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영원히 기억에 남을 시즌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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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스포츠 팬들이 그렇듯 야구팬 역시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인 선수들에겐 굉장히 열린 마음으로 지켜보는 편이다.
특히 9월 확장엔트리 이후, 그리고 순위가 결정된 후라면 주전들의 체력 안배와 신인들의 경험치를 위해 신인이 나오는 경기가 많았다.
특히 투수들이 경기에 나서는 경우는 경기가 거의 판가름이 났을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팬들은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씩씩하게 던지고, 볼질만 안하면 된다.
마린스나 프렌즈 팬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특히 프렌즈의 선발 투수였던 다넬 제이스가 1회부터 김수호에게 홈런 맞고 2회 만에 강판당한 날엔 당연하다시피 신인 투수가 올라왔다.
프렌즈 마운드에 올라온 건 작년 1차 지명 투수 김찬.
“찬아. 쫄지말고.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눈 딱 감고 던져. 경주마처럼. 응?”
이미 점수가 2회에 6대0으로 벌어졌다.
한창 순위 경쟁 중이었다면 이 악물고 역전을 노려보겠지만 이미 순위는 거의 확정됐다.
그 때문에 김찬이 마운드에 올라왔고 투수코치가 격려의 말을 전하고 찝찝한 마음으로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다른 팀이 봐도 김찬은 좋은 선수다.
실제로 호올스가 트레이드로 가장 처음에 요구했던 투수가 바로 김찬이었다.
그만큼 매력적인 투수였고 특히 고등학교부터 깡 하나만큼은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첫 등판 이후 7경기에 나와서 15이닝 동안 볼넷이 고작 2개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까지 넉넉한 상황에 등판한 건 맞다.
그래도 볼넷이 적은 건 충분히 합격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이제 편한 상황에서의 등판은 끝났다.
보호받은 온실이 아니라 태풍이 부는 들판으로 나설 차례였다.
6대0으로 지는 상황.
지금까지 나왔던 경기들보다 점수 차는 더 벌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3회 말, 마린스의 1번 타자부터 시작하는 타순은 여태껏 김찬이 경험했던 그 어떤 타순보다 강했다.
“투코님 말이 뭔 말인지 알지? 네가 원래 잘하는 거 있잖냐. 몇 실점해도 좋으니까 그거 딱 보여주고 내려가자.”
“네!”
씩씩한 대답에 박희준이 오묘한 표정으로 어깨를 두드려주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프렌즈 감독과 투수코치가 어떤 생각으로 김찬을 지금 올렸는지 잘 알고 있다.
투수는 다다익선.
특히 단기전의 경우 버려야 하는 경기가 생길 수 있다.
그럴 때 김찬처럼 자기 공을 던지면서 이닝을 먹어줄 투수가 필요했다.
만약 오늘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충분히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합류할 가능성도 있었다.
‘근데 왜 하필 지금이냐고.’
이규영, 이주학, 김수호가 각각 두 차례씩 타석에 들어와 도합 5타수 4안타 1볼넷.
특히 김수호는 첫 타석에 홈런도 있다.
세 타자의 타격감이 하늘을 찌른다.
분명 버거운 3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신인이 저렇게 씩씩한데 선배가 먼저 포기하고 아무것도 안 할 순 없으니 박희준이 홈으로 돌아오자마자 이규영에게 말했다.
“규영아. 아직 스무 살 앤데 좀 봐줘라.”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정에 기대기로 했다.
다행히 이규영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예. 뭐.”
차분히 루틴을 진행한 이규영이 슬쩍 박희준을 향해 말했다.
“근데 선배님. 저는 그런데 저희 스물한 살 애들은 어떻게 할지 장담 못합니다. 스무 살이나 스물한 살이나 그게 그거 아닙니까?”
박희준의 표정이 썩어들어갔지만, 이규영은 보지 않았고 곧바로 초구를 당겼다.
빠른 타구를 2루수가 잡으면서 원 아웃.
그리고 이규영이 말한 마린스의 스물한 살 애 중 한 명이 타석에 섰다.
이규영 말이 맞았다.
프로에서 스무 살이나 스물한 살이나 사실 비슷했다.
하지만 마린스의 스물한 살 삼인방은 동 나이대 선수들과 결이 달랐다.
김수호와 이호민에 묻혀있지만, 이주학 역시 나이답지 않은 수비, 빠른 발과 선구안을 겸비한 타격은 마린스의 타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박희준이 이주학에게 똑같이 말했지만, 이주학은 알겠다고 대답만 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내가 누굴 봐줄 처지가 아닌데 무슨.’
하지만 세간의 평가와 다르게 이주학 본인이 느끼기에 아직 한참 부족했다.
전교 4등 반 3등.
절대 만족할 수 없다.
이주학은 김찬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몇 번 만나보기도 했고 유명했으니까.
하지만 김찬은 고등학교에 비해 변한 게 없었다.
