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오늘도 손병수가 도쿄 관광을 해 주어 구경하다가 밤에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현관 안으로 들어오자 소파에 앉아 있던 고진욱이 일어서며 물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네. 먹었습니다.”
“매일 밖에서 사 먹었다면서 집에 와서 드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러게요. 시간이 너무 늦어 먹었습니다.”
“잠시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좋습니다. 올라가서 옷 좀 갈아입고 내려오겠습니다.”
“그러세요.”
이 층 내방에 올라가 손을 씻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오자 거실 탁자에 차 두 잔이 놓여있었다.
향이 좋았다.
“향이 좋은데 이게 무슨 차입니까?”
“귤차입니다. 겨울에는 이만한 차가 없습니다. 드셔 보세요.”
“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귤 맛이 느껴졌다.
“좋은데요.”
“전 겨울에는 귤차를 즐겨 마십니다. 오늘은 어디를 다녀오신 겁니까?”
“우에노 공원과 황거라는 곳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은 봄에 가면 더 좋습니다.”
“어쩔 수 없죠.”
차를 한 모금 마신 고진욱이 나를 보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차 한잔하자고 한 이유가 진민재 씨를 보면 저의 젊은 날이 떠오릅니다. 진민재 씨가 어떤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저번에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니 순탄한 삶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라도 제 이야기를 듣고 힘을 냈으면 하는 의미이니 오해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말하는 뉘앙스를 보니 뭔가 오해하는 것 같았다.
부모가 없다고 했고 집밥을 먹은 지가 몇 년이나 되었다고 하니 막장 인생을 살며 방황하다가 일본에 놀러 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말 그대로 힘을 내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알겠습니다.”
“알다시피 저는 재일한국인입니다.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이 받는 차별은 알게 모르게 심합니다. 저 같은 경우 일본 명문대학교인 도쿄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저를 받아 주는 일본 기업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같은 과 친구들은 소니 등 일본 대기업에 쉽게 취직했지만 저는 면접조차 기회가 없어서 한동안 방황하며 좌절하다가 중소기업인 전자회사에 겨우 취직하였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다니다가 MSS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구인 광고를 보고 지원하여 합격했습니다. 미국 회사라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서 쉽게 취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손 회장님을 만나 소프트 뱅코에도 다니기도 했습니다.”
말을 마치고는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MSS도 다니고 소프트 뱅코도 다녔기에 보기에는 그럴듯한 인생을 산 것 같지만 제가 겪었던 차별과 좌절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겁니다. 제 아들과 딸이 커 가자 이런 고통을 물려 주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귀화도 하였습니다. 저 혼자라면 절대 귀화하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로서 자식들에게 제가 겪은 고통을 똑같이 물려줄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무심하지 않은지 운 좋게 중소기업에 취직하여 겨우 마음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지금은 매우 힘들지만 분명 살길은 생깁니다. 작은 것에라도 마음을 준다면 그게 인생을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너무 큰 것을 너무 많은 것을 원하지 말고 현실에 맞게 살다 보면 분명 기회가 올 겁니다. 꼭 이 말을 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고진욱이 젊었을 때인 70년대는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꽤 심했을 것이다.
내가 직접 겪은 것은 아니지만 대략 어떨지 이해가 갔다.
“말로만 들어도 재일한국인으로 일본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겠습니다. 어떤 뜻으로 말씀하시는지도 잘 알고 저를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 걱정하실 만큼 나약하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강하고 현재 위치도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이며 큰 야망도 가지고 있습니다.”
내 말에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진민재 씨는 무슨 일을 합니까? 1월에 일본에 놀러 온 것을 보면 대학생 같기도 하고 직업이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더 오해하기 전에 사실대로 말하자.
“혹시 오션 아십니까?”
“제가 한동안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서 자세히는 모릅니다. 다만 MSS에 다니는 전 직장 동료가 MSS에서 야심 차게 개발한 MSN이 오션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한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사모님 건강 간호하느라 세상일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겠지.
“제가 오션 개발자입니다.”
놀라 두 눈이 커졌다.
“네? 정말 오션 개발자라는 겁니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혼자서 개발했습니다. 아울러 미국에 법인도 설립했고 지난 10월에 나스닥에 상장하여 갑부의 대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민망하다는 얼굴을 하였다.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주제넘게 나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좋은 말씀이었습니다. 가슴에 깊게 새기겠습니다.”
“어쩐지 진민재 씨를 보면 밝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어서 사실 매치가 잘 안 되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이 자신의 치부를 덮으려고 일부러 꾸민 모습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근데 지난번 식사할 때 말씀하신 것은 정말입니까?”
“네. 맞습니다. 저도 보기에는 그럴듯한 인생을 살아온 것 같았지만 어린 나이 때부터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걸 이겨 내고 지금의 제가 있는 거고요.”
“대단하십니다. 저도 젊었을 때 힘든 시기가 있어서 그게 어떤 것인지 잘 아는데 어릴 때부터 겪으시고 지금의 위치에 올라섰다니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이왕 말 나온 김에 고진욱은 모르겠지만 나 혼자 면접을 보자.
