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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소나기가 오는 밤 (57/80)


57화. 소나기가 오는 밤
2023.05.16.


태풍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 은우와 설희 두 사람은 대청마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똑똑 빗방울이 떨어져 처마 밑에 맺히더니, 곧 굵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에는 마당 한편에 물이 고일 정도였다.

이대로 지나갈 소나기로는 보이지 않았다.


“큰일이네.”

설희는 다리를 끌어안고는 비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오늘의 저녁 뉴스를 확인해보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이번에 북상한 태풍 제8호는 토요일 저녁, 제주도에 근접할 것으로 예상되며 일요일에는 직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번 8호 태풍의 중심기압은 1023헥토파스칼, 최대 풍속은 초속 25m입니다. 휴가철을 맞이하여 제주를 방문한 관광객들이 섬에 발이 묶일 것으로 예상되며, 폭우와 거센 바람 대비를 하지 않은 주택에서는 서둘러 준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여러 가지 자료 영상과 함께 무심하게 나오는 아나운서의 말에 화면을 보지 않고 설희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은우의 미간이 찌푸러 들었다.


“큰일이군. 하필이면 여기서 태풍이라니.”

“그러게요.”

집에 들러 정리를 하고, 식사를 하러 나가려 했는데 당장의 식사가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설희는 손가락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내일은 비행기가 안 뜰 것 같네요. 비도 더 거세질 것 같고. 병원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원래 출발할 예정은 일요일, 바로 내일 오후였다.

그럼 월요일 진료에는 옥 선생도, 설희도 무사히 출근할 수 있을 터였다. 원래 휴가를 낸 것은 토요일뿐.

은우가 핸드폰을 들어 본인의 스케줄을 체크했다.


“다행히 월요일은 수술 잡힌 게 없네요. 꼭 내가 봐야 할 예약도 없고. 그래도 원장 선생님께 전화 드려서 미리 연락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그래요.”

은우는 원장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학회로 제주에 와 있다는 것, 그리고 제주에 태풍이 와서 월요일 날 출근을 못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하자 전화기 건너편에 원장은 예상과는 다르게 껄껄 웃으며 좋아했다.


-옥 선생, 평소에 휴가 한번 내지 않고 있더니 여름휴가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놀다 와요. 마침 장마가 져서 그런지 병원에 오는 환자들도 적은 편이니까. 진료는 내가 대신 며칠 볼 테니 걱정 말고.

“감사합니다, 원장 선생님.”

여기까지는 좋았다. 외삼촌인 원장이 괜찮다고 하니 월요일에 대한 부담이 한결 덜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원장이 말을 이었다.


-설희는 잘 있죠? 학회 처음이라 긴장한 것 아닌가.

“네. 들으려던 발표는 오늘이라 다행히 내일 태풍이 와도 영향 없습니다.”

- 아, 그래? 잘됐네. 잘 들었죠? 남자친구랑 놀러 가서 너무 들뜬 게 아닌지…….

쓸데없는 소리가 스피커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설희는 손을 뻗어 옥 선생의 핸드폰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외삼촌, 왜 이래, 진짜.”

그와 사귀고 있다는 것은 친구인 인경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특히 알아서는 안 될 요주의 인물이 외삼촌인 원장이었다.

병원에서 마주치면 얼마나 자신을 놀릴지, 그리고 설희 엄마에게 바로 전화해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생긴 것을 당장 전할 터였다.

옥 선생이 자신과 그런 사이인 걸 모르던 때도 그를 보고 좋아하던 엄마, 아빠였는데, 알게 되면 정말 결혼식장이라도 잡을지 모른다.

혹시 은우가 오해할까 싶어 그녀는 급히 말을 이었다.


“제가 말한 거 아니에요. 그냥 넘겨짚으신 거니까.”

그 말에 은우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단정한 얼굴에 주름이 졌다.


“말해도 돼요. 비밀 아니잖아.”

“…….”

“비밀로 하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그런 그의 말이 의외였다. 병원에서는 철저히 사생활을 이야기하지 않아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싫을 줄 알았다.


