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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단둘이서 (1/80)


1화. 단둘이서
2022.11.01.


서초구 한 대로변에 위치한 돌마래 동물병원.

진찰실 뒤에 있는 자그마한 창고는 전구가 하나 나가 살짝 어두컴컴했다. 설희는 큰 상자들을 두 손 가득 든 채 선반을 바라보았다.


“하아…….”

깊은 한숨.

선반에는 수많은 약과 물품이 가득 차 있어 빈 곳을 찾기 힘들었다.


“어디다 꽂아야 하나. 분명히 옥 선생님이 지난번에 알려주셨는데.”

한참을 고민하다 설희는 대충 앞 선반에 올려놓으려고 손에 들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설희 씨.”

조용하면서도 사람을 낮게 울리는 낮은 목소리.

비쭉,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다.

설희는 가능한 한 밝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지만, 볼 근육은 긴장해 딱딱히 굳었다.


“네, 부르셨나요?”

긴 속눈썹에 날카로운 콧날. 비릿한 미소가 떠 있는 입술에 훤칠한 키.

흰 가운을 대충 걸치고 있는데도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갈 정도의 외모, 아니 미모였다.

옥은우.

돌마래 동물병원의 수의사로 젊은 나이에 외과 과장을 맡고 있는 남자.

빛나는 외모와 꼼꼼하며 친절한 진료로 그는 보호자들 사이에서는 아이돌급의 인기가 있었다. 일부러 옥 선생 지목해서 진료를 받는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그래, 얼굴은 잘생겼지.

하지만 설희는 이렇게 마주 서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그가 어려웠다.

그가 반듯한 입술을 열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진찰대 제대로 닦았습니까?”

“네, 진료 끝나자마자 했습니다.”

“그냥 닦은 거 아니고 제대로 했습니까?”

“한 것 같습니다만.”

스타카토처럼 툭툭 던지는 그의 말에 설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은우의 미간은 점점 좁아져만 갔다.


“어떻게 했는지 보여줘 봐요.”

또 실수했구나, 한숨을 쉬며 설희는 옥 선생의 뒤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갔다.

설희는 수의 테크니션이었다. 명칭은 그럴싸하지만, 아직 수습인. 그래서 은우에게 자주 혼나곤 했다.

은우가 긴 손가락으로 진찰대를 가리켰다.


“어서.”

그냥 내가 잘못한 거면 ‘이렇게 해라.’라고 알려주면 되는데 눈앞에서 시연을 시켰다.

그거 알아요, 옥 선생님? 당신, 사람을 미치게 하는 성격인 거.

설희는 한 손에 알코올 스프레이, 다른 한 손에는 수건을 쥐었다. 스프레이를 진찰대 위에 꼼꼼히 뿌려, 소독액이 빈틈없이 내려앉자, 설희는 수건으로 그 위를 닦았다.


“흠.”

석연치 않아 하는 옥 선생의 추임새. 뭐가 잘못된 걸까.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 잘못됐나요?”

“이미 지적한 적이 있었던 거로 아는데. 진찰대를 닦을 때는 끝에서부터 닦아야 합니다. 그렇게 원으로 둥글게 둥글게 문지르면, 오염물질이 퍼지니까.”

“앗, 네.”

“알겠습니까?”

그가 알려주기 전부터 다 아는 내용이었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근데, 왜 옥 선생 앞에만 서면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걸까?’

다른 수의사와 일을 할 때는 이런 실수는 결코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바라볼 때면, 잘하던 일조차 실수연발.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찔러 긴장이 되어서일까.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괜히 반항하면 말만 더 길어지게 된다. 빠른 사과가 잔소리를 짧게 하는 법.


“우리 병원 내원 환견 중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피부병 환자인데, 소독을 꼼꼼히 해야겠죠.”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소독에 더 신경 쓰겠습니다.”

‘맞습니다, 맞고 말지요.’

고개를 흔들며 맞장구치는 설희를 보고 은우가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대뜸 큰 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예방은!”

갑자기 시작된 구호에 어리둥절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재촉했다.


