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전 세계의 게이머들과 개발자들이 모이는 초대형 행사.
GDC(Game Developer Conference).
개발 진행 중인 신작 게임들에 관한 가장 최신 정보가 공개되고 심지어 체험까지 해 볼 수 있는 이곳에 출사표를 던진 한 기업 때문에 전 세계가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 매지컬 컴퍼니. GDC 2024에 참가 신청 공식 확인.
- 게임 개발에 뛰어드는 매지컬 컴퍼니? 관련 게임 업계 초긴장.
- 요동치는 게임 관련주 주가. 과연 이번에는 어떤 거대한 혁신의 광풍을 몰고 올 것인가?
어떤 사업이든 손을 댔다 하면 관련 산업계 전반에 걸쳐 지구적인 영향력을 몰고 오는 매지컬 컴퍼니. 그렇기에 전혀 예기치 못하게 기습을 받은 게임 업계 전반에 커다란 혼란이 밀려왔지만, 게임 업계의 개발자들은 이러한 혼란을 단호한 어조로 일축했다.
[ 게임은 영상, 음악, 미술, 서사를 비롯해 시스템과 설정 등 온갖 다양한 장르가 융합된 종합 예술입니다. 전문적인 기술력과 노하우 없이 단순히 막대한 자본의 투입으로만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어느 정도 흉내를 낼 수는 있겠지만, 오랜 시간 동안 게임 개발에 매진해 온 기존 게임 회사들의 저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겁니다. ]
[ 매지컬 컴퍼니라는 이름에 게임 시장 전체가 너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합니다. 매지컬 컴퍼니 내부에 게임 관련 개발을 해 온 인력이 있기는 합니까? 이쪽 업계가 생각보다 엄청 좁아서 어느 정도 실력 있는 이들은 서로 어디에 일하는지 다 아는데 매지컬 컴퍼니에서 일한다는 게임 개발자는 들어 본 적이 없군요. ]
[ 이번에 GDC에서 공개할 게임의 이름이 ‘스토리 오브 판달리아’라고 들었습니다. 게임 타이틀만 봤을 때는 판타지 장르의 RPG인 것으로 보이는데……. 최근 사양되는 장르인 RPG에서 얼마나 게이머들의 그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개인적으로 기대되는군요. ]
게임 개발과 관련해서 쥐뿔도 모르는 회사가 어딜 감히 건방지게 나서냐는 반응이 대부분인 상황. 하지만 별다른 기대가 되지 않는다는 전문가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유저들 대부분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관심을 보여 주고 있었다.
- 멀린 묻었으면 끝난 거 아님?
- 도대체 뭘 만든 거지? 그냥 게임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 아마 마나 링크를 기반으로 한 신개념 대규모 RPG 게임이 아닐까?
- 게임을 좀 해 보고 만들기는 했으려나 모르겠네. 빛 좋은 개살구일지도 모르지.
- ㄹㅇ ㅋㅋ. 멀린 걔는 딱 봐도 완전 겜알못인 거 같은데.
- 사실 제목은 좀 별로긴 해. 스토리 오브 판달리아가 뭐냐? 유치하게.
- 멀린 작명 센스 개후진 거 몰랐음?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반응이 혼재된 사람들의 반응 속에서 시작된 GDC에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렸다.
앰플, 매크로소프트. 볼케이노. 고글…….
그 이외에도 게임을 넘어선 수많은 IT 기업들의 고위 임원들이 앞다투어 참석한 자리에서 나는 직접 마이크를 들고 단상에 서서 모두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발표를 시작했다.
[ 반갑습니다. 게이머 여러분. 저는 세상에서 제일 개쩌는 대마법사. 멀린입니다. ]
[ 제가 이번에 우로보로스의 입학시험을 준비하면서 만들어 낸 제품에 대해서 다들 익히 들어 봤을 겁니다. 그 제품의 정식 명칭은 ‘되풀이되는 환상’이라고 부르는 아티팩트예요. 제가 사전에 설정해 둔 환상을 착용자의 꿈속에서 지속해서 보여 주죠. 물론 연속해서 같은 시험만 반복해서 치러야 하는 상황은 그야말로 악몽이나 다름없는 일이겠죠? ]
CIA에서 그렇게 군침을 흘리며 하나만 주면 안 되냐고 물어봤을 정도로 방대한 시간의 흐름을 감당하기 힘든 나약한 인간에게는 아주 가학적이고 잔인한 도구.
