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후우.”
세 번째 허수아비까지 마무리한 도진은 깊은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직접 몸을 써서 그런지 상쾌하기는 한데, 허수아비가 흘린 검고 끈적한 액체 때문에 온몸이 지저분해졌다.
[퀘스트 목표가 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불쾌함은 경쾌한 알람 메시지가 울리면서 사라졌다.
도진은 대충 소매로 얼굴에 묻은 액체를 닦아 내며 출구를 향해 걸었다.
이미 도진을 구경하던 뉴비들은 살벌함에 질려 물러난 상태.
그의 걸음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훈련장 포탈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 훈련장 내부를 살피는 용도의 수정구를 들고 있는 라미가 보였다.
수정구를 통해 도진의 퀘스트 진행 상황을 지켜본 그녀의 얼굴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교관님, 다 끝냈습니다.”
“…….”
불러도 답이 없다.
얼이 반쯤 빠진 그녀를 도진이 다시 한번 불렀다.
“음, 죄송합니다.”
그때서야 라미는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수습했다.
“…훌륭하군요. 설마 훈련용 무기도 없이 허수아비를 쓰러뜨리는 훈련생이 나올 줄이야…….”
“별거 아니었습니다.”
도진은 가볍게 답하며 눈으로 말했다.
빨리 퀘스트 보상이나 내놓으라고. 그리고 다음 퀘스트를 빨리 달라고.
이글거리는 도진의 눈빛에 재촉당한 라미는 떨떠름한 얼굴로 수정구를 집어넣었다.
“확실히 첫 번째 훈련을 마쳤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럼 보상을…….”
그때 라미가 말을 흐렸다.
도진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분명 종교적 신념 때문에 무기를 쥘 수 없다고 했었지? 으음… 그러면 그 야만적인 전투 방식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고안한 나름의 길이라는 뜻.’
그렇게 생각하니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신념을 지키려는 한 사람을 존중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해서, 라미는 최대한 이 훈련생을 배려하기로 했다.
어차피 줘도 쓰지 못할 무기라면 차라리 다른 걸로 보상을 대체해 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무기를 지급 받을지 정해야 합니다만…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불편하다면 무기는 제외하고 다른 것으로 보상을 대체-”
그러나 그녀의 배려 담긴 말은 그대로 잘려 나갔다.
“문제없습니다.”
“예?”
뭐가 문제가 없다는 겁니까? 하고 물을 틈도 없었다.
“허수아비를 쓰러뜨리면서 생각해 봤습니다. 정말 무기를 쥐지 않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인가에 대해서요. 결론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
황당함이 과해서일까. 라미의 입에선 평소 그녀라면 상상도 못 할 비속어까지 튀어나왔다.
무의식중에 내뱉은 험한 말에 스스로 놀라 입을 다무는 라미.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진의 말, 아니 궤변이 이어졌다.
“허수아비의 머리를 바닥에 내리꽂을 때마다 제 가슴은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
아닌 것 같던데. 오히려 즐기는 것 같았는데. 라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도진의 철면피를 뚫어 내는 건 불가능했다.
“제가 스스로의 신념을 포기하고 무기를 쥐었다면, 허수아비는 훨씬 더 편안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더 온전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었을 거고요.”
“…….”
부정하고 싶다. 라미는 죽도록 눈앞의 남자가 뱉는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긴 해도 맞는 말이라 부정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개소리인 건 분명하다.
근데 도대체 왜 논리적이란 말인가.
“무기를 쥐지 말라. 이건 어디까지나 평화를 지향하라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최소한의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방향이 낫지 않을까요?”
계속되는 논리적인 개소리에 라미는 두통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주먹까지 꽉 쥔 채 물었다.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도진은 그런 라미에게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입가에는 매력적인 웃음까지 매달고서.
“무기 주세요. 묵직한 둔기로.”
드디어 라미는 눈앞의 인간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 * *
도진은 해탈한 얼굴을 한 라미에게서 초보자용 메이스와 기타 보상을 받았다.
당연히 경험치도 올라서 레벨도 올랐다.
이미 초반 성장 루트를 세밀하게 구상한 도진이었기에 고민 없이 모든 보너스 포인트를 체력에 투자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걸음은 다음 퀘스트를 받기 위해 옮긴다.
동선과 시간 낭비 없는 빠른 진행이었다.
“시련의 숲 퀘스트-”
“네!”
