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필승공식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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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는 최근 5년간 FA 영입이 가장 뜸했던 팀이었다.
그렇다고 모기업의 투자가 인색했던 건 아니다.
투자 범위를 조금 넓혀보면 강주호와 강기호의 복귀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썼고, 외국인 용병을 구성하는 데에 돈을 한도까지 쓰는 등 나름 타당한 판단하에 FA가 아닌 다른 곳에 투자한 것뿐이었다.
그동안 FA영입은 단 한 명, 바로 마린스의 현 주장이자 한때 수원 나이츠의 주전 2루수였던 최치호였다.
4년 55억이라는 금액에 오버페이가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마린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구멍이 나버린 포지션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고, 강기호의 부상 이후 몰락하는 마린스에 가면 욕받이 취급을 받을 거라 생각한 선수들은 마린스를 회피했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마린스와 협상에 임했던 선수가 바로 최치호였다.
사실 수원 나이츠와 부산 마린스의 금액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7억.
차이가 크게 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수원 토박이인 최치호가 지방으로 내려가는 비용과 까다로운 옵션이 걸려있던 마린스의 제안을 생각해보면 마린스로 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최치호가 굳이 마린스로 향한 건, 수원 나이츠에 최건우라는 초대형 2루수의 등장과 연관이 있었다.
그의 백업으로 지난 시즌을 시작한 최건우는 야금야금 선발 출장을 하더니, 결국 이듬해에 최치호를 1루로 미뤄내고 말았다.
거기까진 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프로선수로서 자신도 누군가를 미뤄내고 이 자리를 차지한 거였고, 승리를 위해 다른 포지션으로 가는 건 감수할 수 있었다.
문제는 시즌 중반에 터진 초대형 트레이드 소식.
대형 2루수의 등장에 나이츠가 이제 FA가 반년 남은 최치호를 트레이드하려다 무산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당시 수원 나이츠 단장에게 찾아가 물었고, 대답은 황당했다.
“저희가 그걸 왜 최치호 선수에게 말해줘야 하죠?”
차라리 아니면 아니라고, 맞으면 맞다고 해줬다면 최치호도 수긍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구단은 절차상으로 문제가 없었다는 말만 반복할 뿐, 결국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월 후, 최치호는 부산 마린스와 계약을 맺었다.
입단 직후, 최건우에게 문자가 왔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본인 때문에 이적한 줄 아는 멍청한 후배를 삼 일 내내 만나고 나서야 오해를 풀었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말았다.
‘나중에 가을 야구에서 보자.’
하지만 약속을 지키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마린스에 난 구멍을 메우기엔 최치호만으론 부족했다.
‘절대 못 지킬 줄 알았는데.’
FA 마지막 해인 올해 역시 꼴등으로 시즌을 마칠 뻔했다.
하지만 김수호 덕분에 가을에 왔다.
이제 그 이후 약속을 지켜야 할 차례.
“건우야, 형이 약속 꼭 지킨다고 했지?”
그다음 약속은 바로 서로를 이기는 팀이 우승까지 하자는 것.
“야, 최치호 선배님 갑자기 혼잣말한다.”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최치호가 인상을 썼다.
하여간 저놈은 분위기란 걸 몰라요.
“이주학! 일로 와.”
“넵!”
유격수는 해본 적 없지만, 키스톤 콤비로서 가장 가까이서 수비 하는 모습을 봤던 최치호였다.
최건우보단 못하지만 좋은 재능을 가졌다.
아마 5~6년 뒤엔 지 동기 발끝 정도는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때 되면 우리 포수님은 태평양을 건넜겠지만.’
“너 어제 5회 수비 할 때 왜 그따위로 했어?”
“아, 그게요....”
물론 갈 길은 멀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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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하스와 경기에 관해 얘기하고 왔는데 저 멀리 최치호한테 잡힌 이주학이 보였다.
오케이, 신경 쓸 사람이 한 명 줄었다.
역대급으로 바쁜 날인 것 같다.
5판 3선승인 준플레이오프에서 어느 경기가 안 중요하겠냐마는 오늘 경기는 어제 경기만큼, 아니 어제 경기보다 더 중요했다.
이미 1승을 거둔 이상 유리한 건 우리다.
반면 나이츠는 우리 다음 경기 선발을 생각하고 오늘 경기에 모든 걸 쏟아부을 거다.
우리도 허하준, 웰링턴 두 선발의 호투 덕에 고작 세 명의 투수만 올라갔을 뿐이다.
