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결혼하자.
(35/80)
35화. 결혼하자.
(35/80)
35화. 결혼하자.
2023.02.28.
과천 시내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곳. 그곳에는 이만 평 대지에 저택이 서 있었다. 사랑채, 별채, 그리고 본채. 그 주변에는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도록 높은 담이 둘러쳐 있었다.
높은 담 때문에 바깥에 서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차까지 저택의 지하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은우의 차가 밖에 멈추자마자 거대한 문이 열렸다.
“옥 선생님…… 여긴…… 뭐예요?”
텔레비전에서나 본, 아니 영화관에서나 본 엄청난 곳이다.
“어디긴요. 할머니 댁이죠.”
“할머니 댁…….”
할머니 댁이라는 이미지와 너무 맞지 않는다. 설희는 머릿속으로 멍하니 자신의 할머니 댁을 떠올렸다.
“이건 일반 할머니 댁이 아니잖아요.”
“일반 할머니 댁이 어떤데요?”
“저희 할머니 집은…….”
원주에 사시는 설희의 할머니는 단독주택에서 사시는데, 아담한 단층집이었다.
“마당에 작은 평상 하나 있고, 텃밭이 있고.”
“우리 할머니 댁에도 평상도, 텃밭도 있어요.”
“평상이랑 텃밭이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보통 할머니 댁은 이렇지 않아요. 여기, 진짜 할머니 집 맞아요?”
지하에 주차장이 있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설희가 입술을 반쯤 벌리며 아연실색하자, 은우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괜찮아요. 평범한…… 평범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특이할 것 없는 집이에요.”
옥 선생은 ‘특이하다’라는 개념을 잘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은우가 차를 세운 지하 주차장은 일반 주택의 주차장이라기보다는 빌딩이나 큰 건물의 주차장 같았다. 집은 어떨지 걱정이 앞선다. 아니 할머님도 예사 분은 아닌 것 같다.
설희가 입을 벌렸다.
“말해주셨어야죠.”
“뭐라고 말해요?”
“우리 할머니는 되게 부자다, 잘산다, 이런 거?”
설희의 그 말이 재밌는지 은우는 싱긋 웃었다.
“그런 걸 뭐 하러 말해요. 재밌네, 설희 씨.”
웃을 일이 아닌데. 그가 차에서 내려 설희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있는 설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가요.”
엉겁결에 손을 내밀자, 은우가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냥 할머니예요. 너무 걱정 말아요.”
***
거짓말쟁이, 옥은우 선생님은 완전 거짓말쟁이였다.
입술이 툭 튀어나와버렸다.
그럼 그렇지, 그냥 할머니일 리가 없었다. 설희의 예감은 정확히 적중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에 올라가자, 한복을 입은 고운 자태의 노부인이 설희를 맞이했다.
집에 무슨 엘리베이터가 있어, 하는 놀라움은 노부인을 만나자 잊혀져버렸다.
“드디어 만나게 됐네요. 반가워요.”
회색빛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단정하게 쪽을 진, 60대 후반의 여성이 인자하게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봐도 ‘할머니’라고 부르기보다는 ‘노부인’이라고 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그녀의 옆에는, 누가 봐도 가족은 아닌 이 집에서 일하는 것 같은 사용인이 붙어 있었다. 노부인의 웃음에 설희는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유설희입니다.”
“나선숙이에요.”
“아, 네. 여사님.”
뭐라고 불러야 하나, 자신도 모르게 여사님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녀에게는 사람을 압도시키는 분위기가 있었다.
여사님, 이라는 조금은 딱딱한 호칭으로 그녀를 부르자 여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쿡쿡, 가볍게 그녀는 웃었다.
“여사님이라니, 편하게 할머니라고 불러요.”
“아, 그래도.”
“은우 결혼할 상대라니 그 정도는 해야지.”
선숙의 말에 설희의 입술이 멈췄다.
결혼할 상대?
여자친구가 아니고?
