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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랭커의 뉴비 생활-18화 (19/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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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마법 기록 작업 도중 오류 발생.]

[잘못된 정보의 입력이 발견되었습니다.]

[입력된 정보의 분석 및 수정 작업을 시작하시겠습니까?]

도진은 눈앞에 뜬 메시지에 눈을 끔뻑였다.

지금 이게 뭐지? 뭐긴 뭐야. 진리의 서가 또 사기를 치는 거지.

빠르게 머리를 굴린 도진은 빠르게 작업을 수락했다.

그러자 거의 다 사라지다시피 했던 검은 연기가 마법회로 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따끔거리는 통증이 이어지길 잠시.

[기록 중이던 마법 「악령 생성」의 논리적 오류를 발견, 수정하였습니다.]

[새롭게 정립한 이론을 바탕으로 마법을 기록합니다.]

[새로운 마법 「악령 생성」이 기록되었습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도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게 운빨 갓겜이지!’

비단 마법사만이 아니라 어떤 클래스든 귀한 스킬을 확률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보통 그런 경우 100번 중 99번 정도는 행운의 여신의 외면을 받고 실패의 고배를 마시는 게 대부분.

방금 전 도진도 그런 보통의 인간에 해당했었다.

하지만 운의 영역은 더 큰 운빨 앞에 힘을 잃기 마련.

슬롯머신? 확률 조작 앞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실패라는 사인(死因)으로 죽은 야매 스킬북마저 강제로 부활시켜서 스킬을 뽑아내다니!

도진은 진리의 서가 가진 사기성에 환호했다. 물론 구석에서 시살라 몰래 조용히 스킬북을 쓴지라 입은 다물고 혼자 좋아했다.

너무 좋아하면 귀한 거 혼자 낼름한 게 너무 티가 날 테니.

어쨌든 마법계의 슈퍼컴퓨터쯤 되는 진리의 서로 확률을 조작해 스킬을 날로 먹은 도진은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탐색을 마저 마쳤다.

그러고서 뒤로 돌아보니 시살라가 좁디좁은 실험대 아래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보였다.

도진은 그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시살라, 여기 있는 것들은 당신이 가져요.”

시살라의 움직임이 멎었다.

낑낑거리며 엉금엉금 역주행한 시살라는 먼지가 덕지덕지 묻은 꼴로 물었다.

“지, 지금 뭐라고……?”

“여기 있는 것들 다 가지라고요. 어차피 저한테는 쓸모없는 것들이니까.”

도진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유용한 건 말끔히 다 챙긴 뒤에 하는 양보였다.

그러나 시살라 입장에서는 파격적이다 못해 호구에 가까운 호의로 보였다.

입을 쩍 벌린 그녀가 물었다.

“저, 저것들만 해도 어마어마한 값이 나갈 텐데요?”

상당량의 마석, 각종 시약, 제작과 실험에 쓰이는 설비들을 가리키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이것들! 이 자료들은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에요.”

안다. 가져다 팔면 어쨌든 적지 않은 골드를 벌 수 있겠지.

하지만 도진은 당장 골드 몇 푼 챙기는 것보다 시살라에게 주는 게 더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녀의 제작자로서의 성장도 앞당기고, 미리 투자를 함으로써 시살라 오멘이라는 인간의 지분도 사 놓는 셈이 될 테니 말이다.

그래도 생색은 적당히 내야 한다. 가치를 몰라서 그냥 넘겨준다고 여길지도 모르니까.

“알고 있어요. 사람을 재료로 써서 실험한 자료이니, 역겨움과는 별개로 희소성은 있다는 것쯤.”

“그런데 이걸 다 준다고요? 나누는 것도 아니고?”

“아까 준 마석 폭탄을 보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시살라는 만드는 것에 재능이 있는 거 같아요. 여기 있는 것들이 제작과 관련된 물품들이니까 한번 확인해 봐요. 만드는 게 시살라의 적성인지 아닌지.”

“아, 아무리 그래도 너무 과해요. 설비랑 재료도 그렇지만, 자료들도 엄청 희소한 것들일 텐데.”

“그래도 그냥 가져요. 나중에 잘돼서 갚으면 되잖아요.”

