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진동민이 나왔다.
“민재 여기 있었네? 왜 나왔어?”
“바람 쐬러. 넌?”
담배를 들고 흔들었다.
“담배 피우려고. 너도 하나 줄까?”
좀 전에 피웠더니 생각이 없었다.
“괜찮아.”
“너 담배 안 피우나?”
“어쩌다가 한 번씩.”
“그럴 거면 아예 피우지 마라. 넌 지금 미국에 가 있는 거야?”
“응. 대학원을 미국으로 갔거든.”
“대학원을 갔어? 어디 대학?”
“스탠퍼드.”
“와! 좋은 데 갔네. 하긴 넌 공부를 잘했으니까.”
“너는?”
“난 지방대 입학하고 1학년 1학기만 다니다가 휴학하고 군대 갔어. 지금은 복학해서 다니고 있고. 넌 대학원 마치고 군대 가나?”
“모르지.”
“너 몇 년 사이에 많이 변한 것 같다. 대학원 물 먹었다고 당당해진 건가?”
“이제는 내 앞가림할 수 있는 나이잖아.”
“장례 끝나면 바로 미국 갈 거야?”
“그래야지.”
“그게 좋을 거다. 괜히 분란 만들지 말고 빨리 가라. 어차피 너는 우리 집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니까.”
환영받지 못하는 것보다는 껄끄러운 존재가 더 정확하겠지.
나도 작은 집 식구들 얼굴 보기도 싫다. 장례 끝나면 이제 남남이다. 미련 한 점 남김없이 떠날 거다.
갈증이 나서 음료수를 마시려고 식당으로 들어갔더니 고모와 고모부, 작은 엄마와 작은아버지가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분위기가 이상하였다.
크게 언성을 높이는 건 아니지만 서로 의견 차이가 심한지 다투는 것 같았다.
살금살금 냉장고에서 캔 콜라를 하나 꺼내어 나오는데 고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민재가 자기는 상속받지 않고 바로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던데 그럼 민재 재산도 공평하게 나누어야 하는 거 아니야?”
결국은 유산 싸움이었어? 그걸 꼭 지금 해야 하나? 장례 다 끝난 다음이나 하든가? 듣기 싫어 얼른 나왔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재벌가 자식들 간의 유산 싸움을 직접 목격하니 마음이 착잡하고 씁쓸하였다.
그냥 사이좋게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면 안 되나? 할아버지는 저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하실까?
저기에 내가 끼어 있다는 생각을 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갈 수는 없는 법이지.
복도 저쪽 의자에 서영이가 혼자 앉아 있는 것이 보여 그곳으로 갔다.
옆에 앉자 고개를 돌렸다.
“민재 오빠!”
“혼자서 뭐해?”
“그냥 있어.”
“잠이나 좀 자지.”
“잠도 안 와.”
“대학 합격한 거지?”
“응,”
“축하해. 대학 입학 기념으로 선물해주고 싶은데 원하는 거 있어?”
피식 웃었다.
“오빠 돈 없잖아. 엄마가 유학 경비 제대로 보내주지도 않았을 텐데.”
“나 돈 많아.”
“거짓말. 선물은 됐고 밥이나 사줘. 오빠 언제 미국 가?”
“너 밥 사주고 갈게. 학교생활은 재미있어?”
“응. 재미있어.”
“미팅은 했어?”
“응. 한번.”
“마음에 들었어?”
“아니.”
그래도 대학 생활이 재미있다니 다행이다. 서영아! 너만이라도 행복해라.
서영이와 대학 생활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작은아버지가 다가왔다.
“민재!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네.”
장례식장 밖으로 나왔다.
“너는 왜 와서 사달을 만들어?”
“손자가 할아버지 장례에 참석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 왔으면 조용히 장례나 치르고 갈 생각을 해야지 쓸데없는 말을 해서.”
그럼 물어보는데 내가 누굴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물론 대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고모 성격에 계속 물고 늘어질 텐데 내가 왜 피해를 봐야 하는데.