놀라 은우를 쳐다보았지만, 은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 합의되어 있다는 듯 놀라움이 없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숙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은우를 한번 쳐다보고. 모든 게 너무 당연해 보인다. 점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설희가 눈만 이리저리 돌리고 있자, 선숙이 물었다.
“왜, 문제 있어요?”
네. 결혼할 상대라니 전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여자친구 자격으로 여기 온 거고 결혼은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자신을 바라보면서 인자하게 바라보는 선숙을 보고 도저히 설희는 그런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 네, 할머님.”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서울에서 맞이하면 좋겠지만, 서울집에는 워낙 보는 눈들이 많아서.”
“아…….”
왜 보는 눈이 많은지 차마 물어보지도 못하겠다. 설희는 그저 맞장구만 쳤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무겁지 않아요?”
부인의 시선이 설희의 손에 닿았다. 설희의 손에는 누가 보더라도 선물로 보이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꽤 부피가 크고 무거웠다.
“아, 이거.”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설희가 준비한 선물이었다. 은우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어른을 뵙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평소에 취미였던 베이킹으로 정과를 만들어왔다.
설희는 취미로 가끔 과자를 만들었다. 주변 어른들도 다 맛있다고 할 정도로 괜찮았고, 때로 재료비만 받고 주문하는 분이 있을 정도라 선물로도 좋겠다 싶었다.
주말에 만든 정과를 곱게 포장하여 왔지만, 아무래도 여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이런 걸 드시기는 할까?
“저…….”
드릴까 말까 고민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들고 왔는데 다시 가져가는 것도 이상했다. 모든 게 어렵다. 사실 이 집이나, 선숙이 일반적이었어도 긴장은 했을 것 같다.
“이거 별건 아니지만, 과자예요. 입에 맞으실는지 모르겠어요.”
“아, 맞을 거예요.”
우아하게 말한 선숙은 안에서 물건을 꺼내 확인했다. 그리고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이거 도라지 정과 아냐. 어디서 산 거예요? 보통 물건 같지는 않은데.”
“제가 만들었어요. 저, 아마추어라 별로 마음에 안 드실 수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듯, 선숙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대단하기도 하지. 직접 과자도 만들어오고.”
선숙의 얼굴에 환히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사용인에게 쇼핑백을 전해줬다.
“차랑 같이 내오도록 하세요. 내가 당장 먹어보게. 우리 같이 먹어봐요. 괜찮지, 응?”
“네. 괜찮습니다.”
“어머 귀엽기도 하지. 이런 걸 다 만들어오고.”
설희를 보면서 또 한 번 선숙이 웃었다.
***
“선생님, 솔직히 말하세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잠시 선숙이 부엌에 무슨 차를 준비하는지 챙기려고 자리를 비운 사이, 설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우를 바라보았다.
“뭐가요?”
“결혼이라니요.”
“아.”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다는 듯, 은우가 고개를 까닥였다. 그리고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하신 말씀이에요.”
“아닌 것 같은데요. 다 정해진 것 같던데…….”
“할머니가 앞서나가셔서 그래요.”
은우는 너무나도 차분하게 말을 했다. 그의 얼굴에는 거짓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옥 선생을 믿을 수는 없었다. 평소에도 감정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정말, 저희가 결혼한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여자친구인 것과 결혼을 하는 사이인 것은 전혀 다르다. 여자친구면 나중에 할머님이 몸이 좋아지시고 헤어졌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기로 한 거라면 헤어지는 것도 곤란하고 혹시나 할머님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그냥, 말만 그러신 거겠죠?”
절박한 설희의 질문에 은우가 웃었다. 한쪽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맞아요, 오늘 설희 씨가 집에 와서 할머니 기분이 좋아서 들뜨신 거예요. 설희 씨가 무척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고.”
“그럴까요.”
마음에 드셔 한다니 마음이 좀 안도가 되었다. 그래서 그냥 순간적으로 물어보신 거겠지. 설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은우는 말을 덧붙였다.
