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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네가 먼저 날 꼬신 거야 (60/84)


60화. 네가 먼저 날 꼬신 거야
2023.04.28.



 
사실 그날 밤은 술에 취해 있었고, 아침에는 그가 깨기 전에 서둘러 떠나기 바빴기에 호텔방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영은 마치 처음 와본 장소인 것처럼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런데 스위트룸이랑 이 방을 바꾼 건 너무 돈 낭비 아니에요?”

방값이 세 배 이상 차이 날 듯했다.

그러니까 그 유투버 여자도 군말 없이 방을 바꾸어준 것이다.

아니었으면 미친 사람 취급당했을 거다.

그녀의 물음에 태혁이 움찔하며 멈추어 섰다.


“제발 내 앞에서 우리 할아버지처럼 말하지 마.”

그가 정말 싫어하는 표정을 지어서 나영은 웃고 말았다.

그래도 그가 진심으로 할아버지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최태혁 교수는 진짜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오히려 무표정이 되었다.

마치 그 사람을 이 세상에 없는 사람 취급하듯이.


“우선은 뭘 좀 먹자.”

그러고 보니 일어나서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 먹긴 했다.

태혁은 룸서비스를 시키기 위해서 전화기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주문할 동안 나영은 창가로 걸어가서 밖의 풍경을 보았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풍경은 시원하고 드넓었다.

그래도 두 번째 와서 이걸 보게 되니 좋구나 싶었다. 추억이 하나 더 늘었다.

뒤에서 뻗어온 단단한 팔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 공간에서 그녀의 몸을 안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기에 나영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틀어 옆을 보았다.

쪽.

순식간에 태혁은 그녀의 입술까지 맛보고 멀어졌다.

나영은 잠시 얼이 빠진 눈으로 그의 수려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낮에 맨정신으로 와보니 어때?”

그의 말에 나영은 얼굴이 달아올라서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젠 서울의 풍경과 함께 유리창에 비친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이 눈을 어지럽혔다.


“그때는 너랑 침대밖에 기억이 안 나.”

아무래도 그는 그녀가 부끄러워 죽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여기 데려온 거 같았다.

그녀는 이런 말들에 전혀 면역력이 없었다.


“너 귀가 빨개졌어.”

그가 그리 말하며 입술로 그녀의 귀를 물자 나영은 속으로 내적 비명을 질렀다.

나영은 서둘러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서 반대쪽으로 갔다.


“하, 하지 마세요.”

그녀가 새빨개진 얼굴로 거부하자 태혁이 바로 사과했다.


“아! 미안. 귀가 예민했어?”

까악! 그런 말도 정말 못 참겠다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화장실 갈 거예요.”

나영은 쥐구멍 대신 몸을 돌려 화장실로 도망쳤다.

태혁이 그녀의 집에서 화장실로 도망쳤듯이.

탁.

문을 닫고 화장실에 혼자 남게 되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요동치는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오늘 왜 저러는 거야?”

그녀는 이미 그와 밤을 보내보았기에 그의 스타일을 알았다.

정말 그런 순간이 오면 그는 절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오늘처럼 그의 말에 적응 못 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이 없었던 거다.

이걸 괴롭힌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유혹한 거라면 그녀가 이리 도망쳤으니 실패다.

나영은 이렇게 도망친 그녀가 문제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같이 밤을 보낸 연인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녀가 통나무처럼 군다고 태혁이 싫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나영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첫날밤을 보내는 사이도 아니고, 이미 밤을 같이 보낸 사이이니 너무 유난스럽게 굴지 말자.

나영은 두 눈을 감고 자신에게 암시를 걸었다.

똑똑.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자 나영은 크게 어깨를 떨며 암시에 실패했다.


“식사 왔어. 나와서 먹어.”

이 호텔 방을 나갈 때까지 화장실에 있을 수는 없었기에 나가긴 나가야 했다.

달칵.

문을 조금만 열고 나영은 최태혁 교수한테 부탁했다.


“밥 먹을 때는 조용히 먹는다고 하면 나갈게요.”

차에서는 너무 조용하다고 뭐라고 하고, 호텔 와서는 말한다고 뭐라고 하고 있으니 오히려 그녀가 변덕스럽게 보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최태혁 교수가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고개를 틀어 문틈으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교수님 화나게 하려는 게 아니라요. 그런 말은 제가 너무 부끄러워서 그래요.”

나영은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알았어. 약속할게. 나와.”

그녀의 노력이 통했는지 그가 흔쾌히 약속하자 나영은 그제야 안도하며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병원으로 너 찾아온 남자 누구야?”

쾅.

그녀가 다시 문을 닫아버린 건 거의 본능이었다.

나영은 자기 행동에 자신이 더 깜짝 놀랐다.

여기서 문을 닫으면 어쩌자는 거야!

진짜 장수호랑 뭔가 있는 거 같잖아!

나영은 서둘러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분명 방금까지 문 앞에 있던 최태혁 교수가 없었다.


“교수님!”

나영은 당황해서 큰 소리로 그를 부르며 화장실에서 뛰어나왔다.

식사 준비된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하고 나영은 엉거주춤 멈추어 섰다.

당황한 그녀와 달리 태혁이 차분한 어조로 나영에게 권했다.


“어서 와서 먹어.”

나영은 서둘러 그의 앞자리로 다가가서 앉으며 설명했다.


“아버지 부하직원이에요. 제가 독립하고 집에 자주 안 가니까 아버지 대신 확인하러 왔다고.”

그녀는 결국 맞선이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그럴 용기가 도저히 안 생겼다.

