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화.
2040년 5월 12일.
영화 속에서나 듣던 최후의 날이 갑자기 찾아왔다.
[ 공습 경고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전역에 실제 공습 경고를 발령합니다. 이 경보를 듣고 있는 모든 시민은 지금 즉시 가장 가까운 지하 대피소나 지하철역으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현재······. ]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이 울려 퍼지기 시작된 경고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어오른 거대한 버섯 형태의 죽음의 구름이 지구 전역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하면서 전 세계는······. 아니, 인류는 자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우웅.
지구 전역에서 낮이고 밤이고 쉴새 없이 터져나간 수많은 핵무기.
이미 오래전에 완성된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에 따라 확실한 보복 조치를 감행하며 특정 국가를 가리지 않고 날아가기 시작한 핵 공격은 순식간에 전 세계의 대도시들을 파괴해버렸고 곧이어 퍼져나간 방사능의 분진과 비로 인해서 지구 대부분이 죽음의 대지가 되어버렸다.
하루아침에 사회의 필수적인 기반과 통제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해버린 결과. 이 세상은 수천 년에 걸쳐 쌓아 올렸던 인류의 찬란했던 문명이 무너지고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야생과 야만의 시대로 되돌아갔다.
기아, 폭동, 약탈, 살인, 방화, 강간······. 심지어 식인까지.
천인공노할만한 범죄와 온갖 악질적인 행태가 곳곳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현세의 지옥도.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이 지옥 같은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나는 채 1년도 버티지 못했다.
“크헤헤헤헤헤! 이거 봐! 여기 괜찮은 사냥감을 잡았어!”
“쓸만한 물건은 없나? 좀 뒤져봐.”
“에이······. 뭐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비렁뱅이였구먼.”
기습적으로 날아온 화살에 심장을 정확히 관통당하고 뜨겁게 흘러나오는 핏물을 부여잡으며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킬킬거리며 등장한 빌어먹을 세 마리의 야만적인 짐승 새끼들. 그들은 거칠게 내 몸을 뒤적이며 약탈할 물건을 찾으며 중얼거렸다.
“끄으으으으······.”
흐려지는 의식을 부여잡고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나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쳐 보이는 야만인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한 남자. 그는 누워 있는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히죽 웃으며 말했다.
“크크크······. 그래도 최소 일주일 치 식량은 되겠는데 뭐.”
그렇게 나는 죽었다.
미쳐버린 세상에서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뭣할 놈들의 양식이 되는 처참하고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며 말이다.
*
“이건 무슨······?”
분명히 심장을 관통당해 확실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상황. 하지만 눈을 떠보니 펼쳐진 광경을 보며 나는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우주 공간 속에 자리한 거대한 도서관.
하나만 해도 높이만 거의 성인 남성 둘은 세워놓을 수 있을 정도로 듣도 보도 못한 거대한 크기의 책장이 하나둘도 아니고 수천수만 개······. 아니, 끝도 없이 저 지평선 너머로 펼쳐져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꿈을 꾸는 건가? 도대체 여긴 어디고 이것들은 뭐지······.”
도무지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비현실적인 공간.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바로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의 제목이었다.
[ 마법 이론의 기초. ]
[ 초보 마법사의 필독서 ]
[ 마법 역학 개론 ]
[ 마법 부여의 기본 지침서 ]
“마법······?”
마치 어린아이들이나 보는 유치한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마법. 기본적인 개념이나 설정 정도만 아는 정도지 마법이라는 것에 대해서 깊이 파고든 적도 없었지만, 무심코 꽂혀 있는 책 중 하나를 꺼내 펼쳐본 나는 그 책들에 적혀져 있는 내용은 그저 망상이나 일개 설정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도대체가······.”
너무나도 빼곡하게 무언가가 적혀진 책.