“너무 걱정 말아요. 그러니까.”
“네. 그럴게요.”
정신 차리자.
은우가 친구와의 모임에서 얼마나 잘해줬는지를 설희는 떠올리려 했다.
찬정이 사람들 앞에서 은우를 취조하듯 물어보고, 거기에 스킨십까지 뻔뻔하게 요구했었다. 그런 모든 찬정의 행동과 친구들의 호기심을 부드럽게, 그리고 때로는 단호하게 넘겼다.
그 결과, 그 끈질겼던 찬정도 은우와 설희와의 관계를 납득했고 친구들은 어디서 저런 남자를 찾아온 거냐고 호들갑을 떨었었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그에 준하는 행동을 보여야 했다.
거실로 통하는 복도로 선숙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설희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일어서며 숨을 들이켰다.
잘할 수 있어.
***
“너무 맛있다. 팔아도 되겠어. 아니, 파는 것보다 더 맛있어.”
“정말요?”
“응. 난 단것 안 좋아하는 데도 단맛이 아주 적절한 게, 너무 마음에 드네.”
걱정했던 것 과는 달리, 선숙과의 대화는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선숙은 우선, 설희가 만들어온 정과를 칭찬했다.
“요즘 아가씨가 이런 걸 만들고 참 대단해.”
“아니에요. 저, 베이킹을 좋아하는데 저희 할머니나 할머니 주변 분들이 이런 걸 좋아하셔서 가끔 만들어요.”
“어머, 효녀네.”
선숙은 싱긋 웃었다.
“요리를 좋아하나 봐요?”
“아, 그런 건 아닌데.”
“뭐, 맛이 그런걸. 한두 번 한 실력이 아닌걸?”
집에서는 여느 직장인과 다르지 않았다. 병원을 퇴근하고 돌아오면 내내 늘어져서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설거지만 하는 정도였다. 혹시 선숙이 너무 큰 기대를 할까 봐 손을 저었다.
“정말 아니에요.”
“아, 시집살이시킬까 봐 그래요? 걱정 마. 취미로 하고 싶은 만큼만 해요. 그런 건 사람 시키면 되니까.”
아니, 그런 걱정 때문은 아니었는데.
오히려 저, ‘시집살이’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문제였다.
“에미는 이런 것 못하잖니.”
선숙의 말에 은우가 미지근한 미소를 지었다.
“뭐, 그렇죠.”
“우리 에미가 좀 철이 없어서 집안 꾸리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것도 좋아하질 않거든. 아, 은우 엄마는 만나봤어요?”
“아, 아뇨.”
아직, 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나 설희는 입술을 달싹였다.
어디까지나 할머님만 만나 뵙고 건강을 유지하시고,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 온 것이었다. 은우의 다른 가족들까지 만나면 대형사태다.
“아직 못 만나봤구나. 은우 엄마가 좋아할 텐데. 예전부터 딸도 가지고 싶어 했고, 며느리도 원했거든. 은우는 아들만 둘이니 더 그래.”
“그렇군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설희는 손을 뻗어 제 앞에 있는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꼴깍, 안에 담겨져 있는 갈색 액체를 마셨다.
은은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맛있네요.”
“그렇지? 내가 좋아하는 홍차를 영국에서 블랜딩해서 들여왔지. 마음에 들어?”
“네. 참 맛있어요.”
“홍차지만 이런 한국과자랑도 잘 어울린다오. 오늘 갈 때 한 통 싸줄 테니 가져가요.”
“괜찮습니다.”
“가져가요.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니까.”
어른의 제안을 몇 번이고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아, 그럼 잘 먹겠습니다.” 하고 설희가 고개를 숙였다.
설희의 빈 잔에 다시 한번 차를 따라주며 선숙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날은 언제로 잡을까?”
그 말에 설희는 그만 주룩, 잔을 바닥으로 떨어뜨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