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그러든가.”
“알았어. 이렇게 말하니까 왠지 오빠하고 더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네.”
친화력 하나는 끝내주네. 환하게 짓고 있는 미소는 진짜 미소일까? 거짓 미소일까? 저 미소에 넘어갈 내가 아니지만 궁금하였다.
신상철이 반의반만이라도 닮으면 좋을 텐데.
“용건이 있어서 온 게 아니야? 이제 말해도 되지 않나?”
“뭐가 그리 급해? 시간은 많은데.”
“난 일해야 하거든.”
“아! 그렇지. 나만 생각했네. 오빠는 혼자서 다니지?”
“그렇지. 대부분 혼자서 다니지 않나?”
“일반인이야 그렇지만 오빠는 이제 일반인이 아니지. 오빠도 사업하고 오션이 계속 성장하다 보면 날 파리들이 꼬일 수 있어. 지금이야 오빠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않지만 계속 한국에 있다 보면 조만간에 알려질 거야. 할아버지가 걱정이 많으셔. 한 분밖에 없는 친한 형님 손자분이 위험할 수 있으니까.”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어르신이 하는 사채업이라면 위험할 수가 있겠지만 난 일반적인 사업이라 위험할 것은 없는데.
“나보다는 네가 더 위험할 것 같은데.”
“그렇기는 하지. 근데 난 경호원들이 있거든. 지금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 그래서 말인데 오빠도 경호원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지금까지 딱히 필요하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가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필요하면 나중에 구할게.”
“사실은 할아버지가 오빠 걱정해서 경호원 한 명 추천했거든. 그래서 내가 온 거야. 지금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한번 볼래?”
그럼 그렇지. 단순히 궁금해서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겠지. 목적이 있으니까 왔겠지.
“글쎄? 난 집하고 여기만 주로 왔다 갔다 해서 경호원까지는 필요하지 않은데. 어르신께 마음만 감사하게 받겠다고 전해줘.”
“꼭 경호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비서 한 명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거야. 어디 갈 때 운전도 하고 심부름도 시킬 수 있잖아.”
그러고 보니 그것도 괜찮았다.
미국에서는 운전하기 편한데 한국은 운전하기가 좀 힘들고 주차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운전하기보다는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자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한번 보고 결정하든가? 실력 있는 자라 든든할 거야. 들어오라고 한다.”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핸드폰을 들었다.
“아니, 부르지 마. 난 생각이 없어. 어르신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줘.”
“왜? 할아버지가 고심 끝에 생각한 건데.”
호의를 베푸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기는 했지만 내가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남의 호의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나랑 같이 다니게 되면 내가 하는 일이 전부 어르신께 들어갈 염려도 있고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르신께는 할아버지 말씀대로 나중에 한번 크게 도움받을 때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도움 청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르신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난 지금까지 혼자 다녀서 혼자가 편하거든.”
황규희는 진민재가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거절하는데 강하게 계속 요구하다 보면 기분만 상하기에 여기서 물러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오늘은 첫인사하는 날이고 말도 편하게 놓았기에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하였다.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서둘 필요는 없었다.
“알았어. 오빠 편한 대로 해.”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황규희가 갔다.
“누구예요?”
“아는 사람이야.”
“예쁜데요.”
“예쁜 장미에 가시가 있다는 거 몰라? 찔릴 수도 있어. 조심해야 해.”
‘특히 저 여자는.’
마음속으로 말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비서 겸 경호원이 있으면 편할 것 같았다. 어떻게 구해야 하지? 염중섭 대표한테 부탁해야 하나?
아! HQ 컨설턴트 정하나 실장에게 부탁하면 되겠다. 근데 그 회사에서 경호원도 관리하나? 물어보면 되지.
핸드폰을 들었다.
(정하나 실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진민재입니다.”
(고문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을까요?)
“뭐 하나 물어보게요. HQ 컨설턴트에서 경호원도 관리하시나요?”
(경호원 필요하세요?)
“운전기사 겸 비서 겸 필요할 것 같아서요.”
