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 잃어버린 기억 속의 이름 (73/80)


#72. 잃어버린 기억 속의 이름
2023.07.08.


이명섭 교수가 설명하는 기억에 관한 이론은 머릿속에 남지 않고 한 귀로 흘러나갔다.

두 손을 꼭 잡아주며 다녀오라고 말하는 하준을 뒤로하고 이 교수를 따라 커튼을 지나니 진료실과는 전혀 다른 어두운 공간이 나왔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베이지색 리클라이너에 앉은 지안은 다리를 펴고 최대한 편히 기대었다.

눈에 거슬리지 않는 자그마한 조명이 지안을 비추었다.


“어릴 적 기억이 먼저 보일 수도 있고 마지막 기억이 보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전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죠.”

이명섭 교수는 굉장히 말이 많은 편이었다.

원래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잡는 건지도 몰랐다.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최면으로도 기억이 보이지 않으면 어쩌지.

이 교수가 조곤조곤,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지그시 눈을 감은 지안은 복잡한 생각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청명한 울림소리가 지나고 점잖은 음성이 점점 더 작아지다가 희미해졌다.

그렇게 잠이 드는 건가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의식이 있으면서도 팔다리가 푹 꺼져가는 것처럼 어딘가로 깊숙이 가라앉았다.

머리가 무겁다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번쩍,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시야가 밝아졌다.


“너 어디가?”

제 목에서 나올 수 없는 낭랑한 목소리가 흘렀다.

그게 너무 어색해서 웃음이 삐져나왔다.

눈앞에는 유치원생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레이스가 펄럭이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아이였다.


“엄마가 데리러 왔어. 이제 엄마랑 같이 살 수 있대. 그렇지, 엄마?”

여자아이가 엄마를 부르고 나서야 아이의 작은 손을 잡은 젊은 여자가 보였다.


“피이…….”

다물린 잇새로 바람이 새어나갔다.

여자아이가 엄마의 손을 붙잡고 보육원 밖으로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툭툭, 운동화 앞코로 땅을 찍었다.

문득, 운동화가 너무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운동화만큼은 아니지만, 까맣게 손때가 탄 소맷자락이 손등을 덮고 길게 늘어졌다.

원피스가 체구에 맞지 않는 건지, 펑퍼짐하게 치맛자락이 연신 발목을 건드렸다.

헐거운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하릴없이 흙바닥을 걷다가 자주 찾는 나무 벤치를 떠올렸다.

씩씩한 걸음으로 도착한 나무 벤치에 보육원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오빠보다 더 커 보이는 낯선 남자가 앉아 있어서 지저분한 소매를 뒤로 감추었다.

마침 심심했던 차에 말 상대를 찾아서 약간 흥이 올랐다.

짧은 다리로 쫄래쫄래 다가가 키보다 조금 낮은 벤치에 어렵사리 올라앉자 잠시 저를 바라본 남자는 금세 시선을 돌렸다.


“안녕하세여.”

인사를 해도 묵묵부답.

남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우리 보육원에 선물 주러 왔죠? 오빠같이 큰 사람들이 왔다 가면 맛있는 음식도 먹고 예쁜 새 옷도 고를 수 있어요. 그래서 알아요.”

멀찍이 떨어진 빨간 건물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대로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잠시라도 입을 다물면 나도 엄마가 데리러 왔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 따위를 하며 울게 될지도 몰랐다.

남자가 제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말을 붙였다.

다행히 남자는 자리를 떠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친구가 엄마하고 집으로 갔어요. 저하고 같은 나이는 걔 하나인데.”

메마른 뺨에 바람을 한껏 집어넣고 땅에서 떨어진 발을 굴렀다.
  

 


“치킨도 먹고 피자도 먹을 텐데 하필 오늘 가서 조금 안 됐어요. 엄마가 와서 부럽기도 하구.”

그때까지도 남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저는 엄마가 없어요. 아빠두. 원장님이 아기 때부터 데리고 있었대요.”

그제야 남자의 눈길이 머리 위에 머무르는 것 같았다.


“원피스가 너무 길다. 오빠는 이름이 뭐예요? 저는 한서윤이요.”


“서윤아, 여기가 어딘지 알겠니?”

이름을 소개하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겹쳐지는 시점에서 삐익, 귀를 찌르는 이명이 들렸다.

순간 점멸했던 세상이 잠시 암흑으로, 다시 빛으로 변했다.


“윤아.”

“오빠!”

벤치에서 보았던 그 오빠와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무서운 인상의 어른이 정면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따가운 시선 아래에서도 구름 위를 딛고 있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아주 좋았다.

땅이 푹신푹신했고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람도 꽃내음이 스민 것처럼 향긋했다.

최대한 상냥하게 웃으니 회장님은 눈썹을 꿈틀거렸고 오빠는 어서 집에 가자며 손을 내밀었다.


“한서윤.”

미련 없이 커다란 손을 잡을 때, 고압적인 저음이 여러 번 메아리쳤다.


“아악!”

곧이어 무언가에 거칠게 부딪히는 충격이 몸을 뒤흔들었고 놀란 지안이 벌떡 상체를 세웠다.


“괜찮아요, 지안 씨. 괜찮습니다. 무엇을 보았든 여긴 안전해요.”

“아아…….”

또 한서윤이었다.

끝내 떨어지지 않는 이름이 끔찍하게 느껴져서 지안은 한동안 머리를 감싸 안고 흐느꼈다.