“MSS와 소프트 뱅코에 다니셨다고 하여 제가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앞으로 인터넷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인터넷 말입니까? 남들이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인터넷이 세상에 나왔을 때 저는 일종의 혁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구에는 수백 개의 국가가 있고 비행기로 서로 이동하고 전화로 서로 통화를 하지만 인터넷은 자기 방에 앉아서 세계를 하나로 통합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즉,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인터넷으로 소통이 가능하고 정보도 주고받는 등 우리 일상생활에 깊게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오션과 같은 검색 프로그램이 개발된 것이고 앞으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인터넷 관련 프로그램들이 많이 개발되어 우리가 사용하게 될 것 같습니다.”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정확히 인터넷 미래를 보고 있었다. 통찰력은 있네.
“좋은 말씀입니다. 그럼 오션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제가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손병수와 함께 지난번 손정우 회장과 식사했던 고급 식당에 또 왔다.
그때는 저녁때라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낮이라 제대로 볼 수가 있었다.
정원에 몇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지만, 겨울이라 대부분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만 있어 좀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도 봄이나 여름에 오면 제법 운치가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손 회장님 안 오셨죠?”
“네. 그렇습니다. 15분 후에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럼 여기 정원 좀 둘러보죠.”
“알겠습니다.”
천천히 정원을 거닐었다.
연못 앞에 멈추고 연못 안을 바라보았다. 연못은 크지는 않았지만 작지도 않았고 크고 작은 잉어들이 많이 보였다.
연못 옆에 정자 하나 만들어 놓으면 금상첨화일 텐데.
운치가 있어 이런 곳에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문제는 여름에는 벌레가 많아져 집안에까지 들어온다는 거다.
벌레는 너무 싫었다.
“회장님 방금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네. 가시죠.”
가는 길에 손 회장을 만나 같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이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이런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괜찮더라고요.”
“저도 나중에 은퇴하면 시골에 내려가서 이렇게 꾸며 놓고 살 생각입니다.”
“굳이 시골까지 갈 필요가 있나요? 여길 인수해서 사셔도 될 것 같은데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혹하는 얼굴이었다.
“그렇기는 합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난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손 회장은 IT 버블로 인해 재산이 급격히 상승하자 2000년도에 진짜 이 식당을 매입하여 손님 접대용 별장으로 사용하였다.
행동력과 결정력 하나는 끝내주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오늘도 맛있게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진짜 여기 음식 맛은 좋네요.”
“잘 드시는 모습을 보니 제가 다 흐뭇합니다. 일본에 오시면 항상 이곳에서 대접하겠습니다.”
“계속 폐를 끼칠 수는 없죠. 마음으로만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손 회장이 물었다.
“곧 가신다고 하시던데 결정은 하신 겁니까?”
“네.”
“누구로 결정하신 거니까?”
J 맨파워에서 두 명을 더 추천해 줘 총 3명을 만났다.
J 맨파워에서 자신할 만큼 하나같이 인재들이어서 마음 같아서는 전부 다 고용하고 싶은데 티오는 한 명이라 인터뷰한 3명과 고진욱을 놓고 고민을 많이 하였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나의 최종 결정은 고진욱이었다.
고진욱도 이야기를 해 보니 3명과 다를 바 없이 능력이 뛰어났고 그동안 민박집에 머물면서 지켜본 결과 인성도 뛰어났다.
부족하다면 깨끗이 포기하겠지만 이왕이면 재일한국인이 나에게는 더 편하였다.
“고진욱입니다.”
손 회장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웬만해서는 사람을 잘 소개해 주지 않는데 그 친구는 정말 능력도 있고 인물입니다. 그래서 소개해 드린 겁니다. 오죽하면 제가 스카우트했겠습니까?”
“저 때문에 그런 인재를 놓쳐서 어떡해요?”
“그 친구는 소프트 뱅코보다는 오션에 더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그 친구를 아끼는 만큼 어울리는 자리에 가도록 하는 것이 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그 친구가 받아들인 겁니까?”
“아직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이나 내일 말하려고요. 근데 사모님 때문에 제안을 받아들일지 모르겠네요.”
“받아들일 겁니다. 와이프도 거의 건강을 찾았고 남편이 자기 때문에 집에만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그전부터 일을 알아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만약 거절하면 와이프에게 말하면 됩니다. 그 친구가 공처가라 와이프 말을 아주 잘 듣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공처가 같습니다. 사모님한테 꼼짝을 못하시더라고요. 그래도 그 모습이 저는 보기 좋았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성격이라 그렇게 못합니다. 고문님도 나중에 결혼하시면 공처가가 될 것 같습니다.”
공처가는 아니지만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는데.
“글쎄요? 어떻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 다음 달 2월 15일에 한국 갑니다. 한국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사업 때문에 오시는 거예요?”
“아닙니다. 제가 김도중 대통령 당선인에게 뵙고 싶다고 요청했더니 초청해 주어 가게 되었습니다.”
“대통령 당선인을 뵙고 싶다고 요청했다고요? 왜요?”
“한국이 지금 IMF를 맞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대통령 당선인으로서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시급한 문제들을 건의하고 싶다고 하였고 이를 통해 IMF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