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흔들리는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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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흔들리는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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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흔들리는 몸
2023.03.14.
결국 두 사람이 함께 술집 밖으로 나왔다. 공기가 답답했던 실내와는 달리, 바람이 불어 설희의 앞머리를 붕 띄웠다. 이마가 드러나고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시원해서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괜찮아요?”
“……네.”
“안 괜찮은 것 같은데?”
평소와 달리 많이 웃는 설희가 이상한지, 인상을 찌푸리며 옥 선생이 물어봤지만, 설희는 다시 웃었다.
술 때문인지 웃음이 헤퍼졌다.
“아닌데, 괜찮은데!”
설희의 하이톤의 목소리에 은우의 투명한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잠시 눈썹을 꿈틀하더니, 말없이 그녀를 거의 질질 끌 듯 오피스텔로 데려갔다.
“와, 신난다.”
가는 내내 신난 설희와 달리 은우는 침묵을 지켰다. 때로 이를 꽉 깨물어 단단한 근육이 뺨 위로 불룩, 솟아올랐다.
건물에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탄 순간, 여전히 설희는 옥 선생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신나서 흥얼거리던 설희는 밀실에 단둘이 남자, 어색한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조용해진 설희를 보고, 은우가 내려다보았다.
“이제 술 좀 깼어요?”
머리카락 밑으로 따스한 눈빛이 쏟아졌다. 그러나 설희는 여전히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말만 안 할 뿐이지, 여전히 그녀의 입에서는 알싸한 알콜 향이 났다.
“괜찮습니까?”
설희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 모습에 은우가 결국, 그녀를 따라 웃어버렸다.
“하…… 미치겠네.”
“……..”
“속이 안 좋아요?”
설희가 다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럼요?”
설희는 여전히 말을 잃은 채 은우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뉘집 아들인지 참 잘생겼다.
그리고 귀여워.
나한테 떽떽거리면서 화낼 때는 정말 무섭기도 하지만, 이렇게 걱정해주기도 하고, 배려 있고 귀여운 남자야.
근데 이런 옥 선생이 나를 좋아한다고 하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설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를 바라보던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그의 팔을 뿌리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걸어갔다. 그런 설희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걸로 착각한 은우가 뒤에서 설희를 쫓아왔다.
“설희 씨, 괜찮아요?”
그러나 설희는 말없이 집 쪽으로 가서 번호키를 눌렀다. 번호키는 이사 오고 나서 아직 바꾸지 않은 상태였다. 전 세입자가 정한 비밀번호가 번호가 순간적으로 생각이 안 났다.
3910이었나? 3920이었나?
설희가 마구잡이로 번호키를 눌러대자, 옥 선생이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번호가 뭐예요?”
“모…… 모르겠어요.”
“이사 오기 전에 세팅되어 있던 번호 그대로예요?”
은우의 질문에 설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옥 선생이 번호를 대신 눌러주었다.
달칵.
문이 열리자 옥 선생이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요.”
그가 하는 말에 설희가 고개를 끄덕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설희의 어깨를 옥 선생이 잡았다.
“설희 씨.”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걱정스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많이 마셨어요. 정말 괜찮은 거 맞죠?”
조용하게 읊조리는 그의 말에 설희는 고개를 저었다.
“말짱해요,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체구가 작은 사람일수록 술에 쉽게 취한단 말입니다. 몸무게와 근육이 적을수록 알콜 분해 능력이 약하다고요. 혹시 탈이라도 나면 어쩌지.”
술 마시고 안 그래도 어지러운데, 은우의 잔소리가 시작되자, 설희는 볼을 부풀렸다. 듣기 싫었다.
지금 듣고 싶은 건, 옥 선생의 다른 모습인데. 날 좋아한다고 하던 그 진지한 눈빛, 술 마시고 키스했을 때 나에게 다가왔던 붉은 입술, 그런 게 보고 싶은데.
