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가장 빛나는 별 - 4
#
야구의 꽃은 홈런이라는 말이 있다.
꽃이 1년 중 잠깐 피고 지는 것처럼 홈런 역시 경기에서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
쉽게 보지 못하는 만큼 더욱더 극적이며, 야구의 그 어떤 순간보다 짜릿하다.
그런 의미에서 마린스와 피닉스의 팬들은 행운아였다.
한 시즌 30홈런은 많아야 10명, 적으면 한 명도 기록하지 못하는 기록이다.
범위를 더 좁혀보면 KBO 데뷔 첫해 20홈런을 넘긴 선수는 채 10명이 되지 않았고 30홈런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이것만 봐도 고졸 신인이 데뷔 시즌에 30홈런 이상 칠 확률을 따져보면 불가능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작년에 그런 선수가 무려 둘이나 나왔다.
김수호와 황인재.
황인재는 40홈런을 넘겼고 김수호는 7월부터 활약해 30홈런을 넘게 쳤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 당연했다.
프로 통산 홈런의 개수가 30개가 채 되지 않는 선수들도 많다는 걸 생각하면 둘의 기록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 프로 통산 29홈런을 기록 중인 선수가 있다.
시즌으로 환산하면 한 시즌당 3.2개꼴이고 홈런이 없던 데뷔 시즌을 제외해도 3.6개밖에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기록만 보고 턱없이 적다고 하겠지만 기록 앞에 붙은 이름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기록의 주인은 이규영.
홈런 대신 2루타를, 타점 대신 도루를.
이 말을 신념 삼아 결국 리그를 대표하는 외야수로 자리 잡았다.
오늘도 그 생각은 변함없었다.
하지만 막상 타석에 들어서니 어쩐지 방망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쪽팔리게.’
야구에서 상대의 약점을 노리는 건 너무 당연한 방법이다.
애초에 이규영도 김호기나 우민준, 이민수 등 사이드암이나 언더 투수가 나오면 발로 멘탈을 뒤흔든다.
제구가 안 좋은 투수가 나오면 공 10개는 거뜬하게 쳐내고 볼넷으로 나갈 자신도 있다.
그런데 강우진이 포심을 던졌다고 해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 한심했다.
물론 만루에서 김수호와의 승부를 피하고 자신을 선택한 것, 그리고 그 선택의 이유가 빠른 포심이었고 결국 이겨내지 못했다는 게 이규영이 화를 낸 이유였다.
‘민망해서 수호 얼굴은 어떻게 보냐.’
겨우내 김수호와 최현우의 도움을 받아 노력했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자신에겐 빠른 볼을 맞히는 능력은 있어도 그걸 좋은 타구로 만들어내는 능력은 없었다.
이 사실을 인정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을 정리한 이규영이 타석에 들어가기 전 마운드에서 위력적인 공을 뿌리는 투수를 바라봤다.
에릭 니콜라스.
좌완에 강력한 포심을 던지는 피닉스의 에이스 투수.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 시즌에도 피닉스에서 뛰게 됐다.
그리고 이규영과의 상대 전적은 11타수 2안타 7삼진.
전혀 이규영답지 않은 기록이었다.
경기 전부터 투수가 포심을 던지면 다 쳐내겠다 마음 먹은 이규영도 주춤하게 만드는 기록이었다.
기록이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있던 자신감도 없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후우.”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타석에 들어갈 준비를 하려는데 뒤에서 이규영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 잠시만요.”
“왜?”
목소리의 주인은 김수호였다.
“그냥, 진짜 그냥 제 생각인데 초구에 몸쪽 포심 한번 노려볼래요?”
몸쪽 포심.
이규영이 제일 싫어하는 코스와 구종이다.
“왜 그러는데.”
“그냥요. 오늘 제가 던져보니까 선배 몸쪽 공 잘 치던데요?”
고작 그런 이유에서 추천할 김수호가 아니었다.
하지만 더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
“일단 알겠어.”
대답한 이규영이 머릿속 한쪽에 그 말을 새겨놓고 타석에 들어섰다.
#
이규영에게 그런 말은 한 이유는 간단했다.
딱 봐도 머릿속이 복잡해 보여서.
내가 아는 이규영은 딱히 노림수를 갖고 타석에 서는 타자가 아니다.
자신만의 기준이 명확한 타자.
노림수 대신 2스트라이크 이전에는 존에만 집중하고 2스트라이크에 몰리면 특유의 컨택 능력으로 전부 쳐낸다.
그러다 실투나 볼이 빠지면 출루하는 거고.
하지만 어제부터 이규영은 평소 같지 않은 모습을 계속 보여줬다.
평소 이규영다운 모습을 되찾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슬럼프에 빠질 수도 있다.
괜한 걱정이면 좋겠는데.
몸쪽 포심을 추천한 것도 그 때문이다.
상대 투수가 좌타자를 상대로 초구에 몸쪽 포심을 던지는 건 반반 정도 된다.
평상시의 이규영이라면 아마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반응을 보니 확실히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 정도 확률이면 머릿속에 넣어두고 한 번 노려볼 만했다.
물론 이규영이 포심에 약한 건 잘 안다.