“제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얼마 안 가 고모도 상황 파악을 할 텐데 금세 들통날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전 약속한 대로 지키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고모랑 알아서 해결하시고요. 그 이야기라면 저는 더 할 말이 없어요. 들어갈게요.”
3일 장이 끝나고 선산에 할아버지를 모셨다.
그동안 홀로 쓸쓸히 계시던 할머니 옆에 할아버지가 오셨으니 할머니는 더는 쓸쓸하지 않겠네.
‘할아버지 편히 쉬세요.’
그 옆에 조금 떨어진 아빠의 묘소가 유난히도 쓸쓸해 보였다.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고 간단히 제사를 지내고 다 끝나자 모두가 산에서 내려갔다.
오랜만에 온 아빠의 묘소라 금세 갈 수가 없어 홀로 남아 아빠 묘소 앞에 앉았다.
‘아빠 저 왔어요. 저 보고 계시나요? 오랜만에 왔다고 뭐라고 하지 마세요. 어린 저를 두고 먼저 떠난 아빠가 더 큰 잘못을 한 거니까요.
원망하냐고요? 원망한다고 달라질 게 있나요? 하지만 한가지는 말을 하고 싶어요.
아빠의 인생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빠는 남편으로서 아빠로서는 빵점이었어요. 하늘에서 반성하세요.
저는 다시 한번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전 인생에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는 100점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부럽죠? 아빠도 다시 인생을 사신다면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꼭 100점이 되세요.’
그렇게 계속 있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산에서 내려왔다.
낭패다. 시골이라 그런지 버스가 벌써 끊겼다. 근처 농가에서 하룻밤 자야겠네.
***
서한 미디어 회의실에서 3명의 남자들이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금테 안경을 쓴 오십 대 초반의 남자가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서한 미디어의 투자 조건은 이렇습니다. 보시지요.”
맞은 편이 앉아 있던 남자 둘이 얼른 서류를 집어 보고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김 이사님! 이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뭐가 너무하다는 말씀입니까? 우린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만.”
“투자금은 그렇다 쳐도 개발 이후 마케팅과 판매를 전부 서한 미디어에 넘기고 공동 특허권을 가지겠다는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우리는 투자만 하고 이익을 얻지 말라는 겁니까? 우리도 남는 것이 있어야 투자하는 것이 아닙니까?”
“누가 이익을 얻지 말라고 했습니까? 도가 지나치다는 겁니다.”
헛웃음을 지었다.
“두 분은 아직도 현실 파악이 안 되는 겁니까? 우리 서한 미디어니까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는 거지 어느 기업에서 투자하려고 합니까?
여러 기업에서 투자 제안을 전부 거절당하셨으니 잘 아실 겁니다.”
“우리가 개발하는 것은 세계 최초로 음원을 디지털 파일로 플레이어에 저장하여 재생하게 하는 기술입니다.
이 기술이 개발되면 이제 시디에 노래를 담아 듣는 세상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만큼 미래 발전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투자 제안을 거절한 기업들은 그 가치를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그 기술이 지금 개발이 끝난 겁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개발하다가 실패하게 되면 우린 투자금만 날리게 되는 겁니다.
아무리 가치가 있다고 해도 눈앞에 실물이 놓여있어야만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겁니다. 신기루 같은 가치를 누가 인정하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모험을 하는데 그만한 이득이 없다면 누가 투자하려고 하겠습니까? 지금 한국 경제가 어떤지 두 분 다 잘 알지 않습니까?
한국 경제가 안 좋아 기업마다 힘들다고 아우성이고 투자를 줄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투자하려는 기업이 없어서 우리 서한 미디어에까지 온 것이 아닙니까?
또 디지털 카스트도 운영 자금이 모자라서 투자를 받으려는 것이 아닙니까? 당장 굶어 죽겠는데 찬밥 더운밥을 가리시는 겁니까?
아직 배고프지 않으신 겁니까?”
한 남자가 발끈하여 뭐라고 말하려고 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팔을 잡고 제지하고서는 입을 열었다.
