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다시 해가 진 밤.
도진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숙소로 들어왔다.
개미들의 침공이 시작된 밤부터 다시 밤이 되기까지 쉬지 못해서일까.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가 장난이 아니었다.
오랜 게임 플레이로 인한 현실의 피로에 더불어 시스템으로 강제되는, 가상현실의 피로가 겹친 탓이다.
벽에 기댄 자세 그대로 잠들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도진은 몰려드는 졸음을, 눈을 부릅떠 몰아냈다.
아직 마무리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일이 남아서였다.
바로 보상으로 받은 랜덤 특성 선택 포인트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랜덤 특성 선택 포인트: 1]
랜덤 특성 선택 포인트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랜덤’과 ‘선택’이 공존하는 시스템을 가진 성장 시스템이다.
포인트를 사용하면 수많은 특성들 가운데 5개가 랜덤하게 떠오르고, 5개의 결과물 중 1개를 선택하는 방식.
문제는 무작위 테이블에 들어 있는 특성들 중에는 쓰레기 취급을 받는 특성이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걸 잘 알기에 도진은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딱 하나. 다섯 개 중에 하나만 제대로 된 게 나오면 돼.’
크게 바라지 말자.
쓸 수 있는 특성.
그거면 된다.
‘적어도 내가 쓸 수 있는 걸로.’
짧은 시간 동안 하느님, 부처님, 알라 외에도 기타 등등 수많은 신들에게 기도를 올린 도진은 주사위를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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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공백 칸이 나타났다.
이어 물에 푼 물감 같은 연기가 첫 번째 칸에서 헤엄치듯 일렁이며 글자를 만들어 갔다.
[신검합일]
그렇게 완성된 글자를 본 도진의 표정에 금이 갔다.
시작부터 검사, 아니 검을 쓸 수 있는 모든 클래스가 침을 질질 흘릴 특성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유저들 사이에서 평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랜덤 특성 포인트에서 등장할 수 있는 특성들 중에서는 1티어에 속하는 특성이었다.
차라리 쓰레기 특성이 나오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더럽게 좋지만 정작 자신은 쓸 수 없는 특성의 등장에 도진은 속이 매우 쓰렸다.
신검합일 나올 확률로 그냥 마법사 1티어 특성이 나왔으면 얼마나 좋아.
그렇게 생각할 때 다음 특성이 뽑혔다.
[사자의 심장]
두 번째 칸에 완성된 글자를 본 도진의 이가 맞물렸다.
뿌드득 하는 살벌한 소리에서 그의 심기를 읽을 수 있다.
“…이게 말이 되냐고.”
이번에는 물리 딜러의 1티어 특성이 나왔다.
두 번 연속으로 이런 좋은 특성이 나올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될까?
그 두 개의 특성이 전부 내가 쓸 수 없는 특성만 골라서 나올 확률은 또 얼마나 되고?
운명의 장난 같은 결과에 도진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연속으로 얻어맞았더니 정말 농담이 아니라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이래서 내가 이런 도박은 절대 안 하는 건데.”
도박이 싫은 게 아니다.
실력과 노력으로 뒤집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도박은 오히려 도진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더 큰 리스크를 짊어졌을 때의 압박감과 스릴.
그 모든 악조건을 찍어 누르고 극복했을 때의 짜릿함과 성취감.
그런 것들은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없는 자극이니까.
하지만 이런 종류, 그러니까 확률이 정해져서 운에만 맡겨야 하는 도박은 도진이 가장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성공하면 기쁘기야 하지만, 성공과 실패에 전혀 관여하지 못한 채 기도만 하는 건 도진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튼튼한 육체]
세 번째가 되어서야 도진이 쓸 수 있는 특성이 나왔다.
생명력(HP), 체력(스태미나), 상태이상 저항력 등에 골고루 영향을 미치는 괜찮은 특성이었다.
하지만 앞서 등장한 특성 두 개가 워낙 좋은 것들이다 보니 도진으로서는 겨우 이 정도 특성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포인트를 사용하기 전 마음먹었던 ‘쓸 수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은 증발한 지 오래였다.
옆 사람이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걸 보고서 어떻게 로또 3등쯤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제빵을 위한 손]
그러나 하늘은 무심했다.
필요할 때만 찾아서 그런지.
아니면 자기만 찾아야 하는데 온갖 신을 동시에 찔러 봐서 그런지.
신들마저 도진의 기도를 싹 무시했다.
정말 웃긴 건, 「제빵을 위한 손」마저도 여기서 뽑을 수 있는 특성들 중에서는 대박 특성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클래스가 최소한 요리와 관련된 클래스여야 한다는 가정이 붙지만.
제빵과는 평생 연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인 도진은 시체 같은 눈으로 허공에 뜬 검은 글귀를 바라봤다.
마지막 한 발이 남았지만, 저 한 발에 잭팟이 터질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차라리 사자의 심장이나 고를까. 혹시 알아? 가끔 주먹질할 때 도움 될지도 모르잖아. 공포 저항도 나름 쓸 만할 테고…….’
헛생각을 하며, 뛰어난 육체를 선택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할 때.
[마나 하트]
잭팟이 터졌다.
“…….”
도진은 눈을 깜빡였다.
혹시 너무 피곤해서 이거 굴리다가 잠들었나?
그래서 꿈을 꾸는 건가?
아니다. 꿈이 아니다.
“…이게 여기서도 나오는 특성이었어?”
‘랜덤 특성 포인트’와 ‘랜덤 특성 선택 포인트’는 대형 이벤트가 진행될 때 아주 가끔 전 유저에게 지급되는 보상이었다.
