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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은 혈왕을 내려다봤다.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위태로운 호흡을 뱉고 있는 모습을.
“너, 너 이 새… 끼… 누구… 쿨럭, 쿨럭.”
혈왕은 마비되어 잘 돌아가지도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보려다 핏물을 잘못 삼키고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그래도 이쪽은 다른 놈들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주변에 쓰러져 있던 것들은 이미 진즉에 중독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거나 실시간으로 죽는 중이었다.
곳곳에서 그들의 육신을 이루던 것들이 세계를 이루는 근원, 마나로 화해 빛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아마 겨우 버티고 있는 혈왕도 머지않아 저렇게 될 게 뻔해서, 도진은 그 전에 할 말을 하기로 했다.
“섭섭한데? 내가 누군지 벌써 잊어버렸다니.”
적의와 억울함 가득하던 혈왕의 눈에 의문이 깃들었다.
어디서 만난 적 있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니 기억을 더듬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봐야 도진에 대한 기억이 튀어나올 리 만무했다.
도진과 혈왕이 마주치고, 악연으로 얽히는 건 앞으로 꽤나 시간이 지난 미래에 벌어졌던 일이니까.
“뭐, 기억 안 날 수 있지. 이해해. 원래 가해자는 잊고 피해자는 기억하는 거잖아? 이런 일은.”
그런데 뭐… 그런 건 도진이 알 바가 아니었다.
억울하면 타임머신이라도 개발해서 미래로 가서 나한테 좆같이 구는 몇 살 더 먹은 본인한테 드롭킥이라도 날려서 말려 보든지.
“커헉.”
도진은 쓰러진 혈왕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챘다.
적의와 억울함이 범벅된 놈의 시선을 마주하자 도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짜릿함을 느꼈다.
이런 게 복수의 맛인가 싶었다.
“그래, 그런 눈을 해야지. 그래야 복수하는 입장에서 보람을 좀 느끼지.”
“복… 수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 쿨럭, 쿨럭.”
“기억 안 나?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더 까불어 보라고. 다음에는 더 비참하게 해 주겠다고. 그래서 이렇게 왔어. 네가 날 얼마나 비참하게 해 줄 수 있을지 궁금해서.”
내가 그랬다고? 언제?
황망한 눈으로 묻는 혈왕의 머리를 도진은 그대로 땅에 던지듯 처박았다.
그러고는 뒤통수를 밟아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평소라면 마법사에게 짓눌릴 혈왕이 아니지만, 하베르칸의 독에 중독된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잘 봐둬. 지금 그 시점이 앞으로 네가 날 마주칠 일이 있을 때마다 눈에 담아야 할 광경일 테니까.”
“으그극……!”
혈왕은 폭주하려는 듯 몸을 들썩였으나 도진은 그에게 분노든 뭐든 터트릴 기회도 주지 않았다.
콰직.
도진의 마법이 혈왕의 심장에 종지부를 찍었다.
* * *
도진이 하베르칸을 마무리한 순간 불타오르기 시작했던 채팅창이 고요해졌다.
혈왕이 보는 시야, 그러니까 방송 화면에 잡힌 도진의 얼굴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법사의 정체가 지독하게 궁금했고, 그래서 자신들도 모르게 오직 화면에, 그리고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너, 너 이 새… 끼… 누구… 쿨럭, 쿨럭.”]
먼저 열린 건 혈왕의 입. 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그래서 님은 누구신데요? 그렇게 마음으로 물을 때.
[“섭섭한데. 내가 누군지 벌써 잊어버렸다니.”]
도진의 입이 열렸다.
그 말은 모두의 궁금증을 더욱 폭발시켰다.
혈왕은 모르지만, 상대는 혈왕을 안다.
그것도 누가 보아도 악연으로 얽힌 인물임이 확실해 보이는 뉘앙스.
[“뭐, 기억 안 날 수 있지. 이해해. 원래 가해자는 잊고 피해자는 기억하는 거잖아? 이런 일은.”]
그 말과 함께 화면이 확 움직였다.
모로 꺾여 있던 시선이 강제로 바로잡히고,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화면을 독차지한다.
날카로운 조각도로 깎아 낸 듯한 얼굴과 눈매만으로도 눈에 띌 것 같은 남자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건… 어린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깊고 거칠고 어두운 눈빛이었다.
[“그래, 그런 눈을 해야지. 그래야 복수하는 입장에서 보람을 좀 느끼지.”]