(필요하실 거예요. 우리 회사에서는 관리하지 않는데 고문님이 원하시니 제가 경호원 관리하는 회사에 알아봐 줄게요.)
“연락처 알려주시면 제가 해도 되는데요.”
(제가 하는 게 더 좋을 거예요. 원하시는 조건 같은 것이 있나요?)
“20대였으면 좋겠고 인상이 사납지 않고 실력 있는 분이었으면 해요.”
(알았어요. 제가 알아보고 연락 드릴게요.)
“고마워요.”
(고마우시면 나중에 밥 사세요.)
“그럴게요.”
* * *
집으로 돌아온 황규희는 할아버지가 계시는 서재로 바로 갔다.
“할아버지! 다녀왔어요.”
손녀가 앉자 바로 물었다.
“그놈은 만났어?”
“네.”
“표정이 밝은 것이 잘됐나 보네.”
“아니요. 보기 좋게 거절당했어요.”
“괜찮아?”
“예상했던 일인데요. 저라도 거절했을 거예요.”
“근데 뻔히 알면서 왜 그런 제안을 한 거야?”
“핑곗거리가 필요해서요. 찾아가는데 그냥 갈 수는 없잖아요.”
“그냥 가면 어때서?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인사하러 가는 건데.”
“그래도 인사는 잘했어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진민재하고 더 친해져야죠. 이왕이면 진민재가 하는 사업에 투자하면 좋을 것 같은데 들어갈 틈이 없네요.”
“사업은 자본이 많을수록 좋은 거야. 투자한다고 하면 반길걸.”
“아니에요. 제가 보기에는 지금 오션은 투자가 필요하지 않아요.”
말하면서 미소 짓는 손녀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수가 있는 거야?”
“오션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지만, 진성은 뻥 뚫려 있거든요. 진성을 공략하면 될 것 같아요.”
“망할 회사를 공략한다고? 손해만 볼 텐데.”
고개를 저었다.
“사모 펀드처럼 기업을 인수해 잘 키워 재매각하자는 거예요. 뜻대로 안 되더라도 나중에 손해 보지 않을 정도로 진민재에게 넘기면 되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할아버지! 진성 어페럴 우리가 인수하는 것은 어때요? 또 진성 리조트는 알짜 기업이고 할아버지 지분도 많으니까 리조트도 같이 인수하면 좋을 것 같아요.”
“다시 자기 손으로 찾겠다고 했는데 그놈이 반발하지 않겠어? 괜히 역효과만 나는 게 아닐까?”
“그럴 일은 없어요. 우리가 영원히 가질 것은 아니잖아요. 나중에 넘기면 되는 거죠. 오히려 우리가 인수하면 더 쉽게 찾을 수 있으니 진민재에게는 도움이 될 거예요.”
“진성 건설도 어렵다고 하던데 이왕이면 진성 어페럴보다 진성 건설도 좋지 않아?”
“진성 건설은 제가 관리하기 벅차요. 제가 관리할 수 있는 어페럴이 좋거든요.”
“사람 쓰면 되지. 요즘 능력 있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제 손으로 키워야 나중에 진민재에게 떳떳하잖아요.”
“굳이 그럴 필요 있어? 너 그놈에게 진짜 마음이 있는 거야?”
“아직은 몰라요. 저의 짝은 제 조건에 충족해야 하거든요. 그런 인물인지 아닌지는 아직 몰라요. 좀 더 지켜봐야죠.”
* * *
한 남자가 들어오는 순간 바로 정하나 실장에게 부탁한 경호원이 저 남자라고 직감하였다.
20대 후반으로 보였고 키는 180 정도 되고 어깨가 쫙 벌어진 것이 체격도 좋았고 평범한 인상이었다.
내가 말한 조건은 다 갖추어져 첫인상은 마음에 들었다.
“사장님 뵈러 왔습니다.”
강성중이 나를 손으로 가리키었다.
“저분입니다.”
남자가 내 앞으로 걸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배상도입니다.”
