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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9화: 통쾌하게, 시원하게. (80/80)


외전 9화: 통쾌하게, 시원하게.
2023.08.01.


유설희는 다음 주,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 준비 겸 신혼여행 때문에 오랜 무급휴가를 받았다.

오늘도 그녀는 신혼집 꾸미기에 열심이었다. 아침부터 인테리어 샵 갔다고, 골라달라고 인경에게 사진이 몇 장이나 왔었다.

그런 유설희에게 무슨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에.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결혼해?”

“어.”

어지러운 듯, 찬정은 비틀거렸다. 이러다 쓰러지라지.

찬정 역시, 옛 친구였지만 이제 그의 염치없음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인경에게조차 넌더리가 날 정도였다.

찬정이 다급하게 인경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누구랑?”

“뭐?”

“누구랑 결혼하는데.”

얘는 무슨 또 딴생각이야.


“누구긴 누구야. 옥은우 선생님이지.”

“그때 그 수의사?”

“어.”

“모임에 나왔던.”

“어!”

“말도 안 돼!”

찬정의 말에 어이쿠야, 아직도 꿈속에 사네. 라고 인경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말이 안 되는 건 지금부터였다. 찬정이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곳 중에 WS그룹에 취직하려는 것. 청첩장 받을 때 사실 옥 선생이 WS그룹의 옥경일 회장의 아들이라는 것을 들었다.

물론, 뭐 하찮은 직원에게 뭘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런 우연이 우스웠다.

그러나 옥은우가 WS와 관계있다는 것은 비밀이었다. 결혼식을 할 때까지 설희가 절대로 주변에 말하지 말라고 했다. 식을 올리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알 수밖에 없겠지만.

아직 식은 좀 남아 있었다. 찬정이 알게 되면 그동안 어디로 튈지 몰랐으므로 인경은 겨우 말을 멈추고 마음을 다스리고는 말했다.


“그래, 이찬정. 그러니까 너도 네 인생 살아. 남 인생에 질척대지 말고.”

“내가 언제 질척댔어.”

“설희 병원에도 찾아가고, 동기 모임도 오고, 이번까지. 이게 질척대는 게 아니면 진흙탕도 굳은 땅이겠다.”

인경의 비유 섞인 비난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찬정이 눈을 껌뻑였다.


“에휴,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니가 이러니까 너 설희에게 미움받는 거야.”

“……야, 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오늘 이렇게 만나준 건 고마운데.”

“만나고 싶어서 만난 것도 아니지. 연락 안 된다고 회사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어딨냐?”

그렇게 인경이 말하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와, 그때 설희 동물병원도 가고 여기까지 오고. 생각하니까 얘 상습범이네.”

인경은 참지 않았다. 전에 설희 동물병원 알려준 게 미안해서라도 더 역정을 냈다.


“나 그리고 너 차단했다. 회사에 다시 나타나면 진짜 스토킹으로 신고할 줄 알아. 동기 모임에도 말할 거야.”

그리고는 인경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경의 말에 찬정은 그녀를 잡을 생각도 못 한 채 멍해졌다. 그런 얼빠진 모습을 보고 인경은 웃었다.

설희는 복수할 생각이 없다고, 그냥 다 잊어버렸다고 했지만 설희는 꽤나 멋진 복수를 했다. 쓰레기 같은 남자 다 버리고 잘 살기. 그게 최고의 복수지 뭐.

자신의 일도 아니건만, 인경의 입술에서는 웃음이 샜다.

***


 


“아니, 이게 말이 돼?”

인경은 밖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말이 되냐고. 햐, 될 놈 될이라고 해야 하나. 유설희, 진짜 복이 붙어 있다. 복덩이여, 복덩이.”

그렇게 말하며 인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3월의 어느 봄날, 설희와 은우는 결혼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로 된 곳은, 은우가 다니는 회사인 WS호텔이 운영하는 야외 결혼식장이었다. 이번에 리뉴얼 돼서 처음으로 결혼하는 것이 바로 은우 커플이었다.