하지만,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이 자그마한 팔찌는 완전히 다른 용도로 만들어졌다.
[ 여러분도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만약 우리가 꾸는 꿈을 통제하고 원하는 형태로 구현해서 얼마든지 원하는 시간만큼 머물 수 있게 된다면, 그 안에서 얼마나 안락하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유희를 즐길 수 있을지 말이죠. ]
[ 침대에 누워 자기 전에 이 팔찌를 장착한다면, 여러분은 신비로운 신수를 타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거나 에메랄드빛 바다를 마음껏 헤엄치고 다니고. 호화로운 무도회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잘생긴 남성과 춤을 추거나 마을 축제에서 실컷 먹고 마시며 색다른 체험을 할 수도 있죠. 여러분의 꿈……. 정확히는 심상 세계 속에서 말이죠. ]
심상 세계를 조작하고 내가 설정한 형태의 세계로 조작해 주는 아티팩트.
루시드 드림(Lucid Dream).
그리고 그런 내 신제품 발표를 듣는 사람들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갔다.
“그러니까……. 지금 꿈속에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는 건가?”
“이런 미친……. 그게 가능해?”
“잠깐만 저거 그러면 설마…….”
“가상현실……?”
게임 업계에서는 꿈의 기술이자 관련 기술의 진보가 극에 달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
가상현실(假想現實).
무에서 하나의 가상 속 세계를 창조하고 자유롭게 즐기고 체험하고 싶다는 상상은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은 해 보는 상상이었지만, 현실에 산재한 무수히 많은 기술적 난제 속에서 그러한 가상현실이 세상에 출시되는 것은 요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꿈이라는 심상 세계 속에서 구현된 환상은.
그 불가능을 너무나도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자……잠깐만요! 질문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광기가 묻어나는 괴성 속에서 번쩍 들린 손.
그걸 시작으로 사방에서 앞다투어 쏟아지기 시작한 질문들로 인해 일순간 관중석은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내가 차분하게 하나하나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주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이내 진정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 현재까지 제가 만들어 낸 꿈의 종류는 대략 8개 정도예요. 해당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마나 링크가 필수적이라서 혹시라도 아직 마나 링크 서비스를 쓰지 않으신다면 이참에 통신 회사도 갈아타셔야겠죠? ]
[ 아뇨. 관련 기술을 다른 게임사에서도 원한다면 제공은 해 드릴 수 있는데, 기존 게임 개발과는 완전히 달라요. 원하는 환상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려면 일단 기본적으로 환상 마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수련한 마법사가 필요하죠.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나중에 일루젼 학파를 나온 마법사들을 대거 채용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
[ 과금 모델이요? 음……. 일단 지금 고려 중인 모델로는 구독형 결제로 나갈 생각이에요. 1일 기준 10달러의 비용으로 책정할 예정이에요. 비싸다고요? 저도 아는데 이건 어쩔 수 없어요. 우리 회장님이 돈 없다고 하도 뭐라고 해서 돈 벌려고 만든 녀석이니까요. ]
[ 차후에 다른 마법사들이 만들어서 마나 링크에 올려 둔 콘텐츠들은 여러분이 추가로 돈을 지불하고 구매해야겠지만, 그래도 제가 만든 기존 콘텐츠들은 전부 무료로 제공될 예정이에요. ]
일종의 심상 세계 속 플랫폼 역할을 하게 될 마나 링크.
이를 통해서 일루젼 학파의 마법사들이 구현한 환상을 팔아먹으며 수수료 장사를 하며 수십억 명의 전 세계 소비자들의 지갑을 탈탈 털어먹으려는 나의 원대한 계획에 누군가가 손을 들고 물었다.