그 내용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안에 한가득 적혀져 있는 심오하고 복잡한 의미를 잔뜩 가지고 있는 구절과 문장들이······. 그리고 온갖 난해하고 기나긴 수식과 기하학적으로 그려져 있는 도형들이 지금 이 모든 것은 농담이나 한낱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뒤에서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너무 그렇게 난잡하게 어지럽히지 말아 줄래? 그렇게 잔뜩 헤집어놓으면 결국에는 내가 다 하나하나 정리해야 하거든.”
정신없이 수십 권의 책을 뽑아 들고 바닥에 던져놓은 책들로 수북한 내 주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은발과 은색 눈동자의 어린 소녀.
이제 겨우 9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체구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기에 나는 무언가 본능적으로 밀려오는 기시감에 물었다.
“너는 누구······?”
“이브. 이브라고 불러.”
“이브······.”
묘하게 친숙한 이름을 가진 의문의 소녀. 그리고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갑자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김철수 맞지?”
“내 이름은 어떻게······.”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이브.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정보들에 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직업은 평범한 회사원. 별다른 특기도, 취미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한심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네. 부모도 없이 하나뿐인 누나와 함께 살아가느라 제대로 된 삶을 살지도 못했었고. 그래도 누나는 꽤 재능은 있어서 나중에는 대성할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나쁜 일에 얽매여서 일찍이 죽어버렸네. 뭐······ 네 녀석이 살아가던 지구의 그 엿 같은 최후를 생각하면 그게 더 나은 죽음인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마치 자신의 모든 일생을 알고 있다는 듯.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내용까지 전부 읊고 있는 이브의 물음에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너······. 도대체 뭐야. 그런 건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나는 알고 싶은 건 모두 알 수 있어. 그게 전지(全知)의 기본적인 권능이니까.”
“뭐······?”
내 반응을 즐기는 듯이 싱긋 웃는 이브. 그리고 그 순간, 문득 나는 깨달았다.
마지막의 빌어먹을 새끼들의 한낱 식량이 되어버리는 최후를 맞이한 내가 지금 이곳에서 멀쩡히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눈앞의 이 소녀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너는······. 아니,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나? 이 도서관의 관리자인데?”
“관리자······?”
마치 신이나 혹은 악마와 같은 초월적인 존재. 감히 인간의 상식과 이해 따위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인외(人外)의 존재를 마주한 나는 복잡한 생각에 빠져들었지만, 이브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나를 마경(魔境)의 존재······. 그러니까 악마 같은 거로 생각하는구나? 하긴······. 아무것도 모르던 입장에서는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걱정하지 마. 뭐가 되었든 네가 살던 그 세계 속에서 생각하는 그런 존재는 아니니까.”
“그럼 도대체 무슨······.”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넘어가고, 본론만 이야기하자. 나랑 계약 하나 하지 않을래?”
“계약······이요?”
뜬금없이 계약하자는 제안을 건네는 이브에게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무언가 짜증 섞인 표정을 지으며 고충 비슷한 무언가를 토로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말이지. 네가 살아가던 그 세상은 내가 아니라 어느 생각 머리 없는 빌어먹을 꼬맹이 새끼의 개념이 지배하는 세상이야.”
“예······?”
“그런데 말이야. 그 새끼가 자기 주제도 모르고 남의 영업장에 와서 깽판을 쳐 놓더라고?”
“······.”
“그래서 나도 똑같이 해 주려고. 말하자면 복수 비슷한 거지.”
“복수······요······?”
도무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잔뜩 화가 난 듯한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던 이브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원하는 거? 그냥 내가 너에게 선사하는 개념을 이용해서, 최대한,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가며 가능한 칠 수 있는 깽판은 모조리 치고 다니는 것. 그게 전부야.”
“깽판이라면······.”
“너도 직접 보고 듣고 뼈저리게 경험하고 왔잖아? 네 세상이 어떻게 망가지고 무너지고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지?”
“······.”
“인간들은 말이지. 참 오만하고 또 멍청해. 이 방대한 대우주 속에서 티끌보다도 못한 한낱 먼지와도 같은 존재일 뿐인데 자신들이 만물의 영장이고 가장 우월한 존재라고 여기며 모든 것을 밑에 두려고 하지. 심지어 자신들이 살아가는 터전이나 다름없는 자연조차도 말이야.”
