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가벼운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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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가벼운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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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가벼운 접촉
2022.11.29.
꽉 잡은 손은 놓아주지도 않았다. 작고 여린 자신의 손과는 다른, 단단한 남자의 손.
“손…… 부터 시작하자고요?”
“네.”
당연한 듯, 은우가 손을 쥐었다.
“싫습니까?”
“싫은 건 아닌데.”
싫은 게 아니라 이건 뭐랄까.
심장이 가슴에 있지 않고, 그와 맞잡은 손에 있는 것만 같다.
두근, 두근.
차갑게 식었던 손끝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설희가 올곧게 쏟아지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하얀 목덜미가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발끝으로 톡톡 찼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이 정도는 해야 의심을 사지 않을 것 같아서.”
아니,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도대체 어디까지 해야 하는 건가. 이 정도로 꼼꼼하게 해야 하는 건가? 데이트도 하고, 손도 잡고,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의 눈동자. 그 밑으로 날카로운 콧날. 그리고 붉은 입술…….
입술.
설마, 거기까진 아니겠지?
그가 입술을 살짝 비튼다. 그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뜨끔하다.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망측한 곳에 생각이 다다른 설희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건 아냐.”
“네?”
설희가 혼잣말하자 은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가 아닌데.”
그는 고개를 숙여서 설희의 얼굴을 살폈다. 단숨에 둘 사이의 공간이 좁혀졌다.
뜨거운 숨결이 사이에 고인다.
손 넘어 그 이상의 것도 해야 하나 걱정했다고는 입이 비틀려도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탁.
조명이 꺼진 어두운 주차장에 은우와 둘이 손을 잡고 있자니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다. 부드러운 살과 살이 스친다.
어정쩡하게 걸어가는 그 순간.
건물 한편의 문이 달칵 열리며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남자. 누가 왔나 어두컴컴한 눈을 두리번두리번하다가 은우를 보고 달려왔다.
“오!”
아는 사이인가? 망설임도 없이 그는 손을 흔들면서 달려오고는 은우에게 외쳤다.
“앗, 도련님, 여깁니다!”
도련님……?
설희가 고개를 돌려 은우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평온했던 은우의 인상이 팍 구겨져 있었다.
“아유, 우리 도련님께서 여기까지 행차하시다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진호.”
그의 목소리가 무섭게 내리깔렸다.
“무슨 도련님이야.”
험악한 그의 말에 앞에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손을 비비던 진호가 뚝 멈췄다.
“앗.”
“죽을래? 내가 전화했을 때 뭐라 했어.”
은우에게서 살기가 철철 흘러넘친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남자를 으스러뜨릴 것 같은 은우의 행동에 남자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난 그냥. 너 웬만해선 여기 오는 일 없잖아. 요즘 바쁘다고 나 만나주지도 않고. 그래서 너무 반가워서 그랬지.”
“…….”
“화내지 마, 무섭게.”
은우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진호가 눈치를 봤다.
“화난 거 아니지?”
“아냐, 오늘 늦게까지 있어 줘서 고맙다. 아, 설희 씨.”
그가 진호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진호. 대학교 동창입니다. 여기는 유설희 씨.”
설마 그가 아는 사람을 직접 만날 줄은 몰랐기에 설희는 눈을 깜빡이다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 넵. 안녕하세요, 유설희 씨? 이름이 너무 이쁘시네요. 와, 와…….”
그렇게 앞에서 인사를 하던 진호의 눈이 맞잡고 있는 은우와 설희의 손에 닿았다. 눈이 커지고, 은우를 한 번, 설희를 한 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일, 이게 무슨 일이야. 은우가 정말 여자분이랑 오다니. 오, 하나님. 진짜 꿈이 아닙니까. 제가 이런 상황을 보게 된다니.”
또 한 번 진호가 주접을 떨려고 주절주절 시동을 걸자, 은우가 짖듯이 으르렁댔다.
“이진호. 내가 뭐랬지?”
경고하는 듯한 낮은 은우의 목소리에 진호의 입이 합죽이가 되었다.
“이러지 말랬지.”