설희가 말없이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옥 선생을 바라보다가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작은 손으로 그의 셔츠를 잡아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눈은 어느새 감겨 있었고, 앙증맞은 입술은 반쯤 열려 있었다.
은우를 점점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던 그 순간, 눈을 감은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그의 숨결이 닿았다.
“유설희 씨, 나한테 어쩌려고 이래요.”
“…….”
“도저히 참을 수가 없잖아.”
탁한 소리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은우가 손가락으로 설희의 입술을 살짝 눌렀다. 예민한 살결이 쓸린다. 여전히 설희는 그의 옷자락을 잡고 끌어당기고 있었고, 서로를 향했다. 허공에서 스치는 시선이 애달팠다.
“하…….”
은우는 입술을 여러 번 깨물었다. 안 그래도 붉은 입술이 더 붉고 진하게 달아오른다. 그렇게 한참 망설이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되겠어.”
“뭐가요?”
술에 취해 이성이 날아간 설희와 달리, 은우가 담담하게 읊조렸다
“설희 씨 지금 만취했어요.”
“…….”
“비겁하게 이 상황을 틈타, 설희 씨한테 다가가지 않을 겁니다. 지난번에도 취하고 했는데, 두 번째마저 그렇게 될 순 없어.”
그럴 수는 없다.
옥 선생이 설희를 부드럽게 밀어낸 뒤. 그녀의 뺨을 두 손가락으로 살짝 잡았다.
“다음 키스는 사귀고 나서. 제정신으로.”
“…….”
“잘 자요.”
근사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는 설희를 부드럽게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멍하니 서 있는 설희 앞에 현관문이 조용히 닫혔다.
***
다음 날 아침, 엄청난 두통 속에 설희는 눈을 떴다.
바닥이 딱딱해……. 울었는지 퉁퉁 부은 눈을 겨우 떠보니, 설희는 아직도 현관 맡에서 자는 중이었다.
얼마나 취했었는지 신발도 아직 신은 상태였다. 화장은 당연히 지우지 않은 상태였다.
“병원! 지각인가?”
그 와중에도 병원 생각이 나 가방 속의 핸드폰을 꺼냈다. 충전시키지 않은 핸드폰은 이미 방전이 되어 사망.
일어서려 했으나 다리가 후들거려 앞으로 기어가서 시계를 확인했다.
“아침 6시…… 살았다.”
지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설희는 긴장이 풀린 탓에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 와중에도 머리가 욱신거렸다.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문득 전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눈을 감고, 옥 선생을 당겨 키스를 하려 했다.
그리고 떠오른 그의 한마디.
“안 돼.”
번뜩 눈을 떴다.
진짜 있었던 일인가? 실화인가? 설희는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두 손으로 가렸다.
내가 옥 선생에게 키스를 하려고 했다? 내가 정말 저런 거라면…… 그런 거라면…….
죽고 싶었다.
“아아악! 술을 왜 그렇게 마신 거야!”
전날의 기억을 더듬은 설희의 비명이 오피스텔에 울려 퍼졌다.
“술을 마시질 말아야 해. 술은 왜 마시는 거야? 유설희. 넌 오늘부로 금주다. 절대 술은 다시 마시지 말고, 옥 선생한테도, 옥 선생한테도…….”
더듬더듬 자신을 탓하던 설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옥 선생이라는 이름 떠올리는 것조차 남사스러웠다.
“왜 옥 선생이랑 술만 마시면 스킨십을 하지? 아니, 말은 정확하게 하자. 지난번에는 옥 선생이 먼저 했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먼저 한 게 뭐가 중요해, 거기에 반응해서 막 난리를 쳤으면서.
“내가 못 살아.”
그렇게 설희의 머리가 엉망진창이 된 채로 머리를 휘젓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 딩동. ]
누구지.
머리 위에서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가운 소름이 설희의 온몸에 돋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까 소리를 질러서 옆집 사람이 온 것일 수도 있지만, 눈을 들어 시계를 봤다.
