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빨로 FA 천억 포수-162화 (162/203)

162화 오늘은 000날, 우리들 세상 - 4

#

작년 오늘, 대구에서 대구 에이스와 부산 마린스의 경기가 열렸다.

결과는 대구 에이스의 시리즈 스윕.

그 경기 이후 가까스로 하위권 경쟁을 하던 부산 마린스는 단독 꼴찌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경기를 기억하는 에이스 선수들은 이번 어린이날 시리즈 역시 마린스에 최악의 기억을 선사할 거라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주호와 함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양준이 선수단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이겨도 본전, 지면 손해다. 다들 명심해라.”

대구 에이스의 이번 시리즈 목표는 위닝시리즈.

솔직한 말로 허하준은 KBO에 있어 말 그대로 재앙에 가까웠다.

MLB에서 뛰어야 할 선수가 한국에서 뛰고 있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하지만 허하준이 매일 경기에 나오는 건 아니었고, 실제로 세 경기 중 첫 번째 경기에서 이겼다.

거기에 이번 시리즈 선발도 좋다.

제이든 스미스, 멧 위버, 최정윤으로 이어지는 1, 2, 3선발.

마린스의 선발투수 역시 막강했지만,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 세상이니까 마음껏 뛰놀고 오자.”

마린스에 있어 최악의 날이었다.

물론 브릭 웰링턴이 이전보다 훨씬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준 건 맞다.

거기에 마린스 타선이 부담스러운 건 맞다.

이규영이 합류한 타선은 말 그대로 리그 최고의 타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정윤 역시 이번 시즌 최고의 스타트를 했다.

시즌 3승, 1.8의 ERA 그리고 4월 MVP 후보까지.

오늘 최정윤의 컨디션이 어떤지 공을 받아본 양준은 자신했다.

‘오늘 일 한번 낸다.’

이미 지난 시리즈에 마린스 타선을 꽁꽁 묶으며 마린스의 연승을 끊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만큼 최정윤을 바라보는 양준의 표정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강주호가 마린스에 김수호를 남겼다면 자신은 최정윤을 남겼다.

이 나이 먹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게 퍽 유치하지만 재밌는데 어떡할까.

“정윤아. 준비됐냐?”

웰링턴의 투구를 보고 눈을 빛내던 최정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마린스의 라인업은 이규영을 제외하면 전부 우타자가 나왔다.

하지만 우타자가 모두 좌투수의 공을 잘 치는 건 아니다.

그런 논리라면 허하준을 상대로 좌타자들만 내면 된다.

잘 치는 타자가 좌, 우 가릴 것 없이 전부 다 쳐내듯이 잘 던지는 투수는 좌, 우를 가리지 않는다.

올 시즌 최정윤도 그랬다.

좌투수를 상대로 강점이 있는 이규영을 삼진, 박은성이 인플레이 타구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내야를 뚫어내지 못했다.

김수호가 타석에 들어서자 양준이 기다렸다는 듯 노래를 불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지난 경기의 반응을 생각하며 부른 노래가 되려 양준을 당황케 했다.

이틀 전만 해도 기겁하던 김수호가 설마 따라부를 줄은 몰랐다.

“뭔 일 있었냐?”

“아무 일도요.”

하지만 김수호의 입가에 떠오른 여유로운 미소는 어제 에이스의 타선을 완벽히 막아낸 허하준의 미소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그 미소의 결과는 8이닝 무실점.

처음부터 김수호를 만만히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좀 더 경각심을 가진 양준이 초구 사인을 고민했다.

‘슬라이더로 간을 한 번 볼까?’

최정윤은 고등학교부터 150km 초반의 빠른 포심과 종 슬라이더를 던지는 좌완 투수로 유명했다.

올해 고작 23살밖에 되지 않은 주제 안정된 제구와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이미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 투수.

‘내 눈엔 아직 아기지만.’

구위로 윽박지르는 것만 할 줄 알았던 최정윤을 지금 이렇게 만든 것에 양준의 지분은 상당했다.

하지만 작년, 어느 순간부터 최정윤은 양준의 손에서 떠났다.

‘내 부상이었지 아마?’

정확히는 부상 이후 지금 타석에 서 있는 저놈과 배터리를 이룬 이후였다.

그때 이후 최정윤은 무언가 느낀 게 있는지 이석훈과 계속 대화하며 양준이 없는 미래를 대비했다.

씁쓸하면서도 행복한 기분.

하지만 양준에겐 아직 반년의 시간이 남았다.

