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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예상치 못한 (54/80)


54화. 예상치 못한
2023.05.06.



“……헐.”

자신도 모르게 설희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눈앞의 미인은 당연한 듯이, 은우의 팔을 끼고 생글거리고 있었다.

누구지? 누구길래 옥은우 선생의 팔짱을?

아니, 부럽다거나 한 건 아니다. 부럽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나도 안 끼워봤는데.

우습게도, 설희와 은우는 키스는 했지만, 팔짱을 끼워본 적은 없었다. 그런 일을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아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저 여자는 뉘시길래 옥 선생의 팔을 잡나.

설희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비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여자가 눈썹을 추어올렸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

제가 묻고 싶은 말씀입니다만.

그렇게 설희가 묻기 전, 은우가 여자의 손아귀에서 제 팔을 빼내며 말을 했다.


“여긴 유설희 씨. 우리 병원 수의 테크니션. 그리고 여긴, 윤세나. 내 대학 후배입니다.”

“아…… 수의 테크니션. 근데 오늘 학회에 테크니션까지 참가시키는 거야? 오빠네 병원은?”

“개인 참가야.”

“개인 참가로 제주도까지…….”

그렇게 말하고는 세나가 설희를 고개를 까닥 숙였다.


“안녕하세요, 윤세나예요. 은우 오빠 후배입니다. 아주 친한 후배.”

아주에 방점이 붙었다.


“안녕하세요, 유설희 입니다. 옥은우 선생님……의.”

여자친구입니다. 그러니까 그 거리 좀 떨어뜨려주세요.

그러고 싶었지만, 옥 선생이 테크니션이라고 설명한 판국에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설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수의 테크니션이에요.”

“열심이시네요. 학회에 다 오시고.”

“이번에 동물보건사가 신설되면서 학회에서도 관련 강연이 나온다길래. 서건창 교수님이 강연자고.”

“아아, 관심 없는 분야라 몰랐네.”

심드렁한 세나의 말에 은우가 몸을 돌려 설희 쪽으로 다가왔다. 설희 곁에 바싹 다가서며 그가 팸플릿을 내밀었다.


“여기. 우리가 봐야 할 강연이 이 2시 강연입니다.”

“아…….”

그렇군요. 라고 설희가 대답하기도 전, 세나가 말을 끼어들었다.


“오빠. 나 1시에 발표 있는데, 그거 들을 거지?”

“발표가 있었어?”

“발표자 이름도 안 봤어? 어, 나 발표 있어. 대학 때 졸업 논문 연장선상으로 지금 연구 중인 거. 봐줘야 해. 부족한 부분 나중에 지적도 해주고, 그래야지.”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

딱 잘라 안 된다고 하는 은우의 말에 세나가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 전에 포스터 발표를 돌아볼 예정이거든. 유설희 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이분은 혼자 못 보셔?”

그것 하나도?

빈정거리듯, 붉은 입술이 올라간다. 그러나 은우는 그런 반응에도 담담하게 읊조렸다.


“아니, 내가 같이 보고 싶어서.”

“…….”

“아, 저기 이건우 교수님 계시네. 인사해야겠군. 그럼, 나중에 봐.”

그리고 은우가 설희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가죠, 설희 씨.”

 

***

설희는 학회는 처음이었다. 학부만 졸업했다 보니 전공 분야의 학회에 나갈 일도 없었고, 따로 찾아본 적도 없었으니까.

머릿속에서 대충은 예상을 해보았다. 강연이나 발표가 있고, 그것을 듣는.

옥 선생도 별로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실제로는 긴장할 일 천국이었다. 우리 나라에 개설되어있는 수의대는 10개. 1년에 졸업하는 학생도 1,000명을 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같은 학교 출신이거나 학회에서 자주 보는 사람들이 은우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일이 흔했고, 설희도 덩달아 옆에서 인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은우와 인사하고 나거든 다들 설희를 향해 신기하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악의가 섞인 행동은 아니었지만, 설희는 왠지 동물원 우리 속의 동물이 된 느낌이었다.


“저기, 옥 선생님.”

조금 전, 그의 선배라는 사람과 인사하고 아무래도 위화감을 느낀 설희가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죄송한데요, 저…… 여기 오면 안 되는 거 아니었을까요?”

“음, 왜죠?”

“아니, 저…… 왠지 분위기가 그래서.”

“수의학회라고는 하지만, 수의대 학생들이나 수의사 출신 아닌 대학원생들도 오고, 또 협력 업체나 관련한 사람들도 참가해서 와도 됩니다.”

“아니, 그런 참가 문제가 아니라.”

설희가 잠시 망설이다가 속삭였다.


“옥 선생님이랑 있어서 그런 건가요, 다른 분들이 약간……. 저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아아.”

은우가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뾰족한 콧날에 느른한 입술이 드러났다. 잠시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있다가,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그건 설희 씨 탓이 아니고, 내 탓입니다.”

“……옥 선생님 탓?”

“내가 워낙 대학 시절부터 혼자 다녔거든요. 일 관련해서도 누구랑 다니는 걸 싫어하고.”

“……아.”

“그런 내가 처음으로 여자랑 있으니, 혹시. 하는 거죠. 이 바닥이 워낙 쓸데없이 좁아요. 그래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

설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처음으로 여자랑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이지.

그러나 그 말의 의미를 깊게 새기기 전에 또 다른 사람이 옥 선생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



“오늘따라 학교 출신이 많네.”

은우는 한숨을 쉬며 회장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있던 연구실의 조교, 선, 후배, 잠깐 같이 일해보았던 수의사 등등 아는 사람이 많아서 인사하는 데 진을 뺐다.


