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오늘은 000날, 우리들 세상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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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전말을 들은 이주학의 반응은 나보다 더 심했다.
“...진짜 그런 걸 믿는다고?”
나야 어릴 때부터 마린스 팬이었으니 어린이날에 성적이 안 좋은 건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수들의 반응을 납득할 수 있는 정도는 됐다.
하지만 이주학은 서울 출신에 좋아하는 팀은 서울 호올스였다.
그래서 이주학의 반응은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원래 미신이나 징크스 같은 게 그렇지 뭐. 미국도 염소니 밤비노니 저주도 많잖아. 그런 거라고 생각해.”
“그럼 우리는 어린이날의 저주냐?”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있어 보이긴 하네.”
전혀 어울리지 않은 말 두 가지가 합쳐지니 더더욱 섬뜩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아무튼 서로 입 조심하자는 말을 하고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4회 말에 추가점을 내지 못하면서 스코어는 아직 1대1.
이호민도 기세를 끌어올리며 5회 초 선두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다음에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양준.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어린이날과 저주가 정말 안 어울리는 말인 것처럼 양준과 어린이날 노래는 정말 안 어울렸다.
신나서 노래를 부르는 어린이도 양준이 부르는 걸 들으면 곧바로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노랫소리.
“표정 봐라. 관리 안 하냐?”
내 표정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양준의 장난 섞인 지적에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얼씨구. 이럴 땐 말 잘 듣네. 자, 그럼 가운데 하나 꽂아봐.”
“좋죠. 가운데 갑니다.”
-퍼어억!
“스트라이크!”
이호민도 내 사인에 피하지 않고 공을 꽂았고 결과는 스트라이크가 됐다.
타이밍은 얼추 맞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158km의 포심을 맞추지 못하면서 헛스윙.
“이걸 진짜 꽂네.”
“선배님이 원하신 건데 해드려야죠. 다음은 어디에 꽂을까요?”
진짜 양준이 말해서 사인을 낸 건 당연히 아니었고 이미 이전 타석에서 빠른 볼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는 걸 봤다.
하지만 이번엔 타이밍이 맞았다.
의도적으로 스윙 타이밍을 빠르게 잡으면서 타이밍을 맞춰본 것 같은데.
한 타석 사이에 이렇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양준이라는 선수가 20년간 쌓아온 커리어의 결과였다.
하지만 문제가 전혀 없냐, 그건 아니다.
방금 헛스윙에서 봤다시피 이호민의 빠른 볼은 그 자체로도 정확히 맞추기 어렵다.
거기에 하나 더 있다.
빠른 볼에 한 번 스윙이 끌려 나온 타자는 머릿속에서 그 궤적을 지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스트라이크!”
다시 빠른 공으로 카운트를 잡은 뒤 정석으로 던진 변화구.
양준도 변화구를 예상한 듯 방망이를 내지 않았지만, 공은 그대로 존을 꿰뚫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방망이를 잡고 얼어버린 양준을 뒤로하고 3루수에게 공을 던졌다.
내야수들이 공을 돌리는 동안 양준이 한마디 툭 내뱉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에라이. 너 어린이날 때 두고 보자.”
“...예?”
두고 보자는 말이 이렇게 무서웠던 건 이번이 처음이다.
거기에 내일도 아니고 하필 어린이날을 콕 집어서 말한 건 양준도 우리의 어린이날 성적을 알고 있다는 거다.
하긴 모를 리가 없다.
우리가 어린이날 성적에 벌벌 떠는 만큼 상대 팀이 자신감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다.
10연승 팀과 10연패 팀을 상대하는 마음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어쩐지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먹먹했다.
하도 주변에서 난리를 치니 나도 영향을 받은 걸까?
“나도 모르겠다.”
“뭐?”
나도 모르게 나온 혼잣말에 타석에 들어온 타자가 반응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복잡한 마음을 뚫어주는 이호민의 시원한 포심으로 삼자범퇴로 처리하고 더그아웃에 들어왔다.
일단 오늘 경기부터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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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아쉽게 패배했다.
이호민이 7이닝 3실점으로 호투했지만 제이든 스미스 역시 제 이름값답게 8이닝 2실점으로 승리투수를 가져갔다.
시즌 첫 번째 3연패.
5월에 시작이 완전히 엉켜버렸다.
이쯤되니까 의식하고 싶지 않아도 의식이 됐다.
진짜 어린이날에 뭐가 있나.
심지어 어린이날뿐만 아니라 어린이날 시리즈 출발부터 꼬이다니.
“쟤 왜 저러냐?”
