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55화.
729회차의 로또 추첨.
본래 10명도 채 되지 않는 적은 수의 당첨자를 배출하며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그저 그렇게 지나갈 추첨에 불과했겠지만, 과거로 돌아온 나라는 변수로 인해서 그 예정되었던 미래가 완전히 새롭게 뒤바뀌어버렸다.
[ 로또 당첨 번호를 사전에 알아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조작을 방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대책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일단 추첨을 위한 기기부터 어떤 것을 사용할지 무작위로 정해지며, 수많은 관객과 경찰관이 대동한 상태에서 생방송으로 모든 추첨 과정이 진행되게 됩니다. 그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 속에서 당첨 번호를 조작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
[ 로또 복권 발행 사업의 주무 기관인 기획재정부에서 해당 사안에 대해서 면밀한 감사에 착수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부정한 방법으로 로또의 당첨 번호를 유출하거나 혹은 조작했다는 일말의 증거라도 발견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해프닝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
[ 로또가 뭡니까? 단순한 일확천금을 위해서 사는 도박이 아니라 서민들에게는 인생역전을 꿈꾸며 고된 하루하루를 잠시나마 잊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어볼 수 있게 해 주던 수단입니다. 그런 로또에서 조작이나 부정행위라뇨.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그 진상을 반드시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
814만 분의 1.
길 가다 벼락 맞을 확률보다도 훨씬 더 낮은 당첨 확률을 가진 로또.
그 로또의 1등 번호를 어느 철부지 중학생이 귀신같이 알아맞혔다는 사실은 그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을 넘어 복권 사업 자체에 대한 신뢰성을 의심하게 했다
- 아니, 상식적으로 마법이 말이 되겠냐 로또가 조작이라는 게 말이 되겠냐?
- ㅋㅋㅋㅋ 아직도 로또 사는 멍청이들이 있냐? 그거 다 조작이라니까?
- 당첨금의 절반이 세금으로 뜯기는 것도 모르네. 그거 다 짜고 치는 고스톱임
- 매번 당첨자가 엇비슷하게 나오는 것만 봐도 뭔가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가 손을 쓰고 있다는 건 대충 짐작할 수 있음.
- 참고로 다른 나라에서 복권 조작한 사건 있었는데 그때 거기서 사용한 기계랑 로또가 사용하는 기계가 같은 것임.
온갖 음모론과 허위사실이 난무하며 로또가 전부 사기라는 주장이 인터넷에 만연해진 상황. 그렇기에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경찰은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조사에 착수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난항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 번호들이 전부 찍은 거라고?”
“네. 방송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그 양구찬인가 양세찬인가 하는 아저씨가 저한테 대놓고 시비 걸잖아요. 그래서 그냥 꼴 받아서 냅다 지른 거예요.”
“······.”
그냥 아무렇게나 번호를 찍었다고 진술하고 있는 15세 소년. 김철수.
뮤튜브에서는 위대한 대마법사 멀린이라고 스스로를 지칭하며 온갖 광기 어린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지금 경찰서에 출석해 조사를 받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순진하고 앳된 중학생 소년의 모습 그 자체였다.
“크흐흠······. 찍었다고 하기는 너무 확신에 찬 얼굴로 번호를 말하던데?”
생방송으로 그가 로또 복권의 번호를 말하며 양구찬에게 욕을 박아버리는 모습까지 봤던 김 형사. 그 순간을 자신의 두 눈으로 보았기에 그는 그것이 그저 우연히 맞춘 것이라는 진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그럼 제가 마법으로 미래를 예지해서 맞춘 거라고 거기 조서에 쓰시게요?”
“······.”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보세요. 그렇게 써서 올리면 아마 형사님 윗선에서 뭐라고 할지 진짜 궁금하긴 하네요.”
그렇다고 다른 주장 역시 터무니없을 정도로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제가 만약에 정말로 로또 1등 당첨 번호를 알고 있었다면 과연 생방송으로 그렇게 전 국민에게 말했을까요? 그냥 저 혼자 몰래 똑같은 번호로 수십 장을 사서 죄다 독식하고 말지?”
자그마치 10만 명이라는 기록적인 당첨자 수를 경신한 729회차 로또 복권.
그로 인해서 1등임에도 불구하고 고작 1게임 당 당첨금이 20만 원에 불과한 경악스러운 상황이 벌어져 오히려 2등에 당첨된 사람들이 더 많은 상금을 타갈 수 있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뭐든 심문은 해야 하지만, 그 어떤 정황도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기묘한 상황. 그렇기에 할 말이 없어 연신 입을 뻐끔거리며 우물거리던 형사에게 내 변호사가 조금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상 물어볼 내용 없으시면 이만 조사 끝내시죠.”
“에······. 그게······. 아직 물어볼 내용이 더 남았는데······.”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조사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만한 소득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 하지만 이번 사태에 과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아무런 수확 없이 조사를 끝내서는 곤란했다.
하지만······.
“제 의뢰인은 아직 미성년자인 학생입니다. 이런 식으로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일방적으로 붙잡아두고 계속 심문하겠다면 저도 의뢰인의 변호인으로서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법무법인인 이앤장의 변호사.
그것도 파트너급의 고위 변호사가 직접 나서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경고하자 아직 경력이 낮은 일개 형사에 불과한 그로서는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다.
“크흠. 알겠습니다. 일단 오늘 조사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죠.”
“이게 전부예요? 엄청 간단하네요.”
“······.”
