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태양계에서 4번째로 위치한 지구의 이웃이자 황량한 죽음의 행성이었던 화성.
하지만 이제는 지구보다 더 역동성 넘치는 환경과 수많은 초록빛 생명으로 가득한 모습으로 변해 버린 이곳에는 행성의 대기권을 넘어서 우주까지도 닿지 않을까 싶은 거대한 나무가 그 존재감을 잔뜩 뽐내고 있었다.
태초의 나무라고 불리는 세계수.
아무것도 없던 화성에 창세를 일으키고 하나의 세계를 완성한 그녀의 주변에는 24시간 철통 경계를 유지하는 강력한 수호자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아스테리아가 서신을 보내 왔다고요……?”
“네. 여왕님. 지금 우리 영역을 찾아온 인간들이 가져 온 물품들을 하역하고 있습니다.”
엘븐 킹덤의 지도자이자 세계수를 지키는 사명을 이행하고 있는 수호자. 하이 엘프. 엘리시아.
푸르른 잎사귀 일족을 이끄는 엘프 여왕이기도 한 그녀는 한 경계병의 보고를 받고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헤……. 신기한 물건인데?”
“이거 봐. 이렇게 만지면 움직인다?”
“흐음……. 특이한 물건이긴 한데, 이걸 아스테리아가 왜 우리에게 보낸 거지?”
일족 전체를 대표하며 지구라는 미지의 행성으로 떠나간 아스테리아.
그 이후로 아무런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있던 엘프들이기에 또다시 자신들의 영역을 방문한 파이오니어 함선과 여러 인간이 가지고 온 물품에 호기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푸르른 잎사귀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첫 번째 가지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미합중국의 외교 대사이자 아스테리아 대사의 부탁을 받고 이번 물품 운송에 동행하게 된 케빈 알링턴이라고 합니다.”
엘프들의 예법을 알고 있는 듯,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를 건네는 인간.
그리고 그런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든 엘리시아는 고고한 표정으로 여왕으로서의 품격을 지키며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푸르른 잎사귀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엘븐 킹덤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인간들이여.”
비무장으로 온 듯한 십수 명 정도의 인간들. 그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계속해서 꺼내 마을 광장에 늘어놓는 것을 보며 아스테리아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아스테리아가 그대를 보낸 연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우리 일족들이 손에 들고 있는 저 묘한 형태의 물건은 무엇이지?”
“아, 저것 말입니까? 스마트폰이라고 부르는 물건입니다.”
“스마트폰……?”
그게 도대체 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리시아. 과학 기반의 문물을 접해 볼 일이 없는……. 그것도 특히나 숲에서 집 하나 제대로 짓고 살아가지 않는 자연인 그 자체인 엘프 일족들이 스마트폰이라는 최첨단 과학 기술의 집약체이자 정수나 다름없는 물건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다목적 통신 및 컴퓨팅 시스템 단말기입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머리가 멍청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상식이라고 할 법한 개념조차 문외한인 엘프들. 하지만 외교관으로서 수십 년 구르고 사전에 관련 사항을 철저하게 숙지하고 온 케빈은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고 차근차근 이 원시인이나 다름없는 엘프들에게 스마트폰의 개념을 분명하게 이해시켜 주었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통신 수정과 비슷한 기능을 가진 아티팩트라는 말이군.”
“네. 맞습니다. 그 이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활용이 가능할 겁니다. 특히나 마나 링크를 활용한 통신 네트워크가 탑재되어 있어서, 아무런 지연 시간도 없이 지구에 있는 본국의 대사와도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또한…….”
한번 설명을 시작하면 끊임없이 말을 이어 가는 케빈. 하지만 엘리시아는 이제 대충 무슨 용도로 아스테리아가 이런 물품을 자신들에게 보낸 것인지 이해가 되었기에 그의 말을 끊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귀하의 설명에 감사를 표한다. 다른 것들은 내가 대사에게 직접 물어볼 것이니 그대는 이만 돌아가 편안히 쉬도록. 이들이 자네를 거처까지 안내해 줄 것이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엘리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가는 미국 대사. 그리고 이내 그녀는 그 스마트폰이라는 것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 이미 저장되어 있는 한 연락처를 통해 전화를 걸었다.