공격적인 투구도, 140km 후반의 위력적인 빠른 공도 여전했다.
하지만 이주학은 많이 변했다.
특히 올해, 수비는 수비 코치가, 타격은 이규영의 도움을 받으면서 한층 성장했다.
-따악!
초구 몸쪽으로 바짝 붙은 공을 골라내고 2구 바깥쪽 들어오는 공을 밀어 쳤다.
맞자마자 방망이를 버리고 1루로 냅다 달렸다.
유격수가 백핸드로 잡긴 했지만, 좌타자에 발이 빠른 이주학을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송구조차 하지 못하고 세이프.
“오, 벌써 3안타? 2번 타자가 잘 맞나봐? 4안타 치면 내가 감독님한테 말해볼까?”
“에이. 아직은 9번이죠.”
1루 코치의 장난스러운 말에 이주학이 웃었다.
“오늘은 그린라이트니까 한 번 타이밍 잘 잡아봐.”
고개를 끄덕인 이주학이 넉넉하게 리드폭을 가져갔다.
이번 시즌 15개의 도루가 있다.
달리기 속도에 비해 도루가 적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규영, 박은성, 김수호로 이어지는 상위타선이라서 그렇다.
굳이 도루 시도를 안 해도 1점은 가볍게 뽑아내는 타선이 있는데 무리해서 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도루 대신 김찬의 신경을 잔뜩 긁을 생각이었다.
“세이프!”
이주학의 의도대로 김찬이 계속 견제를 시도했다.
몸이 흙으로 범벅이 됐지만, 어차피 이 복수는 팬들이 알아서 해준다.
“마!”
“마!”
“마!”
세 번의 견제 이후 김찬이 김수호에게 처음으로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진짜 깡 하나만큼은 좋네.”
“김수호한테 초구에 직구? 와, 돌았네.”
“좋다! 김찬 파이팅!”
직관을 온 소수의 프렌즈 팬들이 여러 의미로 감탄했다.
KBO의 그 어떤 투수도 김수호를 상대로 저렇게 과감한 1구를 집어넣지 않는다.
저게 제구가 안 된 건지, 아니면 정말 깡으로 집어넣은 건진 모르겠지만 평소의 모습을 비추어보면 후자에 가까웠다.
두 번째 공도 과감하게 몸쪽을 찔렀다.
“파울!”
그리고 파울을 만들어냈다.
이걸로 0-2.
“그거지! 나이스!”
“좋다, 좋아! 하나만 더!”
-짝짝 짝짝짝
“삼구 삼진!”
가뜩이나 선발 투수가 일찌감치 내려가서 화가 났는데 얹힌 속을 단번에 뚫어주는 사이다 피칭이었다.
프렌즈 팬들이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며 한목소리를 냈다.
이번엔 한 번의 견제 이후 공을 던졌다.
“삼구 삼....”
-따아아악!
프렌즈 팬들이 기대하던 호쾌한 스트라이크 콜 대신 들린 강렬한 타격음.
순식간에 양 팀 팬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하···. 저걸 가운데 꽂냐···.”
“와아아아아! 김수호! 김수호!”
어제 경기에 이어 또다시 연타석 홈런.
그리고 아시아 최다 홈런 타이기록인 60번째 홈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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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 홈런을 치고 벌써 3일이 지났다.
어제 수원에 도착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뜨고 호텔에 있는 헬스장으로 향했다.
헬스장에 도착하니 이주학이 먼저 와있었다.
“나 타격에 눈을 뜬 거 일지도?”
이주학의 설레발과 함께 시작하는 훈련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이젠 저 모습을 하도 보니까 진짜 아무 생각도 안 든다.
3일 전 프렌즈 전에서 4안타를 치더니 어제 호올스 전에서도 2안타 1볼넷을 기록하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두 경기 모두 2번 타자로 출전하면서 이뤄낸 성과라 더 좋나 보다.
“야. 그거 수호랑 상대하기 싫어서 너랑 한 거잖아.”
“응. 개소리.”
이주학은 뒤늦게 온 이호민의 딴지에도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서 훈련을 이어갔다.
근데 딱히 훈련이랄 것도 없는 게 이제 7경기밖에 안 남았다.
굳이 무리해서 다치는 것보단 러닝만 가볍게 뛰면서 몸을 푸는 데 집중했다.
나이츠도 이미 순위가 정해진 만큼 라인업은 1.5군으로 이루어졌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근 며칠간 계속 지명타자로 출전했는데 오랜만에 포수 마스크를 낄 수 있어서 좋았다.
수원 2연전은 나이츠가 먼저 승리를 챙겼고 두 번째 경기에서 우리가 이기면서 1승 1패를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수원을 떠나기 전, 구장을 반 정도 채운 우리 팬들의 축제가 이어졌다.
오늘 승리로 드디어 100승.
마린스의 역사에 영원히 남을 기록을 세웠다.