[ 이야기하시는 내용을 들어 보니 전부 혼자서 즐기는 그런 것들인 것 같은데……. 혹시 연인이나 가족, 혹은 친구와 함께 꿈에서 만나는 건 불가능한 겁니까? ]
싱글 플레이 말고 멀티 플레이는 지원 안 하냐고 물어 오는 물음.
그리고 그 말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당연히 불가능하죠. 심상 세계라는 것은 자아를 가진 한 주체의 내부에서 구현된 일종의 독립적이고 폐쇄적인 세계나 다름없어요. 그걸 다른 자아를 가진 존재가 침입한다? 아마 이 경우에는 둘 다 자아가 붕괴하거나 뒤섞여 미쳐 버리게 되는 경우가 99.9%일걸요? ]
루시드 드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그 모든 경험은 개인의 꿈속에서 벌어지는 환상에 불과하기에 현실적으로 구현하기에는 절대 불가능한 기능인 멀티 플레이.
하지만 무릇 인간은 혼자 무언가를 즐기는 것보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즐기는 것을 선호하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내 말에 사람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쩝……. 제일 치명적인 단점이네.”
“그러게……. 아무리 환상적인 휴양지라도 혼자서 즐기면 금방 질리지 않을까?”
“멀티 플레이가 안 되는 게임은 좀 별론데.”
“애초에 저건 게임이라고 보기는 조금 그렇지 않나?”
술렁거리는 유저들의 아쉬운 반응에 조금은 반색이 되는 게임 업계의 관련자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반응을 한껏 즐기던 나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히죽 지으며 하다 만 말을 이어 갔다.
[ 하지만, 제가 누군가요? 이 멀린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는 법이죠. ]
“……?”
의미심장한 내 말에 일순간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일제히 나에게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
그런 그들에게 나는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아주 복잡하고 까다로운 마법들을 여럿 조합하고 조합해서 결국 완성해 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의 자아가 게슈탈트 붕괴를 일으키지 않고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수많은 이들의 심상 세계를 안정적으로 하나로 엮어 내는 비장의 기술. 통합사념망(統合思念網)을 말입니다. ]
전지의 권능 속에서 얻어낸…….
마법 문명에서도 아득히도 머나먼 미래에 극한으로 발전한 일루젼 학파의 마법.
통합사념망.
자아를 가진 수많은 존재의 사념들이 자유롭게 공존하고 소통하며 하나의 심상 세계 속에서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이 마법을 통해서 나는 아득히도 우월하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방대한 심상 세계를 가진 용용이에게로 인간들을 초대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럼 이제 어느 정도 개념 이해가 되었을 테니 슬슬 소개해 보도록 하죠. 여러분이 경험해 보지 못한 최고의……. 그리고 최악의 난이도를 가진 게임. ‘스토리 오브 판달리아’의 모습을 말이죠. ]
쿠궁.
내가 손을 튕기자 나를 비추던 스포트라이트가 전부 꺼지고 비장하고 웅장한 음악과 함께 그 누구도 보지 못한 환상의 세계가 초대형 스크린을 통해 모두에게 선보여지고 있었다.
[ 망국의 공주여. 그대는 어째서 나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거지? ]
[ 당신은 지금껏 제가 봐 왔던 어떤 기사보다도 강하니까요. ]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남루한 행색의 여인이 황금빛의 눈동자와 머리칼로 반짝거리는 꽃미남 기사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영상.
그리고 그 여인은 무언가 결심한 듯한 비장한 눈빛으로 그 기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저는 몰락한 망국의 공주입니다. 나라와 아비, 그리고 가족 모두를 잃고 이렇게 도망자 신세가 되어 가벼운 깃털 같은 목숨을 겨우 부지하고 있지만, 저와 왕실의 부족함과 무능함 때문에 이 땅의 수많은 백성이 죄없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
망국의 공주와 이름 모를 황금의 기사.