“그니까. 오늘 패전 먹은 건 난데.”
“다 들린다.”
“어. 들으라고 한 소리야.”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 원래 지금쯤이면 호민아, 넌 오늘 완벽하게 던졌어. 리드를 잘 못 한 내 탓이야. 그러면서 날 위로해 줘야지.”
“맞아. 주학아, 넌 내가 아는 최고의 유격수야. 난 널 믿어. 이러면서.”
“미친놈들아. 내가 언제 그랬다고.”
둘의 말에 발끈하자 낄낄거리면서 다가왔다.
“뭐가 고민인데? 연패? 내일 하준 선배잖아. 알아서 잘 던져주시겠지.”
“오늘 더그아웃에서 선배들이 오히려 네 눈치 보더라. 뭔데?”
“그냥 징크스나 미신이 진짜 있나 싶어서. 내 생각엔 네가 오늘 퍼펙트게임 때보다 더 잘 던진 것 같은데 패전 먹고, 주학이 너도 잘 맞췄는데 아웃 됐잖아.”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네가 맨날 나한테 해줬던 말 아니냐?”
“와, 김수호 이런 모습 처음인데. 호민아, 이거 찍어놓을까? 이거 유튜브에 올리면 우리도 100만 조회수다.”
“아오. 알겠으니까 그만해라. 나도 그만할게.”
이제야 둘이 만족했는지 웃으면서 주변에 앉았다.
“진짜 신기하긴 해. 나도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거든? 근데 선배들이 진짜 어린이날 언급도 안 하더라.”
“어. 나도 치호 선배가 그렇게 반응하는 거 처음 봤어. 아까 더그아웃에서 어린이날 말했을 때 싸해진 거 봤냐? 몰카 찍는 줄.”
“근데 왜 어린이날에 그렇게 지는 거냐? 뭐 이유가 있는 거 아니야?”
“웰시코기는 뭐가 있어서 그러냐? 그냥 의식하다 보니까 지는 거지.”
“아니 그래도 염소의 저주나 밤비노 저주 같은 유명한 건 스토리가 있잖아. 어린이날 이건 너무 뜬금없는 거 아니야?”
“미신이 다 그렇지 뭐.”
둘의 대화를 곰곰이 듣다 보니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러게. 왜 그런 걸까.”
“뭐가.”
“아니 너네가 말한 대로 너무 뜬금없이 않냐? 아무리 그래도 같은 날 10연패는 너무 하잖아.”
“그건 그렇지.”
“그나마 생각해보면 지상파 중계, 만원 관중, 낮 경기. 마린스가 못하는 세 요소가 섞인 게 제일 그럴듯한데.”
팬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전해지는 마린스가 못하는 날의 특징을 꼽자면 저 세 가지가 대표적이다.
나머지는 처음 만나는 투수, 신인 투수, 좌완 똥볼 투수, 강속구 투수 등등의 공을 못 치는 미신이 있다.
그럼 어떤 투수 공을 치냐고?
그게 마린스의 불가사의 중 하나다.
“근데 그건 이제 별 의미 없지 않나?”
“그치?”
만원 관중은 작년 후반기에 수없이 경험했고, 지상파, 낮 경기는 포스트시즌에 다 깨부쉈다.
셋이 머리를 맞대봤지만, 우리 셋의 경력을 합쳐봤자 이제 고작 3년 조금 넘었을 뿐이다.
결국 우리만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또 다시 문제에 봉착했다.
“그래서 누구?”
선배들은 전부 이 주제에 관해 얘기하는 걸 꺼린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제외하면 우리랑 비슷한 사람들 뿐이었다.
그때 한 사람의 이름이 픽하고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야. 따라와.”
“갑자기? 어디 가는데?”
“지금 이 사태에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한테 간다.”
“지금? 이 시간에?”
두 명은 얼떨떨하면서도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 목적지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하스. 전데요. 늦은 시간에 죄송한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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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은 목요일이다.
그런데도 화요일과 수요일 역시 원정 응원단이 오는 3루를 제외하곤 전부 마린스 팬으로 가득 찼다.
이젠 너무 당연하게 느껴질 만한 열기였고 이미 사직구장은 경기 시작 한참 전부터 수많은 사람을 받느라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그리고 여기, 화요일 경기에 찾아와 쓰디쓴 패배를 맛본 한 가족이 다시 사직구장을 찾았다.
“엄마. 오늘은 마린스가 이기겠죠?”
“응. 그럼. 오늘 선발 투수가 누군데.”
한창 뛰어노는 게 좋은 7살 박수호와 4살 박수한.
