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봄린스는 아무도 막을 수 없다 - 2
#
내기는 내 승리로 끝났다.
10개의 공 중에 7개의 홈런, 그리고 두 개의 2루타.
하지만 그 이후 내가 내기에 참가하는 일은 없었다.
“밸런스 패치 모르냐?”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불참.
억울함을 표해봐도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매번 잘 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쪼잔하게 말이야.
내기가 끝나고 넘어간 곳은 투수들이 불펜 투구를 하는 곳이었다.
대부분 공을 받아본 적 있는 투수들이었고, 새로 들어온 오상엽도 국가대표 때 받아봤으니 큰 걱정은 없었다.
아직 내 차례는 오지 않아 옆에서 포수들이 공을 받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왔냐? 주학이는?”
“걘 수비 코치님한테 잡혀가던데?”
투구 대기 중이던 이호민이 날 발견하고 다가왔다.
“또? 진짜 주학인 거의 수코님 아들 아니냐?”
“부럽냐?”
“아니. 전혀.”
같이 투수들이 투구하는 걸 보고 있는데 연이어 날카로운 포구음이 들렸다.
-퍼어억!
“좋다! 한 번 더!”
“쟤 어때?”
“공 좋던데? 일단 소리부터 다르긴 하더라. 성준 선배도 잘 받아주고.”
박우주와 김성준이 배터리를 이루고 불펜피칭을 시작했다.
자세히는 기억 안 나지만 고등학교 때 몇 번 만난 그때보다 공이 훨씬 좋아진 느낌이다.
구속이야 대충 봐도 140km은 넘는 것 같고 특히 우리 팀에 거의 없던 좌투수인 게 좋았다.
“쟤 최대 구속이 얼마라고?”
“고등학교 땐 150km는 그냥 나왔는데? 지금은 더 잘 던지지 않을까?”
공만 빠르다고 다는 아니지만, 좌완의 150km는 아무래도 느낌이 다르긴 했다.
그렇게 불펜 피칭이 끝나고 이호민이 턱으로 안을 가리켰다.
“온 김에 내 공이나 받아줘.”
“좋지. 연습은 많이 했냐?”
이호민은 제구를 약간 포기하더라도 구속을 끌어올리기로 했다.
이미 150km가 넘는 구속을 끌어올리고 싶다고 올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몇몇 선택받은 투수는 노력만 한다면 그게 가능했다.
그리고 이호민은 그 투수 중 하나였다.
장비를 차고 투구를 기다리자 이내 공이 날아왔다.
스프링캠프 초반인데 불구하고 구속이 꽤 빨랐다.
“좋은데?”
포심 다음은 슬라이더.
최고 145km까지 나왔던 만큼 제대로 들어오기만 하면 이번 시즌에도 이호민의 최고의 무기 중 하나가 될 구종이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공만으로 시즌을 소화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겨우내 이호민이 선택한 구종이 바로 체인지업이었다.
원래 던질 줄은 알았지만, 말 그대로 던질 줄만 알았던 구종이 감독님의 손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오, 야 좋은데?”
공을 받자마자 감탄이 흘러나왔다.
정확한 구속은 모르겠지만 슬라이더와 비슷했다.
“넌 무슨 체인지업도 구속이 잘 나오냐?”
“근데 제구 잡기가 빡시더라. 아무튼 좋다니까 기분은 좋네.”
155km가 넘는 포심과 최대 140km 중반의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의 조화라.
제구가 조금 안 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저, 선배님.”
“어? 나?”
정말 오랜만에 선배님이란 소리를 듣자 조금 당황했다.
아무튼 여기서 나에게 선배라고 부를 사람은 박우주 한 명밖에 없었다.
“혹시 제 공도 한 번···.”
“수호야. 여깄었네?”
“아, 오셨어요?”
본의 아니게 박우주의 말을 끊은 건 허하준이었다.
“공 좀 받아줄래? 미국에서 재밌는 거 배웠거든. 너도 좋아할걸?”
“정말요? 아, 근데 우주가 받아달라고···.”
“아닙니다. 나중에 해주셔도 돼요.”
“그래? 그럼 바로 할까요? 배워온 게 뭔데요?”
“특별한 건 아니고 원래 던지는 거 약간 변형한 거야. 그, 약간 더 횡으로 휘는 슬라이더?”
“스위퍼요?”
“뭐, 비슷해.”
원래 슬라이더보다 횡으로 더 휘고 구속이 느린 구종인데 같은 손 타자를 상대로 워낙 효과가 좋다고 알고 있다.
“대체 몇 개를 던지려고 그래요? 구종 추가가 그렇게 쉽나? 제 손가락은 다섯 개밖에 없어요. 사인 내기도 힘들겠네.”