[“기억 안 나?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더 까불어 보라고. 다음에는 더 비참하게 해 준다고. 그래서 이렇게 왔어. 잘난 네가 날 얼마나 비참하게 해 줄 수 있을지 궁금해서.”]
중간중간 중얼대는 혈왕의 소리는 시청자들의 귀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화면을 가득 채운 도진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혈왕이란 존재를 지워 버린 것이다.
그러다 순식간에 화면이 바뀌었다. 도진의 얼굴이 사라지고, 나온 것은 차갑고 어둑어둑한 땅바닥.
[“잘 봐둬. 지금 그 시점이 앞으로 네가 날 마주칠 일이 있을 때마다 눈에 담아야 할 시점일 테니까.”]
차갑고 시린 목소리로 내리는 경고가 끝나고. 콰직- 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화면이 검게 변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잠잠했던 채팅창에는 불이 났다.
* * *
[공략 게시판]
[제목: 오늘 1인 레이드 그거 댓글로 토론 좀 해 보자]
-나부터 시작함. 일단 나는 법사가 개사기라고 생각함
└ㅋㅋㅋㅋ 토론하자더니 법사가 개사기 ㅇㅈㄹ 하고 있네.
-는 농담이고, 그 법사 내가 볼 때는 그 보스 처음 잡는 거 아닌 거 같은 느낌임. 뭔가 다 파악한 상태에서 보스가 쓰는 패턴을 받아치는 느낌? 그런 것처럼 보였음.
-ㅇㅇ 나도 그렇게 봤음. 벌써 그 전투 영상만 15번 정도 봤는데, 순식간에 상황이 팍팍 진행돼서 그렇지 뜯어 보면 ㄹㅇ 처음부터 소름 돋을 정도로 완벽하게 설계된 전투라는 걸 알 수 있겠더라.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느낌?
└시작부터 독가스 밀어내고 바로 불붙여서 터트리는 거 보고 느낌. 유혈 애들만 봐도 처음 보니까 대응 못 하고 질질 쌌잖아. 근데 바로 그렇게 대처를 한다? 나는 힘들다고 봄.
-독가스도 독가슨데, 나는 거기서 소름 돋음. 다리 두 개 날려 버리자마자 바로 사이드로 돌면서 사각 파고들고, 보스 회전 속도에 맞춰서 암석 방패? 이름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는데 그거 다다닥 깔고 바로 빠지는 거. ㄹㅇ 무슨 몬스터 AI를 상대로 그런 기만을 한다는 게 진짜 재능이란 게 있구나 싶더라.
└ㄹㅇ이야. 거기다 무슨 소환 마법으로 뽑은 걸로 2차 기만까지. 보스가 아니라 나도 속았다니까? ㅋㅋㅋ
-그것보다 님들 그거 앎? 오늘 나온 그 마법사 오늘 처음 등장한 게 아님.
└어디 또 나온 적 있어?
└예전에 잠깐 핫했던 영상 있는데, 거기선 얼굴은 안 찍히긴 했어도 입고 있는 로브랑 금색 책 소환하는 게 똑같음.
[마법사 게시판]
[제목: 하아… 진짜 자괴감 든다. 그냥 겜 접을까?]
[후우… 오늘 퇴근하고 치킨 시켜서 레이드 방송 보는데 현타 오더라.
마지막에 나온 그 사람 있잖아. 예전에 폐쇄된 철광석 광산 던전 영상에서 나온 그 법사 확실해. 내가 그분 팬이라 그 영상 진짜 많이 돌려봤거든.
로브랑 발동형 아이템으로 소환하는 책 말고도 그냥 체구가 완전 그분인 거야.
진짜 처음 화면에 그분 잡히자마자 비명부터 질렀음. 넘 멋있어서.
근데 다 보고 나니까 현타 오지더라…….
나 사실 그분 영상 보고 이 게임 시작했거든. 마법사로 시작한 이유도 그분 때문이고…….
똑같이는 못해도 흉내라도 내면 재밌게 겜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고블린도 제대로 못 잡겠는 거야.
걔들이 막 점프해서 달려들면 바로 눈 질끈 감게 되고, 그러면 바로 캐스팅 실패하고.
근데 오늘 다시 본 그분은 혼자서 그 무섭게 생긴 괴물을… 하아.
