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일본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였다.
일본은 난생처음인데 공항 안내판에 걸린 일본어 빼고는 한국과 비슷하여 위화감 같은 것은 없었다.
입국 수속을 무사히 마치고 출국장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쪽에 내 이름을 영어로 쓴 종이를 들고 있는 젊은 남자가 보여 그쪽으로 걸어가자 그 남자도 나를 보고서는 내 앞으로 뛰어왔다.
“혹시 진민재 씨 되십니까?”
영어로 말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한국말이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알아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네. 제가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카즈마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제가 재일한국인입니다. 한국말이 좀 서툽니다. 한국 이름은 손병수입니다”
“혹시…….”
말을 끝내기 전에 대답하였다.
“손 회장님하고는 아무 관계가 아닙니다. 성만 같은 겁니다.”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나 보네. 그러니 말하기도 전에 알지.
“오해 많이 받겠어요.”
“좀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 이름을 말할 때는 카즈마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내 캐리어를 잡았다.
“가시지요. 숙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카즈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도쿄 외곽에 있는 어느 한 2층 주택 앞에 정차하였다.
“이 집입니다.”
처음에 호텔로 숙소를 정하려고 했는데 손정우 회장이 자기 집에서 묵으라고 하여 부담되어 거절했더니만 호텔보다는 민박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여 본의 아니게 민박을 하게 되었다.
민박집이 재일한국인이고 식사도 제공한다고 하여 15일 정도 머물 거라 오케이 했었다.
차에서 내려 집을 둘러보았다.
일본 집들은 작고 나무집이라고 들었는데 이 집은 좀 크면서 벽돌집이었다. 지내기에는 나쁘지 않네.
차가 도착한 소리를 들었는지 집에서 중년의 부부가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고진욱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부부는 닮는다고 하더니만 둘 다 인상이 좋았다.
“안녕하세요? 진민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네.”
2층에 있는 방을 안내하여 들어왔다.
“여기입니다. 방 안에 화장실도 있어 편하실 겁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고진욱이 나가자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침대 하나에 옷장 하나뿐이었고 방이 생각보다 넓어 답답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창가로 가서 창밖을 보자 집 뒤로 나무들이 보였다.
풍경도 괜찮네. 답답한 호텔보다는 훨씬 좋네. 산책도 할 수 있고.
대충 캐리어를 정리하고 나왔다.
“벌써 나가시는 겁니까?”
“네. 약속이 있어서요.”
“저녁은 어떻게 합니까?”
“먹고 들어올 겁니다.”
“네. 다녀오십시오.”
집 밖으로 나오자 차에 있던 손병수가 얼른 내려 뒷문을 열어 주었다. 나도 손이 있는데. 이런 게 익숙하지 않았다.
차를 타고 30분 정도 달려 커다란 일본 전통 주택 같은 곳에서 멈췄다.
“여기입니다.”
차에서 내려 손병수와 같이 안으로 들어가 걷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안을 둘러보았다.
조금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건물도 여러 개가 보였고 정원도 꽤 넓고 작은 연못도 있었다.
“이곳은 뭐 하는 곳이에요?”
“차도 팔고 술도 파는 고급 식당입니다.”
“이 집 꽤 오래된 것 같네요.”
“제가 알기로 4백 년 되었고 최초에 어떤 사무라이 집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사장이 20년 전에 이 집을 구매하여 식당으로 개조한 겁니다.”
손병수 안내로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가자 손정우 회장이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일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회장님 신세를 많이 지네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앉으시죠.”
난 손 회장이 미국에 왔을 때 학교 벤치에서 커피 한 잔 사 준 게 전부인데.
“네.”
바닥에 앉자 찻주전자를 들어 잔에 따라 주었다.
“드시지요. 방금 나온 거라 따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숙소는 마음에 드십니까?”
“네. 주인분들도 좋으시고 방도 깨끗하고 넓어서 아주 마음에 듭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우리 집에 묵으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명함 하나를 꺼내 상에 올려놓았다.
“일본에서 제일 큰 헤드헌팅 회사입니다. 영어로도 가능하니 전화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명함을 집어 보았다.
야마다 유키 이사의 명함이었다.
“이분 잘 아십니까?”
“잘 아는 것은 아니고 예전에 몇 번 거래한 적이 있습니다. 일 처리는 깔끔하게 하는 편이라 도움이 되실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무슨 종이를 상에 올려놓았다.
“고문님이 인재를 찾는다고 하여 제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나름대로 한번 알아보았습니다. 오션에 딱 맞는 사람이 한 명 있어서 추천해 드리는 겁니다. 전혀 부담 가지실 필요 없고 헤드헌팅 업체에서 추천해 주는 사람과 비교해서 결정하시면 될 겁니다.”
종이를 들어 보았다. 이력서였다.
이름 테츠야, 나이는 45세로 적당하였고 도쿄 대학 전자 공학과를 졸업했고 일본 전자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일본 MSS에서도 재직한 경력도 있었고 소프트 뱅코에서는 이사로 일한 경력도 있었다.
단점이 CEO 경험이 없다는 것뿐 이력서만으로는 꽤 괜찮았다.
“소프트 뱅코에서도 근무한 경력이 있는데 회장님이 잘 아시는 분입니까?”
“네. 잘 압니다. 이 친구가 일본 MSS에서 근무할 때 일로 몇 번 만났었는데 능력도 있어서 제가 스카우트했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친구도 재일한국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손 회장이 스카우트할 정도면 능력은 검증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나도 일본인보다는 재일한국인을 고용하는 게 더 좋았다.
