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약속의 무게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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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홈런이었다.”
“고마워요. 하스가 해준 말 덕분이죠.”
“내가 말하지 않았나. 자네는 약속을 지키는 자. 내가 굳이 말해주지 않았어도 분명 좋은 결과가 있었을 거다.”
하스의 말이 참 든든했다.
하스는 길어지는 공격에 몸을 풀러 가고 혼자 남았다.
사실 홈에 들어오면서 아빠가 있는 곳을 봤다.
내가 살면서 봤던 아빠의 모습 중 가장 흥분하고, 행복해 보이셨다.
경기 전까지만 해도 오늘 경기에 초대한 게 약간 후회됐는데 그 표정을 보니까 조금만 더 빨리 초대할 걸 그랬다.
다음엔 엄마까지 초대해서 두 분이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
물론 내가 잘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르긴 하지만 그건 자신 있으니까 괜찮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
내가 아빠한테 한 약속은 오늘 재밌는 경기를 보여드리겠다는 거였다.
아까 봤던 아빠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기뻐 보이셨지만 아직 모자라다.
사람마다 재밌는 경기의 기준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아빠가 마린스 경기를 보실 때 유독 즐거워하셨던 경기가 있다.
바로 투, 타 모두가 완벽한 경기.
경기 내용이 일방적일 수 있지만 그런 경기를 가장 좋아하셨고 오늘 내 목표도 자연스럽게 그런 경기가 됐다.
또 아까 내가 홈런을 쳤을 때 좋아하셨으니 내 활약도 추가.
그리고 기왕 편하고 좋은 자리에 오셨으니 적당히 즐기다 가시는 것도 좋아 보인다.
이 모든 걸 요약하자면 공격은 길게, 수비는 짧게 해서 적당한 시간을 맞추고 중요한 건 내 활약.
이 세 박자만 맞추면 된다.
“쉬운데?”
“뭐가 쉬운데?”
내 혼잣말에 대답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이규영이 어느새 근처에 와있었다.
“음. 그냥 이것저것요.”
“빨리 이 형한테 말해봐. 뭔데. 안 그러면 내 마음대로 생각한다? 뭐, 아까 홈런 친 거 쉽다고?”
이 사람이 누구 매장하려고 그러나.
“그냥 오늘 경기 어떻게 풀어갈까 생각했어요.”
“결론은 뭔데?”
“나만 잘하면 된다?”
“재수 없는 놈.”
저렇게 말할 거면 왜 물어본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까 홈 들어오면서 인사한 건 뭐냐?”
“아, 오늘 아빠 오셨거든요.”
“진짜? 그걸 왜 말 안 했어? 그래서 아까 너답지 않게 무식하게 휘두른 거였냐?”
무식하게 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스읍, 있어 봐. 우리 동생 아버지면 또 내 아버지기도 하지.”
“아까부터 계속 뭔 소리 하는 거예요.”
“이 형만 믿어라.”
이규영이 내 어깨를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런 표정을 짓고 믿으라고?
불안한 마음으로 이규영을 바라봤다.
더그아웃 가장 중앙에 선 이규영이 경기를 보고 있는 선수들을 바라봤다.
“다들 잠깐만 주목해주시길 바랍니다.”
저 말에 불안함이 더 커진다.
“오늘 저의 아주 소중한 동생이자 자랑스러운 동생인 수호의 아버지가 오셨다고 합니다.”
“아, 그래서 아까 거기 보고 인사한 거야?”
몇몇 선수가 날 쳐다보길래 그냥 웃으면서 끄덕였다.
“물론 오늘 찾아와주신 모든 팬이 소중하고 감사하지만, 제가 또 수호의 형으로서 어떻게 아버지가 오셨는데 가만히 있겠습니까. 만약 오늘 이기면!”
절묘하게 끊은 이규영이 당당하게 외쳤다.
“제가 내일 피자랑 커피 쏩니다!”
“오, 돈 좀 쓰는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김수호 앞으로.”
이규영이 나를 보며 손을 까딱까딱했다.