걸어야 할 길도 제시하고, 연구와 성장에 쓸 재료, 설비, 금전까지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면 시살라 오멘이 빛을 보는 시기가 상당히 앞당겨질 터.

쓸모 있는 체스 말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게끔 밀어 주는 것 또한 게임을 쉽게 풀어가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 * *

제론으로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난 날.

도진은 제론 외곽에서 시살라와 작별을 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도진의 말에 시살라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이에요. 받은 거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도진은 말없이 웃어 보였다.

던전을 함께 공략하면서 친근해진 시살라는 처음과 달리 다양한 표정을 보여 주게 되었다.

하기야 현재 도진이 쌓은 시살라 오멘의 호감도는 57.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NPC 호감도의 상한선이 70임을 감안할 때 57이면 꽤나 절친한 사이가 됐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 가 봐야겠네요.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길거리에서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

그래서일 것이다.

시살라가 코앞에 닥친 이별을 유독 아쉬워하는 것은.

섭섭한 미소를 입에 걸고, 시살라가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다 닭살 돋는 것들이라 하기가 좀 그래요. 다음에 볼 때 민망할 거 같거든요. 그래도 이 말은 꼭 하고 싶네요. 고마웠어요. 덕분에 마법사로서 더 나아갈 수 있을 거 같아요. 도진이 준 것들로 열심히 수련해서 다음에 볼 때는 더 높은 경지에 오른 모습을 보여 줄게요.”

“고마워할 것 없어요. 나중에 다 받아낼 거니까.”

“네, 네. 그러시겠죠. 이자까지 쳐서 갚을 테니까 걱정 마요.”

“농담 아닌데.”

“저도 농담 아니거든요?”

농담 닮은 진담을 나누며 피식거린 도진과 시살라는 약간 긴 악수를 나눴다.

“그럼.”

“당신의 여정에 행운이 함께하기를 바랄게요.”

그렇게 도진은 마법의 도시를 떠났다.

* * *

던전 공략을 마치고 제론에 이틀을 더 머물면서 몇 가지 마법을 더 익혔다.

파지직.

그중 하나 「방전」을 사용하자 손에 파란 스파크가 일었다.

걸으면서 심심해서 새로 배운 마법들을 하나씩 써 보는 중이었다.

다만 가장 써 보고 싶은 마법인 「악령 생성」은 4성 마법이라 아직 쓸 수가 없었다.

“음, 벌써 다 왔나?”

몇 시간은 걸어야 하는 거리였는데.

마법에 정신이 팔려서인지 어느새 관문에 도착했다.

여기서 말하는 관문은 차원을 넘어올 때 들렀던 관문이 아니라 지역과 지역 사이에 설치된 검문소를 말했다.

오는 동안은 딱히 사람이 보이지 않았는데, 여러 갈래의 길이 모이는 곳이라 그런지 검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만든 줄이 꽤 길었다.

멈춘 듯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행렬에 합류하며 도진은 멀찍이 보이는 커다란 철문을 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저쪽으로 통과했을 텐데.’

귀족이나 부자 혹은 그에 준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위한 특별 통로였다.

명성 있는 모험가였던 전생에는 저곳으로 휙 지나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얌전히 줄을 서서 검문을 통과해야 하는 10급 모험가 신세다.

보따리를 짊어진 상인들, 허름한 짐마차에서 투정 부리는 말을 애써 달래는 농부, 거친 인상의 밑바닥 용병들.

힘과 영향력 없는 사람들이 늘어선 모습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앞쪽에서 거친 외침이 터졌다.

“이 시간에 굳이 관문을 넘어가려는 이유가 뭐지? 딱 보니 마차 뒤에 뭐라도 숨겨서 밀수라도 하려는 수작이구나!”

도진은 고개를 빼서 앞쪽을 바라봤다.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병사가 중년 남자와 그의 딸에게 윽박을 지르는 중이다.

“아이고, 나으리! 밀수라니요! 절대, 절대 아닙니다!”

“어이, 로겐. 마차 짐칸 뒤져봐. 분명 뭔가가 나올 거다.”

“예, 병장님.”