가끔 발현되는 최정윤의 싸움닭 기질을 조절하는 데 이석훈은 아직 미숙했다.

이번 경기를 보면서 이석훈이 느끼는 게 있기를 바라며 사인을 냈다.

‘초구 포심으로 카운트 잡자.’

좌투수가 우타자를 상대할 때 가장 좋은 무기로 꼽는 구종은 체인지업이다.

하지만 최정윤은 체인지업 대신 스플리터를 선택했다.

그 스플리터를 갈고 닦아서 제대로 선보인 게 바로 이번 시즌부터였다.

그리고 스플리터가 가장 빛날 순간은 역시 빠른 공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때였다.

오늘 최정윤의 포심은 최상.

김수호의 눈에 포심의 잔상을 심어두기만 하면 오늘 충분히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최정윤 역시 김수호를 보자 싸움닭 기질이 발휘됐는지 한 번의 거절 없이 곧바로 투구에 들어갔다.

리그에서 빠른 공을 잘 치기로 둘째가라 하면 서러운 김수호에게 던진 빠른 공이었지만 양준은 확신이 있었다.

‘이건 못 친다.’

그 확신을 더 해주는 포심의 완벽한 궤적.

미트에 자석이 있는 것처럼 시원하게 쭉 빨려 들어오는 포심이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 미트를 닫았다.

-따아악!

하지만 양준의 귀에 들려야 할 가죽 때리는 소리 대신 들어온 딱딱한 무언가에 맞는 소리.

공은 막힘 없이 하늘을 날았고 그 종착지는 담장 밖이었다.

“와아아아!”

양준은 쏟아지는 환호성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저 새끼 전성기 강주호보다 심한데?’

#

김수호의 선취 솔로 홈런으로 기선을 확실하게 제압한 마린스였지만 최정윤은 무너지지 않았다.

되려 그 홈런이 기폭제가 됐는지 나머지 타자들을 전부 요리하며 3회까지 홈런을 제외하면 흠잡을 곳 없는 완벽투를 보여줬다.

아니, 홈런을 맞은 공도 실투가 아니었다.

그냥 김수호가 잘 쳤을 뿐.

웰링턴 역시 경기 시작 전부터 보여줬던 자신감을 결과로 증명했다.

다만 에이스의 타선은 모든 타자가 한 방을 노리는 타선.

4회 초, 오늘 경기 던진 첫 번째 실투가 불의의 동점 솔로 홈런으로 연결된 걸 제외하면 좋은 모습을 보였다.

다행히 웰링턴 역시 후속 타자를 잘 수습했기 때문에 에이스에 분위기를 내주지 않은 상황.

하지만 최정윤을 공략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 분위기가 마린스에 있을 거라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특히 김수호의 홈런으로 잊혔던 어린이날의 기억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은성이 선두타자로 타석에 섰다.

-따악!

“세이프!”

[아, 3루수! 한 번에 공을 빼지 못했습니다! 1루! 세잎! 세잎입니다!]

박은성이 상대 수비수의 실책을 틈타 이번 경기 김수호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최정윤을 상대로 출루에 성공했다.

[실책이 나온 타이밍이 너무 안 좋습니다. 현재 KBO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타자, 김수호 앞에 주자가 출루합니다!]

캐스터가 흥분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흥분한 사직 팬들 앞에 김수호가 타석에 섰다.

언제나 그렇듯 팬들이 김수호에게 바라는 건 명확했다.

지긋지긋했던 40년 무관을 끝내버렸던 것처럼 지금 이 답답한 흐름을 바꿔주길 원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김수호는 팬들이 바라는 걸 명확하게 이뤄줬다.

첫 타석에 교훈을 얻고 조심스럽게 승부를 한 최정윤, 양준 배터리.

2-1의 카운트에서 던진 스플리터가 그대로 김수호의 방망이에 걸렸다.

-따아아악!

[떴습니다! 외야에 높게 뜬 타구! 높게, 멀리! 외야수가 잡는 걸 포기합니다! 그대로 담장 밖으로! 김수호! 다시 경기를 뒤집는 투런 홈런!]

캐스터가 공이 떨어질 위치가 가늠을 못 할 만큼 큰 포물선을 그린 공은 긴 체공시간 끝에 그대로 담장을 넘겼다.

허탈한 표정을 짓는 최정윤과 그 뒤로 베이스를 돌고 있는 김수호가 동시에 화면에 잡혔다.

