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나만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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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나만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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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나만 믿어
2023.04.24.
태혁은 떠나는 윤이나의 뒷모습을 외면하고 돌아서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넵! 교수님.]
오승희가 군기 바짝 든 신병처럼 전화를 받았다.
“나영이 아직 집에 있어?”
[아뇨. 1시간 전에 나갔는데. 못 만나셨어요?]
태혁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나영이 사는 집에서 병원까지 차로 5분이었다.
그럼 넌 어디로 간 거지?
난 왜 네가 아니라 오승희에게 전화한 걸까.
태혁은 자기 행동이 후회되었다.
그가 결국 윤이나의 말에 흔들렸다는 게.
그게 윤이나가 원한 것이었으니, 그는 그러면 안 되었다.
늪은 빠진 순간 점점 깊이 말려들 뿐이었으니까.
태혁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밀려드는 사념을 차단했다.
설령 윤이나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해도 모든 판단은 나영의 말을 듣고 나서 해야만 했다.
섣불리 다른 의심을 하는 건 이 사랑에 대한 모독이었다.
***
나영은 호텔에서 이주아를 만나고 나서 곧장 병원으로 왔다.
최태혁 교수와 황 여사의 병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녀가 너무 늦어버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서 열심히 뛰었다.
병실 앞에서 숨을 고른 뒤 똑똑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황 여사와 함께 있는 최태혁 교수가 보이자 그녀는 의식적으로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오늘은 홍식 씨가 없네요.”
대답을 한 건 최태혁 교수가 아니라 황 여사였다.
“홍식이 교회 갔어요.”
“아! 기독교예요?”
“교회 성가대.”
교회도 노래 부르러 갔다는 말에 나영은 하하 웃다가 그녀를 빤히 보고 있는 최태혁 교수를 발견하고 웃음을 멈추었다.
조용한 시선이 더 많은 말을 담고 있는 듯해서 나영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왜 저렇게 보지?
“생각보다 늦었네.”
그의 말에 나영은 짧은 시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주아를 만나서 맞선을 깽판 친 건 말해도 상관없지만, 그럼 이주아를 찾아간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아직은 이주아가 회사로 보낸 편지 때문에 아버지가 그에 대해 다 안다는 걸 최태혁 교수가 몰랐으면 했다.
적어도 장수호와 그녀가 해결책을 찾아낸 다음에 알리고 싶었다.
나영은 대답했다.
“교수님이 어항 청소하라고 해서 오늘 청소하고 오느라 좀 늦었어요.”
전에 그가 어항 청소하라는 메시지를 보낸 게 떠올라 꺼낸 말이었다.
그녀의 대답에 그의 눈이 살짝 벌어졌다.
“어항을 청소했다고?”
“네.”
그녀의 대답을 듣고 최태혁 교수가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아무 말이 없었다.
나영은 예민하게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별말이 없었지만, 그녀의 눈을 먼저 피한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걸기 위해 입을 벌렸을 때 병실 문이 열리며 홍식이 밝은 에너지를 몰고 들어왔다.
“다들 절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까?”
교회 다녀오는 길이라는 홍식은 그 어느 때보다 차림이 경건했다.
그런데 넘치는 흥은 꼭 클럽에서 돌아온 사람 같았다.
홍식이 돌아오자마자 태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황 여사에게 말했다.
“그럼 저희는 그만 가볼게요.”
황 여사가 나영을 쳐다보았다.
그녀에게 오늘 윤이나가 다녀간 걸 말해주고 싶으나 옆에 태혁이 있어서 하지 못했다.
병실 밖에서 대화해서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다시 돌아온 태혁의 분위기가 좀 달라졌었다.
나영은 황 여사가 아쉬워서 쳐다보는 줄 알고 말했다.
“퇴원하시기 전에 또 올게요. 여사님.”
황 여사는 웃으며 잘 가라고 인사했다.
나영은 마지막으로 홍식에게 인사한 뒤 태혁을 따라 병실을 나왔다.
“저 때문에 빨리 갈 필요는 없어요. 승희 있을 때는 고스톱도 쳤다면서요? 그거 저도 할 수 있어요.”
병실에 더 있어도 된다고 그녀가 말하자 최태혁 교수가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내가 너랑 고스톱 치고 싶을 거 같아?”
그의 말과 표정이 평소와 똑같아서 아까 병실에서 느낀 예민함은 그녀가 거짓말 때문에 양심에 찔려서 그랬나 보다.
나영은 조금 안도하며 물었다.
“그럼 뭐하고 싶은데요?”
“가보면 알아.”
태혁이 그녀를 이끌었다.
그는 가고 싶은 곳이 확실히 있는 듯 보여서, 나영도 그가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해졌다.
며칠 전 병원에서 짬을 내 1시간 데이트한 게 전부였기에, 오랜만의 데이트가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그와 정말 좋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었다.
***
나영은 조수석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앉아있다가 힐긋 고개를 돌려 운전석의 그를 보았다.
오늘따라 그가 말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 왜 아무 말씀이 없으세요?”
그녀가 묻자 태혁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운전 중이잖아.”
분명 강원도 갈 때는 운전하면서도 말을 곧잘 했던 거 같은데 말이다.
“교수님이 말이 없으니까 제가 심심해요.”