호명된 병사가 씨익 웃으며 짐칸으로 다가갔다.

어설픈 경첩이 걸려 있긴 했지만, 사람 머리통도 깨는 묵직한 폼멜로 몇 번 후려치니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뭘 숨겨 뒀는지 한번 볼까!”

활짝 열린 마차 짐칸에는 곡물 자루가 한가득 실려 있었다.

“마을로 돌아간다는 놈이 가지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많은데? 역시 이 안에 뭘 숨겨서 통과하려는 게 틀림없구나.”

그걸 본 로겐이라 불린 병사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검을 들어 곡물 자루를 푹 찔러 베었다.

형편없이 잘린 자루 사이로 밀알이 쏟아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이구! 나으리, 정말 아닙니다! 저건 그냥 마을 사람들이 부탁한 밀일 뿐입니다. 다 같이 먹으려고 돈을 모아서 사 가는 중입니다요!”

“웃기는 소리 하고 자빠졌군. 로겐, 뭐하고 있어? 분명 자루에 밀 말고 다른 걸 숨겨 뒀을 거다. 모조리 잘라서 뒤져!”

퍼억.

병장이 농부를 밀치는 소리는 거의 작정하고 후려친 수준이었다.

형편없이 나뒹굴며 어억 비명을 지르는 제 아비를 감싼 딸이 울음 섞인 소리를 냈다.

“정말이에요! 저희 것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전체가 먹을 식량을 사느라 많이 산 것뿐이라고요. 믿어주세요!”

“흥. 마을 전체? 네놈들 마을에는 뭐 겨우 10명쯤 사나 보지? 겨우 저 정도 양으로 마을 전체 어쩌고 하다니. 더더욱 수상하군.”

많이 샀다고 지랄. 이번에는 적다고 지랄.

누가 봐도 트집을 잡기 위한 트집이었다.

“개새끼들.”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짜증을 삭이고 있는 도진 뒤쪽에서 앳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걸쭉한 욕이 들렸다.

돌아보니 명치쯤 오는 키를 가진 당돌한 여자애였다.

분한 듯 주먹을 꽉 쥔 그녀에게 도진이 물었다.

“자주 있는 일이야?”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 했다.

그때.

“어이쿠, 죄송합니다. 나으리.”

그런 소녀의 뒤에서 덩치 큰 남자가 소녀를 휙 집어 들어 뒤로 숨겼다.

불안하게 앞쪽 상황과 자신의 마차를 번갈아 보다가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딸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었다.

“죄송하긴 뭐가! 나 아무 잘못도 안 했어!”

“쉿! 아빠가 한눈은 팔았어도 네 입에서 개새끼란 소리가 나오는 건 똑똑히 들었다! 소피, 내가 그런 말은 마을 꼬마 놈들한테만 하는 거라고 했지!”

제 딸에게 눈을 부라린 남자는 연신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도진에게 사죄했다.

“아이고, 제 딸내미가 워낙 못 배워 먹어서. 이게 다 못난 부모 만난 탓이니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그가 이렇게 조심스러운 것은 도진의 차림이 평민들이 생각하는 마법사의 전형이기 때문이었다.

모험가처럼 보이는데 딱히 무기로 보이는 건 눈에 안 띄고,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이 흐르는 로브를 걸친.

평범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마법사란 족속들은 신비로운 동시에 막연히 두려운 존재였다.

“괜찮습니다. 따님이 욕한 건 제가 아니라 저 앞에 있는 병사들이니까요.”

“맞아! 난 마법사 오빠 욕 안 했다니까?”

“소피! 너 계속 이러면 진짜 엄마한테 이른다!”

“…….”

곰 같은 덩치를 가진 아빠 말은 듣지 않던 소피였으나 ‘엄마’라는 단어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곧 억울했는지 글썽글썽 눈물을 머금더니 잔뜩 억눌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나, 난……! 난 그냥 막심 아저씨랑 아샤 언니가 괴롭힘당해서 그런 건데…….”

도진은 남자가 딸을 다시 나무라기 전에 끼어들었다.

“저 앞에 있는 사람들, 아는 사람들인가 보네?”