고전 게임 컷신 넘기듯이 NPC가 말을 꺼내자마자 말을 끊어 버리는 도진.
그 모습에 말을 걸어온 중년 교관은 입을 뻐끔거리다 헛기침을 했다.
“크흠, 흠. 기운 넘치는 녀석이군! 좋다! 나는 시련의 숲에 도전하려는 훈련생들을 담당하고 있는 크루거라고 한다.”
커다란 근육을 꿈틀대며 팔짱을 낀 크루거는 쓰윽 멋들어진 수염을 쓰다듬었다.
“물론 시련의 숲에 바로 도전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 있으니까. 이미 앞서 허수아비 처치 임무를 수행했다면 레벨이 올랐을 테고 보너스 포인트라는 것이-”
“보너스 포인트 분배라면 이미 했습니다. 각 스탯에 대한 부분도 라미 교관님한테 물어봐서 알고 있고요.”
“뭐, 뭐라고?”
당황한 크루거는 교관용 수정구를 도진 쪽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수정구에 도진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곳에는 분명 도진이 보너스 포인트를 분배했음이 드러나는 수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크루거의 콧수염이 꿈틀댄다.
그는 가뜩이나 처음부터 말을 싹둑 잘라먹었던 도진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선행학습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또 말을 잘라먹다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미리 배우고 왔다고 제재를 가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크루거는 탐탁찮은 목소리로 다음 설명해야 할 내용으로 넘어갔다.
“이미 배우고 왔다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이건 모르겠지? 최초로 빛난 별, 창세성 벨라가 너희 이방인들을 위해 준비한 안배에 관한 것 말이다.”
도진은 이번에도 아는 척하며 설명을 스킵하려 했다.
하지만 크루거의 손이 슬쩍 허리에 찬 검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입을 털었다가는 ‘다른 방법’으로 교육을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잘 들어라. 너희 이방인은 이곳… 아니, 로스타니아에서 리제니안이라 불린다. ‘되살아나는 자’라는 뜻이지.”
“그렇군요.”
“…안 놀라냐?”
“놀라는 중입니다.”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쯧, 그냥 설명이나 빨리 듣고 가라. 재미없는 자식.”
김샜다는 듯 고개를 저은 크루거는 마치 국어책을 읽듯 말을 쏟아 냈다.
‘생물인 동시에 정령 같은 존재인 리제니안은 죽으면 부활한다. 창조의 힘을 지닌 별 벨라가 리제니안의 육체를 다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과 부활 과정에서 영혼이 상처를 입기 때문에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같은, 뻔하지만 플레이어가 주어진 역할에 몰입하기 위한 설정과 관련된 부분들이었다.
설명이 끝나자 크루거는 품속에서 꺼낸 퀘스트용 힐링 포션을 휙 던졌다.
“받아라. 이제부터 시작될 시련의 숲 퀘스트에서 네가 쓸 전용 포션이다. 시련의 숲 입구로 들어가서 출구를 찾아 나가면 되는 간단한 퀘스트지만, 간단하다고 해서 쉽진 않을 거다.”
퀘스트에 관한 설명을 하며 크루거는 씨익 웃었다.
마치 도진이 앞으로 고생할 모습이 기대된다는 듯이.
실제로 그는 지금 이 버르장머리 없는 이방인이 잔뜩 고생하는 모습을 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후후, 이렇게 건방진 놈일수록 실전에서는 빌빌대기 마련이지. 부활할 수 있다고 해서 죽음이 주는 충격이 약해질 줄 안다면 큰 오산이다, 이 자식아. 어디 한번 제대로 고생 좀 해 봐라.’
하지만 오직 튜토리얼을 빨리 끝내고 그에 따르는 보상을 받는 것만이 목적인 도진이 중년 남성의 뜨거운 눈빛에 관심을 보일 리 만무한 일.
[퀘스트]
시련의 숲
등급: 튜토리얼
[시련의 숲을 통과하자!]
목표: 시련의 숲 무사히 통과
보상: 경험치, 골드, 초보자용 방어구 세트, 추천장
도진은 퀘스트 창이 뜨자마자 털이 수북한 중년 교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포탈을 향해 일직선으로 뛰고 있었다.
“참고로 말해 주자면 내가 시련의 숲으로 보낸 훈련생들 대부분이 평균 여덟 번의 재도전을 했고, 제일 빨랐던 놈도 세 번은 재도전을 했다. 즉, 최소한 세 번은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경험을…….”
