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평화와 자연의 상징인 엘프.
아름다운 외모와 함께 온화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대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이들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 자신들의 영역에 대한 집착이 심해서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그런 거지, 사실 엘프들도 알고 보면 어마어마하게 과격하고 폭력적인 집단이야. 특히나 허락도 없이 인간을 비롯해 외부의 생명체가 자신들의 숲에 발을 들이기만 하면 경고도 없이 그냥 머리통에다가 화살을 박아 넣는다니까? ]
[ 인간들이야 그냥 엘프들 얼굴 보고 눈이 돌아가서 잘 모르는 거지, 일반 몬스터들 사이에서 엘프들은 그야말로 최상위 포식자나 다름없는 녀석들이라고. 엘프들이 살아가는 영역에 일반 동식물을 제외하고 몬스터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괜히 그런 건 줄 알아? 모조리 그 씨를 말려 버렸으니까 그런 거라니까? ]
극단적이고 병적인 영역 동물 중 하나에 속하는 엘프.
특히, 세계수가 자리한 숲에 그 터전을 잡은 일족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해서 주변 일대에 얼쩡거리기만 해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위험성과 폭력성은 극에 달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일족 중 하나인 푸르른 잎사귀 일족의 가지. 아스테리아.
그녀는 마음속 어딘가에 깊이 숨어 있는 그 위험성과 폭력성을 그대로 가상의 모바일 세상. 튀니지에서 마음껏 발현했다.
“그러니까……. 엘프와 비슷하게 생긴 요정을 보고 관심이 생겨서 그 게임을 처음 해 보게 됐다는 말이죠?”
뉴욕에서 나의 부름에 반강제적으로 한국으로 소환된 아스테리아.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나는 책상 위에 이 그녀가 저지른 발칙한 짓의 증거 자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미소 지으며 물었다.
“네. 길을 가다가 우연히 광고를 보게 됐었어요.”
“처음에는 별다른 생각 없이 호기심에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멋대로 공격해 오는 인간들 때문에 캐릭터가 무참히 죽었고요?”
“네……. 그냥 사냥터가 자신들의 소유니까 얼쩡대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더라고요. 여러 차례 항의도 하고 정중하게 부탁도 했는데 전혀 듣지 않았어요.”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자신이 당한 부당함을 토로하는 아스테리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인 튀니지에서 사냥터의 통제라는 너무나도 상식적이고 지당한 행위로 인식되었지만, 게임 따위는 접해 본 적 없는 그녀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일이었을 것이었다.
“좋아요. 인간 캐릭터들에게 엘프와 비슷한 요정 캐릭터가 죽은 것이 화가 났고, 그래서 이 게임에 몰입하고 그들에게 복수하기 결심하게 됐다는 거군요. 얼추 상황이 이해되네요.”
감히 ‘인간’ 따위가 고귀하고 우월한 ‘엘프’를 죽인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아스테리아.
일족의 자존심을 운운하며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게임에 몰입하게 된 것인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강해지기 위해서 두 달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자그마치 134억 2,429만 원을 쓴 점이에요.”
내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튀니지의 인앱 결제 이력. 그 내용이 얼마나 많은지, 한 손으로 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그 종이의 두께가 두툼했다.
“제가 튀니지를 제대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지른 건지 대충 알 것 같기는 하네요.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아이템을 이렇게 전부 다 초월 등급으로 맞추고 그렇게 모으기 힘들다는 컬렉션까지 98%까지 맞추셨다니. 이 정도면 진짜 잠도 안 자고 결제랑 가챠만 돌려야 하는 수준 아닌가요?”
“잠을……. 조금 줄이기는 했죠.”
내 말에 조금 찔리는 듯한 표정으로 뜨끔하는 아스테리아.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반응에 용용이가 나에게 속삭였다.
[ 잠을 조금 줄인 게 아니라 아예 안 잔 거겠지. 주인, 내가 저 엘프의 플레이 타임이랑 이력을 분석해 봤는데, 저 정도가 되려면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거의 온종일 저 게임만 붙잡고 살았다고 봐도 무방해. ]
잠도 자지 않고 튀니지에 모든 것을 불태운 엘프.
아무리 일족의 자존심과 자신을 죽인 인간들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저지른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과한 면이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원하는 복수를 이루셨네요. 그렇게 까불던 인간 놈들의 혈맹 무리도 모조리 개박살을 내 버리고 랭킹 1위를 달성하셨고……. 극찬이나 마찬가지인 ‘최강 미친 지갑 전사 요정’이라는 정신 나간 칭호도 얻었네요?”