옆에 가자 이규영이 어깨동무했다.
“그리고 수호가 뽑은 MVP에게는 무려!”
무슨 소리 할지 불안했다.
“수호가 이제부터 형님으로 모실 겁니다.”
“...제가요?”
“어. 싫냐?”
“아니, 좋고 싫고를 떠나서 이런 걸 왜 굳이···.”
“진짜가?”
“예?”
“점마가 한 말, 진짜냐고.”
채지훈의 말에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네, 뭐. 근데 저도 돈 보태서 더 좋은 거 먹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내 말은 들리지 않는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지 이 분위기.
옆에 있는 이규영만 마음에 드는 듯 낄낄거리고 있었다.
“선발 투수는 출전 못하는데 불공평한 거 아닌가요!”
김호기가 손을 들고 외쳤다.
“어쩔 수 없지. 다음 기회 노려라.”
“MVP 선정 기준이 어떻게 되죠?”
그러자 이규영이 나를 쳐다봤다.
에라이 나도 이제 모르겠다.
“아버지가 뽑은 가장 인상 깊은 활약을 한 선수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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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마린스 선수들을 자극했던 김수호의 호칭 논쟁.
그 두 번째 논쟁이 막을 올렸다.
첫 번째 논쟁에선 김수호가 ‘애들도 아니고 설마.’라는 말과 함께 허무하게 끝이 났다.
하지만 이번엔 무려 공식 상품으로 걸렸다.
처음엔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이젠 은근 자존심 싸움이 됐다.
그리고 주자로 나가 있느라 소식을 듣지 못했던 강주호도 더그아웃에 들어와 듣게 됐다.
“관심 없다.”
지난번 이호민의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가게에 갔을 때 부모님과 형 동생 하던 강주호였다.
김수호한테 형 소리 들어봤자 양심 없는 짓이다.
“오케이! 행님, 말 바꾸지 마이소!”
채지훈이 희희낙락하면서 1루로 나갔다.
가장 강력했던 우승 후보가 스스로 불참을 선언했다.
채지훈으로선 좋은 일이었다.
물론 강주호는 어이없어했지만.
‘나쁘진 않네.’
뭐 오랜만에 느끼는 이런 분위기는 썩 괜찮았다.
오랜만에 다들 이를 악문 느낌이랄까.
1위가 거의 확실시되면서 약간 풀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슬슬 고삐를 단단히 죄어야 할 때가 왔다.
시즌 종료까지 고작 한 달 조금 넘게 남았다.
그것만 지나면 포스트 시즌이다.
그래서 슬슬 분위기도 좀 잡을 겸 타이밍만 보고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 이유가 형님 소리라는 게 웃기긴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였다.
그보다.
‘저 자식. 아버지가 오셨으면 미리미리 말 좀 하지.’
김수호한테 받은 게 너무 많았다.
그걸 어떻게 보답할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예전에 김수호의 어머니와 얘기를 나눴을 때 아버지가 굉장한 마린스의 광팬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팬인 건 확실하다.
‘서프라이즈나 한 번 할까.’
경기가 끝나고 바로 다음 경기장으로 이동해야 했지만, 시간은 조금 있었다.
어찌 보면 강주호의 자만으로 비칠 수도 있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강주호의 생각은 맞는 말이었다.
“크, 강주호 아직 살아있네!”
“우리 군대 전역하고 나서인가? 그때쯤 데뷔하지 않았냐?”
“난 진짜 강주호, 강기호 있을 때 우승할 줄 알았는데.”
이미 김진우와 그 친구들은 강주호의 타석을 안주 삼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튼 진우야 고맙다. 네 덕분에 오랜만에 야구도 다 보고. 아들 잘 키웠네.”
“내가 뭐 한 게 있냐. 지가 잘 큰 거지.”
“하긴. 제수씨가 잘 키우신 거지.”
“맞지 맞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오랜만에 온 야구장.
바뀐 건 나이밖에 없었다.
여느 때처럼 공격엔 열렬한 응원을, 수비엔 치킨과 맥주를 마시며 경기를 봤다.