아직 새벽…….
옆집 사람일 확률이 높을까, 아니면 지난번처럼 옥 선생일까.
“누구…… 세요?”
“유설희 씨, 옥 은우입니다.”
역시나.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치켜뜨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설희에게 있어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 1위. 옥 선생. 2위 역시 옥 선생이었다.
“무, 무슨 일이세요?”
“문 좀 열고 이야기합시다.”
그냥 좀 돌아가 줬으면 좋겠는데, 문을 열라는 소리에 설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잠시만요!”
거울 속의 자신은 술 마시고 현관에서 화장도 안 지우고 잔 여자. 딱 그랬다. 머리는 산발을 하고 마스카라가 번져 눈 주변은 팬더가 되어있고, 얼굴은 뚱뚱 부어서 볼에는 자국이 남아있었다.
이대로 옥 선생을 만날 수는 없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스피드!
서둘러 폼클렌징으로 얼굴을 지우고 머리는 고무줄로 질끈 묶은 후 모자를 썼다. 쌩얼인 게 마음에 걸렸지만, 옥 선생을 현관 앞에 두고 풀메이크업을 할 시간은 없었다. 서둘러 bb크림을 바르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현관문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차분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자연스럽게, 지금 샤워하고 나온 것처럼.
그렇게 가는 거야 유설희.
문을 벌컥 열며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옥 선생님?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술에 쩔어 현관에서 잤던 설희와는 달리 옥 선생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얼굴이 붓지도 않았고 머리카락은 세팅되어 근사한 얼굴을 더욱 빛내주고 있었다.
오늘 입은 셔츠도 주름 하나 없이 완벽한 상태.
얄밉다. 술은 같이 먹었는데.
얼굴에서는 은은히 빛까지 나고 있었다. 생얼인데도 피부가 참 좋아, 옥 선생은.
그렇게 옥 선생의 미모에 감탄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올려다보았다. 은우는 인상을 쓰고 설희를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설희 씨.”
“네?”
“어제 그냥 잤죠.”
뜨금. 설희는 순간적으로 놀라 눈을 크게 떴으나 곧 고개를 흔들었다. 칠칠치 못하게 화장도 안 지우고 잤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 옥 선생의 앵글에서는 모자 챙 때문에 설희의 부은 얼굴도 완벽히는 보이지 않을 터였다.
“아, 아닌데요?”
“아니긴 뭘 아니야. 옷이 어제랑 똑같은데.”
아차.
붓고 엉망진창인 얼굴을 신경 쓰느라 옷이 그대로였다. 역시 눈썰미 좋은 사람이야. 설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럴 수도 있죠! 뭐.”
설희의 말에 옥 선생의 입술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손가락을 들어 톡, 설희의 모자챙을 치며 말했다.
“아침 아직이죠? 옷 갈아입고 우리 집으로 와요. 밥해놨으니까.”
그는 거절할 틈도 주지 않았다.
***
옥 선생이 돌아간 뒤, 최대한으로 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옷 매무새를 확인하고 나서야 쫄래쫄래 옥 선생의 집 앞에 섰다.
604호.
소문으로만 듣던 옥 선생네 집이다.
최 선생님이 말하기로는 평소 옥 선생의 생활은 생각보다 털털하다고 그랬다. 집은 병원처럼 깨끗할까. 아니면 여느 자취방처럼 더러울까.
긴장이 차올라 숨을 크게 들이킨 다음, 초인종을 꾸욱 눌렀다.
벌컥.
“꺅!”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려 설희가 놀라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런 설희를 옥 선생이 이상한 듯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아, 아니…… 놀라서.”
“초인종 눌러서 문 열었는데 놀랄 게 뭐가 있어요? 들어와요.”
설희는 조심스레 은우의 방에 들어갔다.
기대했던 옥 선생의 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