“예방은?”

아, 귀찮아 죽겠네, 정말.


“최선의 치료이다…….”

힘없이 중얼거리자, 그가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외쳤다.


“예방은!”

에라이, 모르겠다. 이 장단에 맞춰줘야 끝나겠지.


“최선의 진료이다!”

설희 역시 주먹을 불끈 쥐고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환자들이 다 돌아간 병원을 울리는 쩌렁쩌렁 구호 소리에, 병원의 부원장인 최 선생님이 웃으며 진찰실 문을 열었다.


“하하하, 설희 씨. 늦었는데, 청소 다 끝났으면 퇴근하세요.”

“넷! 감사합니다! 그럼 퇴근하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

옷을 갈아입자마자 설희는 서둘러 가방을 들고 병원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해방이다! 오늘은 해방! 내일은 일요일, 병원 안 오는 날!’

그렇게 신나게 발을 내딛는 그때.


“설희 씨.”

앞으로 향하던 발이 뒤에서 들려온 귀에 익은 음성에 정지했다. 마치 귀신의 목소리를 들은 양, 멈춰 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냐 아냐, 잘못 들었을 거야. 퇴근했는데 옥 선생이 나를 부를 리가.

무시하고 가려던 그때.


“유설희 씨.”

한숨을 쉬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은우가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네, 선생님.”

“오늘 저녁에 약속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저 자신과의 약속이…….

침대에 배를 깔고 귤을 까먹으며 만화책을 보다가 그대로 누워 잘 약속이 아주 오래전부터 잡혀 있었어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설희는 얼굴에서 불만을 지우고 생긋 웃어 보였다.


없어요.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시간 있으면 나랑 어디 좀 가죠.”

“어디요?”

남은 일이 있나 싶었는데, 병원 밖으로 나가자니 예상외의 말이었다.

어디 세미나라도 가자는 걸까? 같이 자료를 찾아보러 간다거나.

설희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하자, 은우가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안 잡아먹습니다.”

“…….”

“가면 알아요.”

그는 잡아먹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설희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은우의 차에 탔다.

 
***

우아한 클래식이 흐르는 레스토랑 안.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와서인지, 설희는 아무래도 몸에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이거 정말 오늘 무슨 일이라도 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낯선 공간이었다.

은우가 자신을 데려온 곳은 동물병원 근처의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직접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지만, 소문은 익히 들은 곳이었다.

차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 부드러운 음악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며 설희는 속삭였다.


“여기, 텔레비전에 나온 유명한 셰프가 새로 개업했다는 곳 아닌가요?”

“그랬던 것도 같네요.”

느른한 표정으로 은우가 말했다.

예약을 잡기가 힘들다고 알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 이름을 대고 들어왔다. 미리 예약까지 한 것이라는 이야기.

왜, 어떻게, 어떠한 이유로 온 걸까?

빨리 용건을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은우는 우아한 손길로 식사를 할 뿐이었다. 손을 움직이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안 먹습니까? 맛없어요?”

“아뇨, 맛있습니다.”

‘레스토랑 음식 잘 먹이고 일을 시키려고 하는가. 아니, 고작 일 때문이라기엔 너무 잘 먹이는데.’

혹시 안 좋은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닐까.


‘병원에서 나가 달라고 하려나. 그러니까 이런 비싼 밥을 먹이지.’

지금 돌마래 동물병원의 실세는 다름 아닌 은우였다.

내로라하는 병원에서 은우를 데려가고 싶어 한다고 다른 직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니까 밥을 맛있게 먹인 다음.

“유설희 씨, 병원에 도움이 안 됩니다. 수습기간 중에 병원에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제안한다면…….

그동안 잘못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설희가 상상을 부풀리는 순간, 은우가 살짝 눈썹을 치켜들었다.


“유설희 씨.”

“네?”

“여기가 마음에 안 듭니까?”

“아, 아뇨. 너무 좋은데요. 제가 안 어울려서 그렇지.”

설희는 오늘 외출할 계획이 없어 편한 원피스를 입은 채였다. 그에 반해, 은우는 너른 어깨에 툭 걸친 검은 재킷이 멋스러웠다.

