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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7화: 모든 것은 다. (78/80)


외전 7화: 모든 것은 다.
2023.07.25.


재벌가여서, 당연히 반대를 할 줄 알았다는 설희의 말에 희윤이 재밌다는 듯 입술을 실룩였다. 그 미소를 짓는 희윤의 모습이 언젠가, 은우가 웃음을 참으며 입술을 실룩이던 때와 꼭 같았다. 역시, 은우 씨도 어머니와 닮았구나. 설희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희윤이 한참 웃음을 참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뭐, 그런 집도 있죠. 재벌가끼리 결혼시키는 집. 그게 사업에는 좋을 수도 있고. 하지만 나는 아니에요. 우리 집은 아니에요. 나는 정략결혼 출신이지만 그게 반드시 옳다고는 생각 안 해요. 특히 우리 선우, 은우는 그렇네요.”

“…….”

“아기 키워보면 알 거예요. 내 자식이라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첫째는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도 사고를 많이 쳐서 내가 학교에 불려가기도 많이 불려갔어요. 둘째인 은우는 사고는 안 쳤지만 마음이 다쳐서 또 내가 고생 좀 했고.”

“아.”

그 이야기를 예전에 은우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은우에게는 주변 환경이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고 그래서 그가 집안일을 숨기고 다녔다는 이야기.

설희가 이미 아는 듯 보이자, 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서 나는 그 아이들이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는 거면 돼요. 나도 완벽한 며느리는 아니었으니까.”

“…….”

“아까 병원에 있을 때 설희 씨를 유심히 봤어요. 어떤 사람인가.”

희윤이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대단히 미안하지만 우리 아들이 만난다는 분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희윤의 말이 길게 늘어졌다.


“좋은 사람이더군요. 내가 나이가 많아서 혹시 힘들까 봐 의자를 옆에 가져다 놓으면서도 젠체하지 않고, 수의사의 일을 도우면서도 보호자 표정까지 살피는. 흠잡을 데 없었어요. 나도 동물병원은 처음이지만.”

희윤의 구두 굽은 얇고도 높았다. 그 연세에 그 구두굽을 신고 계속 서 있으면 피곤할 것 같아 의자를 가져다 둔 것인데 그거 가지고 좋아하실 줄은 몰랐다. 누구에게나 하는 당연한 일인데.


“고작 그 정도의 일로 칭찬을 받는 건…… 쑥스럽습니다.”

“고작 그 정도의 일도 안 되는 사람이 많거든. 나는 부족하고 안 되는 점도 많지만, 우리 회장님이 단 한 가지는 높이 사시는 게 있어요.”

그게 뭘까. 설희가 눈으로 묻자 희윤이 말했다.


“사람 보는 눈.”

“…….”

“왜 우리 은우가 하필이면 설희 씨를 선택했는지 몰랐는데, 만나 보고 나니 알 것 같아요.”

대단한 칭찬이었다. 설희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미안해요. 나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은데, 일이 그렇게 되네요.”

그리고 희윤이 어렵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가 하는 말을 설희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꼼꼼히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한 문장도 빼놓지 않고.

***


 
늦은 밤.

설희가 누워 있는 오피스텔의 도어락이 삑삑삑, 울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자고 있던 곰곰이가 신이 나서 달려 나갔다.

탁탁탁.


“하악, 하악.”

거친 곰곰이의 숨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너무너무 신이 나면 나는 소리였다.

이 시간에 우리 집에 올 사람은.

그리고 곰곰이가 저런 반응을 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설희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웃었다.


“자기야.”

그를 부르자, 신발을 벗던 은우가 눈썹을 추어올렸다.


“안 자고 있었어?”

은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시간은 1시가 넘었다. 은우는 회사로 돌아가고 나서는 주말을 제외하면 늘 이 시간에나 집에 올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방은 잠깐 들르고, 설희의 방으로 왔다. 그래서 은우의 고양이도 이제는 설희네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강아지인 곰곰이와 사이가 좋아질 정도로 설희와 곰곰이와 보내는 시간이 길었다.


“왜 안 자고 있었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생각할 게 있었어.”

“무슨 생각.”

은우의 질문에 설희는 답하지 않았다. 은우의 어머니가 다녀간 이후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안한데, 오늘 내가 왔다 간 건 비밀로 해주지 않을래요?”

 
아까 희윤과 헤어지기 전, 그녀가 신신당부했던 말이었다.
 


“특히 은우에게는.”


“알겠습니다.”

 
그렇게 약속한 노릇이니 말할 수가 없었다. 당신 어머니 생각을 했다고는.


“그냥. 이제 곧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잖아.”

설희의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는 게 다음 주, 그리고 그다음 주 주말에는 은우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게 되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불안해?”

“아니. 불안하지는 않고…….”

다행히 오늘 희윤이 다녀가서 그런지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몇 가지 말들을 남기고 갔다. 희윤이 남기고 간 모든 말들은 설희에게 오롯이 남았다.

설희가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말을 흐리자, 은우가 물었다.


“부모님은 좋은 분들이셔. 좀 특이하시긴 해도.”

“응, 그런 것 같아.”

설희의 대답에 은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가 어떻게 아냐는, 그런 표정. 설희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자기 보니까, 딱 보여. 부모님이 좋으신 분인 게, 얼마나 사랑받고 자란 사람인지 딱 보여.”

“아.”

그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할게.”

그리고 설희는 두 팔을 뻗었다. 안아달라는 그녀의 자세에 은우가 가방을 내려놓고 성큼 걸어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오늘 은우의 어머니인 희윤이 남기고 간 말.