너무나도 생동감 넘치게 움직이며 무언가 심오한 대화를 나누는 이 둘에게 사람들은 숨도 쉬지 않고 완전히 몰입했다.
[ 원한다면 저의 영혼까지도 바치겠나이다. 그러니……. 저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십시오. ]
[ 부디 이 땅의 백성들을 저를 대신해 구원해 주시기를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
공주의 말에 한참을 침묵하던 황금의 기사.
그리고 그는 이내 말했다.
[ 좋다. 너의 그 하잘것없는 부탁을 들어주지. ]
[ 저……정말인가요? ]
[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한동안 지루하지 않은 나름 재밌는 유흥거리가 될 것 같아서 수락하는 것이니 말이야. ]
절대자로서의 압도적인 기운을 풍겨 내며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황금의 기사는 말했다.
[ 하지만 조건이 있다. ]
[ 조건이라면……? ]
[ 네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지금부터 그대가 마지막 숨을 내뱉는 그 순간까지 너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심지어 말하는 것조차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
[ 그런……. ]
[ 그 대신, 그대의 백성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풍요와 안정 속에서 살아가게 되겠지. 바로 나, 골드리안의 통치 아래에. ]
[ 선택해라. 비록 철창 안에 갇힌 꼭두각시 인형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더라도.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희생해서 백성들을 구원할 것인가? 아니면 외적들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하며 고통 속에서 죽어 가게 내버려 둘 것인가? ]
인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선택하라는 골드리안의 말에 고민하던 그 망국의 공주는 입술을 질끈 씹으며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 모든 것은……. 당신의 뜻대로. ]
그렇게 인트로가 끝나며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판달리아.
어디인지도 모를 다른 이차원에 존재했던 판달리아의 모습이 공개되자 사방에서 어마어마한 감탄과 환호성이 들려왔다.
“와……. 저거 뭐야?”
“그래픽 미쳤는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규모가 얼마나 되는 거야?”
“저게 실제 플레이가 가능한 지형들이라고?”
용용이가 실제로 활동했던 ‘골드리안’의 일대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스토리 오브 판달리아.
그의 심상 세계 속에 구현된 세상의 모습을 보며 모두가 경악 어린 표정으로 입을 하염없이 벌리고 있는 그 순간, 나는 손발을 부여잡고 있었다.
“아오, 야. 대사 저거 실화냐?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시공간이 오그라들어서 못 참겠다.”
[ 왜? 멋있기만 한데. ]
“멋이 다 뒤졌냐? 도대체 네가 살던 세상은 어떻게 생겨 먹은 곳이길래 그런 정신 나간 멘트를 여자애 앞에서 날리고 앉았냐?”
[ 뭔 소리야? 그때 안드레아 저게 나한테 얼마나 뿅 갔는데. ]
“뿅 가긴 얼어 죽을. 너 나중에 NPC들 스크립트 전부 나한테 검수받아. 무슨 중2병 걸린 유저들만 대상으로 한 게임도 아니고 저런 오글거리는 대사가 먹히겠냐?”
[ 아! 주인! 다른 건 다 좋은데 골드리안은 건들지 말라고! 그건 실제 이야기고 역사적 고증이나 다름없는데 그걸 왜 바꿔? 드래곤의 존재도 모르는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나의 흘러넘치는 위엄과 간지를 생동감 넘치게 보여 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
“시끄러워. 애초에 네가 저 제국의 황제라는 설정도 마음에 안 들지만 참고 있는 거라고.”
[ 안 해! 못 해! ]
“어쭈? 이게 또 까부네? 너 오랜만에 터보 모드 맛 좀 보고 싶냐?”
[ 아오! 진짜! 이럴 때마다 자꾸 그러기야? ]
전 세계의 게이머들이 열광하는 가상의 세계인 스토리 오브 판달리아.
하지만 이 세상은 사실…….
말기 관심 종자에 겉멋만 잔뜩 든 자의식 과잉의 중국산 짝퉁 용가리 인형인 용용이의…….
자캐딸을 위해서 만들어진 세상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