어차피 장수호와는 그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굳이 맞선이라고 말해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그녀 멋대로 판단하는 건 모두 그녀의 변명이라는 걸 알기에 심장이 쿵쾅쿵쾅 지진 난 듯이 뛰어댔다.

마치 그한테 나쁜 짓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최태혁 교수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버지가 네 남동생이 아니고 부하직원을 보냈다고?”

“남동생은 군대 갔어요.”

그 말에 태혁은 더 크게 반응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아직 우리 사이 가족들이 몰라서.”

그녀도 병원 근무 때문에 동생 입대하는 날 갈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것도 꼭 최태혁 교수한테 일부러 속인 게 된 것만 같아서 나영은 그의 앞에서 점점 주눅이 들었다.

차라리 이제라도 솔직하게 장수호가 그녀의 맞선 상대였고, 아버지는 아직도 장수호가 그녀와 만나는 걸로 알고 있다고 그에게 말하면…….


“그럼 그 남자 나도 한번 만나자.”

최태혁 교수의 말에 나영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왜요?”

설마 벌써 그녀의 말을 의심하는 건가?

아무래도 그녀는 이런 쪽으로 전혀 소질이 없나 보다.


“네 아버지가 인정하는 사람이니까 너한테 보냈겠지. 나도 좀 배우고 싶어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최태혁 교수의 말에 나영은 눈가가 뜨거워졌다.


“우리 아버지는 제 유괴 사건 이후 사람이 변했어요.”

고기를 썰던 태혁의 손길이 멈추었다.


“그런데 만약 그때 교수님이 절 구해준 사람이었다는 걸 아버지가 알았다면 자기 전 재산을 주어서라도 감사를 표했을 거예요.”

“됐어. 난 돈 안 좋아해.”

무심하게 받아치는 그의 말에 나영은 희미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그녀가 사과하자 태혁의 미간에 실금이 그어졌다.

그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갑자기 왜 사과하는 거야?”

나영은 고개를 숙이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그때 절 구해준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한마디만 했어도, 많은 게 바뀌었을 거예요.”

그럼 지금 이렇게 막막하지도 않았을 거다.

굳이 장수호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다.

모두 그녀의 탓이었다.

그의 손이 다가와 그녀의 뺨을 감싸 쥐고 위로 들어 올렸다.

단단하고 기름한 손가락이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눈 밑을 문질렀다.


“그때 넌 말 못 하는 실어증이었는데 그게 어떻게 네 탓이야?”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저지른 사고가 많아서 떳떳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그의 탓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날 알아봤잖아. 난 그걸로 충분해.”

나영은 두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손을 붙잡았다.

둘 다 서로에게 하지 못한 말을 마음에 품고 있었기에 바라보는 시선에 애틋함이 더 짙어졌다.

태혁은 윤이나의 말에 조금이라도 흔들린 게 미안했고.

나영은 그에게 거짓말한 게 미안했다.


“여기 다시 데리고 와 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그리 말하며 진심으로 웃기까지 하니 태혁은 양심이 찌르르 울렸다.

그녀가 어항 청소를 했다고 했을 때 그는 이미 그녀의 거짓말을 알았다.

어항 청소를 했으면 분명 그의 선물을 발견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선물에 대한 언급도 없었고, 손에 아무것도 끼고 있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한테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묻지 못한 건 윤이나의 말이 현실이 될까 봐 두려워서.

그래서 그녀를 데리고 안전한 장소로 숨는 걸 선택했다.

그게 이곳이었다.

오늘은 그녀도, 그도 똑같이 떳떳하지 못했다.

그러니 공평하다고 퉁 치는 것도 참 바보 같은 일이었지만, 태혁은 끝까지 그녀의 거짓말을 캐묻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나영을 믿고 싶었다. 그녀가 그를 상처입히지 않을 거라고.

도자기 인형처럼 아기자기한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흐르던 그의 시선이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서 멈추었다.

그녀의 입술은 부드러운 꽃잎처럼 탐스러워 보였다.


“네가 먼저 씻을래?”

그의 말에 놀란 나영이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태혁은 그녀가 그한테서 벗어나지 못하게 목덜미를 손으로 붙잡고 끌어당겨 입술을 부딪쳤다.

고개를 틀며 더 깊이 키스하자 짓눌린 입술 사이에서 더운 숨결이 흘러나왔다.

아랫입술을 베어 물고 떨어질 거 같던 입술은 다시 더 깊게 파고들었다.

길어지는 키스에 제대로 호흡하지 못한 나영의 하얀 얼굴은 금세 붉게 피어올랐다.

차오른 열기는 눈으로 몰린 듯 물기가 번졌다.

한참 만에야 입술을 뗀 태혁은 그녀의 눈망울을 채운 물기를 보고 눈을 좁혔다.


“내가 지금 울린 거야?”

나영은 민망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울려고 한 게 아니라 생리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진짜 울고 싶은 건 난데.”

그의 말에 나영은 눈이 크게 벌어졌다.


“교수님 힘들어요?”

그리 묻는 그녀의 눈빛에 그를 향한 걱정이 뚝뚝 떨어졌기에 태혁은 입술 사이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그한테 거짓말을 밝힐 용기는 없을지 몰라도, 그녀를 향한 갈망만은 멈출 수가 없었다.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그는 그녀의 앞에서 기꺼이 바보가 되기로 했다.


“지금 네가 먼저 날 꼬신 거야.”

그리 말하며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자 나영은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다.

태혁은 그녀를 안고 곧장 침대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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