하지만 순간 치킨을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혼을 쏙 빼먹는 명품 수비들이 이어졌다.
시작은 채지훈이었다.
2회 초, 선두타자로 나온 김민주의 날카로운 타구가 1루 라인 선상으로 날아갔다.
만약 공이 구장 구석으로 빠진다면 3루까지 내어줄 수도 있는 타구.
하지만 1루를 지키고 있는 채지훈이 날았다.
“페어! 페어!”
빠른 땅볼 타구를 완벽한 다이빙으로 잡으면서 1루에 커버 플레이를 온 하스에게 공을 던졌다.
이걸로 원아웃.
“채지훈 점마도 늙었을 텐데 잘하네?”
“예전에도 1루 수비 하나는 기깔났지.”
다음 타자가 이번엔 좌측으로 타구를 날렸다.
공을 잡기 위해 박은성과 이규영이 달려왔다.
“마이! 마이!”
원래 수비 범위가 겹치면 이규영에게 양보하는 박은성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규영이 박은성 뒤로 가면서 백업 플레이를 했다.
그 와중에 완벽하게 공에 집중한 박은성이 그대로 몸을 날렸다.
“아웃!”
말 그대로 공을 낚아채고 글러브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수비에 사람들이 글러브로 조종당하는 것처럼 자리에서 번쩍 일어났다.
“와아아아! 미쳤다!”
벌써 투아웃.
마지막을 장식한 건 김수호였다.
-딱!
기습 번트에 오준혁이 내려왔지만, 김수호가 더 빨랐다.
빙글 돌면서 강하게 1루로.
“아웃!”
불안정한 자세에도 완벽한 송구를 보여주며 2회 말이 끝났다.
“와, 씨. 마린스가 원래 수비도 잘했냐?”
“공격보다 수비가 더 재밌는데?”
전말을 모르는 팬들은 그저 어리둥절하면서 기뻐할 뿐이었다.
“마! 봤나! 행님이라 부를 준비 해라.”
“형님. 제 수비가 함성 더 큰 거 못 들으셨어요?”
“두 분 다 잘하셨어요.”
멋진 수비를 선보인 채지훈과 박은성이 김수호 앞에서 티격태격했다.
그사이에 낀 김수호만 조금 난감해했지만, 분위기는 좋았다.
경쟁은 수비에서만 이뤄지지 않았다.
야구의 꽃은 역시 타격.
챌린저스 포수 추승우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다들 뭘 잘못 먹었나?’
마린스 타자들이 얼마나 신중한지 최소 공 5개 이상은 본다.
근데 또 볼넷을 노리는 건 아닌 것 같은 게 막상 볼넷으로 나가는 타자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자연히 오늘 선발 투수인 박민국의 투구수는 늘어났고 결국 5회 만에 100구를 던지며 물러났다.
6회 말, 점수는 4대0.
그리고 주자는 2사 만루.
오늘 첫 타석에 홈런을 쳤던 김수호의 타석이 돌아왔다.
첫 타석 홈런으로 44홈런, 99타점을 기록 중인 김수호.
‘높게 하나 빼자.’
오늘 첫 타석부터 느꼈지만 김수호가 장타를 노린다는 게 스윙에서부터 묻어나왔다.
그래서 초구를 어깨보다 높은 하이패스트볼을 요구한 거였는데.
-따아악!
‘미친!’
차라리 더 높게 던지든가, 공이 요구한 것보다 낮게 들어왔다.
물론 그래도 높은 공이다.
존에서 위로 공 하나 반 정도 더 빠진 공.
하지만 김수호의 방망이는 망설임 없이 나갔고, 타구는 주자들을 전부 홈으로 불러들이는 데 충분했다.
싹쓸이 3타점 2루타.
‘스윕···. 하···.’
한창 순위 경쟁 중인 챌린저스로선 데미지가 큰 스윕 패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반면 마린스 더그아웃에선.
“근데 아버지가 수호 뽑으면 어떡하냐?”
“그러게요? 에이 수호는 빼고 뽑겠죠.”