거기에…….
깊은 눈매.
날카로운 콧날.
부드러운 입술.


‘하긴, 얼굴이 저렇게 잘생겼는데 옷이 중요한가. 불공평한 세상이야.’

그렇게 설희가 속으로 꿍얼대는데, 은우가 입을 열었다.


“다행이군요. 오늘 유설희 씨에게 할 중요한 말이 있어서 나름대로 신경 썼습니다.”

설희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되물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뭔가요?”

심판의 시간.

은우는 입꼬리 한쪽을 비틀면서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반듯한 인상이 찌푸려 들었다.


“유설희 씨.”

“……네.”

“아무래도 우리, 연애하죠.”

순간, 시공간이 멈췄다.

 


“네?”

귀에서 폭탄 소리가 들렸어도 이보다는 덜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지금 옥 선생이 뭐라 그랬어? 연애?

비현실적인 말에 한동안 설희가 말이 없자, 은우가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유설희 씨, 괜찮습니까?”

괜찮지 않았다. 믿겨 지지가 않아. 옥은우가 누구던가. 일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 없는 남자 아니던가.

여전히 설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렵하게 뻗은 눈꼬리가 자신을 향했다.


“저, 뭐라고 하셨죠? 저랑…… 뭘 하신다고?”

“연애 말입니다.”

연애란 무엇인가.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서로 좋아하여 사귐.

성적인 매력.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꼿꼿한 자세로 앉은 얼굴을 바라본다.

긴 속눈썹.

날카로운 콧날.

붉은 입술.

자신에게 연애를 속삭인 입술에 시선이 가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은우가 입술을 끌어올려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당황했습니까?”

“네? 네. 솔직히 당황했어요.”

그동안 일하면서 자신에게 잘해준 적이 있다든지, 가끔이라도 친절하게 해줬다든지 하면 이해가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설희에게 특별대우를 해준 기억은 없었다.

아, 아니지. 특별히 엄격하게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하긴 했지.

혼란스러워하는 설희에게 은우가 말을 꺼냈다.


“그럴 수 있죠. 갑자기 이렇게 말해서 미안합니다.”

은우의 사과에 설희의 눈꺼풀이 파르르 흔들렸다. 지금 옥 선생이 사과를 했다. 내일 세상이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정이 있습니다.”

딱딱한 은우의 말에 설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사정이 있으셨구나! 그렇죠, 그렇겠죠. 아, 이제야 이해가 가네.”

왜 옥 선생님이 나랑 사귀자고 하지? 갑자기 연애를 해야만 하는 급박한 사정이 있나? 아니면 내가 뭘 잘못했나? 이게 무슨 벌인가?

다른 건 몰라도, 저 옥 선생이 날 좋아하는 건 아닐 거야.

그렇게 설희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의문이 그제야 차분히 가라앉았다.

무언가 일이 있어서, 갑자기 연애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가장 가까운 설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별로 친하지도 않고, 애초에 그에게는 애물단지인 자신에게까지 제안한 것을 보면 은우도 꽤나 급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설희는 그 제안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저는 곤란한데요. 다른 직원분들에게 부탁해보시면 어떨까요? 채린 씨라든지.”

“……무슨 말입니까?”

“저한테까지 이야기하신 것 보면 급하신 것 같아서요.”

“싫습니다.”

은우가 딱 잘라 말했다. 기분이 나쁜 듯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다. 설희는 서둘러 덧붙였다.


“사정이 있으시다길래, 괜한 오지랖이었네요. 저한테까지 부탁하셔서 급한 일이실까 봐.”

한참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유설희 씨, 착각을 한 것 같군요.”

“착각이요?”

“나는 당신한테까지 말한 게 아니라.”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올린다. 은우의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그 아래로 빛나는 눈동자.


“설희 씨라서 말한 겁니다.”

붉은 입술이 속삭인다. 홀린 것처럼 설희는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아무나가 아니라.”

“…….”

“당신이라서 연애하자고 한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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