은우의 이가 으득으득 갈린다. 그러자 진호가 무서운지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는 설희를 향해 생긋 웃었다.
“이진호입니다. 저……. 은우가 여자분이랑 다니는 걸 처음 봐서 그만 제가 흥분해버렸네요. 실례했습니다.”
손을 들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가 사과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은우 친한 친구예요.”
“그냥 친구입니다.”
은우의 말에 진호가 끼어들었다.
“제일 친한 친구죠.”
“언제부터 네가 가장 친한 친구냐.”
“나보다 더 친한 사람 누구 있는데.”
투닥거리면서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진짜 친한가 보다.
은우는 언제나 딱딱하게 갑옷으로 둘러싸인 듯한 이미지였다. 병원에서는 사적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고, 상대가 보호자들이 아니면 다정하게 웃는 일도 없었다.
그런 옥 선생에게도 친구가 있구나. 그것도 이렇게 격의 없는 친구가 있구나. 진호가 활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오셔서 반갑습니다. 들어가서 구경하시면 됩니다. 은우가 저보다 더 잘 알 테니 안내는 필요 없겠죠? 아무래도 두 사람이 오부웃하게 지내는 게 좋을 테니까.”
오붓이라는 말을 진호가 길게 늘이자, 은우의 표정이 다시 험악해졌다.
으드득.
은우가 이를 꽉 깨무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진호가 몸을 움츠리고는 두 손을 저었다.
“그러다 너 나 한 대 치겠다.”
“안 그래도 고민 중이야.”
“고민 끝나기 전에 가야겠네. 그럼 또 뵈어요, 설희 씨.”
“네가 왜 설희 씨랑 또 봐?”
그러고는 은우는 부드럽게 설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죠.”
그 소란 속에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
은우가 데려온 곳은, 원더풀랜드의 동물원이었다.
밤의 동물원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손님이 하나도 없는 곳을 거니니 더더욱 신기했다. 인적이 드물었지만, 아주 가끔 직원들이 지나가며 은우에게 목인사를 했다.
“자주 오셨나 봐요.”
“인턴을 했었어요, 대학 졸업하고 반년 정도.”
그래서 그런지, 그는 넓디넓은 동물원 안을 헤매지도 않고 다녔다. 전에 설희가 왔을 때 기억으로는 지도를 보고 가도 헤맬 정도로 복잡하게 느껴졌는데,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두 사람이 걷다가 도착한 곳은 해양관이었다.
“아, 여기는…….”
전에 설희가 왔을 때는 없던 곳이었다. 작년인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구조물이라고 뉴스에서 떠들썩했던 기억이 났다.
“와봤어요?”
“아, 아뇨. 처음이네요.”
은우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행이네요. 처음으로 같이 와서.”
그리고 그가 손을 잡아끌었다.
입구의 긴 터널을 넘어서자, 그곳은 바다였다.
눈앞에 온통 파란 물빛이 일렁였다. 10m도 넘는 벽 전체가 커다란 수조였다. 그 사이로 동그란 터널이 지나가고 있었고.
바닷속에는 사람만 한 가오리며, 형형색색의 물고기 그리고 집채만 한 고래가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꼬리가 휘익, 움직일 때마다 하얀 물거품이 파란 물 안에서 피어올랐다.
“와.”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대로 멈춰서 눈앞의 광경을 보았다.
아름다워서, 너무나 아름다워서.
입술을 반쯤 벌리고 바라보자, 설희의 표정을 관찰하려 은우가 고개를 숙였다.
“마음에 들어요?”
“……네.”
“설희 씨랑 나랑 데이트를 만약에 한다면 이런 곳이 좋을 거로 생각했어요.”
은우가 마치 그녀의 감상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하는 양, 조용하게 속삭였다.
“동물원이요?”
은우가 고개를 까닥였다.
“동물, 좋아하잖아요. 유설희 씨. 그래서 동물병원에 들어온 거 아니었나요?”
그냥 넘겨짚은 건가. 아니면 내가 그에게 말했던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요?”
“했어요. 병원에 들어오고 첫날.”