그제야 최태혁 교수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하며 바라보았는데, 태혁이 아무 말 없이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영은 실망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냈다. 승희한테 까망이 밥 좀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아침에 급하게 나가느라 주지 못했기에.
“누구한테 연락하게?”
그런데 그제야 최태혁 교수가 그녀에게 먼저 물었다.
“승희요.”
그녀의 대답에 그의 목울대가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설마 승희한테 화나셨어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승희라고 말했을 뿐인데 저러니 나영은 그리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태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툭 뱉어냈다.
“아냐. 나한테 화난 거야.”
그건 그거대로 이해가 안 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이 덩달아 심각해지는데, 그가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재미있는 말을 하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안 떠올라.”
그의 말에 나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 말이 재미있었어요.”
태혁은 인정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나영은 그가 오늘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새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
“…….”
두 사람은 불이 꺼진 클럽 간판을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그들이 17년 만에 처음 만났던 곳이었다.
“문 닫았는데요.”
“그러게. 그러고 보니 항상 밤에 왔었구나.”
그의 대답이 너무 바보 같아서 나영은 웃고 말았다.
정말 최태혁 교수답지 않은 실수였다.
“그런데 왜 여길 온 거예요?”
두 사람이 그날 클럽에 왔던 건 각자 사정이 있었다.
그녀는 레지던트 생활 시작하기 하루 전이었고, 태혁은 막 미국에서 돌아와서 차현이 환영 인사 겸 끌고 왔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니었다.
“오늘따라 그날이 많이 떠올라서.”
태혁의 대답에 나영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말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바로 알 수가 없어서.
꼭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엔딩이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헷갈렸던 것처럼.
“할 수 없군.”
태혁이 포기한 줄 알았는데,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호텔부터 가자.”
호텔이라는 말에 나영은 당황부터 했다. 술에 취해서만 가봤었지, 맨정신으로 남자랑 가본 적은 없었으니까.
“네? 진짜 지금 가실 거예요?”
“난 그냥 클럽에 가려고 했던 건데. 문 닫았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핑계 한번 그럴듯했다.
“저희 2차로 술 마신 곳도 있잖아요.”
“거기도 저녁에 열어.”
그날 그들의 마지막 장소가 분명 호텔이 맞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낮에 호텔이라니.
정말 부담스러웠다.
만약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친다면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호텔은…….”
그녀가 망설이자 최태혁 교수가 돌아보며 엄숙하게 물었다.
“넌 나 못 믿는 거야?”
이 순간 이런 대사는 참 거북했다.
“믿어요.”
달리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이젠 그를 믿는다면 호텔에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에 나영은 결국 그가 이끄는 대로 호텔까지 가게 되었다.
시간만 달라진 것인데 처음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정말 달라서 나영은 최태혁 교수의 등 뒤에서 눈치만 보았다.
호텔 프런트 직원은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인데, 마치 그들이 호텔에 왜 왔는지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인 거 같았다.
“1005호 주세요.”
그가 그때 두 사람이 묵었던 방을 달라고 말하자 그녀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그 방에 또 가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죄송합니다. 그 방은 이미 손님이 묵고 계시는데, 다른 방도 괜찮으십니까?”
그들이 찾는 방이 이미 나갔다는 말에 태혁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실망감이 떠올랐다.
나영도 팽팽하게 달아올랐던 긴장감이 푹 꺼지며 맥이 빠졌다.
그녀는 그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떡해요? 교수님.”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가 단단해지더니 최태혁 교수는 프런트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스위트룸으로 주세요.”
그가 이 호텔에서 가장 비싼 방을 달라고 하자 나영은 입이 벌어졌다.
태혁이 이대로 진짜 스위트룸을 예약하기 전에 나영은 그의 팔을 급하게 잡아당겼다.
“이러면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잖아요.”
두 사람은 그냥 호텔에 온 게 아니라 함께 밤을 보낸 그 방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하는 말은 한결같았다.
“나만 믿어.”
도대체 뭘 믿으라는 건가.
이젠 그가 살짝 사이비 교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태혁은 스위트룸 키를 받아서 들고는 그녀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영은 더 이상 그를 말리기도 지쳐서 묵묵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스위트룸으로 가는 줄 알았던 태혁이 그녀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곳은 10층이었다.
최태혁 교수는 1005호 앞으로 걸어가서 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끈질기게 두드리자 안에서 짜증 내는 목소리가 들리며 곧 문이 열렸다.
20대의 젊은 여자는 문 앞에 서 있는 훤칠한 외모의 최태혁 교수를 보고 바로 표정이 밝아졌다.
“어머. 무슨 일이시죠?”
목소리에 애교가 흘러넘쳤다.
바로 옆에 나영이 있는데도 그녀는 보이지 않는 거 같았다.
열린 문틈으로 촬영 장비들이 있는 걸 보니 유투버인가 보다.
나영이 여자를 예민하게 살피는 동안 최태혁 교수는 그녀에게 스위트룸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스위트룸과 이 방을 바꾸고 싶은데, 그러시겠습니까?”
여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스위트룸 카드를 보았고, 나영은 최태혁 교수의 얼굴을 보았다.
이 남자는 오늘 도대체 어디까지 하려고 이 일에 이렇게 진심인가 싶었다.
꾹.
그녀의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그녀가 도망칠 수 없게 하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