“엄살 부리지 말고 빨리 가서 앉아봐.”
“네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허하준의 투심 사건이 기억나 기대되긴 했다.
자신 있게 던진 공은 언제나처럼 미트를 파고들었다.
처음 받아본 공이었지만, 슬라이더보다 더 나간다고 생각하니 잡는 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스위퍼를 받아본 소감은 간단했다.
“좋은데요?”
“그치? 종종 써먹으면 재밌을 거 같은데?”
타자들한텐 재미로 느껴지진 않을 텐데.
그리고 주변에서 허하준의 투구를 본 투수들의 눈빛도 심상찮았다.
같은 사람으로 보는 건 아닌 것 같고, 최소 외계인이다.
뭐 이런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그들을 대표해서 물어봤다.
“구종이 원래 그렇게 고기 추가하듯 쉽게 추가되는 거예요?”
“아, 이건 원래 던지던 투심 그립에 엄지로 스핀 주는 거라 어렵진 않던데? 따지고 보면 투심에 힌트를 줬던 네 덕분이지.”
아무튼 이 공을 상대할 타자들은 그저 불쌍할 뿐이다.
우타자 상대할 땐 체인지업 대신 오프스피드 피치로 활용도 가능하니 이호민도 배워보면 좋을 거 같은데.
“너도 한 번 배워봐.”
“나도 감독님한테 배워서 던질 줄은 알아. 던질 줄은···.”
“아, 오키. 이해했다. 그럼 끝난 거죠? 우주야. 너도 던진다고 했지?”
“...아뇨. 다음에 할게요.”
박우주의 표정이 허하준의 투구를 볼 때부터 썩 좋진 않더니 결국 거절했다.
하긴, 허하준이 던지는 걸 처음 보면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긴 하지.
#
“타격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타격 코치의 말에 이정훈 감독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작년 이맘때 구멍 투성이었던 타선을 메꾸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한데 올해는 완전히 달라졌다.
9이닝 중 세 번은 공격 기회가 없다고 봐도 될 정도로 마린스의 하위 타선은 심각했다.
하지만 이제 타선에 빈틈이 없어졌다.
이규영(0.331, 52도루)과 박은성(0.292, 24도루)의 테이블세터.
오준혁(0.287, 19홈런), 김수호(0.364, 31홈런), 강주호(0.321, 23홈런)로 이어지는 막강한 중심타선.
거기에 한 방이 있는 잭 미켈(0.317, 19홈런)과 채지훈(0.261, 9홈런), 김민석(0.287, 7홈런), 타순이 밀렸지만 언제나 제 역할을 해주는 최치호(0.278, 11홈런)와 빠른 발로 변수를 만들 수 있는 이주학(0.252, 2홈런)까지.
투수 출신인 이정훈 감독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게 느껴졌다.
타선을 아무리 살펴봐도 쉬어갈 곳이 없다.
당당한 타격 코치의 말에 자극받았는지 투수 코치도 급하게 외쳤다.
“투수도 문제없습니다. 하준이야 말할 것도 없고 웰링턴과 하스 모두 준비를 잘 해왔습니다. 호기도 문제없고요.”
“호민이는?”
“당장 판단하긴 어렵습니다. 구속이 잘 나오긴 하는데 아직 제구가 완벽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수호가 포수로 있으면 멘탈을 잘 잡아주니까 크게 흔들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좋아. 불펜은?”
“상엽이의 합류가 큽니다. 용기도 마무리 욕심이 있긴 한데 오히려 그게 자극이 되는 모양입니다. 몸도 잘 만들어왔고 공도 좋습니다.”
“동준이는?”
“조금 애매합니다. 바뀐 투구 밸런스를 찾는 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그래도 상엽이 왔으니까 기다릴 순 있겠네. 오케이.”
“예. 마지막으로 우주 공이 상당히 좋습니다. 변화구는 아쉽지만 작년 호민이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
희소식이었다.
시즌 중 변수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그중 투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으니까.
특히 투수들의 체력 부담이 커지는 여름이 가장 큰 고비였다.
그런 상황에 투수가, 그것도 150km를 넘는 빠른 볼을 던지는 좌완 투수가 나타났으니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체력 문제는 투수만이 아니었다.
“포수는?”
마린스의 가장 큰 문제는 김수호의 백업 포수가 없다는 거였다.
시즌은 길다.
144경기를 모두 뛰는 야수는 종종 나오지만, 포수는 거의 없다.
특히 이번 시즌이 포수로서 첫 번째 풀 타임 시즌인 만큼 관리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만약 관리 없이 김수호를 쓰다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당장 구멍이 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수비는 당연한 말이고 당장 오준혁이 포스트시즌에서 맹타를 휘두를 수 있었던 이유에 김수호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다.