하지만 어제 호수비에 잡힌 타구도 포심을 때려서 만든 거고 최건우가 아니었다면 안타가 될 만한 타구였다.
겨우내 이규영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봐 왔다.
만약 정말 그 코스가 오고 이규영이 그걸 머릿속에 담아뒀다면.
‘한 번 보여주죠.’
이내 이규영이 타석에 섰고 투수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따악!
“오, 크다!”
초구에 제대로 당겨친 타구가 담장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각도가 낮아 사직의 높은 담장은 넘기기 어려워 보였다.
우익수 역시 공을 잡으려 하기보단 공이 튕겨 나올 걸 대비해서 수비 위치를 잡았다.
그동안 이규영은 순식간에 2루 베이스를 향해 달렸다.
달리는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는 모습에 우리도 흥분해서 소리쳤다.
“3루! 3루! 3루!”
“쓰리! 뛰어!”
그리고 그때 변수가 발생했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몰라도 펜스에 맞은 타구가 엉뚱한 곳으로 흘렀다.
이미 이규영은 3루를 향해 뛰고 있는 상황.
뒤늦게 백업을 온 중견수가 공을 잡고 던지려는 순간 이규영은 3루 코치의 사인을 보고 홈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2루수가 공을 받아 홈으로 던져봤지만.
“세이프!”
이규영은 슬라이딩도 하지 않고 서서 홈을 밟았다.
“와 미친! 존나 빨라!”
“지렸다! 이규영!”
외야 수비가 잠깐 지체되긴 했지만 웬만한 선수들은 3루에서 멈출법한 타구였다.
하지만 이규영은 국내 최고의 대도라는 명성답게 당당하게 홈을 훔쳤다.
인사이드 파크 홈런에 흥분한 선수들이 이규영의 헬멧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나도 끝까지 따라가면서 열심히 헬멧을 두드렸다.
“그만 때려!”
“이럴 때 때려야죠. 제가 선배한테 맞은 게 얼만데.”
이규영도 마린스에 동화됐는지 이제 홈런을 치고 들어오면 미친 듯이 내 헬멧을 노린다.
더 얘기하고 싶지만 이제 나도 내 타석을 준비해야 해서.
-딱!
“아오. 저 미친놈!”
마지막으로 한 대 더 때리고 도망쳤다.
박은성은 삼진으로 물러나서 1사 주자 없는 상황.
-따악!
맞자마자 느낌이 왔다.
최소 2루, 잘하면 3루까지 노려볼만한 타구였다고 생각했는데.
“아웃!”
중견수 홍민우가 담장 앞에서 점프 캐치로 잡아내는 걸 봐버렸다.
“쟨 진짜.”
아쉬움을 삼키고 더그아웃에 들어오자 이규영이 가장 먼저 반겨줬다.
“아깝다. 네 헬멧 노리고 있었는데.”
잠깐 타석에 갔다 온 사이에 원래의 이규영이 돌아왔다.
“이제 좀 괜찮아 보이네요.”
“뭐가? 내가? 난 원래 이랬는데.”
“예예. 그렇죠.”
“이 형이 널 위해서 선물까지 준비했는데 반응이 그러냐?”
“선물이요? 뭔데요?”
그러자 이규영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들어가 봐.”
알 수 없는 미소에 조심스럽게 더그아웃에 들어가자 선배들이 다가왔다.
“수호야. 규영이한테 들었는데 네가 특타 할 때 그렇게 공을 잘 던져준다면서?”
“규영이도 그걸로 감 찾았다는데?”
“마. 짬순 모르나! 순서 지켜라!”
뒤를 돌아봤지만 이규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 사람 봐라? 은혜를 원수로 갚네?
몰려오는 선수들 속에서 다짐했다.
내가 언젠간 복수한다.
#
오늘 선발 매치만 본다면 피닉스가 활짝 웃는 경기였다.
1선발과 4선발의 대결.
김호기도 최근 3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할 만큼 기세가 좋았지만 에릭 니콜라스와 비교하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특히 오늘은 리그에서 손꼽히는 중심타선을 가진 피닉스를 상대해야 한다.
3번 오기택, 4번 황인재, 5번 홍민우.
첫 타석에선 세 명 다 범타로 처리했지만 두 번째 타석은 달랐다.
4회 초, 오기택이 중전 안타를 기록하면서 1사 주자 1루.
뛸 타이밍도 아니고 뛰는 선수도 아니다.
타자에만 집중해도 되는 상황이지만 그 타자가 문제였다.
황인재와 바로 뒤에 있는 홍민우.
‘쉽지 않네.’
우리가 낸 점수는 1회 이규영의 홈런뿐.
1점 차는 얼마든지 순식간에 뒤집힐 수 있는 점수다.
김호기도 긴장했는지 황인재가 들어오자 잠시 발을 풀었다.
이제 사인을 낼 차례.
가장 좋은 건 역시 땅볼을 유도해내서 병살로 이닝을 끝내는 거다.
하지만 낮은 공에 방망이가 나올까?
일단 초구로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김호기도 비슷한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이곤 투구를 이어갔다.
“볼!”