어제 같이 왔던 남편은 일이 바빠 오지 못했지만, 박민영 혼자 두 아이를 데리고 온 이유가 있었다.
지치지 않는 아이들의 에너지를 쏟아붓기에 야구장만 한 곳이 없었다.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응원하고 제풀에 지치니 나름 가성비 좋은 방법이었다.
거기에 최근 마린스 분위기까지 좋으니 엄마가 아닌 야구팬 박민영으로서도 기분이 좋은 그야말로 최고의 선택이었다.
야구장에 들어온 세 모자는 똑같이 김수호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다만 자리는 포수 근처가 아닌 포수에서 제일 먼 외야석이었다.
최근 열기가 뜨거운 만큼 힘들어진 티켓팅에 결국 외야석을 구하는 게 한계였다.
김수호를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좋아했다.
어제 경기는 패배했지만, 전광판에 잡히면서 나름의 추억을 만든 모자가 이른 시간에도 긴 줄을 뚫고 겨우 자리에 와서 앉았다.
일부러 일찍 온 이유가 있었다.
“엄마! 선수들 보고 올게요!”
바로 경기 전 선수들이 몸 푸는 걸 보기 위해서였다.
“대신 수한이 손 꼭 붙잡고 있어야 돼. 알겠지?”
“네! 수한아 가자.”
“웅.”
그렇게 두 형제가 손을 꼭 붙잡고 펜스 앞에 섰다.
“김수호다!”
자리에 잡자마자 움직이게 생겼지만, 김수호를 볼 기회가 생긴 두 형제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형제뿐만 아니라 다른 팬들도 김수호를 비롯한 선수들을 보기 위해 담장 앞에 몰려들었다.
“김수호! 김수호! 김수호!”
여느 때처럼 몸을 풀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팬들에게 인사를 하러 김수호가 다가왔다.
형제도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런 형제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 찾아왔다.
챙겨온 공과 펜을 꺼낸 김수호가 팬들 사이에서 박수호, 박수한 형제를 발견하곤 크게 물었다.
“이름이 뭐니?”
갑자기 일어난 일에 당황했지만 박수호는 겨우 입을 열었다.
“박수호예요! 얘는 박수한!”
“정말? 나랑 이름이 똑같네?”
“네! 맞아요!”
“어제도 부모님이랑 같이 왔었지? 부모님은?”
“뒤에 있어요!”
그렇게 두 명의 이름을 적고 사인까지 마친 김수호가 이주학과 이호민까지 부르면서 세 명의 사인이 담긴 공이 완성됐다.
“이것 좀 전해주세요.”
펜스가 워낙 높은 탓에 어쩔 수 없이 사인한 공을 던지자 주변에 있던 팬이 잡아서 형제에게 건네줬다.
“축하한다.”
너무 행복한 표정을 짓는 형과 지금 일어난 일이 정확히 어떤 건지 이해 못한 동생.
형제에게 찾아온 행운은 끝이 아니었다.
“유니폼도 줄래?”
입고 있던 유니폼까지 사인을 해주고 자신들도 해달라는 팬들을 향해 김수호가 크게 외치고 돌아갔다.
“내일 어린이날이니까 내일까지만 이해 부탁드립니다!”
다행히 평소 워낙 팬서비스가 좋은 김수호라 별문제 없이 끝이 났다.
김수호가 떠나자 형제가 곧바로 엄마에게 자랑하러 갔다.
“엄마! 김수호 형이 사인해줬어!”
“정말?”
그리고 그날,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든 건 그 형제뿐만이 아니었다.
최대한 발이 닿는 대로 어린이들을 찾아 사인을 해준 김수호와 이주학, 그리고 이호민.
그렇게 경기 시작 전부터 추억을 쌓은 어린이들이 김수호가 타석에 들어서자 목놓아 응원하기 시작했다.
짝짝-짝짝짝
“김수호 홈런!”
짝짝-짝짝짝
“김수호 홈런!”
그 응원 덕분일까.
-따아악!
1회 말, 1사 1루에서 시원한 선제 투런 홈런을 친 김수호가 환호를 받으며 홈으로 들어왔다.
선취점에 이어 허하준의 호투가 겹치면서 경기는 5대0 마린스의 완승.
뒤늦게 가족을 데리러 구장에 온 박수호 형제의 아빠가 응원에 진을 빼 지친 아이들을 업고 차에 태웠다.
그날 사직구장엔 그런 부모님의 모습이 흔하게 보였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늦은 새벽, 한 커뮤니티에 장문의 글이 올라왔다.
[김수호 선수,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