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곤하게 자고 있는데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비몽사몽이라 꿈속에서 울리는 건지? 현실에서 울리는 건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았다.
(여보세요.)
(민재 오빠야?)
울먹이는 한국말 소리가 들려왔다. 서영이 인가?
(나 민재야! 서영이야?)
(응. 오빠 나 지금 병원이야.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어.)
잠이 순식간에 깼다.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건강하시다며?)
(어제까지는 건강하셨어. 근데 갑자기 쓰러졌는데 의사 말로는 힘들 거라고 해. 그래서 오빠한테 전화한 거야.)
(알았어. 울지마. 나이 들면 어쩔 수 없는 거야.)
(오빠 올 거야?)
(응. 갈게. 한국 가서 보자. 작은 엄마한테 나한테 전화했다고 말하지 마.)
(알았어. 끊을게.)
전화를 끊고 시간을 보니 새벽 4시 10분이었다.
막상 돌아가실 것 같다는 말을 듣자 슬프거나 하는 별다른 감정은 없지만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할아버지랑 그만큼 정이 깊었던 관계가 아니라서 그런가?
건강하시다고 해서 걱정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쓰러지시다니? 혹시나 했는데 살고 죽는 인간의 운명은 바뀌지 않는 건가?
이전 생에서는 오랜 시간 병원에서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래도 건강하시다가 돌아가시니 그것도 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권 취득하고 바로 여권을 신청했었는데 잘했네. 한국 간 김에 행정 처리도 해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하였다.
아침 일찍 교수님하고 에릭에게 전화하여 상황 설명하고 공항으로 향하였다.
10시간 넘는 비행 끝에 김포 공항에 도착하여 청사 밖으로 나왔다.
4년 만에 돌아온 한국이지만 공항 밖의 모습은 떠날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있든 없든 간에 세상은 물레방아처럼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였다.
VIP 병실로 올라가자 병실 밖 복도 의자에 사촌들이 앉아 있었고 그 안에 얼마나 울었는지 화장이 눈물로 지워진 서영이도 보였다.
서영이는 마음이 너무 약해서 탈이다. 다른 사촌들은 부모를 닮아서 안 그런데 혼자서 돌연변이인가?
천천히 걸어가자 날 본 석구 형이 놀라면서 손을 들어 나를 가리키었다.
“네가 여길 어떻게?”
그 소리에 다른 사촌들도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서영이가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달려왔다.
“민재 오빠 왔어. 오느라 힘들었지?”
“할아버지는 어떠셔?”
“의식도 없어. 의사 말로는 힘들게 버티고 계신다고 해. 얼마나 버틸지 몰라서 전부 모여 있는 거야.”
“알았어.”
앞으로 걸어가자 진구 형이 일어났다.
“어떻게 온 거야? 너 핀란드에 있는 거 아니었어?”
“지금은 미국에 있어.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데 손자 된 도리로 와야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할아버지 보러 들어갈게.”
“그래라.”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작은 엄마, 작은아버지, 고모, 고모부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날 본 작은 엄마, 작은아버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고 고모가 일어나 나에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만재 왔어?”
“안녕하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너한테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연락처를 아무도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하나? 했는데 잘 왔어.
너는 이런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연락처를 알려줘야지. 하마터면 너 없이 큰일을 치를 뻔했잖아.”
“제가 핀란드에서 미국으로 건너갔거든요. 그래서 그랬어요.”
고모부에게 인사하고 작은 엄마, 작은아버지 앞으로 갔다.
“안녕하셨어요?”
내 인사에 작은 엄마가 못마땅한 말투로 물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
고모랑 고모부가 있어서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인륜의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잖아요. 약속은 지킬 테니 안심하세요. 일 다 끝나면 바로 돌아갈 거예요.
그러니 그동안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주세요.”
작은아버지가 짧게 대답하였다.
“알았다.”
할아버지 앞으로 갔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계셨다.