“지안아!”

곧장 달려들어 온 하준이 파들파들 떨리는 어깨를 토닥였다.

다급히 접어 올린 무릎에 한참 동안 고개를 묻고 있던 지안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고 이명섭 교수를 찾았다.


“최면으로 보이는 기억도 가짜일 수 있어요?”

“최근 기억은 그럴 수도 있지만, 어릴 적부터 차곡차곡 쌓인 기억은 사실일 확률이 높아요.”

“하지만…….”

“어차피 한 번으로 모든 기억을 찾을 수는 없어요. 본인이 원하면 추후 일정을 잡아줄게요.”

“네, 알겠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지안이 어정쩡한 움직임으로 리클라이너를 내려오다가 비틀거렸다.

하준이 재빨리 지안을 부축했다.


“지안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은데 왜 울어.”

하준의 팔을 잡고 병원 밖으로 나온 지안이 손을 올려 뺨을 문질렀다.

딱히 슬프지는 않은데.

이유도 모르게 눈시울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얼굴을 적셨다.

내가 정말 한서윤인 걸까.

기억의 실체를 찾고 편안해지기 위해 받은 최면 치료에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뒤죽박죽, 실타래처럼 얽혀버린 머릿속에 익숙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내가 어떻게 너를 보내.”

처음엔 강현의 감정에 동화되어 저도 모르게 만들어내는 가짜 기억이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엔 누군가의 유일무이한 존재로 살다간 쌍둥이가 부러워서 터무니없는 기억이 망상처럼 나타나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를 가진 후에도 한서윤을 찾는 목소리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서윤아!”

당시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언젠가부터 완전히 달라진 그의 태도가 차례로 떠올랐다.

연인의 쌍둥이에게 목숨을 내어놓고 달려오던 태강현.

혼란스러운 상황이 닥치면 자신을 한서윤이라고 부르던 태강현.

최면 치료를 받으러 간다고 했을 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묻는 어두운 얼굴까지.

한서윤의 존재를 증명하는 건 결국, 태강현이었다.


“하준아, 엄, 엄마 가게로 가자.”

잃어버린 기억이 한서윤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엄마라는 호칭을 뱉는 입안이 까끌거렸다.

그런 스스로가 너무 낯설게 느껴져서 따뜻한 옷이 겹겹이 쌓인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 * *

정혜가 일하는 반찬 가게에 도착한 지안은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하준을 보내고 묵직한 문을 밀어냈다.


“어서 오세, 지안아!”

출입문에 달린 종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 정혜가 연락도 없이 방문한 지안을 반겼다.


“엄마.”

“너 얼굴이 왜 이래.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정혜는 핏기없는 얼굴로 비척비척 걸어오는 지안을 의자에 앉히고 미지근한 물을 테이블에 얹었다.


“엄마.”

“그래, 엄마 여기 있잖아. 무슨 일인데 그래. 전무님하고 싸웠어?”

“아니, 저기…….”

정혜의 눈치를 살핀 지안은 일단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최면 치료 중에 보았던 어린 시절과 보육원에 관해 확인하고 싶어서 무작정 정혜를 찾아왔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기억을 찾으면 사이가 틀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던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이렇게 시간을 끌어?”

인자하게 웃는 얼굴을 두고 물잔을 감싸 쥔 지안은 결심을 굳히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어차피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었다.


“엄마, 나 알고 있어요. 입양아라는 거.”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몸서리친 정혜가 풀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 어떻게……. 그게 지안아, 엄마가 설명할게. 그러니까 왜 거짓말을 했냐면…….”

낯빛이 창백한 지안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정혜가 말을 더듬거렸다.


“일부러 거짓말한 건 아니었어. 나는 그냥 지금이 좋아서, 좋아서 그랬어.”

“진정해요, 엄마. 엄마 탓하려고 말하는 거 아니야.”

지안은 울먹이는 정혜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했다.


“네가 6살 때쯤에 집안 사정이 너무 안 좋아져서 할머니 댁에 맡겼거든. 할머니 돌아가시고도 넌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어. 이미 우리한테 정을 뗀 것 같더라고. 그래도 고등학교 때까진 얼굴은 보여줬었는데…….”

가슴 졸이면서 덮어둔 죄를 실토하는 것처럼 횡설수설하던 정혜는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작게 한숨을 내쉰 지안이 티슈를 뽑아 건넸다.


“데면데면했지만 가끔 통화도 했고. 그런데 입양 사실 알고 나서부터는 아예 말도 섞지 않았어. 부모도 아니면서 찾아오지 말라고. 이런 꼴로 살게 할 거면 왜 자기를 데려왔냐고.”

“…….”

“무서웠어. 지난 4년간 엄마, 아빠는 그 어느 때보다 정말 행복했는데 기억이 다시 돌아오면 그전으로 돌아가게 될까 봐. 그래서 숨겼어.”

“그러지 않을 거니까 울지 마.”

지안은 덩달아 치미는 울음을 꾹 참으며 놀란 정혜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최면 치료받고 왔어요. 기억 찾고 싶어서.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이 혼란스러워서 이제 알아야 할 것 같았어.”

“엄마가 미안해, 네가 더 힘들 텐데…….”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정혜가 지안의 손을 잡았다.

딸에게 더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응.”

“혹시 나 몇 살 때 데리고 왔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지안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한서윤과 서지안을 구분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을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정혜의 입에서 원하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봐.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지독한 인지 부조화가 일어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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