“이분 제가 한번 만나 봐도 되겠습니까?”
“상관은 없습니다. 근데 이미 만나셨습니다.”
“네?”
“민박집 주인입니다.”
“네?”
“그 친구는 제가 추천해 준 것을 모릅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시고 그 집에서 머물면서 지켜보시고 결정해도 될 겁니다. 고문님이 일본에 온 이유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릅니다. 제가 잘 아는 분에게 부탁받은 거니 당분간 신세 좀 지겠다고 부탁한 겁니다.”
한 방 크게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 집으로 민박하게 한 거였구나.
어떻게 생각해 보면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나를 위해서 능력 있고 좋은 인재를 소개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분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니 내가 전혀 부담 가질 필요도 없고. 좋게 생각하자.
“그분은 지금 일을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네. 2년 전에 와이프가 몸이 안 좋아 일을 그만두고 옆에서 간호한 겁니다. 지금은 와이프가 많이 나아져서 일할 수 있습니다. 원래는 소프트 뱅코로 다시 부르려고 했는데 제가 생각해 보니 오션에 더 적임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까 보기에는 건강해 보였는데 이제 다 나아서 그런가 보네.
“혹시 영어는 가능합니까?”
“전혀 문제없습니다.”
다행이네.
“알겠습니다. 제가 지켜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여는 손 회장이었다.
“일본에서도 오션의 인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계속 점유율이 무섭게 상승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문님 조언대로 야호에 투자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점 감사합니다.”
“제 조언이라기보다는 회장님이 올바른 판단을 하신 결과입니다. 옆에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한다고 해도 우매하고 어리석은 지도자는 그 말을 듣지 않는 법입니다.”
“현명한 지도자는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오션에 투자하지 못한 것이 참 아쉽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이제 일 이야기는 그만하고 식사하시겠습니까?”
“배가 좀 고프기는 하네요.”
“여기 음식 맛이 아주 좋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확실히 장담할 만하였다.
코스 요리인데 20가지 정도가 나왔으면 음식 이름을 모르는 것도 많았고 하나같이 맛이 있었다.
음식량은 조금씩 나왔지만, 종류가 많아 배부르게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회장님!”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잘 드셨다니 제가 다 기분이 좋습니다.”
“너무 신세를 많이 지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 갖지 마십시오. 그럼 서운합니다. 손님 대접하는 것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원칙입니다.”
이러면 나중에 손 회장이 한국에 오거나 미국에 오면 내가 잘 대접해야 한다는 말이잖아. 받을 때 모르겠지만 줄 때는 은근히 부담으로 오네.
“저는 회장님이 미국에 오셨을 때 제대로 대접한 것이 없는데요.”
“왜 없습니까? 저를 만나 주신 것만으로도 큰 대접을 받은 겁니다. 또 조언도 해 주시고 또 어디 가서 받아 보지 못할 장소에서 커피도 마셨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때가 생각납니다.”
“설마 그때를 기억하며 저를 욕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욕을 왜 합니까? 절대 아닙니다. 특별한 기억이라서 정말 좋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공항 마중 나간 친구가 일본에 계실 동안은 고문님을 수행할 겁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의 작은 성의이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주십시오. 조금 전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손님 대접에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다가 코 뀌는 거 아닌가? 거절할 수도 없고.
“감사합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손 회장은 차를 타고 먼저 떠났고 난 손병수가 민박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내일은 몇 시쯤 오면 됩니까?”
내일은 헤드헌팅 업체에 전화하는 것 외에는 특별하게 할 일이 없는데.
“내일은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종일 민박집에 계실 겁니까?”
“글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도쿄 구경 나갈 수도 있어요.”
“그럼 내일 오전 10시쯤 제가 오겠습니다. 제가 도쿄 가 볼 만한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나 혼자 다닐 수 있는데. 거절하면 저 친구 손 회장에게 한소리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지 못하는 척 따르자.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차가 떠나는 것을 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
다음 날 아침 욕실에서 씻고 나오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문이 조금 열리더니 고개만 빼꼼 들어왔다.
“식사하시래요.”
딸인가 보네. 어제는 못 봤는데.
“곧 내려갈게요.”
방문이 닫히자 내려갈 준비를 하였다.
1층 부엌으로 내려가자 두 부부와 아들과 딸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딸은 고등학생으로 보였고 아들은 중학생으로 보였다.
“저 때문에 식사를 못 하셨네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제 막 앉았습니다. 된장찌개를 준비했는데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자제분들인가 보네요.”
“네 그렇습니다.”
고진욱이 아들과 딸을 보며 말하였다.
“인사드려야지.”
아들과 딸이 수줍게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당분간 신세 질게요. 잘 지내요.”
“집에 사람을 들인 경우가 처음이라 쑥스러운가 봅니다. 이제 식사하시죠.”
“네. 감사히 먹겠습니다.”
생각 외로 사모님 음식 솜씨가 좋은지 맛있었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 보는 집밥인가? 된장찌개를 떠먹는데 왠지 모르게 울컥하며 괜히 눈물이 나오려고 하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밖에서 사 먹기만 했는데.
집에서 해 먹더라도 인스턴트식품 또는 간편하게 해 먹었지, 이런 밥상은 아니었다. 민박하기를 정말 잘했다.
어제오늘 호식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