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자고 가도 괜찮아요
(36/84)
36화. 자고 가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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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자고 가도 괜찮아요
2023.02.03.
나영은 계속 마주 보고 있다가는 심장병이 생길 거 같아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세 번의 기회 중 마지막이라는 말이잖아요. 어차피 병원에서 매일 같이 일하는데 어떻게 마지막이 될 수 있어요.”
“병원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거면, 너랑 윤이나의 차이는 뭔데?”
최태혁 교수가 하필 윤이나의 이름을 말해서 나영은 꿈이 다시 생각나 버렸다.
누가 숨구멍을 틀어막은 듯이 가슴이 답답했다.
고개 숙인 그녀의 붉은 얼굴을 내려다보던 태혁은 몸을 돌려 바닷가에서 걸어 나왔다.
그가 그녀를 바닥에 내려주자 몸이 잠시 휘청했다.
나영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네가 마지막 용기를 내지 않으면 결국 나도 방법이 없어.”
나영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최태혁 교수는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스민 슬픔이 그녀의 눈으로 뚝뚝 떨어진 듯 시야가 아렸다.
“내가 아무리 널 좋아해도 방법이 없다고.”
그가 단지 육체적 욕망이 아니라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하니 심장이 뛰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하지 못하는 게 그녀의 방어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진짜 문제는 병원이 아니었다.
그 사건 이후 움츠러든 마음을 펴지 못하고 사람을 경계하고 믿지 못하며 자신의 우물 안에 갇혀 있는 모습이 꼭 실패자처럼 느껴졌다.
그녀도 지금은 이런 자신이 싫어졌다.
“우선 밥이나 먹자.”
최태혁 교수가 가볍게 말하며 식당이 있는 쪽으로 먼저 걸음을 떼었다.
나영은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그녀도 그의 뒤를 쫓아 걸어갔다.
바닷가였기에 두 사람은 조개구이를 먹으러 갔다.
조개만으로도 푸짐하게 한 상 차려지자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불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조개는 보는 것만으로도 입맛을 돋우었다.
최태혁 교수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관자를 그녀의 그릇 위에 올려주며 권했다.
“먹어 봐.”
나영은 관자를 먹기 전에 그의 얼굴을 보았다.
“오늘은 왜 먼저 안 드세요?”
그의 식사는 그녀의 시선으로 봤을 때 아주 야생적이었다.
공격적이었고, 빠르며, 매우 많이 먹었다.
“너 맛있게 먹는 거 보고 싶어서.”
강원도 바다에 있는 최태혁 교수는 모든 게 병원에서 볼 때와 달랐다.
좀 더 낭만적이다. 사람 설레게.
그녀는 뜨거운 관자를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맛있어?”
그의 물음에 나영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교수님도 드세요.”
젓가락을 잡은 그의 표정이 정말 행복해 보여서 나영도 웃음이 나왔는데,
그가 조개가 아니라 라면으로 젓가락을 뻗자 나영은 바로 그의 젓가락을 붙잡았다.
태혁은 이건 반칙이라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라면 말고 조개 드시라고요.”
“난 조개구이집에서 원래 라면 먼저 먹어.”
나영은 그가 라면을 이렇게나 좋아한다는 게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만약 그녀에게 자격이 주어진다면 라면부터 끊게 할 거였다.
그 생각을 한 순간 나영은 깜짝 놀란 눈으로 최태혁 교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반응을 오해한 태혁은 오늘 라면을 못 먹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개구이집에서 꼭 라면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그녀에게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영은 입도 떼지 못했다.
방금 그녀가 처음으로 두 사람의 발전된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는 걸.
***
바다의 시간은 정말 도시의 시간보다 느리게 흘렀다.
파도가 왔다가 떠나는 소리를 몇 번이고 들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일몰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해가 바다에 잠기며 하늘이 보랏빛과 붉은빛으로 휩싸이자 자연의 아름다움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장관을 이루었다.
그래도 나영은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동해에 와서 일출이 아니라 일몰 보는 게 의미가 있나요?”
“그럼 내일 일출도 보고 갈래?”
최태혁 교수는 자고 가자는 말을 꼭 조개구이 집에서 라면 말하듯이 했다.
“전 그 시간에 무조건 병원에 있어야 합니다. 교수님.”
그녀가 갑자기 정중한 어투로 레지던트가 교수에게 보고하듯이 말하며 안 된다고 하자 태혁도 더 고집하지 않았다.
“그럼 이만 서울로 돌아가자.”
그가 먼저 서울로 가자고 말한 순간 나영은 마음에 아직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남은 느낌을 받았다.
“교수님. 저…….”
그녀가 입을 떼자 태혁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하지만 정작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영은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말한 마지막 용기를 뽑아내는 것은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지금 그녀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할 말 없으면 그만 가자.”
그리고 최태혁 교수는 왜 하필 지금 이렇게 쿨한 태도를 보이는 건가 싶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그녀가 제대로 대답할 때까지 몰아붙였을 텐데.
설마 그의 마음속에서 세 번의 기회는 이미 끝이 나버렸다는 건가.
그가 먼저 이 관계에 그녀를 끌어들였으면서, 그 혼자 정리해 버린 거 같아서 나영은 착잡한 마음으로 최태혁 교수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노을이 끝난 바다에는 까만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영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태혁 교수도 애써 그녀한테 말을 걸지 않고 운전에 집중했다.