[ 푸르른 잎사귀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여왕님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곧이어 화면에 나타나는 아스테리아.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엘리시아는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참으로 신기한 물건을 보냈구나, 아스테리아. 이렇게 선명하게 너의 모습을 보고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니, 마치 내 바로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한 기분이구나.”
[ 저 역시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참으로 기쁩니다, 여왕님. ]
행성과 행성의 아득히도 머나먼 공간을 초월하여 만나 잠깐의 회포를 푸는 두 엘프.
그리고 지구에서 있었던 일들에 관한 아스테리아의 보고를 들으며 엘리시아는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세계의 인간들이 가진 힘이 판달리아의 인간들보다 더욱더 위협적이라고?”
[ 네. 그렇습니다. 이 지구의 인간들 대부분은 대자연의 힘을 다룰 줄도 모릅니다. 최근, 아주 극소수의 인간들이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되었지만, 그 경지가 아주 낮습니다. ]
[ 하지만, 이 세상의 인간들은 ‘과학’이라는 기묘한 힘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들이 가진 병기들은 판달리아의 인간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이고 강력합니다. ]
총기. 미사일. 탱크. 폭격기, 잠수함……. 심지어 핵무기까지.
고작 스위치 하나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대륙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다는 현대 병기들의 파괴력을 들으며 엘리시아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다.
“으음……. 역시 인간은 인간이군. 너무나도 파괴적이고 위험한 종족들이야.”
과거 판달리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는 엘프 일족 전체와 세계수를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인간들. 그렇기에 이들이 판달리아의 인간들보다 더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아스테리아의 보고에 엘리시아는 과거의 악몽이 떠오른 듯한 모습이었다.
[ 하지만,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위대한 사도님께서 이 세계의 인간들을 확실하게 계도하고 계몽시키고 있었습니다. 먼저……. ]
자연의 소중함을 모르는 이 무식하고 미개한 인간들을 대신해서 전 지구적인 녹화 사업을 벌이며 생태계를 복원하고. 대자연의 힘을 다룰 줄 모르는 이들을 가르치고 교육할 학교를 설립하며, 행성 전체를 죽음으로 잠식하는 악마까지도 소멸시킨 위대한 세계수의 사도. 멀린.
그가 지구에서 이루었던 일들을 마치 일대기처럼 늘어놓는 아스테리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엘리시아의 눈은 이내 반짝거렸다.
“역시……. 위대한 어머니께서 그분을 사도로 괜히 정하신 것이 아니었구나. 그 미개하고 포악한 인간들을 그렇게까지 다루고 교육해 자연을 사랑하고 가꾸게 만든다니……. 역시 우리 일족을 이끌 만한 자격이 있으신 분이구나. 참으로 기쁜 소식이야.”
판달리아의 기나긴 역사상 단 한 번도 인간을 사도로 지정한 적 없는 세계수.
그렇기에 처음으로 인간의 뜻을 그대로 따르라는 세계수의 의지에 엘리시아는 남모를 불안감을 가슴 속 깊은 곳에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아스테리아의 이야기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금은 편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아스테리아는 조금은 진지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 하지만, 여왕님. 애석하게도 아직 이 지구에는 추악한 인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
“그게 무슨 소리냐?”
[ 이 인간들 사이에서는 ‘튀니지’라고 하는 또 다른 허상의 세계가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는 놀랍게도 저희와 같은 일족으로 보이는 ‘요정’이라는 이들이 있습니다. ]
자그마치 수십 년 동안 서비스되어 온 튀니지라는 게임 속의 방대한 세계관과 설정을 하나하나 풀어내는 아스테리아.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엘리시아는 곧장 이해할 수 있었다.
“판달리아와 매우 흡사한 허상 속 세계로군……. 참으로 흥미롭구나.”
[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그들은 인간들의 탐욕과 욕심 속에서 고통받고 또 멸망의 갈림길에 서 있는 위중한 상태였습니다. ]
“뭐라?”
인간들에게 일족 전체가 멸망하고 유린당한 전적이 있는 푸르른 잎사귀의 일족. PTSD가 도지는 듯한 아스테리아의 말에 엘리시아는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과한 반응을 내비쳤다.
[ 튀니지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 요정들의 숲. ]
요정들이 살아가는 영역인 방대한 숲 하나를 두고 인간들의 세력끼리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서사. 그리고 그러한 인간들 사이에 끼어서 항전하고 있는 요정들의 이 가련하고 비통한 서사를 이야기하며 아스테리아는 자신의 노고를 처연한 태도로 늘어놓았다.