꽃장식이 흐드러지게 장식된 아름다운 버진로드. 그 버진로드의 끝엔 하늘까지 닿을 것 같은 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다.

그 앞에서 신랑 신부가 서서 혼인 서약을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리뉴얼 전, 처음에 설희가 그 모습을 조경도로 확인했을 때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상기온으로 3월인데도 영하의 기온이 이어졌다. 심지어 사흘 전에는 갑자기 눈이 왔다. 정말 지구가 아픈 것 아니냐며 인터넷에서는 난리였고, 뉴스에서도 꽃샘추위치고는 심각하다며 연일 텔레비전 뉴스에 나왔다.
 


“야외 결혼식인데 어쩌지.”

 
설희는 어제까지 잠을 못 잘 정도로 걱정을 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는 자신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야외 결혼식장에서 추위에 벌벌 떠실 하객들이 걱정이었다. 그런데.


“유설희가 마법을 부렸나.”

인경이 유리문 밖을 바라보며 부러움 섞인 한숨을 쉬었다.

어제까지 최고기온이 10도였는데, 오늘이 되니 남쪽에서 훈풍이 불어왔는지 지금의 기온은 무려 23도였다.


“그러게, 정말 다행이다.”

“그러게요, 신부님. 정말 다행이에요.”

드레스샵의 사람도 한숨 놓았다고 옆에서 종알거렸다. 그도 그랬을 것이다. 훤히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를 입고 한겨울의 야외 결혼식장을 갈 설희를 위해 위에 덮는 케이프며, 코트며 이것저것 준비해놓았지만 아무래도 입지 않은 것보다는 못했다.

WS가의 결혼식인지라 보는 사람도 많은데 그런 꼴을 보이기는 정말 싫었다고, 드레스샵 직원이 말했다.


“정말 운이 좋은가 봐.”

“진짜로. 햇살도 너무 따뜻하고, 무슨 5월 같아.”

“그러게.”

정말 다행이다, 라고 설희는 속삭였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은우 때문이었다. 3월로 결혼식이 잡힌 것은 2월까지는 설희가 지금 듣고 있는 수업으로 바빴고, 4월부터는 은우의 원더풀랜드의 사파리 사업이 계획되어 있기 때문에 3월밖에는 시간이 없었다.
 


“미안해.”

 
3월에 결혼식이 잡힌 것이 본인 탓도 아닌데, 은우는 몇 번이나 설희에게 사과를 했다. 특히, 며칠 전 눈이 오고 나서는 정말 미안해했는데.

다행히 그도 좋아하겠다.


“정말 대박이야. 우리 설희가 결혼을 하다니.”

“그러게.”

인경의 말에 설희가 웃었다. 신부 대기실의 한편에 있는 커다란 거울 안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하얀 드레스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공주님 같다.”

인경의 말에, 망측하게도 설희도 “응, 조금.”이라고 답할 뻔했다. 다행히, 입술을 꽉 눌러 참았다. 진짜 친한 친구인 인경이 이 말을 들으면 앞으로 60년은 “응 그래 우리 공주 설희님”하고 놀려 댈 게 분명했다.


“진짜 축하해, 유설희.”

“고마워.”

인경과 인사를 주고받는 그때, 신부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왔다. 쭉 뻗은 큰 키, 근육질의 몸을 완벽히 감싸고 있는 턱시도, 그리고 봄날의 햇살이 조각 같은 얼굴을 비췄다.

오늘의 신랑, 은우였다.


“어머. 신랑이 왔네.”

설희의 옆에 앉아 있던 인경이 벌떡 일어났다. 방해자는 피해줘야 할 때였다.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인경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자, 은우가 허리를 숙여 오늘의 신부, 설희를 바라보았다. 설희는 머리를 하나로 묶고 뒤로 길게 늘어뜨렸다. 가녀린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가 그녀의 체형에 잘 맞았다. 길게 베일을 늘어뜨린 그녀를 은우가 보고 손을 내밀었다.