그 말은…….
 


“앞으로 힘든 일이 많을 거예요.”

 
그렇게 희윤은 말을 시작했다. 조곤조곤, 하지만 그녀의 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WS의 며느리로 지내 온 사람이 할 수 있을 법한 말이었다.
 


“WS에 며느리로 들어오면 쉽지 않을 거예요. 나는, 물론 정략결혼으로 결혼을 해서 지난 세월 더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에 듣기로, 은우의 어머니인 희윤은 언론사 사장의 딸이었다. 아버지와 정략결혼으로 결혼을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언론사 사장의 딸이었음에도, 거대 그룹에 들어와 며느리로 생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고 희윤이 말했다.
 


“남편을 사랑해도 쉽지 않은 자리예요. 하지만, 또 뿌듯함도 느낄 수 있는 곳이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무엇보다 만약에 문제가 있으면 우리 부부가 도와줄 테니까 힘내요.”

 
어쩌면, 희윤이 결혼할 적에 은우의 할머니이자 희윤의 시어머니가 그녀를 불러 패물을 줬던 것은……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패물보다 더 소중한 용기와 조언을 주기 위해.

설희 역시, 은우와 결혼을 결심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길이 당연히 쉽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다. (결국 겪지는 못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있을 수도 있고, 차후 은우가 기업에서 경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 의도치 않게 은우나 자신의 신상이 드러나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게 되면, 행동에 제약도 생길 거고.

하지만.

그래도 은우가 좋았다. 은우와 함께하는 일이 좋았다. 설희를 꽉 끌어안은 은우가 속삭였다.


“잘될 거야.”

“응.”

설희 역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될 것이다.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잘 안될 리가 없다. 우리를 따뜻하게 지켜보고 있는 가족들이 있는데.

우리는 언제나 괜찮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설희는 은우에게 파고들었다.


 

***

설희의 친구, 인경의 오늘 하루는 정말 힘들었다. 인경은 강남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조그마한 무역회사인데, 월차 쓰는 게 자유로워서 오래 다니고 있기는 했지만 상사가 정말로 ‘꼰대’였다. 일주일에 회식은 꼭 1번씩 있었고, 월차 쓰는 게 편한 대신, 저녁 야근은 당연시되곤 했다.

오늘도 그랬다.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간다. 어젯밤 늦게까지 설희랑 놀아서 그런지 오늘은 간절히 집에 가서 빨리 자고 싶었는데, 이 모양 이 꼴이다.


“그래, 어제 폭음한 내가 잘못이다.”

회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거울 속에 비친 인경의 모습이 너무 피곤해서 눈 아래 다크서클이 쭉 내려와 있다.


“정말 미치겠다. 이러다가는 곧 죽을 거야.”

중얼중얼하고 내려가는데,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누군가가 인경을 잡았다.


“인경아!”

“어!”

놀라 펄쩍 뛰었다. 인경이 다니는 회사는 여러 개의 회사가 모여있는 건물이라 1층 로비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었다. 자신의 어깨를 움켜쥔 두꺼운 손에 어떤 미친놈이 다가온 건가 싶어 인경은 소리를 치려고 입술을 반쯤 벌렸다.

그때.


“인경아, 인경아, 나야. 소리 지르지 마.”

남자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눈앞에서 손을 휘적휘적 하고 있는 놈은, 다름 아닌 인경의 대학 동기이자 설희의 옛 남자친구 찬정이었다.


“어, 찬정아. 왜…… 왜? 너 왜 여깄어?”

“어, 너랑 이야기 좀 하려고 왔지.”

“나랑?”

인경이 황당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랑 무슨 이야기를……?”

찬정과 인경이 동기 사이인 것은 맞았다. 또, 대학 때까지만 해도 같은 동아리 소속이라 같이 놀러 다니는 일도 많았다.

거기다가 인경은 설희와 절친한 사이였으니, 또 얼굴을 보는 일도 많았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설희와 사귈 때까지의 일이었다. 설희와 헤어지고 나서는, 특히 좋게 헤어지지 않았기에 그와 동기 모임을 제외하면 만나는 일이 없었다.

단 한 번, 찬정이 너무 애걸복걸해서 설희 병원을 알려줬다가 설희가 난리 친 적이 있어 더욱 껄끄러워졌다.

인경의 질문에 찬정이 잠시 멈칫했다가, 입을 열었다.


“나, 그…… 이직하려는데, 무역회사로 하고 싶거든. 그래서 왔어.”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고? 날 만나러?”

정말 이상한 노릇이었다. 찬정이 미간을 좁혔다.


“너한테 전화했었는데 안 받고. 문자도 했어. 그것도 답장이 없고.”

“아…….”

인경의 뇌리에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전에 설희와 찬정이 헤어지고 나서, 그에게 설희가 다니는 동물병원을 알려줬다가 설희가 곤란한 상황이 됐다. 그래서 그때 화가 나서 그를 차단했었다.

그렇다고 동기 얼굴에 “내가 너 차단했어, 이놈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음…… 그게, 저 바빠서 그랬어. 오늘도 봐봐, 야근했잖아.”

9시를 훌쩍 넘긴 시계를 가리키며 인경이 말하자, 찬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인경이 바쁜지 아닌지 딱히 큰 관심은 없는 모양이다. 찬정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래서 회사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데, 지금 맥주 한잔할 수 있어?”

“어…… 그게…… 나 내일 출근도 빠르고…….”

솔직한 마음으로는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찬정이 거절하려는 인경의 입을 간절한 목소리로 막았다.


“나 회사 잘렸어, 인경아.”

“……뭐?”

“제발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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