비록 대화는 나누지 못하고 누워 계시는 모습만을 보는 거지만 그래도 이전 생에서 하지 못했던 임종도 지켜볼 수 있고 장례도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할아버지! 저 민재 왔어요.
이렇게 힘없이 누워 계시는 것을 보니 카랑카랑했던 모습이 그리워지고 그런 할아버지가 그리워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와 할아버지는 조손 간이지만 특별히 추억하거나 즐거웠던 기억이 없네요.
저에게 좀 더 다정하게 대해줄 수는 없었나요?
저도 남들처럼 할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이쁨받고 싶었어요. 저는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어서 항상 외로웠고 사랑에 목말라 있었거든요.
그 부족한 것을 할아버지가 채워 주었다면 하는 생각을 가끔 해봐요. 어릴 때라 할아버지가 밉고 원망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원망하지 않아요.
할아버지도 아끼던 자식을 잃고 가슴이 매우 아프셨을 거예요. 저를 볼 때마다 아빠 생각이 나서 멀리하셨던 거 알아요.
이제는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가시니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부자 상봉을 하세요. 할아버지가 일꾼 진성 그룹은 제가 지켜낼게요.
이제는 모든 미련 다 버리시고 편히 쉬세요.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기계음 소리가 들리자 고모가 재빨리 버튼을 눌러 간호사를 호출하였다.
곧이어 간호사와 의사가 들어왔다.
할아버지를 살피던 의사가 숙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환자분 운명하셨습니다.”
장례가 시작되었다.
그룹 관계자와 재계 사람들을 포함해 조문객들이 몰려와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늦은 시간이 되자 조문객이 뜸해지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점심, 저녁도 못 먹었네.
밥은 먹어야지.
밥과 육개장 몇 가지 반찬으로 혼자서 밥을 먹는데 고모가 다가와 내 앞에 앉았다.
“이제 밥 먹는 거야?”
“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어떻게 연락도 한번 안 해?”
누가 보면 다정한 고모 같지만 만만한 고모가 아니었다. 그래도 작은 엄마에 비하면 천사이지.
병실에서도 그렇고 나에게 다정하게 구는 것이 왠지 재산 상속 때문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잘 지냈어요.”
“미국에는 왜 간 거야?”
“핀란드에서 대학 졸업하고 미국으로 대학원 간 거예요.”
“그랬구나. 아버지가 너를 보려고 버티신 것 같아. 네가 인사드리자마자 떠난 것을 보니.”
“그러게요. 조금만 늦었으면 임종도 못 볼 뻔했네요.”
“아닐 거야. 네가 올 때까지 버티셨을 거야.”
말을 하고서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언제까지 한국에 있을 거야?”
“장례 끝나면 바로 가야 해요.”
“바로 간다고? 왜?”
미소만 지었다.
“너도 상속 자격이 있으니 받아야지. 장례 끝나고 상속 문제로 이야기할 건데.”
“저는 상속 안 받을 거예요. 알아서들 하세요.”
“왜?”
말없이 미소만 짓자 이상하다는 듯 일어나 갔다. 아마도 고모부에게 내 이야기를 할 가는 것 같았다.
장례만 끝나면 떠나야지.
마저 밥을 먹는데 저쪽 편에 작은아버지가 조문객을 안내하고 있었다.
“찬호 형!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래.”
자리에 앉은 사람이 작은아버지에게 말했다.
“상규가 해야 할 일을 네가 다하네. 상규는 뭐가 급한지 빨리 떠났을까?”
아빠를 아시는 분인가? 보네. 친구인가?
“그러게 말이에요. 형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렇게 일찍 가기에는 아까운 친구인데.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가끔가다 같이 연구할 때가 생각나.”
가만있어 봐! 찬호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데. 어디에서 들었지? 야구 선수 이름과 같아서 그런가?
아! 예전에 할아버지한테 아빠에 대해 물어봤을 때 말해주신 서울대 화학과 김찬호 교수가 저분이었구나.