“준비됐대. 갈까?”

“응.”

오늘 두 사람은 동시 입장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12시 5분 전. 벌써 그와 함께 결혼식장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떨리면서도 설렌다.


“신부님, 이동하시죠.”

“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일어섰다. 한 손은 은우의 크고 커다란 손을 꽉 잡은 채였다. 긴 드레스 자락이 무거웠지만, 그와 함께여서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었다.


“설희야.”

그의 부름에 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해진 사랑 고백을, 눈부시게 꾸며진 버진 로드 앞에서 내뱉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따뜻한 바람이 길고 눈부신 베일을 흔들어놓았다.


 
천천히, 관현악단의 선율에 맞춰 걸어 나간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하객석에는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득 찼다. 돌마래 병원 사람들이 앉아 손을 흔든다. 채린 씨 옆에는 은우의 친구, 진호가 앉아 있었고, 가족들에 마지막으로…….

혼주석 앞에 서자, 누구보다도 좋아서 환히 웃고 있는 부모님이 보였다. 설희의 어머니는 눈에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언제나 어머니는 밝고 쾌활해서, 결혼식 때도 너무 좋아서 입 찢어지는 거 아냐? 하고 설희는 내심 고민했는데, 생각과는 달리 어머니는 설희를 보며 그렁거리고 있었다.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가에 인사를 하던 때, 결국 설희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은우가 손을 뻗어 닦아주었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 위에 눈물이 맺혔고, 봄날의 햇살이 반짝 빛났다.

아름다운, 봄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해서 더 아름다운 봄이 왔다.

***

두 사람이 신혼여행으로 선택한 곳은, 미국 시애틀이었다.

직항도 있었지만 시간이 잘 맞지 않아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LA 공항에 도착하여 경유를 해서 시애틀로 간다.

도착하기까지 무려 집에서 20시간은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애틀로 간 것은 보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다.


“피곤하지?”

“아니, 뭐랄까, 두근두근하네.”

시애틀 공항에 도착해 시내로 가는 차 안. 설희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낯선 풍경에 흥분해 비행기에서 제대로 자지 못한 것도 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다가 있구나.”

“섬이 있대.”

“와…….”

바쁜 나머지 목적으로 했던 곳을 제외하면 다른 곳은 알아본 곳이 별로 없었다. 결혼 직전까지 일하다가 일주일 전에 휴가를 낼 수 있었고, 휴가를 내서는 결혼식 준비에 신혼집 준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은우를 대신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러니 일 때문에 바쁜 은우는 둘째치고, 설희조차 시애틀에 뭐가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깎아지른 듯한 높은 건물들이 해안가를 끼고 있었다. 얼마나 안 알아보고 왔는지, 이렇게 대도시인 줄은 몰랐을 정도다. 건물 사이사이로는 하얀 안개가 꼈다. 해무일까. 그 모습이 마치, SF소설의 한 장면 같았다.


“바다와 도시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겠네.”

“그러게.”

다행히 시애틀에 묵는 내내 가이드해주는 직원이 있었다. 아무것도 선입견을 가지지 않은 채 오롯이 신혼여행을 즐길 수 있겠다.

사실, 시애틀이 아니라도 좋을 것 같다. 옆에 있는 이 남자만 있다면.

설희는 흘러가는 시애틀의 풍경을 보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



“오늘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호텔에서 푹 쉬시고, 내일 아침 9시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현지 가이드의 깍듯한 인사에 설희와 은우는 인사를 해 보이고는 호텔 룸으로 올라왔다. 처음 도착한 것은 아직 해가 떠 있었을 때인데, 호텔까지 오는 동안 어둠이 내렸다. 커다란 호텔 차창 밖으로 반짝이는 시애틀의 야경이 보였다.


“와.”

설희가 야경을 보고 감탄하자, 은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드디어…….”

“응?”

“첫날밤이네.”

그가 부드럽게 설희를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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