이젠 너무 늦지 않게 서울로 돌아가는 게 제일 중요했으니까.
“피곤하면 자. 서울 도착하면 깨워줄게.”
“아뇨. 괜찮아요.”
나영은 대답하며 어두운 강원도의 밤을 응시하였다.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든 말을 하면 그래도 아직 기회는 있었다.
기회는 최태혁 교수가 그녀에게 달라고 했던 건데, 이젠 그녀가 기회를 찾고 있었다.
나영은 힐긋 운전하는 최태혁 교수의 옆얼굴을 보았다.
꼭 위대한 조각가가 완벽함을 추구하며 조각해 놓은 거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저 정돈된 미모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최태혁 교수를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아주 많았다.
그럼에도 그를 좋아하는 걸 멈출 수 없다면 이 마음에 걸맞게 그녀가 변해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뭔가 이상한데.”
운전하던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영은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그들의 앞으로 차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서울이었으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막힐 일이 없을 줄 알았던 강원도 고속도로라서 이상하다고 말한 것이었다.
“혹시 앞에 사고 난 거 아니에요?”
강원도에서 이렇게 차가 막힌다는 건 교통사고 때문에 차량 통행이 통제되었을 가능성이 제일 컸다.
최태혁 교수는 라디오를 켜서 교통방송이 나올 때까지 주파수를 돌렸다.
<강원도 양양고속도로에서 버스와 승용차가 부딪치는 4중 추돌사고가 발생해서 도로 정체가…….>
뉴스를 들은 최태혁 교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버스 사고라면 부상자들이 넘쳐날 것이었다.
“여긴 속초 진료권이야.”
“네?”
한국은 모든 것이 수도인 서울에 몰려 있었기에 지역 간 의료기관의 불평등이 심한 나라였다.
그래서 지역 간 환자 사망률 차이도 심했는데, 속초 진료권은 전국에서 사망률이 두 번째로 높은 곳이었다.
그건 이렇게 큰 사고로 생긴 환자들을 치료할 의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태혁은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나영에게 지시했다.
“네비게이션으로 여기서 제일 가까운 상급 병원 찾아봐. 거기로 가자.”
두 사람은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나영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들과 전혀 상관도 없는 강원도 병원으로 가겠다는 최태혁 교수를 말릴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의사였으니까.
나영은 서둘러 교통사고 환자들이 이송되었을 병원을 찾아보았다.
***
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원 응급실은 4중 추돌 교통사고로 실려 온 환자들로 아비규환이었다.
한강대학교 병원이었다고 해도 이 정도 교통사고면 응급실이 마비되니, 강원도는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태혁은 병원에 오는 길에 미리 전화로 응급실과 통화해서 자신이 한강대학교 병원 외과 의사라는 걸 알렸기에 바로 응급실 책임자를 찾아갔다.
“전화했던 한강대학교 병원 최태혁입니다.”
그를 보고 응급실 전문의는 바로 반색을 표했다.
“아! 반갑습니다. 지금 수술이 급한 복강 내 출혈 환자가 있는데, 우리 병원 외과의는 전부 수술 중입니다. 수술이 가능하신가요?”
타 병원 소속 의사에게 수술을 맡길 때는 절차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워낙 위급한 상황이라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우선은 환자를 살리고 보는 게 먼저였다.
태혁은 수술실로 가기 전에 그녀에게도 지시했다.
“넌 응급실 환자 치료하고 있어. 난 수술하고 올게.”
나영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몸을 돌려 수술실로 향하는 최태혁 교수의 뒷모습을 보는데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그녀도 제 몫을 하기 위해서 서둘러 간호사에게 다가가 의사 가운을 부탁했다.
응급실에서 계속해서 실려 오는 교통사고 환자들을 보다 보니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 자정이 되었다.
최태혁 교수는 복강 내 출혈 환자 수술뿐만 아니라 환자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다른 수술까지 도와주고 나서야 응급실로 그녀를 찾으러 돌아왔다.
나영은 막 다리 열상 환자의 상처 봉합을 끝내고 있었다.
“급한 불은 꺼진 거 같으니까, 우린 이제 서울로 돌아가자.”
나영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라텍스 장갑을 벗었다.
응급실 의료진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병원 밖으로 나오니 하얀 달이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태혁은 두 팔을 돌리며 기운을 모았다.
“서울까지 운전하려면 또 힘을 내야겠군.”
벌써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으니 서울에 도착하면 새벽 3시가 될 거다.
꼬박 5시간이나 수술실에 박혀 있던 사람을 바로 서울까지 장거리 운전을 시키려니 나영은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이 시간에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운전해 갈 대리운전을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 밤 안에 저 집에 데려다줄 거예요?”
“당연하지. 내일 일출 시간에 무조건 병원에 있어야 한다며. 내가 꼭 그리되게 해줄게.”
태혁은 반드시 서울까지 운전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가 데리고 온 강원도였으니 책임은 그에게 있다는 듯이.
그냥 조용히 조수석에 타면 될 일인데, 나영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고 가도 괜찮아요.”
멈칫.
운전하기 위해서 팔을 풀어주던 태혁은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영은 반대편을 쳐다보고 있어서 얼굴이 안 보였다.
“방금 뭐라고 했어?”
태혁은 그녀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나영은 더더욱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방금 자고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의 목소리 톤이 격양된 건 아무래도 착각이 아닌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