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미간을 찌푸리는 할아버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는 민재 오빠가 마음에 안 드세요?”
“내 앞에서는 다들 고개를 숙이는데 그놈은 너무 뻣뻣해.”
“보기 나름이잖아요. 저는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이 보기 좋던데요.”
“너 설마 그놈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지?”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를 보며 대답하였다.
“마음 있으면 안 돼요?”
황규천도 처음에는 그놈이 마음에 들어 손녀와 이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놈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생각해 보니 그놈은 자신과는 성향이 다른 놈이었다. 결과는 뻔하였다.
자신은 손녀가 행복하기만을 바라지 불행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람은 끼리끼리 만나야 하는 거다.
“그놈은 우리와는 다른 놈이야. 상처받기 전에 마음 정리해.”
“사람이 다를 게 뭐가 있어요? 서로 맞추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네가 인생을 많이 살지 않아서 그래.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데. 내 눈에는 결과가 보여.”
“할아버지 그래서 말인데 우리도 이제는 합법적인 제도권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때요? 이제는 사채업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세상에 나가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사채업이 뭐 어때서? 우리가 서민 등 꼴 빼먹는 사채가 아니잖아. 지금까지 잘해 왔어.”
“세상이 변해 가고 있어요. 정부에서 대부업을 활성화하려고 하더라고요. 또 상호신용금고법을 상호저축은행법으로 개정하려는 움직임도 있어요. 우리도 대부업 또는 상호 저축 은행을 하여 제도권으로 들어가는 변신이 필요해요. 언제까지 그늘 속에 숨어 있을 거예요.”
“그놈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니에요. 그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세상은 변하는데 그 변화에 맞추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문다면 도태되는 거예요. 제도권으로 나가면 아빠도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도 있어요.”
“그놈이 퍽이나 그러겠다.”
“제가 지난번에 저의 생각을 말하니 관심을 보였어요. 아빠는 어디 가서 남들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사업을 원하시는 거예요. 사채업을 한다는 것보다 상호 신용 금고를 한다고 해 보세요. 보는 눈이 달라질 거예요.”
황규천도 세상이 변하고 있고 언제까지 사채업만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쩌면 자신이 손녀에게 떳떳한 사업을 물려줄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살아 봤자 얼마나 산다고 고집을 부릴 이유는 없었다.
“상호신용금고랑 상호저축은행이랑 뭐가 다른 거야?”
관심을 보이는 할아버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잘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자신이 이 일이 좋아서 하지만 지금이야 할아버지가 계시니 어느 정도 도움을 주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신의 힘만으로 해야 하는데 여자가 사채업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특별히 다를 것은 없어요. 이름만 바꾼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상호신용금고를 하게 되면 좋은 점이 뭐냐면…….”
한동안 할아버지를 설득하였다.
“급하게 결정할 필요는 없고 천천히 생각해 보자꾸나.”
급하게 하다 보면 뭐든지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천천히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자세히 알아보면 된다.
“알았어요.”
“그놈은 언제 어페럴 찾아간다고 해?”
“글쎄요? 언제일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민재 오빠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무슨 생각?”
“오빠가 진성 무역을 먼저 인수하려는 것 같더라고요. 저한테 DS 자산 운용사를 소개해 달라고 했어요.”
“진성 어페럴 인수한 것처럼 사모 펀드를 조성하겠다는 거야?”
“그렇겠죠. 그것밖에는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놈이 돈이나 있어?”
“있으니까 인수하려고 하겠죠.”
황규천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신이 알아본 그놈은 현재 자금 여유가 없었다. 보유한 오션 주식을 매각하면 자본이 생기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인수할 이유가 없었다.
“어떻게 마련한다는 말은 없었어?”
“네. 제가 보니까 자본은 전혀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더라고요.”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DS 자산 운용사를 소개해 주면 알 수도 있을 거예요.”
“알았어. 내가 신 사장에게 말해 놓을게.”
“네. 그럼 저는 가 볼게요.”
“그래.”
* * *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고 있는데 40대 중반의 남자와 20대 중반의 덩치인 남자가 들어왔다.
40대 남자는 정장을 입었지만, 남들이 잘 입지 않는 자주색 정장에 머리는 기름칠로 떡칠하여 올백으로 넘겼고 손목에는 노란 금팔찌까지 차고 있어 한눈에 봐도 나 한가락 하는 놈이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
20대 덩치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커피숍 하면서 저런 사람들 처음 봤다. 말로만 듣던 조폭들인가? 조폭이 여기는 왜?
남자들이 커피숍을 잠시 둘러보다가 주문대로 가자 범상치 않은 옷차림에 늦으면 난리 날 것 같았는지 강성중이 얼른 주문대로 달려갔다.
“커피 둘 주소.”
“어떤 커피로 드립니까?”
“아무거나 주소. 이 커피숍에서 제일 맛있는 거로 주소.”
“네.”
강성중이 얼른 커피를 내려 주었다.
지금까지 강성중이 저렇게 긴장하는 거 처음 봤다. 배상도가 있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배상도도 심상치 않은 남자들의 기세에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도록 긴장한 채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고 치지 말고 그냥 가라.
커피를 한 모금 마신 40대 남자가 물었다.
“여기 사장 어디 있소?”
남자의 말에 강성중이 긴장한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내가 나섰다.
“제가 사장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내 말에 남자가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자 배상도가 얼른 일어났다.
남자가 내 앞에 다가오더니 갑자기 구십 도로 허리를 굽히면 인사하였다. 남들이 보면 내가 조폭 두목인 줄 알겠다.