“우리도 현실을 잘 압니다. 하지만 인간관계도 그렇지만 사업에도 기본적인 도리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것을 원하는 겁니다. 다시 한번 투자 조건을 상향해 주실 수는 없는 겁니까?”
김 이사의 말이 부드러워졌다.
“우리 서한 미디어가 건실한 기업이지만 경제가 어려워 자금운영에 애로점이 많습니다.
제가 디지털 카스트의 기술력을 믿기에 투자를 강력히 주장한 것이고 최대한 도움을 드리고자 한 것이 이 조건입니다.
저도 더 이상은 설득할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여기까지며 이 조건을 받아들이시든지 아니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다른 투자 기업을 물색하셔야 할 겁니다.
그 이상을 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투자금이라도 몇억 정도 더 올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회사에 자금이 많으면 그까짓 거 못 해주겠습니까? 우리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서 그럽니다.
잘 판단하시고 결정해 주십시오. 저는 회의가 있어서 이만 일어나야 합니다.”
축객령에 두 남자는 힘없이 대답하며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서한 미디어를 나온 두 남자는 터덜터덜 걸어갔다.
“영철아! 우리 그냥 투자받자.”
“형은 억울하지도 않아? 우리 MP3 기술의 가치가 그것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절대 아니지.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지. 하지만 세상이 전부 안 알아주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어.”
“그렇다고 헐값에 넘길 수는 없잖아. 기다리다 보면 가치를 알아주는 기업이 나타날 거야. 힘들더라도 그때까지 우리 참자. 응?”
“언제 나타날까? 당장 다음 달 직원들 급여 줄 돈도 없어. 직원 월급은 꼭 주고 싶은데 줄 돈이 없다는 게 서글퍼.
투자금을 투자받으면 자금 신경 쓰지 않고 개발도 완료할 수도 있고 몇 년간 운영 자금도 부족하지 않아.
개발하고 제품으로 판매하면 더 나아지지 않을까?”
“판매권도 서한 미디어에서 전부 가져간다고 하잖아. 뭐가 나아져.”
“생산은 우리가 할 수 있고 특허권이 있잖아.
비록 공동 특허권이기는 하지만 판매가 잘 되면 제조 업체도 이득을 보는 거고 다른 업체에서 로열티도 받을 수 있잖아.”
“반쪽 특허권으로 얼마나 들어오겠어? 제조와 판매를 같이 해야 더 마진이 많이 남잖아. 판매권이나 공동 특허권 중의 하나는 양심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니야?
두 개 다 갖게 다는 심보는 놀부 심보지. 너무 하잖아.”
“나도 집에 월급 좀 갖다 줬으면 좋겠어. 마누라에게 4개월째 월급도 주지 못하고 마누라가 일해서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어.
마누라 일하는데 입을 옷이 없어서 저번 주말에 큰맘 먹고 백화점에 갔는데 마누라가 할인 매대에서 옷을 사드라.
그걸 보는데 눈가가 찡하면서 자괴감이 들더라. 가장으로서 해준 게 너무 없어 미안했어. 애들한테 아빠 노릇도 제대로 못 해주고.
요즘 따라 잘 다니던 직장 때려치우고 괜히 사업을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 투자금만 받아도 숨통이 트일 것 같아서 그래.
넌 아직 결혼하지 않아 이런 내 마음 이해하지 못할 거야. 가장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워.”
심용철이 황정화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형! 우리는 언제 해 뜰 날이 올까?”
“어둠이 물러가면.”
“언제 어둠이 물러가는데?”
“그거야 모르지. 당장 내일일 수도 있고 한 달 뒤 일 수도 있고 몇 년 일 수도 있고 아예 어둠이 움직이지 않고 우리 머리 위에 머물 수도 있겠지.”
“형! 기분도 꿀꿀한데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나 한잔하자.”
“돈도 없는데 무슨 포장마차야. 소주랑 새우깡 사 가지고 사무실 가서 마시자.”
“알았어.”
두 사람은 어깨동무하며 사노라면 노래를 크게 부르며 걸어갔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