그걸 직접 봤으니 팬들이 좋아할 수밖에.
100승을 달성한 곳이 부산이었으면 좋았겠지만 100승이라는 게 중요한 거니까.
아쉽게 홈런은 치지 못했지만 딱히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아직 다섯 경기나 남았으니까.
그렇게 수원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마치고 다시 사직으로 향했다.
화요일과 수요일은 스타즈와, 목요일과 금요일은 울프즈와 경기가 있다.
네 경기 모두 홈 경기였고 마지막으로 일요일에 피닉스와의 경기가 정규시즌의 끝이었다.
“휘유. 라인업 빡세네.”
이규영의 말처럼 스타즈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가을야구 두 자리 중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주전 선수를 전원 투입했다.
우리는 여전히 1.5군 라인업이었고 경기 초반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됐다.
스타즈는 이번 두 경기를 모두 지면 사실상 탈락이다.
한 경기만 져도 위험했고 그런 의미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
“볼!”
여지없이 바깥쪽으로 형성되는 공에 한 번도 안 휘두르고 볼넷을 얻었다.
“우우우우우!”
두 타석 연속 볼넷에 야유가 쏟아졌지만, 오늘 선발 투수는 단단히 마음먹었는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끝자리라도 가을야구를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과 별개로 이해는 됐다.
결국 첫날에 4번의 타석에서 세 개의 볼넷과 마지막 타석에 친 뜬공으로 첫 경기를 마쳤다.
다음 경기도 비슷했다.
첫 두 타석 모두 볼넷.
하지만 모든 타자를 볼넷으로 거를 순 없었고 나 대신 다른 타자들이 힘을 냈다.
다시 9번으로 돌아간 이주학의 안타를 시작으로 이규영의 볼넷, 박은성의 안타로 1득점.
여기서 날 거르면 어제오늘 3안타를 친 강주호를 무사 만루에서 상대해야 했다.
“볼!”
하지만 초구가 들어오자 알았다.
그냥 걸어 나갈 준비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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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만루, 타석엔 강주호.
-따악!
그리고 강주호가 친 타구가 빠르게 유격수를 향했다.
“아웃!”
“아웃!”
워낙 빠른 타구였기에 홈으로 던지면서 아웃, 그리고 1루로 던지면서 강주호를 잡아냈다.
이어서 오준혁까지 뜬공으로 잡아내면서 무실점.
스타즈 투수의 포효에 주변을 가득 채운 마린스 팬들이 화답했다.
“우우우우우우!”
결과적으로 스타즈가 다시 한번 승리를 따내면서 스타즈는 옳은 선택을 한 꼴이 됐다.
마린스 팬들과 스타즈와 경쟁하던 다른 구단의 팬들의 쏟아지는 비판이 있었지만, 어차피 스타즈 팬들만 괜찮으면 상관없었다.
그렇게 시즌 종료까지 단 세 경기.
다섯 경기 전에 60번째 홈런을 치고도 아직 홈런을 추가하지 못한 김수호에 대한 걱정이 슬슬 고개를 들었다.
아홉수인 건 아닌지, 기록에 대한 부담 때문에 그런 건 아닌지.
“개소리도 길게 써놨네.”
울프즈와의 경기 전에 이어폰을 꽂고 몸을 풀던 김수호가 이규영이 혼자 말을 하는 걸 보고 이어폰을 빼고 물었다.
“예?”
“별거 아니야. 기사란에 소설들이 올라와서.”
저런 기사 중 태반은 그냥 누가 먼저 시작하니 비슷한 늬앙스로 따라 쓴 것이다.
그 기자 중 김수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에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김수호는 이규영도 가끔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기록을 신경 안 쓴다.
예를 들면 작년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을 때 미친놈처럼 2루로 간다거나.
“아오, 다시 생각하니까 빡치네. 넌 진짜 무슨 생각 하면서 사냐?”
“갑자기 왜 그러는데요?”
이규영의 심술에 괜히 김수호만 큰소리를 들었다.
아무튼 기록에 무감각한 저 성격 덕분에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승부욕이 없는 건 아니다.
결국에 저런 기록들도 다 승부욕에서 나오는 거니까.
“저 왔습니다!”
이규영이 김수호를 보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이주학이 큰소리를 내면서 들어왔다.
“주학아! 이리 와 봐!”
“넵!”
이규영이 부르자 이주학이 잽싸게 달려왔다.
“오, 반응속도 좋은데?”
“다 형이 잘 알려주신 덕분이죠.”
“이 정도면 형이 메이저리그 가면 네가 도루왕 먹겠다.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형은 메이저에서 도루왕, 너는 KBO에서 도루왕. 아주 좋아.”
“형도 축하드립니다!”
다행히 훈련장 안에는 둘을 제외하고 김수호밖에 없어서 다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지 못했지만, 꼼짝없이 둘의 쇼를 보게 된 김수호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