자신들의 탐욕과 욕심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자멸의 길을 선택해버린 인류를 비웃으며 냉소적인 눈빛으로 중얼거리는 이브. 그리고 그녀는 나의 귓가에 마치 악마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한심하고 딱한 결말을 바꿔보고 싶지 않아? 무슨 수단을 이용하고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상관없이, 네가 원하든 건 뭐든 해서라도 온갖 깽판을 다 쳐서라도 네가 겪었던 그 미래를 뒤바꿔보는 거지.”
나에게······. 아니, 인류 전체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는 제안을 하는 이브.
그리고 그녀는 무언가 주저하는 것 같은 나에게 거절할 수 없는 당근을 흔들었다.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하나뿐인 누나도 구하고 말이야.”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하냐고?”
진지한 얼굴로 물어오는 나의 질문에 비웃는 듯이 미소 짓는 그녀. 그리고 이어서 감히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힘이 그 어린 체구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영혼마저 휩쓸려 나갈 것 같은 거대한 영압.
감히 이해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성(神聖)을 마주한 나는 감히 하찮은 필멸자의 영혼 따위가 감내할 수 없는 그 압도적이고 초월적인 힘에 나는 신음하며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멸망해버린 차원의 시간선 하나 되돌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하나의 ‘개념’을 지배하는 관리자가 가진 위(位)가 그렇게 만만한 것 같아?”
“끄으으으윽······.”
마치 영혼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 의식이 서서히 흐려지려는 그 순간, 거짓말처럼 사방을 옥죄어오던 기운이 사라졌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내 ‘개념’을 아무런 제한 없이 허락하겠다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제안인 줄 알아? 그 망할 꼬맹이 새끼가 먼저 저질러서 그렇지 나로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도 이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투덜거리는 이브. 그리고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그런데도 왜 너를 굳이 선택해서 이런 제안을 하고 있는지 알아?”
“잘······. 모르겠는데요.”
“그건 바로 네가 가진 가능성 때문이야.”
“가능성······?”
“그래. 너무 불우하고 기구한 운명 속에서 치여 살면서 많이 퇴색되었지만, 나에게는 분명하게 보여. 너의 영혼에 새겨져 있는 그 숨길 수 없는 본질이.”
“······.”
엄청난 무언가가 있다는 듯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는 이브.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넌 그냥 천성적으로 영혼부터 미친놈이야. 그것도 완전 제대로 미친놈.”
“예······?”
“욕하는 거 아니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그 망할 새끼가 어떤 미친놈한테 개념 빌려줬다가 내 영역이 얼마나 박살 나고 있는지 알아?”
“······?”
“미친놈은 미친놈으로 상대해야지. 네가 딱 제격이야.”
“······.”
나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가만히 손을 내밀며 지그시 나를 이브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를 결심하고는 그 손을 붙잡았다.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내 누나와 그 망할 미래만 뒤바꿀 수 있다면 까짓거 해 보죠.”
굳건한 의지가 담긴 내 진심 어린 각오를 들으며 미소짓는 이브. 그리고 그녀는 이내 진한 미소를 지으며 이 거래가 성사되었음을 선언했다.
“계약 완료.”
쿠우우웅.
그 순간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진동음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이 의문의 도서관 전체를 미친 듯이 뒤흔들기 시작했다.
“이······이게 도대체 무슨······.”
하지만 이브는 이 기현상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듯 그저 나를 바라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자······. 그럼 이제 계약도 끝났으니, 돌려 보내줄게. 적응하는데 필요한 시간도 있을 테니 도우미도 한 명 챙겨줄 생각이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뭐······? 자······잠깐만요······. 지금 그게 무슨 소리······.”
따악.
가볍게 퉁겨진 이브의 손가락과 함께, 하던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인류의 탐욕으로 멸망해버린 지구의 이야기가 새롭게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