목이 메어 끅끅대던 소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랑 같이 굴락 마을에 살아요.”

“굴락? 굴락 산에 있는 마을이 있어?”

다시 한번 끄덕이는 소녀를 보며 도진은 생각했다.

‘굴락 산에는 마을이 없을 텐데?’

굴락 산 너머에는 대규모 몬스터 서식지인 황무지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굴락 산 자체도 황무지에서 밀려드는 몬스터로 우글거리는 곳이고.

그런 최악의 장소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니.

도진의 기억 속 굴락 산은 대규모로 서식하는 몬스터가 몰려오는 걸 막기 위한 요새만 덩그러니 있는 곳이었다.

“굴락 산에는 몬스터가 엄청 많을 텐데. 그런 곳에도 마을이 있나요?”

“예? 아, 뭐 몬스터가 아예 없진 않습니다만, 못 살 정도는 아닙니다. 굴락 산 너머에 벌레 놈들 군락지가 있긴 해도 황무지에 있는 놈들이 산으로는 들어오지 않아서 그렇게 많지는 않거든요.”

“그럼 마을이 굴락 요새 근처에 있나요?”

“요새요……? 굴락 산에는 워낙 먹고살 게 적어서 저희 마을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희 마을도 마나초나 약초를 캐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처지인지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답하는 남자.

남자와 대화를 나눈 도진은 현재의 굴락 산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상태임을 알아챘다.

‘굴락 산이 내가 아는 모습이 된 건 나중 일인 모양이야. 굴락 요새가 아직 없는 걸 보면.’

굴락 산 너머에 대규모 몬스터 서식지가 있는 건 변함이 없는 것 같지만, 그놈들이 굴락 산까지 침범하지는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굴락 요새라는 거점이 없는 건 아쉽지만, 사냥은 할 수 있으니까. 불편하긴 해도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그다지 찾지 않을 테니 더 좋을 수도 있겠어.’

도진은 새롭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계획을 조금씩 수정했다.

게임을 시작한 시점이 오픈 후 3년쯤 지난 이후이다 보니 이런 사소한 정보의 오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식량이든 식수든 물약이든 당분간 보급 걱정 없이 넉넉하게 챙겨 온지라 사냥에 차질이 생길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다음부터는 절대 봐주는 일 없을 테니까 알아서 하는 게 좋을 거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저희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에잇! 시끄럽게 굴지 말고 썩 지나가! 아니면 남은 포대도 전부 갈라 줘야 정신을 차리겠나!”

“지, 지금 가겠습니다!”

소란한 병사의 고함에 도진은 사색을 멈추었다.

신나게 밀과 감자가 담긴 자루 대여섯을 찌르고 베며 패악질을 부리던 병사들이 부녀를 겨우 통과시켜 주고 있었다.

“저놈들이 오늘 뭘 잘못 처먹었나. 돈을 안 받고도 보내주길 다 하고.”

행렬에서 툴툴거리던 몇몇이 병사들의 사나운 눈에 목을 자라처럼 집어넣었다.

작게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릴 리 없는 거리였으나 힘없는 자들에게는 병사들의 눈빛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후우, 밀이야 저기 바닥에 버려진 만큼 덜 먹고 굶으면 되지만, 땔감은 아슬아슬해서 얼어 죽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걱정스레 중얼거리는 남자의 말에 도진은 이들이 부족한 돈으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식량과 물품을 확보하기 위해 마을 단위로 대량 구매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아챘다.

“저놈들이 뇌물 때문에 저러는 거라면 제가 대신 내드리죠.”

“예? 나, 나으리께서 왜…….”

“대신 굴락 마을까지 태워 주실 수 있을까요? 제 목적지가 굴락 산 건너편이라서요.”

도진의 말에 농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괴물 천지인 황무지에 가신단 말씀이십니까?”

두려움과 경외가 반씩 섞인 감탄사를 뱉은 남자는 도진과 검문소 그리고 땔감이 가득 실린 마차를 번갈아 보았다.

정체 모를, 아마도 마법사일 것 같은 자와 동행하는 것이 맞는 일인가? 하는 고민에 남자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러나 곧 남자는 결단을 내렸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도움을 받겠습니다.”