그 움직임이 얼마나 거침없었는지 도진을 겁주기 위해 시동을 걸던 크루거가 당황하여 사레가 들릴 정도였다.
“켁, 케헥!”
크루거가 기침을 하는 사이 도진은 이미 포탈로 뛰어들고 있었다.
“뭐,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아무리 살아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해도 그렇지.
크루거는 맹세코 저렇게 생각 없이 포탈로 뛰어드는 미친놈을 본 적이 없었다.
포탈 앞에서 긴장을 하든,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우든, 아니면 교관인 크루거에게 무언가 정보라도 구하려고 하든 하는 게 대부분인데…….
“겁이라는 게 없는 놈인가……?”
아니면 단순히 정신줄을 놓은 놈인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크루거는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 * *
시련의 숲 입구에 마련된 안전 구역.
그곳에 도착한 도진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유저들이었다.
“시련의 숲 퀘스트 같이하실 분. 허수아비 보상으로 검방 받으신 분이나 회복용 스태프 받으신 분 환영합니다.”
“시련의 숲 최소 3트 이상 해 보신 레벨 6 이상 반숙 파티원 구합니다.”
“시련의 숲 무조건 깰 파티원 구합니다. 포탈 보이는 곳까지 진행 경험 있으신 분이나 레벨작 8까지 하신 분만.”
그들은 시련의 숲을 함께 통과할 파티원을 구하고 있었다.
쭈뼛거리며 그 근처를 서성이는 유저들도 보였다.
경험 있는 유저들에게 묻어 가거나 그게 안 되면 정보라도 얻으려는 자들이었다.
이미 시련의 숲을 겪어 본 자들은 어려운 것을 알아서 조심스럽고, 처음 이곳에 들어와 아직 겪어 보지 못한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기에 조심스럽다.
그런 유저들에게서 눈을 돌린 도진은 앞에 펼쳐진 울창한 숲을 살폈다.
안전 구역이 끝나는 지점. 숲 입구에 슬라임들이 몰려 있는 게 보였다.
시련의 숲에 발을 들이는 유저들을 기다리며 어슬렁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안전 구역 밖에 있는 사람이 없어 얌전하지만, 안전 구역을 벗어나 시련의 숲에 발을 들이는 순간 달려들 터였다.
‘입구에 돌아다니는 슬라임만 해도 대충 15마리라… 시련의 숲답네.’
시련의 숲의 별명은 뉴비 믹서기였다.
퀘스트에 도전하는 뉴비들이 하도 갈려 나가는 통에 붙은 별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허수아비만 봐도 알 수 있듯 LOST에서는 초보자용 몬스터라 해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그런데 시련의 숲에는 몬스터들이 꽤나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허수아비 퀘스트 보상으로 겨우 레벨 3을 찍고 넘어온 유저로서는 연속적인 전투에 지쳐 죽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
다만 쉬운 공략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퀘스트용 힐링 포션이 떨어질 때까지 사냥을 하고서 시작 지점으로 돌아와서 퀘스트를 포기한 뒤 재입장하는, 소위 리셋작을 하면 비교적 쉽게 클리어가 가능했다.
그러나 도진은 그런 방법으로 튜토리얼을 마무리할 생각이 없었다.
‘무조건 한 번에 깬다.’
시련의 숲에 도전하여 클리어할 수 있는 기회는 모든 유저에게 단 한 번만 주어진다.
도진은 두 번 다시 도전할 기회가 없을 콘텐츠를 그런 재미없는 방법으로 넘겨 버릴 생각이 없었다.
어려운 난이도에 정면으로 부딪혀 깨부쉈을 때의 짜릿함.
그걸 느낄 기회를 낭비하는 건 멍청한 짓이라는 게 도진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두 번짼데… 그런데도 한 번에 못 깨면 게임 못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게임 못한다는 소리는 남은 물론이고 자신에게조차 듣기 싫은 마음.
그것이 바로 진정한 게이머의 마음가짐이 아니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각오를 다진 도진은 비장하게 메이스를 어깨에 걸치고 시련의 숲을 향해 달렸다.
말이 시련의 숲을 향해서지 남들이 보기에는 입구에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을 향해 육탄돌격을 하는 꼴이었다.
쉽게 말해, 그냥 미친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