‘이걸 참아?’
좋은 공이었다.
웬만한 타자들은 전부 참지 못하고 방망이를 낼 법한 공.
낮은 공에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었다면 나올 법한 공이었다.
이러면 고민이 깊어진다.
‘낮은 공은 전부 버리는 거 같은데.’
그걸 이용해 다시 낮은 공으로 카운트를 잡아보려 했지만 주심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볼!”
이제 2-0.
최악의 카운트에 몰렸다.
내가 아는 황인재라면 이 카운트에 분명 타격한다.
하지만 이번 타석, 낮은 코스는 아예 배제한 듯한 모양새를 보여줬다.
여기서 도박 수를 던지기로 했다.
이번에 선택한 공은 포크볼.
“스트라이크!”
여태껏 낮은 공에 반응이 없던 황인재가 날카로운 스윙을 보여줬다.
만약 포심이나 투심을 같은 코스로 던졌다면?
‘바로 넘어갔겠는데.’
방심하고 낮은 코스로 카운트 잡는 공을 던졌다가 큰일 날 뻔했다.
이제 2-1.
‘이제 남은 건 높은 공인데.’
결국 낮은 공에 스윙을 유도했으니 승부를 걸 타이밍이 나왔다.
잘못 걸리면 그대로 담장을 넘겨 역전이 될 만한 공이다.
하지만 앞서 던진 세 개의 공이 의미를 찾으려면 이 공을 던져야 했다.
사인을 교환하자 고민되는지 김호기의 머리가 가만히 있었다.
이내 작게 끄덕이고 투구를 준비했다.
선택한 공은 높은 투심.
-딱!
빗맞은 타구가 위로 높게 떴다.
급하게 포수마스크를 벗고 타구를 바라보며 뛰었다.
‘살짝 위험한데?’
잘못하면 더그아웃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위치.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더그아웃에 몸을 던지듯 미트를 뻗었다.
-퍽!
미트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들자 그대로 미트를 꽉 닫았다.
이미 몸은 공을 잡기 위해 더그아웃 안쪽으로 쏠린 상황.
그대로 더그아웃 바닥이 가까워졌다.
“잡아! 잡아!”
그나마 피닉스 선수들이 몸을 잡아줘서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어우! 살살 해라. 다친다 그러다.”
그 말에 씨익 웃고 미트에서 공을 꺼내 주심에게 보여줬다.
“아웃!”
“괜찮냐!?”
소리가 나 더그아웃을 바라보니 우리 더그아웃에서 강기호가 나와 있었다.
“예. 괜찮습니다.”
“하지 말라는 말은 안 하는데 너 다치면 진짜 큰일 난다. 몸조심해.”
강기호가 몇 가지 더 물어보고 다시 돌아갔다.
이걸로 큰 고비는 넘겼다.
이제 남은 고비는 이규영과 더불어 은혜를 원수로 갚는 홍민우뿐.
홍민우는 지난 시리즈 이후 완전히 개화한 듯 보였다.
0.297의 타율과 7개의 홈런.
특히 승부처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도 황인재가 홍민우에게 말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인재가 뭐래?”
1회에 물었을 때 홍민우가 그냥 웃고 넘겼는데 이번엔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치라는데요?”
“그래?”
황인재가 저 말을 했다는 건 홍민우 실력이라면 충분히 김호기를 공략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뭔가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쁜데.
“스트라이크!”
초구는 바깥쪽 투심으로 카운트를 잡았다.
홍민우가 꽤 잘 치고 있긴 하지만 이번 시즌 김호기와 첫 만남이다.
고작 두 타석 만에 적응하긴 쉽지 않을 거다.
-따악!
“파울!”
2구에 다시 투심을 요구했는데 기다렸다는 듯 방망이가 나왔다.
이걸로 0-2.
3구는 첫 타석에 헛스윙을 끌어낸 체인지업과 홍민우한테 보여준 적 없는 포크볼 사이에 고민했다.
고민은 짧았고 김호기도 곧장 투구를 시작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방망이의 궤적이 약간 낮았지만, 완전히 떨어진 포크볼을 치기엔 무리였다.
고비라 생각했던 이번 이닝, 황인재는 포수 뜬공, 홍민우는 삼구 삼진으로 마무리하자 어쩐지 홈런을 칠 때보다 기분이 더 좋았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투수는 리드한 대로 따라주고 타자는 그 공에 완벽하게 제압당할 때, 그때만 느낄 수 있는 느낌이 있다.
마운드에서 내려온 김호기가 내 웃음을 봤는지 말했다.
“나보다 네가 더 기분 좋아 보이냐?”
“티 나요?”
“뭔데. 나한테만 말해줘.”
제일 말하면 안 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까 신용이 안 간다.
“그냥 선배 공이 좋아서 그러죠.”
“그럼 홈런 하나만 더 쳐줘. 1대0은 너무하잖아.”
“그럴까요?”
내 대답이 의외였던 걸까.
“진짜 뭔데?”
김호기의 의아한 반응을 뒤로하고 더그아웃에 들어왔다.
포수 장비를 벗고 방망이를 챙겼다.
4회 말, 이닝의 선두타자는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