갑작스러운 남자의 행동에 배상도도 강성중도 놀란 눈을 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DS 자산 운용 사장 신동환입니다. 회장님께서 사장님을 찾아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뭐? 이 사람이 DS 자산 운용 사장이라고? 딱 보기에 조폭 같은데. 이거 잘못 부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이 사채업을 하기에 휘하에 어깨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건 힘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닌데.
황규희 잘못 건들면 아작 나겠다.
근데 DS 자산 운용사 사장이 진성 어페럴 인수를 진행했는데.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여기까지 왔는데 겉모습만 보고 그냥 가라고 할 수는 없어 일단 이야기는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진민재입니다. 앉으시죠.”
“네.”
조금 전까지 거들먹거리던 행동은 어디 가고 조신하게 앉았다. 나도 앉으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잠시만요.”
“네. 천천히 통화하십시오.”
“진민재입니다.”
(오빠! 나 규희야. 오늘 DS 자산 운용 사장 신동환 사장이 갈 거야.)
“잠시만.”
바로 앞에서 통화할 수 없어 커피숍 밖으로 나갔다.
“지금 왔어.”
(놀랐지? 그럴 거 같아서 전화한 건데 조금 늦었네. 보기에는 저래도 연세대 경영학과 출신이고 실력이 뛰어나. 그래서 할아버지가 DS 자산 운용 사장을 맡긴 거야. 그러니까 믿고 맡겨도 돼.)
“정말 믿고 맡겨도 되는 거야? 보기에는 영 믿음이 안 가서.”
(사람 겉모습 보고 판단하지 마. 실력 없으면 오빠한테 소개해 주지도 않았어.)
규희가 저렇게 말하는데 거부할 수는 없지.
“알았어.”
(잘해 봐.)
“고마워.”
전화를 끊고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로 오신 줄은 아시죠?”
“압니다. 진성 무역을 인수하시려는 것이 아닙니까?”
“맞아요. 진성 어페럴 인수할 때처럼 사모 펀드를 조성해서 진성 무역을 인수해 주셨으면 해서요.”
“제가 진성그룹하고 인연이 있는지 악연이 있는지 자꾸 엮기는 것 같습니다. 지금 진성 무역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인수하는 데는 문제 없을 겁니다.”
“지금 진성 무역이 매우 힘든 상황이거든요. 곧 부도가 날 것 같아요.”
“그럼 더 쉽습니다. 부도 나서 파산할 바에는 조금이라도 받고 매각하는 것이 더 이익이니까요. 진성 어페럴도 그래서 쉽게 인수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현재 진성그룹에 남아 있는 계열사가 금속, 화장품, 유통, 무역 네 개예요. 진성 무역을 인수하면서 다른 계열사도 인수할 수 있으면 인수해 주셨으면 하고요.”
“진성 무역 포함해서 한 곳 계열사를 더 인수하시겠다는 겁니까?”
“한 곳이어도 되고 가능하면 더 인수해도 좋습니다.”
“다른 계열사들도 상황이 좋지 않은 겁니까?”
“네. 제가 진성 계열사 상황 정리한 게 있는데 드릴게요. 잠시만요.”
“네.”
박도진에게 받았던 자료를 건넸다.
“여기 있어요.”
“지금 봐도 됩니까?”
“네. 보세요.”
자료를 받아 한동안 보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계열사들이 하나같이 매우 힘든 상황이네요. 아무리 IMF 시기라고 그렇지 왜 이런 상황까지 오게 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자료를 보니 1~2년 안에 진성그룹은 반드시 무너질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다른 계열사도 인수 가능할까요?”
“자료를 보면 다른 곳은 몰라도 진성 금속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길어야 5개월이고 짧으면 3개월 안에 파산할 겁니다. 진성 무역하고 진성 금속을 먼저 인수할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화장품도 위험하기는 한데.
“그럼 일단 그렇게 진행해 주시고 다른 계열사도 인수할 수 있으면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진성그룹하고는 어떤 관계입니까? 진성 회장하고 성씨도 같고 진성그룹 계열사만을 인수하기를 원하는 것을 보니 특별한 관계인 것 같아서 물어보는 겁니다.”
이런 거까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알아야 하나요?”
싸늘한 내 말에 당황하며 얼른 대답하였다.
“그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인수하실 때 제가 뒤에 있다는 것은 절대 비밀로 해야 합니다.”
“당연합니다. 우리 회사는 투자자의 신분을 철저히 보호합니다.”
“그건 마음에 드네요.”
“그리고 진성 무역하고 진성 금속 거기다 다른 계열사까지 인수하려면 자금이 많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제가 사장님이 동원할 수 있는 자금 규모를 알아야 인수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당장 7,800만 달러 정도는 동원할 수 있고 2~3개월 후에는 더 동원할 수 있어요. 그 정도면 되나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계열사들이 워낙 부실하고 부채 규모가 커서 부채를 안고 인수하면 실제 인수 금액은 많이 들지 않을 겁니다.”
“그 부채 규모를 다 안고 가는 것보다 채권단하고 협의해서 부채를 줄일 수는 있을까요?”
“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부채가 은행권이라면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부채가 거래 기업들이고 은행권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거래 기업들도 부도가 나 전부 날리는 것보다는 조금 덜 받더라도 받는 것이 나을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협의는 해 보겠지만 요즘 다들 힘든 시기라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알았어요. 투자금 바로 보내드릴 테니 바로 진행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DS 자산 운용 사장 신동환 사장과 남자가 가자 강성중이 얼른 나에게 다가왔다.
“저 사람들 누굽니까?”
“DS 자산 운용사 사장이야.”
“조직들이 만든 회사입니까?”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저 사람들하고 무슨 일을 하시는 겁니까?”
“좀 의뢰할 게 있어서.”
“의뢰할 게 있더라도 저런 사람들하고는 연관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의뢰 취소하십시오.”
“내가 알아서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