“아빠! 이 오빠도 같이 가는 거야?”

대화를 듣고 있던 소피가 아빠 뒤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소피, 이 녀석! 얌전히 있지 못해!”

“흥! 집에 가면 아빠가 예쁜 언니들 훔쳐봤다고 엄마한테 이를 거야!”

“뭐, 뭐라고?”

부녀가 떠드는 사이 검문 차례가 다가왔다.

도진은 몇 푼 되지도 않는 돈, 그냥 줘 버리고 통과할 생각이었으나 상황은 그의 예상과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는 고압적이던 병사들의 태도가 도진의 새까만 로브 차림을 보고 180도 변한 것이다.

“음, 신분을 증명할 만한 걸 주시오.”

도진은 말없이 모험가 펜던트를 건넸다.

“음, 10급 모험가에… 마법사시군.”

“내가 마법사인 게 문제가 되나?”

“…그건 아니오. 그런데 어디를 가려고 하는 것이오?”

“굴락 산 너머.”

굴락 산 너머라는 말에 병사가 움찔했다.

“거길……?”

“모험가가 몬스터 있는 곳에 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

“아, 아니오.”

어색하게 눈을 굴리는 모양새가 마법사에 대한 찜찜함이 상당한 것 같았다.

그런 놈이 겨우 검문소 병사라는 자리에 섰다고 자신들보다 약자를 핍박하는 꼴이라니.

상대의 한심함에 질린 도진이 툭 빼앗듯이 자신의 펜던트를 회수했다.

병사는 잠시 인상을 썼으나 거기까지였다.

평범한 10급 모험가라면 몰라도 마법사로 보이는 자에게 성질을 부리면 적어도 며칠은 찜찜할 것이었다.

“이들은 나와 같은 일행인데, 따로 검문이 필요한가?”

“…보아하니 겨울을 날 땔감을 사 가는 모양이군. 통과해도 좋소.”

휙 턱짓을 하는 병사에게 소피의 아비는 웬 떡이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꾸벅 숙여 댔다.

그러고는 혹시라도 병사의 마음이 바뀔까 걱정되는 듯 급히 말을 끌어 검문소를 지나갔다.

“당신도 어서 지나가시오. 괜히 검문이 늦어지는 거 안 보이시오?”

병사는 어지간히도 도진을 치워 버리고 싶은지 손짓까지 섞어 가며 재촉했다.

그러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으나 어쩌겠는가.

약자가 자신보다 약한 자의 갑이 되려고 발악을 하고, 알량한 힘이나마 휘두르지 못해 안달하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인 것을.

여기서 도진이 영웅놀음을 해 봐야 후에 이 병사들의 화풀이 대상이 될 더한 약자들만 괴로울 것이었다.

그걸 잘 알기에 도진은 얌전히 검문소를 지나쳐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기다리는 곰 닮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나으리, 감사합니다. 덕분에 탈 없이 검문소를 통과했습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아닙니다. 나으리께서 동행이라고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으면 저놈들, 땔감 절반 정도는 뺏으려고 들었을 겁니다.”

툴툴거리던 남자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해를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이런! 서두르지 않으면 해가 완전히 저물고도 한참 후에나 도착하게 생겼군요. 얼른 타십시오. 최대한 빨리 몰아 보겠습니다.”

“나는 마법사 오빠 옆에 앉아서 갈래!”

“소피!”

눈을 부라리는 남자에게 도진이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도진은 짐칸 빈자리에 앉았고, 소피는 제 아빠의 걱정스런 눈빛을 무시하고 쪼르르 달려서 도진 옆자리를 차지했다.

참 붙임성이 좋은 아이였다.

“나는 소피고 15살이에요. 우리 아빠는 하놀즈. 그리고 우리 엄마는 제니. 마법사 오빠는요?”

“도진.”

“이름 되게 특이하다. 그런데 오빠는 마법사니까 마법 쓸 줄 알죠? 보여 주면 안 돼요?”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한 소피의 목소리에 따각따각 하는 말발굽 소리가 겹쳐졌다.

“하아…….”

이마를 짚으며 뱉는 아버지의 한숨도 흘러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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