휘둘렀다.

파리를 잡듯이 휘두른 손에 담긴 힘이 도진의 마법은 물론이고 그의 육체까지 한꺼번에 후려갈긴다.

“커헉!”

화염구는 그대로 소멸했다.

도진의 몸은 휘청거렸고, 그렇게 드러난 빈틈은 치명적이었다.

“엥엥대는 모기만도 못한 걸 보니 바퀴벌레라는 말도 네놈에게는 과찬이었구나.”

헥슬리의 손이 도진의 목줄을 움켜쥐었다.

“크, 크윽……!”

고통스레 신음하는 도진을 보며 헥슬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부족해. 그 정도 고통으로 흘리는 신음으로는 부족하다. 너에게는 더욱 어울리는 고통과 죽음이 필요하겠지.”

헥슬리는 저주를 준비했다.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저주를.

그때였다.

도진의 손이 번쩍! 하고 움직인 것은.

푹.

“……?”

헥슬리는 따끔한 통증이 느껴진 부위를 보았다.

옆구리다.

통증이 느껴진 이유는 단검이었다.

하하. 이제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마법사라는 놈이 죽을 위기에 처하니 추잡하게 단검까지 휘둘러?

하여간 쓰레기들이란. 저주에 조금 더 공을 들여야 할 이유가 늘었…….

생각하며 고개를 든 헥슬리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자신에게 목줄을 잡힌 벌레가 아주 만족스레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헥슬리가 무언가 위험하다는 인식을 했으나, 그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멍청한 새끼. 잡았으면 바로 죽였어야지.”

《흑룡의 독니》

도진이 S급 무기의 발동 스킬을 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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