물론 작년과 타선의 무게감이 달라지긴 했지만, 김수호가 빠진다는 건 그만큼 큰 전력 손실이기도 했다.
“성준이가 제일 좋습니다.”
백업 포수 자리는 한 자리, 경쟁자는 셋.
그중 가장 앞서가는 선수는 김성준이었다.
“투수들이랑 잘 맞나?”
“괜찮긴 한데 아무래도 수호랑 비교하면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선발들이 워낙 개성이 강해서요.”
“그렇긴 하지.”
허하준의 스플리터는 평범한 포수는 잡는 것도 버거워했고, 웰링턴은 커브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성적이 바뀌었다.
김호기는 주자가 있으면 제구가 흔들리고 이호민은 제구가 좋다고 보기 어렵다.
“그나마 하스 등판일에 성준이를 올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음. 일단 그렇게 해두고 지켜보자고.”
그렇게 코치진의 기대와 걱정을 한 몸에 받은 김수호는 그런 코치진의 걱정 중 하나를 해결하는 중이었다.
“공 너무 좋은데요?”
#
작년 마린스에 혜성같이 등장한 선수는 김수호, 이주학, 이호민뿐만이 아니다.
시즌 후반 전역과 동시에 깜짝 등장해, 과부하였던 불펜에 큰 힘이 되어준 김동준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김수호의 조언을 듣고 탈바꿈한 김동준은 이번 시즌을 앞두고 새로운 도전을 했다.
그의 구종은 포심과 변형 포심.
포심보다 커터에 더 가까운 변형 포심은 그가 군 생활 동안 기른 근육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이젠 선택과 집중을 할 때가 왔다.
기존 운동법에서 투구에 관련된 근육을 집중적으로 운동하는 방식으로 변경했고, 좀 더 전문적인 방식과 함께 밸런스와 유연성에 집중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운동 방식의 변화로 몸의 밸런스가 이전과 달라지자 제구를 잡는 데 꽤 고생 중이었다.
근육을 늘려서 밸런스가 무너진 게 아니라 되려 근육량을 낮춰 무너진 거니 참 아이러니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김수호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음, 일단 한번 던져보실래요? 포심이랑 커터 10개씩이요.”
“그럴까?”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장비를 찬 김수호가 김동준을 기다렸다.
그리고 곧 미트에 꽂히는 공에 김수호가 속으로 감탄했다.
‘동준이 형 공은 여전하네.’
구속은 다른 투수들보다 느릴지 몰라도 미트에 들어오는 힘이나 무브먼트는 밀리지 않는다.
아니, 작년보다 좋아진 게 느껴졌다.
하지만 김동준의 걱정대로 공이 미트에 벗어난 공이 꽤 됐다.
“공 너무 좋은데요?”
“고맙다.”
김수호의 칭찬에 김동준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김동준도 자신이 던진 스무 개의 공 중에 김수호의 미트에 정확히 간 공은 거의 없다는 걸 두 눈으로 봤다.
“제구도 괜찮았어요. 저 정도면 제가 좀 고생하면 잡을 수 있을 정돈데요 뭐.”
이미 이호민의 제구 안되는 공을 수 없이 받아본 김수호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해결하면 좋은 일이니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번 겨울에 하체 운동을 위주로 했죠?”
“어. 하체랑 요가를 많이 했지.”
“저랑 비슷하네요. 투구할 때 불편한 건 없어요?”
“음. 불편하다고 느끼는 건 없는데 아직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야. 감독, 코치님도 걱정하지 말라는데 아무래도 좀 그렇네.”
“그럴 수 있죠.”
곰곰히 생각한 김수호가 낸 결론은 하나였다.
“제 생각엔 작년보다 안 좋은 상황은 아닌 거 같아요. 공도 더 묵직하고 그렇다고 제구가 막 흐트러지는 것도 아니고.”
“그래?”
“문제라면 아직 폼이 몸에 제대로 안 익은 것 같다는 거죠.”
“흐음.”
이건 김수호도 겪은 일이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타격폼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부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얘기를 들은 김동준이 김수호에게 물었다.
“지금은 어떤데?”
“완벽하죠.”
“그래? 어떻게 했는데?”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방망이를 휘둘렀죠.”
“아....”
어찌 보면 가장 원론적인 답이었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잖아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그동안 이것저것 많이 시도해보죠.”
김수호의 말에 김동준의 마음이 편해졌다.
김수호에게도 이번 시즌은 정말 중요할 텐데 먼저 나서서 도와주겠다니 고마운 마음도,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고맙다.”
“그럼 다시 할까요?”
“좋지.”
-퍼어엉!
-퍼어엉!
-퍼어엉!
두 배터리의 공을 주고받는 소리가 늦은 밤이 되도록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