모르겠다. 직업 바꿀 수 있으면 진짜 바꾸고 싶은데 ㅠㅠㅠ 근데 또 그 사람 생각하면 못 바꾸겠고. 뭐랄까 그냥 작은 공통점이라도 공유하고 싶은 느낌?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게임 접고 앞으로 풀리는 영상이나 보면서 덕질이나 할까 싶기도 하고. 아, 진짜 왜 하필 마법사냐고 ㅠㅠㅠ]
-애도한다. 그때 그 영상 때문에 마법사로 유입된 피해자들이 많긴 했지…….
└이건 영상 속 당사자가 와서 사과해야 한다… 과장 광고로 사람 인생 망쳤으면 사과해야지, 암.
[자유 게시판]
[제목: 오늘 그 사람 괜찮을까?]
[혼자서 괴물 때려잡은 건 진짜 대단하긴 한데.
결과적으로 유혈 애들 엿 먹인 거잖아.
자존심을 그렇게 건드려 놨으니 사생결단 내려고 할 거 아냐.
이번 한 번은 몰라도 앞으로 견딜 수 있을까? 접을 때까지 지랄할 거 같은데.]
-ㅋㅋㅋㅋ 애초에 말하는 거 보니까 유혈 애들이 먼저 건드려서 복수하러 온 거 같은데 그냥 쌤쌤 아님?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 유혈 애들이 지랄하긴 할 거임 ㅋㅋㅋ 원래 속 좁은 병신들이라.
└그래 봐야 소용없을걸? 지금 국적 불문하고 어깨에 힘 좀 준다는 길드들은 다 그 사람 찾고 있음 ㅋㅋㅋ 제발 자기네 길드로 와 달라고. 길드 모집 게시판 가 봐라. 온통 그 사람 찾는 글밖에 없음.
-그러네. 그런 사람이면 유혈보다 센 길드에서도 모셔가겠네. ㅋㅋㅋㅋ
어딜 봐도 온통 도진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자유 게시판부터 시작해서 공략 게시판, 동영상 게시판, 하다못해 유머 게시판까지.
로트라넷을 포함한 LOST 커뮤니티는 전부 합심해서 도진에 관한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진에게 관심을 갖는 건 인터넷 세상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죄, 죄송합니다, 국장님.”
“후우… 야, 우영아, 황우영 PD님.”
“…예, 예.”
“확실하다며. 레이드 실패해도 그림 잘 나올 거라며. 근데 이게 뭐냐?”
“그, 그래도 시청률은 높게…….”
“야! 시청률이 문제야? 네가 우긴 계약서 때문에 그 유혈인지 울혈인지 하는 새끼들 광고를 5분이나 편성했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연신 조아리며 황우영 PD는 빌어먹을 혈왕, 아니 권혁진을 씹었다.
건드려도 그런 사람을 건드려서! 어디서 좆 같은 짓을 하고 다닐 거면 만만한 새끼들이나 건드릴 것이지.
“그냥 계약 엎기로 했다. 방송 내용 좆 된 걸로 무마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안 되면 그냥 위약금 물어주더라도 없던 일로 하기로 했어. 시청률이 문제가 아냐. 지금 마지막 장면 때문에 학폭이랑 엮여서 골치 아파졌다.”
“하, 학폭이요? 아니, 이번 건이 어떻게 그거랑 엮여요?”
“내가 아냐? 내가 알아! 인터넷 찌라시에서 기레기짓 하는 새끼들이 복수 어쩌고 하는 키워드 달고 학폭이랑 엮어서 소설 찌끄리는 이유를 내가 아냐고!”
“죄, 죄송합니다.”
황우영이 다시 폴더처럼 허리를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죄송하지?”
“네? 아, 예!”
“근데 또 징계는 받기 싫을 거고.”
“…….”
“그럼 이렇게 하자.”
“어, 어떻게…….”
“그 새끼. 우리 엿 먹인 그 새끼 데려오는 걸로. 울혈인지 유혈인지 그 새끼 인터뷰 어차피 나가리 됐으니까, 그 새끼 인터뷰 따는 걸로. 오케이?”
이런 일이 KGN를 비롯한 거의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방송국, 유튜버, BJ, 스트리머.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모든 사람들이 혜성처럼 등장한 의문의 마법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것이다.
모두가 자신을 찾기 위해 눈을 빛내고 있는 이때.
주인공인 도진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면…….
“…이게 왜 이 레벨에 나와?”
뒤늦게 확인한 보상 목록을 보고, 사라진 어이를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