“이제 만족하시나요?”
엘프의 고귀함과 우월함을 튀니지 세상 전체에 보여 주며 인간들의 오만한 콧대를 눌러 주며 기강을 확립한 아스테리아. 그리고 그런 내 물음에 그녀는 아직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아직은 아니에요. 오히려 이제 시작이죠.”
“이제……. 시작이라고요?”
“네. 제가 알아 보니, 그 튀니지라는 세상은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이면 세계로 나누어져 있더라고요. 이제 하나하나씩 정복해 나가야죠.”
“……?”
잠깐 아스테리아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향후 계획을 가만히 들어 보던 나는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플레이 중인 서버에서 다른 서버로 이전해서 하나하나 모조리 다 쓸어버리면서 도장 깨기하고 다니시겠다……. 이 말인가요?”
“네. 아직 그 세상에는 불의를 저지르고 다니는 추악한 인간들이 사방에 깔려 있더군요.”
너무나도 당당하게 계속해서 게임을 할 예정이라는 아스테리아.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이 아름답고 고고하고 품격 있어 보이는 외형의 엘프는.
실상 방구석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는 백수 새끼랑 다름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후후후……. 재밌네요.”
우우우우웅.
내 미소와 함께 반응하는 마력.
그 마력의 폭풍에 아스테리아는 일순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굳혔다.
“사……사도시여. 무슨 문제라도…….”
비록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이 세계의 자라나는 세계수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은 유일한 사도인 멀린. 푸르른 일족의 잎사귀의 지도자. 엘프 여왕 엘리시아조차도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는, 서열로 따져도 푸르른 잎사귀 일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그였기에 아스테리아는 그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꼭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정확히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화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일까요? 이건 저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서요.”
심각한 게임 중독의 상태로 보이는 아스테리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게 그렇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미친 듯한 중독성을 자랑하며 수많은 이들이 밤을 지새우게 했던 악마의 게임. 튀니지. 오랜 시간의 서비스 시간 동안 쌓여 온 유저를 개돼지 취급하며 사육하고 조련하며 지갑에서 돈을 뽑아내는 운영 능력이 거의 신의 경지에 달한 전문가들이었기에, 풀과 나무만 보면서 한평생을 자라난 엘프 따위가 저항하기에는 그 자극이 너무 강했을 것이 분명했다.
“이거 하나만 물어보죠. 당장 그 게임을 접고 캐릭터를 삭제하라고 하면 할 수 있겠어요?”
“네……? 어……어떻게 그런!”
내 말에 화들짝 놀라는 아스테리아. 그리고 그녀는 잠깐 주저하다 이내 어두운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사……사도님께서 명령하신다면, 일족의 일원으로서 따를 수밖에 없겠지만……. 일곱 번째 가지는, 저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입니다. 제발 그것만은……!”
고작 0과 1의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한 게임 캐릭터에 너무 과할 정도로 몰입해 있는 아스테리아.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며 나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마음. 잘 알겠어요. 캐릭터를 삭제하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정말인가요?”
내 말에 축 늘어진 귀를 다시 쫑긋 새우며 화색이 된 얼굴로 묻는 아스테리아.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나는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요. 그리고 이왕 그럴 거라면 다른 동료들에게도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건 어떻겠어요?”
“동료요……?”
무한에 가까운 과금력을 기반으로 혼자 수십, 수백 명을 상대로 이길 정도로 무쌍을 찍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 왔던 아스테리아. 그런 그녀에게 나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화성에 있는 일족들에게 튀니지를 할 때 필요한 장비들을 보내 주도록 하죠. 어차피 마나 링크와 연결되어 있는 게임 시스템이라서 그곳에서도 플레이하는 데 특별한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아스테리아는 이곳 지구에서 외로이 혼자만의 싸움을 계속할 필요가 없어요.”
“푸르른 잎사귀 동료들과 함께 그 인간들의 불의에 항거하는 싸움을 이어 갈 수 있는 거죠.”
같은 일족의 동료들과 함께 플레이할 수 있다는 내 달콤한 속삭임에 아스테리아의 눈은 충격과 놀라움으로 동그래졌다.
“오오! 세상에 그런……!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로 기쁜 일이 되겠군요!”
머릿속에서는 이미 자신들의 동료 요정들과 함께 튀니지 속 인간들의 모가지를 썰러 다니는 미친 요정 혈맹을 만들어 낼 계획까지 전부 떠올리는 것 같은 아스테리아. 그리고 그녀는 진심으로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사도시여. 역시 우리 일족을 이끄는 그 위대한 현명함은 저로서는 그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군요.”