오늘 MVP가 유력한 김수호를 견제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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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타석 4타수 1볼넷 3안타 홈런, 2루타, 단타 하나씩, 그리고 5타점.
“직접 보니까 왜 김수호 김수호 하는 줄 알겠네. 진우아, 부럽다?”
“오늘이 44홈런이라고 했나? 저 정도면 예전 강주호보다 잘 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수호 언제 온다고?”
“씻고 오겠지. 좀만 더 기다려봐.”
경기가 끝났지만, 그 여운은 엄청났다.
오랜만에 온 야구장, 마린스 선수들의 허슬 플레이, 그리고 화끈한 승리.
말 그대로 완벽한 경기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김진우와 친구들은 경기가 끝나고 따로 안내받아 김수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 아들이 김수호라는 건 동년배 자식이 있는 김진우 친구들에게도 큰 자랑이었다.
특히 최근 자식들이 야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거 같은데 자연스럽게 말을 걸 구실이 생기는 거기도 했다.
거기에 오늘 김수호 사인과 유니폼 등을 가져간다면?
아마 본인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오늘 경기 얘기로 꽃을 피우고 있는데 드디어 문이 열렸다.
하지만 들어온 사람은 김수호가 아니었다.
“강주호 선수?”
“아, 반갑습니다. 수호 아버지와 그 친구분들이시죠?”
한때 야구를 누구보다 사랑했고 열렬히 봤던 그들에겐 강주호의 등장은 그 어떤 선물보다 반가웠다.
강주호 역시 이런 반응을 알고 있었다는 듯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강 선수가 여긴 왜···?”
“아후, 수호 아버진데 당연히 제가 찾아봬야죠. 오늘 경기 재밌게 보셨나요?”
“선수들이 너무 잘해서 앉아있을 시간이 없더라고요. 하하하 고맙습니다.”
한 명 한 명과 사진을 찍고 준비해온 야구공에 사인까지 해준 강주호가 인사를 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좀 있으면 수호 올 테니까 천천히 보내셔도 됩니다.”
“강선수,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강주호가 문을 열고 나갔을 때, 김수호가 그 앞에 놀란 눈으로 서 있었다.
“선배님?”
“마, 아버지 오셨으면 나한테 먼저 말했어야지. 쯧, 좀 늦어도 되니까 천천히 와라.”
강주호가 김수호를 방 안으로 등 떠밀었다.
“이야, 수호 잘 컸네? 아저씨 기억하냐?”
“오늘 홈런 멋있더라. 네 아빠가 관중석에서 뭐라 한 줄 아냐?”
잠시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던 강주호가 웃으면서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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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들은 먼저 돌아갔다.
오랜만에 뵈니 반갑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빠가 기분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수호야.”
“네.”
“고맙다.”
“아니에요. 제가 좀 더 빨리 초대했어야 했는데.”
“그거 말고.”
“예?”
“많이 힘들 텐데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고맙다.”
아빠도, 나도 그 말에 따로 덧붙이진 않았지만, 이 침묵이 좋았다.
“슬슬 가봐야 하지?”
“네. 내일 원정이니까요.”
“그래. 네가 하는 거 보니까 따로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이더라. 잘 다녀 와.”
“다녀올게요. 들어가세요.”
끝까지 내 눈을 못 보시는 아빠의 모습에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으신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랑스럽게.
버스에 도착하자,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는 게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버스에 올라타자 시선이 집중된다.
그리고 곧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김수호!”
“넵.”
채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내 앞까지 다가왔다.
“마! 말해봐라!”
“네?”
“아버지가 뽑은 우승자, 누고!?”
아, 맞다.
큰일 났다.
물어보는 걸 깜빡했다.
지금 와서 전화로 물어보겠다고 말하면 큰일 나겠지?
“설마 까먹은 기가?”
“...아닙니다.”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숨을 한 번 크게 마시고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형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들면서 슬쩍 눈치를 봤다.
됐나?
“크, 좋네. 마, 다시 함 해봐라!”
다행히 채지훈의 환한 미소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