[ 저의 온 힘을 다해서 이 추악한 인간들의 더러운 손길이 요정들의 터전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지금껏 최선을 다해 막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수가 너무나도 많았기에 저 혼자로서는 역부족입니다. ]
수십의 혈맹들이 연합해 달려드는 것도 자기 혼자서 무쌍을 찍으며 그들의 모가지를 썰어 버린 아스테리아. 하지만 그녀는 수적 열세로 인한 한계점을 토로하며 자신의 애로점을 이야기했고, 그 말에 엘리시아는 공감한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겠지. 인간들은 언제나 그랬다. 자신들의 그 탐욕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수많은 무리를 이끌고 언제나 우리들의 터전을 향해 그 더러운 발을 들이밀었지.”
[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랑스러운 푸르른 잎사귀의 일족의 일곱 번째 가지로서, 그리고 엘븐 킹덤의 대리자로서 여왕님께 정식으로 간청하려고 합니다. ]
[ 비록 허상의 세상이라고는 하나……. 우리와 같은 운명에 처한 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힘을 보태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고개를 숙이며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지원을 요청하는 아스테리아.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말에 엘리시아는 그녀가 왜 자신들에게 이 스마트폰이라는 기물을 수백 대나 보내 준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랬구나……. 이제 알겠다. 아스테리아여.”
언제나 어딘가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인간들의 위협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엘프들.
하지만 인간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이 화성이라는 행성에서 엘리시아를 비롯한 푸르른 잎사귀의 일족들을 비로소 평화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너는……. 우리와 같은 고통을 받는 일족을 지켜 내고 싶었던 것이었구나.”
자신들이 얻어 낸 이 안락함과 평화를 선사하고 싶었던 아스테리아.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어 낸 엘리시아는 조금은 결연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걱정하지도, 주눅 들지도 말거라. 아스테리아. 너는 일곱 번째 가지이자 우리 엘븐 킹덤을 대표하는 대리자. 그대의 뜻은 곧, 나의 뜻이며, 나아가 우리 일족 모두의 뜻이다.”
[ 여왕님이시여……. ]
감동한 눈으로 연신 귀를 쫑긋거리는 아스테리아.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엘리시아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곧 일족들을 불러 모아 너에게 최대한의 힘을 보태라고 일러두겠다. 아직 그 튀니지라는 세상에서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가진 경험과 지혜로 일족들을 잘 이끌어 준다면 아마 금방 너를 도울 든든한 가지들이 되어 줄 것이다.”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왕님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그 이후로도 한참 시간을 튀니지의 세상을 집어삼킬 계획을 논의하느라 정신이 없는 두 사람……. 아니 엘프.
이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존재가 하나 있었다.
[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
멀린에 대한 신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세상 물정이고 금전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엘프들의 무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조잡하게 짜인 덫에 제 발로 들어서는 이들을 보며 용용이는 기가 찼다.
[ 하긴, 나도 처음 이 세상의 문물을 보고는 엄청나게 놀라기는 했다만……. ]
마나 링크를 통해서 이제 이 인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모든 시스템을 빠삭하게 꿰뚫어 보고 있는 용용이.
그렇기에 그는 그 누구보다 이제 막 캐릭터를 생성하고 튀니지에 세상에 발을 들이고 있는 132명의 새로운 요정들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 한 1년……? 아니, 한 반년만 내버려 둬도 헤어 나올 수 없는 빚더미에 빠져들게 되겠네. ]
이 금전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엘프들은, 조만간 자본주의와 빚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하여간 이 세상은 노예를 부려도 아주 세련되게 부린다니까. ]
대놓고 목에 족쇄를 채우고 다니는 판달리아와는 분명히 다르지만, 보이지 않는 빚의 족쇄를 채우려는 멀린. 그리고 그런 그의 속셈을 하나하나 다 알고 있기에 용용이는 새삼 무섭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막상 이렇게 보고 있자니 불쌍하긴 하네. 하필이면 마왕보다 더 악랄한 인간인 주인한테 걸려 가지고는……. ]
멀린의 새로운 노예가 될 이 가련한 엘프들에게 남몰래 애도를 표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