‘괜히 놀렸나.’

양준이 속으로 후회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전 괜찮습니다.”

“알아. 그냥 저놈 욕하러 올라온 거야.”

그렇게 배터리는 잠깐 김수호의 뒷담화를 즐기며 스트레스를 풀 대상을 물색했다.

그 대상이 된 건 김수호를 제외한 다른 타자들.

강주호, 오준혁, 잭 미켈을 나란히 삼진으로 잡아내면서 이닝이 끝났다.

그 이후 3대1의 스코어는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

“나도 할 걸 그랬나?”

“예? 뭘요?”

“너 경기 전에 했던 거. 그런 거 있었으면 빨리빨리 불렀어야지.”

강주호가 괜히 툴툴거리면서 방망이를 보관함에서 꺼냈다.

아직 타석이 돌아오려면 좀 남았지만,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하긴 두 타석 연속 삼진을 당했다고 마냥 우울해하면 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없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강주호뿐만이 아니었다.

5회 말 공격에서도 삼자범퇴를 당하며 홈런 이후 여섯 타자 연속 범타로 물러났다.

나와 박은성을 제외하면 출루에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야구를 하다 보면 긁히는 투수를 만날 때가 온다.

그게 최정윤에겐 오늘이었고.

“너는 왜 잘 치냐?”

이번엔 이규영이 몸을 풀다 말고 다가와서 툴툴거렸다.

“전 착한 일을 많이 했잖아요.”

“나도 많이 하는데?”

“뭐 하는데요?”

“정의로운 도둑 모르냐? 나와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2루를 훔치잖아.”

“그게 착한 일이에요?”

“응.”

당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신이 있다면 나처럼 착한 사람한텐 다음 타석엔 복을 줄걸?”

이규영의 자신감을 확인할 기회는 금방 왔다.

웰링턴이 6회 초도 잘 마무리하면서 6이닝 1실점.

6회 말의 선두타자로 이규영이 나섰다.

“잘 지켜봐라.”

자신 있게 나간 이규영이 초구부터 방망이를 휘둘렀다.

타구가 높게 떴고 절묘한 위치로 야수들이 모였다.

하지만 공을 잡은 야수는 아무도 없었다.

이규영이 1루 베이스를 밟고 웃으면서 나한테 세레모니를 했다.

아, 억울한데.

아무튼 정말 오랜만에 주자 출루, 그것도 이규영이 출루한 건 희소식이었다.

양준이 좋은 포수는 맞지만, 최근 도루 저지율이 2할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규영이 뛸 기회는 없었다.

지난 타석 실책으로 출루에 성공했던 박은성이 끝끝내 자기 손으로 안타를 만들어냈다.

무사 주자 1, 2루.

이번 경기 양 팀 통틀어 처음으로 득점권에 주자가 나갔다.

그러자 양준이 마운드로 올라갔다.

여유가 생겨 수비의 위치를 보니 외야수들이 거의 담장 앞까지 가 있는 게 보였다.

저 정도 거리라면 짧은 안타만 만들어내도 발이 빠른 이규영이라면 홈에 들어올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오늘 어쩐지 욕심이 났다.

무엇보다 공이 너무 잘 보였고 이틀 동안 어린이날 노래로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날 괴롭힌 양준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오늘 마음먹은 대로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진짜 착한 일 해서 신이 도와주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의 컨디션이었다.

이내 양준이 돌아왔고 나도 타격 준비를 했다.

“선배님.”

“어.”

양준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꿋꿋이 말을 이었다.

“제가 마린이들한테 한 가지 약속한 게 있습니다.”

“마린이?”

“네. 오늘 최고의 어린이날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오늘 경기장을 찾은 아이들한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뭐가 있을까.

“...그래서?”

“그냥요. 정윤 선배한테 말 좀 전해주셨으면 해서요.”

“싫어. 네가 직접 말해.”

“넵.”

초구, 몸쪽에 날카롭게 들어오는 포심.

오늘 컨디션이 진짜 좋나 보다.

-따아악!

최정윤 말고 내가.

공은 순식간에 날아갔다.

파울과 페어, 그걸 구분하는 폴대.

그 폴대를 정확하게 때렸다.

워낙 빠르게 날아간 공이라 아직 일루로 출발하지 못했다.

“오늘은 마린이날이라고요.”

한 소리 들을 걸 각오하고 양준한테 못다한 말을 했다.

조금 무서워서 양준의 표정은 확인하지 못했다.

곧 양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가기나 해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