“안녕하세요? 진민재입니다. 앉으시죠.”
“네.”
자리에 앉자 배상도가 이력서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제 이력서입니다.”
이력서를 들어서 보았다.
학력은 고졸이고 나이는 28세에 군대는 특전사로 입대했다가 707 특전대에서 전역하고 격투기 선수를 하다가 그만두고 분식집에서 일한 것이 전부였다.
격투기 선수까지 한 것을 보면 실력은 좋은 것 같은데.
“격투기는 왜 그만둔 건가요?”
“경기 중에 작은 부상을 입어서 잠시 쉬었는데 쉬면서 생각해 보니 격투기는 제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비록 경기이기는 하지만 사람을 때리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선수를 그만두고 바로 분식집을 한 겁니까?”
“제가 한 것은 아니고 부모님이 하시는 분식집에서 도와드린 건데 IMF로 인해 장사도 잘 안 되고 부모님이 남자가 할 일이 없어서 분식집에서 일하냐고 다른 일 찾아보라고 해서 이번에 경호원에 지원하게 된 겁니다. 제가 특별히 배운 기술도 없고 학력도 고졸이라 할 수 있는 게 한정적이었습니다. 군 선배의 추천으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운전은 할 줄 압니까?”
“네. 할 줄 압니다. 1종 보통입니다.”
젊은 사람이 창피해서라도 하지 않을 만도 한데 부모님이 하시는 분식집에서 일을 도와드린 것도 그렇고 사람 때리는 격투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니 인성은 제대로 된 것 같았다. 힘이 있다고 폭력을 즐기는 사람도 있는데.
“그리고…….”
이것저것 질문했는데 마음에 들었다.
“경호원이기는 하지만 특별히 경호원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운전도 하고 심부름도 해야 합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내일부터 일할 수 있습니까?”
“네. 가능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근데 여기 커피숍이 제 직장입니까?”
“혹시 오션 압니까?”
“네. 압니다.”
“배상도 씨는 오션에 취업하는 겁니다. 제가 오션을 개발한 개발자이며 오션의 고문입니다. 다만 제가 여기서 주로 일하기에 대부분 이곳에 있을 겁니다.”
놀라는 얼굴을 하였다.
“제가 오션에 입사하는 겁니까?”
어딘지도 모르고 왔나?
“네. 맞아요. 말 듣고 온 게 아닌가요?”
“좋은 곳이라고만 들었지 오션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다른 기업보다 조건은 좋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오션 개발자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배상도가 가자 게임하던 강성중이 다가와 물었다.
“사장님! 포스가 장난 아닌데 누구예요?”
“내 경호원 겸 비서야. 내일부터 함께 있을 거야.”
“내일부터 당장요?”
“왜 겁나?”
“저분한테는 까불지 말아야겠어요.”
“그 정도는 아니야.”
* * *
배상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니까 편해서 좋았다. 진작 이럴걸.
배상도가 출근한 지 3일째인데 성격이 과묵하여 말이 별로 없었다. 커피숍에서 하루 종일 있다 보니 많이 심심해하는 것 같은데 특별히 내색하지는 않았다.
게임에 관심이 있는지 강성중이 하는 게임을 옆에서 많이 보기는 하였지만, 경호원 신분을 의식해서인지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컴퓨터 한 대 더 놔야 하나?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보는 나도 답답하였다. 게임 테스트라도 하라고 할까?
“배 대리님!”
“네. 고문님!”
신입이기는 하지만 나랑 같이 다녀야 하기에 대리라 부르기로 하였다. 실제 대리 직급은 아니고.
“복장 굳이 정장 안 입어도 돼요. 내일부터 편하게 입고 오세요.”
“아닙니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불편하잖아요.”
“사실 부모님이 제가 정장 입고 번듯한 회사에 출근하는 것을 보며 행복해하십니다. 근데 제가 편하게 입고 나오면 회사에 출근하는 것 같지 않게 느끼실 겁니다.”
효자네. 부모님 생각도 다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