“이럴 거면 오지 말 걸 그랬나.”

긴 다리를 꼬며 느른하게 은우는 중얼거렸다.

오늘 제주도에 온 이유는, 첫 번째로는 설희가 앞으로 동물보건사 자격증을 따서 지금 일을 더 깊이 있게 배웠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설희와 제주에 오고 싶었던 마음이 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아는 사람이 많을 거라면 오지 말 걸 그랬다.

그 순간. 옆자리에 누군가 털썩 주저앉았다.


“오빠.”

“…….”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세나가 활짝 웃으며 있었다.


“여기 앉아 있었네?”

“어.”

“그…… 뭐였지? 쪼그마한 테크니션은 어디 갔어?”

“…….”

쪼그마한 테크니션.

설희는 여 치고도 체격이 작은 편이었다. 좋게 말하면 호리호리해서, 가끔은 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같이 불안할 정도였다.

그걸 설희도 알아서, 체격 이야기하는 것은 싫어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펄쩍 뛰겠군.


“설희 씨? 잠시 화장실에.”

“아아. 그렇구나.”

은우의 말에 세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를 바라보다가 세나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그 테.크.니.션이랑 무슨 관계야?”

“…….”

“그냥 병원 직원이야?”

“아니.”

귀찮다.

이상하게도, 어렸을 때부터 은우는 사람들의 관심이 귀찮았다. 이성으로서든, 그냥 인간적인 관심이든.

특히 세나의 관심은 그 관심에 핑크빛 열기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더더욱 귀찮았다.

그래서 입을 열어 담담하게 읊조렸다.


“여자친구야.”

세나에게 처음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뭐. 비밀로 하기로 한 것도 아니고.

그러나 담담하게 말한 은우와 달리, 그 이야기를 들은 세나는 놀라 눈을 치켜떴다. 입술을 벙긋거리면서 한참 멈춰있다가, 마치 신음처럼 말을 뱉었다.


“여자…….”

“…….”

“친구? 거짓말. 오빠가 여자친구를 사귈 리 없잖아. 여자에 관심 없는 거 아니었어?”

여전히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른 여자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자기보다 한참 작고 빨빨거리면서 병원 내를 쏘다니면서 노력하는 설희를 보면, 자꾸 눈이 갔다.


“여자친구 맞아. 유설희 씨에게는 관심 많고.”

“…….”

“왜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

“그래서 말인데, 그 자리 유설희 씨 자리야.”

은우의 시선이 의자 손잡이에 걸려 있던 가방으로 향했다. 오늘 설희가 들고 온 가방이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비켜.

라는 무언의 메시지. 그 말에 여전히 놀라 세나가 불현듯, 일어섰다. 그녀가 자리를 비키고 나서야 은우는 학회 팸플릿을 열어 오늘 확인할 것들은 체크했다.

그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



“아, 왜 안 지워지지.”

설희는 화장실에 서서 자신의 셔츠에 묻은 붉은 자국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따뜻한 물로, 그리고 화장실에 비치되어 있던 물비누로 씻어내리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안 했던 짓은 하면 안 돼.”

오늘 처음으로 한 틴트가 작은 자국이지만 셔츠 깃에 묻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별거 아니지만, 자꾸 눈에 띄어서.


“포기할까.”

곧 시작 시간인데.

그렇게 시계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때.

화장실 문이 달칵 열리고, 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어머.”

“……아.”

까만 흑발을 단정하게 귀 뒤로 넘긴, 생긋 웃는 미인.

옥 선생의“아주 친한 후배”인가 뭔가였던 윤세나였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뵙네요. 전 손 좀 씻으려고요.”

“네에.”

그렇게 대답하고는 설희는 손을 털었다. 아무래도 옷은 포기하고 회장으로 돌아가야겠다. 아까 세나가 인사하던 것이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설희가 자리를 뜨기 전. 세나가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물을 틀었다.


“그러고 보니, 은우 오빠. 병원에서 인기 많죠?”

세나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뜬금없는 질문에 설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인기가 많냐고?

보호자들이 늘 그의 옆에 서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쳐다보던 장면을 떠올렸다.

최이현이라는 새로운 미남 수의사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돌마래 동물병원의 최고 인기 수의사는 단연 옥 선생이었다.

잘생기고, 말도 잘하고, 동물 좋아하고, 꼼꼼하고.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설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죠?”

“오빠는 예전부터 그렇게 학교에서도 인기가 많았어요.”

“…….”

“주제도 모르는 여자애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죠.”

아. 그런 이야기였구나.

설희는 수의사로서의 인기를 말하는 줄 알았는데, 남자로서의 인기였다. 병원에서 인기가 많다라.

설희가 오기 전부터 계셨던 최 선생님과 매니저는 유부녀였고, 가장 어린 막내 채린 씨는 어리기도 어려서 옥 선생에게 남자로서의 감정은 없었다.

나는…….


“그렇군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맞장구만 치자, 세나가 다시 한번 생긋 웃었다.


“저도 은우 오빠를 좋아했고, 은우 오빠도 절 좋아했던 것 같은데…….”

말을 길게 끌면서 그녀가 손을 다 씻었는지, 수도꼭지를 잠갔다.


“아무래도 은우 오빠 집안 때문에 망설인 것 같더라고요.”

“집안이요?”

무슨 소리인가. 싶어 되물으니 세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학회에 같이 와서 좀 친한 사인 줄 알았는데. 은우 오빠에 대해 잘 모르나 보다.”

“…….”

“은우 오빠 집 말이에요. 정말 몰라요?”

그런 세나의 미소에 방긋, 웃음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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