“옥 선생님이 그런 이야기 하는 거 싫어하실 줄 알았어요.”

“내가요?”

그가 반듯한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가능하면 난, 유설희 씨랑 사귄다고 소문내고 싶을 정도입니다.”

“네?”

“어디 도망갈까 봐 무섭거든.”

그렇게 말하는 은우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농담인가……? 이게 옥 선생님 방식의 농담인 건가.

설희가 입술을 달싹이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집에는 먹을 게 없는데. 오늘 저녁이랑 내일 먹을 거 사오는 게 좋겠어요. 내가 잠시 이 앞에 장 보고 올게요.”

“같이 가요.”

설희가 따라나섰다.

***

비가 와서, 멀리는 가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읍내의 슈퍼마켓으로 갔다. 은우의 한 손에는 바구니가 들렸다.


“뭘 살까요?”

“음식 해 먹을 게 많지 않으니, 간단한 걸로 사죠.”

“그래요.”

읍내의 슈퍼마켓이라고는 했지만, 상당히 크기가 커서 있을 만한 것들은 다 있었다. 제주라 그런지, 서울에서 팔지 않는 것들도 꽤 눈에 띄었다.

슈퍼마켓인데, 한쪽에서는 회를 그때그때 손질하여 팔았고, 그 옆에선 매운탕 거리도 팔았다.


“회, 먹을래요? 좋아하죠?”

“아, 네.”

회를 담고, 그리고 그 옆에 매운탕도 담는다. 그뿐이 아니었다. 은우는 그녀가 잠시 잠깐이라도 눈길을 준 것은 다 바구니에 담았다. 그러다 보니 금세, 바구니 위에 수북이 쌓였다.


“너무 많이 사는 거 아닐까요?”

“내일 거까지 사는 거니까. 그리고, 부족한 것보단 남는 게 낫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또 내가 잘 먹는다고 다 사는 건 아니겠지.

은우가 그런 설희의 마음을 꿰뚫기라도 한 듯, 피식 웃었다.


“설희 씨 다 먹으라고 안 할게요. 내가 먹으면 되지.”

“정말이죠?”

“정말.”

이제 슬슬 가볼까. 몸을 돌리는데 수산물 코너의 한쪽에 처음 보는 새우가 있었다. 이게 뭐지. 냉장고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자, 은우가 질문도 안 했는데 옆에서 답을 했다.


“딱새우예요. 처음 봐요?”

“네. 이런 새우도 있구나.”

“이것도 하나 사죠.”

“너무 많은 것 아닐까요?”

“제주에 왔는데 뭐 맛있는 건 못 사주더라도 이 정도는 사줘야죠.”

은우가 또 망설임 없이 딱새우를 집어 바구니에 넣었다.


“제주도에서는 꽤 흔한데. 요즘 유행이던데?”

“처음 와봐서요…….”

설희의 말에 은우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태풍이 와서 안타깝네요. 내일은 어디라도 가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순간.

슈퍼마켓에서 어떤 사람이 지나가며 툭, 설희의 몸을 쳤다.


“엇.”

앞으로 중심이 쏠리며 몸이 흔들리는데, 채 쓰러지기 전, 두꺼운 팔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순식간에 딱딱한 남자의 품에 안겼다.


“괜찮아요?”

“아, 네.”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별거 아니었다. 그보다 문제는 그가 너무 가깝다는 것.

그의 한 팔이 설희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접촉에 심장이 펄쩍 뛰었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그의 팔에 심장의 두근거림이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일 날 뻔했네.”

은우는 자연스레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딱딱한 손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설희는 고개를 들어 은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남자의 눈빛이 쏟아진다.

모처럼 제주에 왔는데 태풍이 왔다. 이제 학회 하나 봤을 뿐인데, 관광도 못 하고, 외식도 어렵고.

그래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배어 나왔다.

***



“지금 나갔다 와서 다행이네요.”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쏟아졌다. 바람도 거세게 불어 윙윙하는 소리가 귓가를 흔들었다. 점점 날씨는 거칠어지기만 했다.