맞다. 같이 연구했던 때가 생각난다고 했으니까 맞을 것 같았다. 그럼 저분에게 물어보면 아빠에 대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밥을 얼른 먹고 장례식 장 밖으로 나왔다.
밤도 늦었기에 식사 끝나시면 바로 나올 것 같아 여기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옆에서 몇 사람이 모여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보니 갑자기 담배 생각이 났다. 안 피운 지 꽤 되었는데.
“저 죄송하지만, 담배 하나 주실 수 있습니까?”
나를 힐끔 쳐다보고서는 물었다.
“상주신가요?”
“네. 원래 담배 안 피우는데 답답해서 한 대 피우려고요.”
“여기 있어요.”
“감사합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였다.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자 폐가 담배를 거부하는지 목이 막히며 기침이 나왔다.
그것도 잠시 뇌가 기억하는지 반갑게 니코틴을 받아들였다.
내뿜은 담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다가 사방으로 흩어지면 사라지는 것을 보니 덧없는 인생사를 보는 것 같았다.
죽으면 다 끝이고 덧없는데 사람들은 왜 치열하게 살아가는 걸까? 짧은 인생 살아가면서 왜 남에게 피해를 주고 못된 짓을 하며 살아갈까?
남들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하려나?
그때 김찬호 교수가 나오는 것이 보여 그 앞으로 뛰어갔다.
“김찬호 교수님!”
내가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진상규 박사님 아들 진민재라고 합니다.”
“아! 자네가 상규 아들이라고? 상규 장례 때 보기는 했는데 많이 컸네. 상규랑 닮지 않아서 길에서 보면 몰라보겠어.”
그런 소리 많이 들었다. 아빠 외모를 닮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교수님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말해보게.”
“아빠가 돌아가실 때쯤에 교수님이랑 현산 연구소에서 같이 일했다고 할아버지한테 들었어요. 아빠가 연구하시던 게 뭔지 알고 싶어서요.”
“같이 현산 연구소에서 일한 건 맞아. 근데 나랑 다른 분야를 연구해서 나도 상규가 무엇을 연구했는지는 몰라.
친한 친구라도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서로에게 비밀로 했거든. 내가 연구하던 것도 상규도 몰랐고.”
알 수 있다고 기대했는데 이러면 다시 미궁에 빠지는 거네.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래. 도움이 안 되어 미안하네.”
“그럼 아빠의 연구 자료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건지 아세요?”
“나도 상규의 연구 자료가 사라졌다는 말은 들었어. 그때 참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 원래 연구소에서 연구한 자료는 모두 연구소에 보관하게 되어 있거든.
그런데 연구 자료가 사라졌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야.
하나는 연구소에 보관하고 있지만, 무슨 이유로 인해 연구소에서는 없다고 한 경우와 상규가 폐기했거나 빼돌렸을 경우지.
근데 상규가 힘들게 연구한 것을 폐기할 이유도 없고 빼돌렸다면 왜 빼돌렸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내 생각에는 연구소에 보관되어있는 것 같아.”
레베카 말로는 한국의 안기부에서도 찾는다는 것을 보면 연구소에는 없을 가능성이 컸다. 무시무시한 안기부의 눈을 피해 연구소에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럼 아빠밖에 없는데.
“아! 어쩌면 현도 그룹 장주용 회장은 상규가 뭘 연구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현도 그룹에서 상규의 연구 자금을 지원했거든.”
현도 그룹 장주용 회장을 만나면 알 수 있는 건가?
“말씀 감사합니다.”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네. 다음에 학교로 찾아와. 같이 밥이나 먹게.”
“네. 알겠어요.”
다시 원점이었다. 아빠가 연구하던 게 뭔지 되게 궁금하기는 했다. 그렇다고 궁금증을 해소할 시간이 없었다.
장례 때문에 한국에 온 것이고 온 김에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바로 미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