“아, 그래서 그런데 관련 서류 몇 가지를 좀 확인하고 작성해 주시겠어요? 엘븐 킹덤에 보낼 스마트폰과 태블릿 장비, 그리고 인앱 결제 서비스 대행과 관련한 간단한 동의서와 계약서들이에요.”
기쁨과 흥분에 눈이 먼 그녀에게 내민 몇 가지 서류.
그리고 그녀는 그 내용을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흔쾌히 서명을 적어 넣었다.
[ 주인, 왜 그런 거야? ]
“뭐가?”
분명 이 금전 감각이 모자란 엘프를 따끔하게 혼내 주고 재사회화시켜 주는 참교육의 장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던 용용이. 하지만 별다른 잔소리나 화도 내지 않고 그저 웃으면서 부드럽게 달래 주고 도리어 다른 엘프들에게도 게임을 할 수 있는 장비들을 쥐여 주는 나를 보며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한 놈만 해도 고작 두 달 만에 100억여 원이나 게임에다가 쏟아부었는데, 이제는 그걸 백여 명의 엘프들이 모두가 저지르고 다니게 만들겠다고? 그렇게 하면 주인이 돈이 아무리 많아도 다 감당하기에는 버거울걸? ]
산술적으로만 봐도 두 달에 조 단위의 돈을 녹여 버릴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가진 엘프들. 하지만 나는 조금도 그 돈이 아깝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공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뭐 어때? 이제부터는 자기들이 번 돈으로 게임에 지르겠다는 건데.”
[ 뭐……? ]
“방금 아스테리아가 동의서 쓰고 갔잖아. 여기 이거. 안 보여? 인앱 결제 서비스 대행 계약서랑 용역 제공 동의서.”
아스테리아가 별것 아닌 것처럼 무작정 서명하고 넘겨 버렸던 서류.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그녀만이 아니라, 엘븐 킹덤에 소속된 일족 전체를 저당 잡는 아주 무시무시한 서류였다.
[ 잠깐만……. 그럼 이제부터 저 금전 감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엘프들이 지르는 모든 돈은 주인한테 빚지면서 쓰는 돈이라는 말이야? ]
“나라고 뭐 흙 파먹고 사냐? 저 녀석들이 조금만 쓰면 몰라, 한 명이 한 달에 게임 따위에 수십억 원 단위로 돈을 지르고 다니는데 그걸 내가 왜 책임져?”
[ 저 엘프들한테 무슨 돈이 있다고……? 아니, 잠깐만. 그럼 주인 설마 일부러……? ]
엘븐 킹덤을 대표하는 정식 외교관의 신분으로 온 아스테리아.
그녀가 내린 모든 결정과 합의는 곧, 엘븐 킹덤의 일원 모두가 동의하고 사안이었기에 나의 손에 들려 있는 이 계약서와 동의서는 완전무결하고도 깨끗하고 합법적인, 그리고 동시에 강력한 구속력을 가진 법적인 외교 문서였다.
“갑의 카드로 결제된 모든 인앱 결제에 대한 대금은 엘븐 킹덤에서 익익월 내에 지급되어야 한다. 이를 어길 시에는, 을은 신속하게 이에 관한 채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지연액에 대한 연이자는 법정 최대한도인 27.9%로 책정한다.”
“또한, 대금을 지급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갑은 을에게 정당한 근로와 노동을 통한 용역 및 서비스 제공을 통해서 이를 공제하거나 일부를 감면할 수 있도록 요청할 수 있으며, 을은 이를 거부할 중대하고 심각한 사정이 없는 한, 이 요청에 응해야만 한다.”
히죽 웃으며 나는 내 손에 들린 아스테리아의 서명이 적혀져 있는 서류들을 금고 안에 잘 집어 넣으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차라리 잘 된 거지. 이제 필요한 게 있으면 당당하게 그들한테 시킬 수 있는 명분이 생겼잖아? 그들도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생기기도 했고 말이야.”
[ ……. 너무 악랄한 거 아냐? ]
세상 물정 모르는 엘프들의 코를 하나도 아니고 모조리 베어 가 버릴 생각을 하는 멀린.
하지만 그는 너무 당당하고 뻔뻔한 태도로 되물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어.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라는 걸 모르고 무작정 받기만 하는 그 태도가 잘못된 거 아냐?”
신성한 노동을 통해서 얻어 낸 재화로 자신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
자본주의의 사회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정당한 일이었기에 나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싸늘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예수가 말했지.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고.”
“이제 우리 엘프들도 신성한 노동의 참맛을 알아야 할 때가 된 것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