평소에는 보기 힘들지만, 그 시즌이 되면 전 유저가 서로서로 나는 망했네, 나는 성공했네, 나는 이렇게 좋은 특성을 뽑았네 하며 정보를 공유하거나 기만질을 하는 게 하나의 문화였었다.
그래서 도진은 ‘랜덤 특성 선택 포인트’의 등장 테이블은 대충이나마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도진이 알고 있는 한 여기서 「마나 하트」를 뽑았다는 사람은 LOST 15년 동안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얻은 특성과 정보를 공유하지는 않았을 테니 밝혀지지 않은 게 나올 수는 있지만…….
그게 도대체 낮고 낮은 확률을 몇 번이나 뚫어야 벌어질 일인지 감도 안 잡힌다.
“‘눈떠 보니 과거였습니다’ 같은 비현실적인 현실의 주인공인 내가 확률 타령을 하는 것도 웃기긴 한데…….”
그건 그거고.
지금은 천문학적인 확률을 뚫고 나온 행운에 집중할 때였다.
신검합일? 사자의 심장? 무작위 테이블 중에 1티어?
전부 마나 하트 앞에서는 한 수 밑인 특성이다.
이 특성은 성능도 성능이지만, 획득 방법부터 미쳐 있었다.
마나로 빚어진 심장을 이식해야 하는데 수술 성공 확률이 10퍼센트도 안 되는지라 실패할 때마다 돈과 시간은 물론이고, 사망 페널티로 경험치까지 날아가는 걸 감수해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선택만 하면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게끔 눈앞에 떡하니 밥상이 차려진 것이다.
“착하게 살길 잘했어…….”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더니. 그 말이 맞다.
쉬고 싶은데도 다 부서진 마을에 절망한 사람들 얼굴이 눈에 밟혀서 계속 도와준 보람이 있었다.
도진은 심호흡을 하고서 혹시나 잘못 선택할까 몇 번을 확인한 끝에 마나 하트를 선택했다.
“으윽.”
그와 동시에 왼쪽 가슴 부근에서 서늘하면서 뜨거운, 말로 형용하기 힘든 감각이 피어났다.
도진의 심장이 새로운 심장으로 바뀌면서 일어나는 감각이었다.
“커헉-”
도진의 몸이 무너졌다.
가상현실이라 해도 심장이 분해되었다 재구성되는 것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비유하자면 누군가가 심장을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며 모양을 바꿔 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감각이 수 분 지속됐다.
[「마나 하트」 특성이 생성되었습니다.]
특성이 생겨났다는 메시지와 함께 심장 부근의 통증은 사라졌다.
하나 그것이 곧 변화의 끝은 아니었다.
더 많은 마나를 저장할 수 있는 저장고를 갖게 된 도진의 육체는 더 많은 마나를 흡수했다.
받아들인 마나를 더욱 순수하고 정순하게 정제할 능력을 갖게 된 마나 하트는 전신으로 깨끗한 마나를 머금은 피를 뿜어냈다.
도진의 마법회로 또한 그 마나를 회로 내부에서 순환시키며 더욱 튼튼하고 빠르고 효율 좋은 방향으로 진화해 나갔다.
[지능 능력치가 5포인트 상승합니다.]
[체력 능력치가 3포인트 상승합니다.]
그러한 변화는 곧 능력치의 변화로 나타났다.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의 편린을 몇 줄의 메시지로 확인한 도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 좀… 쉬어야겠어.’
몰려드는 졸음을, 이번에는 막지 않았다.
까무룩 검게 물드는 시야를 마지막으로 깊은 잠에 빠졌다.
LOST의 도진도, 현실의 도진도.
* * *
눈을 떴을 때는 부슬비가 내리는 새벽이었다.
오랜만에 본 바깥세상도 비 오는 새벽이었던지라 기분이 묘했다.
‘더 묘한 건 이거지만.’
도진은 마법회로가 새겨진 오른손을 쥐었다 펴 보았다.
미묘하게 달라진 감각.
손가락 끝에 불을 만들어 보았다.
화륵.
더 빠르게 마나를 집어삼켜, 더 빠르게 마법을 완성한다.
조금만 정신을 집중하면 전신으로 뿜어지는, 피에 실린 마나가 느껴졌다.
그 모든 감각이 기분 좋았다.
“좋네.”
감상을 툭 뱉은 도진은 조용한 새벽을 즐기며 할 일을 했다.
“해석.”
[해석을 시작합니다.]
진리의 서에 기록된 모든 마법이 해석에 들어갔다.
도진의 마법사로서의 역량이 몰라보게 성장한 만큼 해석률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가장 자주 사용한 1성 마법들은 대부분 20퍼센트 정도의 해석률을 기록했다.
테스트를 해 보니 이제 1성 마법은 1초도 되지 않아 완성되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배운 지 상대적으로 얼마 안 되고, 사용 빈도도 조금 떨어지는 2성 마법들은 8퍼센트에서 9퍼센트 사이.
현재 배울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인 3성 마법은 기본 해석률인 5퍼센트에 그대로 머물렀다.
‘역시 내 마법 수준이 오를수록 하위 단계 마법 해석률이 빠르게 오르는구나.’
‘해석’을 통한 마법 숙련도 작업을 마무리하자 푸르스름하던 바깥은 어느새 해가 뜨고 있었다.
새벽녘 이슬에 반사된 빛이 만든 옅은 무지개를 보며 도진은 몸을 일으켰다.
다음 여정을 떠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