“……아.”
그제야 떠올랐다.
설희는 동물병원에서 일해본 것도 처음이고 관련학과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동물병원 첫 출근날 잔뜩 긴장을 한 채 병원에 도착했다. 그런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눈앞에 있는 옥 선생이었다.
부원장님이 설희를 은우에게 소개해준 순간, 그는 한쪽 눈썹을 살짝 끌어올리고 샅샅이 설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숨 막혀. 뭐라도 말 좀 해주지. 입안이 바싹 마를 즈음, 그의 입술이 열렸다.
“옥은우입니다. 동물병원은 처음이라고 했나요?”
그의 표정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개 키워본 적 있어요?”
그의 질문에 머리를 저었다.
“고양이는?”
날카로운 옥 선생의 목소리에 설희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없습니다만…….”
“근데 왜 동물병원에서 일하고 싶어 하죠?”
그의 말에 입술을 달싹였다.
‘월급 때문에요? 사람들이 보통 돈 받으려고 일하는 거로 아는데.’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진지한 그의 얼굴은 그런 농담조의 대답을 용서치 않을 분위기였다. 한참 입안에서 이것저것 말을 고르다가 겨우 말을 내뱉었다.
“도, 동물이 좋아서?”
그렇게 말을 하자 안 그래도 어둡던 옥 선생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저는 동물이 좋아서 동물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런 말 정말 싫어합니다. 여긴 취미로 오는 곳이 아닙니다. 프로 의식을 가지고 직업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곳이에요.”
그의 갑자기 시작된 일장 연설에 놀라 눈만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인간 좋아해서 의사 되었다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은우의 뜬금없는 질문에 설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빨이 좋아서 의사 된 사람 있습니까?”
이빨이 좋아서? 웬 뜬금없는 소리야. 그러나 그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렇죠? 근데 왜 동물병원은 다들 동물이 좋아서 일하겠다는 식으로 말하죠?”
뭔가 혼나는 느낌에 설희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역시 월급 때문이라고 말할걸.
“죄송할 건 없어요. 앞으로 유 설희 씨도 프로라는 책임감을 느끼고 일해 줬으면 좋겠어요. 돈을 받는 만큼 열심히 일한다! 그렇게 생각해주길 바랍니다.”
“옥 선생님은 동물을 좋아하셔서 수의사가 되신 건 아니신가 봐요.”
기어들어 가는 설희 목소리에 옥 선생이 고개를 까딱했다.
“아니요? 동물 좋아하는데요. 강아지도, 고양이도 다 좋아합니다.”
***
그런 대화를 했더랬다. 아주 예전에 했던 말이었다. 그때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던 거라고? 심지어 그는 그때 불퉁해 보였는데. 사실 좀 이상한 사람인 줄만 알았다. 대화가 좀 이상하기도 했고.
“기억하고 있으셨어요?”
“네.”
“일부러 그래서 이곳을 오자고 하신 거예요?”
“기왕 할 거, 좋아하는 곳에서 보내면 좋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가짜 데이트인데 이렇게까지 신경 써줄 필요는 없지 않나.
설희는 동물을 좋아했다. 하지만, 동물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 아무도 없이 우리 둘뿐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아주 예전의 대화를 기억했던 게 무언가 말문을 막히게 해, 말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수족관이 아닌 은우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럽니까?”
“아, 아뇨. 저…….”
기억해보니, 이런 데이트를 해본 적 없었다.
찬정과는 늘 그냥 용건과 용건 사이를 때우는 데이트를 했던 것 같다. 대학 때는 강의와 강의 사이, 그리고 강의가 끝난 후 대학가에서 그냥 시간을 보냈다.
“이런 게 데이트인가 싶어서요. 뭔가, 내가 알고 있던 거랑은 달라서.”
“싫어요?”
“아뇨, 좋아요. 너무 좋아요.”
그렇게 말하는 게 무언가 쑥스러워져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러자 단정하던 헤어스타일이 흐트러졌다.
그가 손을 뻗어 헤집어진 설희의 머리를 가다듬어주며 속삭였다.
“그래요, 나도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