별 것 아니라는 듯, 실망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내 말에 똥 씹은 표정을 짓는 형사.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조사를 통해서 어떻게든 로또 1등 복권 번호가 유출될 수 있었는지 그 경위에 대한 자그마한 단서나 실마리라도 얻어내야 하는데, 사실상 그의 손에 놓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정신머리 없는 철부지 중딩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번호가 말이 안 될 정도로 터무니없는 운이 작용해 우연히 전부 당첨 번호였다거나.
아니면 정말 마법을 이용해서 미래를 예지해 로또 1등 당첨 번호를 알아냈다거나.
둘 다 터무니없이 허무맹랑한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 상황.
이걸 가져다가 수사결과라고 발표했다가 닥쳐올 끔찍한 후폭풍을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이야기를 짜깁기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그 대상이 만만치 않았다.
“제 의뢰인이 물론 생방송 중에 성급한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떠한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른 적 없는 성실한 학생입니다. 마술에 심취하고 조금 독특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아주 우연한 상황 속에서 극적으로 벌어진 이 상황을 갖고 복권 당첨 번호 조작이라니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 제 의뢰인은 그 어떤 경찰 조사에도 협조하지 않을 것을 밝힙니다.”
“그게 무슨······.”
“어차피 형사적 책임에서 면책되는 미성년에 해당하는 촉법소년이기에 설사 불법 행위가 있었더라 하더라도 형사님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설사 최악의 경우라 하더라도 보호 수감이겠죠. 하지만, 제 의뢰인이 저지른 잘못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성급하고 충동적인 청소년의 돌발 행동이었을 뿐이지.”
앞으로는 모든 조사에 불응하겠다며 초강수를 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변호사. 그런 그를 따라서 경찰서 밖을 향해 두 발로 유유히 걸어 나갔지만, 그 누구도 나를 막아서지는 못했다.
“변호사는 기대하고 있지도 않았는데, 이호준 회장님이 꽤 이번 일에 신경을 많이 쓰셨나 보네요.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이렇게 사람까지 보내주시다니 말이에요.”
수사를 무사히 마무리하고 경찰서를 나서는 동안 나와 천천히 걸음을 맞추며 걸어가는 말끔한 양복 차림의 중년 변호사. 그는 내 말에 묘한 눈빛으로 나를 잠깐 바라보다 이내 작게 미소 지으며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회장님께서 중요한 분이니 앞으로 최선을 다해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혹시라도 필요한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이 번호로 연락 주십시오. 가능한 어떤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 도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중학생 정도인 나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고는 명함을 건네는 그. 그런 그의 명함을 받아들고 주머니에 넣은 나는 이내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뭐······. 사고 적당히 치고 다니라는 말로 알아듣도록 하죠.”
“예······?”
“저라고 뭐 눈치가 없을 줄 아세요? 인터넷에 로또가 조작이라는 여론이 쫙 풀리던데. 누가 봐도 어디서 알바 푼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수가 어마어마하더라고요.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여론을 그쪽으로 몰아가려고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 냄새가 진하더라고요. 어떻게든 진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죠.”
“······.”
히죽 웃으며 다 안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나.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는 변호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가만히 서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경찰서를 나서기 위해서 정문을 향해 걸어가던 나는 이내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서 앞에 몰려들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기자들. 그런 그들을 발견한 나는 이내 멈춰 서서 가방을 열어 주섬주섬 무언가를 챙기기 시작했다.
“저기······. 철수 님. 지금 뭐 하시는 건지······.”
“뭐하긴 뭐해요? 저기 기자들 밖에 쫙 깔린 거 안 보여요? 이럴 때 쇼맨십도 좀 보여주고 그래야죠.”
안 그래도 저조한 조회 수에 자극적인 기삿거리를 찾아 허덕이고 있을 기자들.
그런 그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한순간에 조회 수를 폭발적으로 늘릴 수 있는 탐스러운 먹잇감이나 다름없었고, 또 언론과 기사에 오르내릴수록 나의 인지도 역시 늘어나기에 나는 서로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 온 상태였다.
펄럭.
평범한 중학생 철수에서 광기 어린 위대한 대마법사 멀린으로 변신한 상황.
그리고 이내 황당한 눈빛으로 경찰서에까지 그 미친 복장을 챙겨왔냐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변호사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물었다.
“어떻게······? 같이 나가실래요? 위대한 대마법사 멀린을 변호한 이앤장 변호사. 기사 제목으로 나쁘지 않은 것 같지 않아요?”
어쩌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질 수 있을 절호의 기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제안이었지만, 그런 나의 물음에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고 확고한 목소리로 답했다.
“······. 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나가시지요.”
“뭐. 원하시는 대로.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세요.”
지금 당장은 미친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함께 카메라에 찍히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그. 하지만 그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차 버린 그의 선택에 나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경찰서의 정문을 열어젖히며 카메라 앞에 섰다.
“어! 멀린이다!”
“어디! 어디!”
내가 경찰서를 나서자마자 요란한 플래시를 터트리며 몰려드는 기자들. 그리고 그들은 앞다투어 나를 향해서 온갖 질문을 쏟아냈다.
“멀린님! 여기 한 번만 봐 주세요!”
“정말 로또 당첨 번호를 예지해서 알아낸 게 맞습니까?”
“로또 번호를 조작하고 유출한 혐의로 조사받았다고 하는 게 사실인가요?”
“멀린님. 정말로 마법사라고 본인 스스로 생각하고 계신 건가요? 답변해 주십시오.”
어떻게든 카메라에 나를 담고 내가 하는 말을 기사화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기자들. BMC의 사태로 인해서 앞으로 다시는 방송국 입구에 얼씬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 어느 때보다도 나의 인터뷰를 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이들의 반응에 나는 웃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을 한껏 즐기며 나는 씨크릿 쮸쮸 요술봉을 휘두르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질문 딱 5개만 받습니다. 선착순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