길에는 사람의 인적이 적어, 마치 은우와 자신 둘만이 남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차장에 도착해, 큰 우산 아래 숨어 겨우 집으로 들어오자.


“어머, 어떻게 해.”

아까 나갈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집의 모습이 무언가 이상했다. 설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붕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제주 고택. 그 한쪽의 지붕 위에 커다란 나무가 쓰러져있었다.


“저기, 나무가 쓰러졌어요.”

자세히 보니, 어디선가 얇은 나무가 날아와 지붕을 덮친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 나무가 덮친 곳이 은우가 묵는 방 위라는 점이었다.

서둘러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천장에서 물이 샌다.


“……하, 이런 일은 처음이네.”

뚝뚝, 방 중앙으로 물이 떨어져 내렸다. 서둘러 대야를 가져다가 와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자리에 받치고, 걸레로 흥건히 젖은 바닥을 쓸어냈다.


“잘 정비된 집인데도 태풍이라 이런 일이 생기네요.”

“그런데, 어쩌죠.”

오늘 밤, 내일 비행기가 뜨지 못하면 내일 밤까지는 이 집에서 자야 한다. 호텔로 가면 좋겠지만, 밖에 날씨가 점점 더 험상궂어져서 차를 타고 나가는 것도 어려워 보인다. 밤인데 지붕을 고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집에 방은 딱 두 개. 설희의 방과, 비가 새는 은우의 방.


“앞으로도 계속 비가 들이칠 텐데 여기서 잘 수는 없잖아요.”

설희의 말에 은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마루에서 자죠.”

“마루요?”

여기는 따로 건물 안에 마루가 있는 게 아닌, 대청마루가 있을 뿐이었다.


“저기 말하시는 거예요?”

은우의 말에 놀라 지붕만 드리워진 대청마루를 가리키자, 은우가 고개를 까닥했다.


“네.”

“아니, 그건 좀…….”

비가 거세고, 바람이 불어 그곳도 당장이라도 물이 들이닥칠 것 같았다. 애초에 이 집의 주인은 옥 선생이었다.


“제 방에서 같이 주무세요.”

“설희 씨랑 둘이?”

“네.”

은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거절할까 봐 설희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안 덮칠게요. 손가락 하나도 안 건드릴 테니까 걱정 말고…….”

그 말에 은우가 웃었다.


“나는 걱정 안 해요.”

“…….”

“설희씨가 문제지. 정말 후회 안 하겠어요?”

그의 말이 위협적이었다.

그렇지만…….

설희는 자신이 어제 잔 방을 들여다보았다. 한 사람이 생활하기에는 넉넉한 사이즈였지만, 두 사람 이불을 깔면 꽉 찰 것 같다.

옥 선생님과 방에서 단둘이.

생각만 해도 긴장이 차올랐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네. 괜찮아요.”

그리고 그를 방안으로 끌어들였다.

***

괜찮다고 했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바로 옆방에 그가 있다고 생각해도 심장이 뛰는데, 좁은 방에 은우와 둘이 누워 있으니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손만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비록 다른 이불이지만 같이 누워 있다.

불을 끄고 눕자, 바깥의 빗소리, 바람 소리 사이로 그의 숨소리가 들린다.

아, 잠이 안 와.

누운 지 벌써 한 시간이나 됐는데, 졸리기는커녕 점점 눈이 말똥말똥 해졌다.


 
그는 지금 잘까?

무슨 대화라도 하면 좀 이 어색함이 줄어들까.


“저, 옥 선생님.”

자는 사람을 깨울 정도는 아니게, 그러나 자지 않고 있다면 들릴 정도로.

아주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그 순간, 지금까지 미동도 없었던 그가 몸을 휙 돌려 설희에게로 다가왔다.


“어맛.”

너무 가까웠다.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순간.

짙은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설희 씨.”

“……네.”

“아까 낮에, 내 부탁 하나 들어준다고 했죠.”

“……네.”

학회에 데려와줘서 고맙다고, 뭐든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고 했다. 설희의 답에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그 소원, 지금 써도 되겠습니까?”

그 모습이 아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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