이미 하스 뒤로 김호기, 이호민 등 기존 선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리도 기운이 맑군.”
“주학이요?”
“그래. 기운이 맑은 사람에겐 여러 좋은 사람들이 찾아오길 마련이지.”
“저는 어떤데요?”
“흠, 자네에 비하면 리는 미세먼지와 다름없지.”
한국에 살더니 미세먼지도 아네.
오늘 선발인 하스는 언제나 그렇듯 편안해 보였다.
하긴, 예전에 레타쿠가 꿈에서 웰시코기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한 적을 제어하면 경기 전 굳이 케어가 필요 없는 선수였다.
“언젠가 주학이도 하스처럼 떨지 않는 날이 올까요?”
“그럼. 자신을 믿고, 레타쿠를 믿으면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이어질 거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제발요.
내가 괜히 이주학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하스는 강점이 분명한 투수다.
홈런, 볼넷, 안타, 도루, 심지어 실책이 나와도 다음 공을 존 한 가운데에 꽂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결과가 다시 안 좋게 이어지더라도 다시 한번, 또 한 번 던질 수 있는 투수는 거의 없다.
거기에 세 가지 패스트볼이 좋은 날엔 타구의 80% 이상이 전부 땅볼이 될 정도로 뛰어난 땅볼 투수기도 했다.
경기 전에 공을 받아 본 결과 땅볼이 상당히 많이 나올 것 같다.
그런 만큼 내야, 특히 가장 중요한 유격수인 이주학의 수비가 중요한 날이었다.
근데 저 멀리 최치호가 하는 걸 보면 이주학이 상당히 기죽을 거 같은데.
“너무 걱정하지 마라.”
“예?”
“리도 건장한 청년이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한 남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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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기분 좋게 시작한 1회와 다르게 오늘은 삼자범퇴로 시작했다.
하스 역시 좋은 공을 던지면서 첫 타자를 잡아냈다.
“푹 잤니?”
언제나 그랬듯 나이츠의 2번 타자로 나선 최건우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한숨도 못 잤는데, 개운해 보인다?”
“구단에서 좋은 숙소를 잡아줘서요. 그래도 집이 최고죠.”
“사직 좋지. 나도 사직만 가면 날아다니거든.”
“알죠. 저도 한 수 배우고 싶은데요.”
최건우가 사직에서 타율이 4할이 넘는 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팬들이 사직우, 사직우 거리면서 데려오자는데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결국 사직에서 상대한 투수는 우리 투수.
그냥 우리한테 강한 거지, 딱히 사직이랑 큰 연관이 있는 건 아니다.
특히 하스에게도 3할 5푼으로 강했다.
아무튼 지금껏 최건우가 타석에 들어오면 딱히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근데 오늘 갑자기 말을 걸고, 심지어 하는 말도 나를 흔들려는 의도가 보였다.
근데 트래시토크도 어울리는 사람이 해야지.
최건우는 팬들도 다 아는 착한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그냥 상황이 웃겼다.
“왜 웃어?”
“아뇨, 아닙니다.”
아무리 최건우라지만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큰일 날 수도 있다.
아무튼 안 하던 것까지 할 정도로 오늘 경기에 진심이라는 뜻이었고, 그에 맞춰서 사인을 보냈다.
‘몸쪽에 커터 하나 붙이죠.’
최건우는 충분히 한 방을 칠 수 있는 능력도 있고, 스타성도 넘친다.
어제의 우리처럼 분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스트라이크 볼 비율이 70% 가까이 되는 하스를 상대로 초구, 시원하게 돌릴 가능성이 크다.
그 상황에 포심처럼 오는 먹음직스럽게 생긴 커터가 온다면?
-빠각!
방망이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밋밋한 타구가 하스 우측으로 굴러갔다.
얼마나 급했는지 최건우가 부서진 손잡이를 들고 전력으로 뛰는 게 보였다.
하지만 결과가 바뀌는 건 아니다.
이주학이 달려오면서 잡고 차분하게 1루로 러닝스로.
“아웃!”
'오 수비 좋은데?'
다음으로 타석에 들어선 3번 타자 역시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아무리 하스가 존에 과감하게 던지는 투수지만, 대놓고 급한 모습을 보여주는 타자들에게 굳이 정면승부를 할 필요는 없다.
-따악!
“아웃!”
이주학이 가볍게 뜬 공을 잡아내면서 삼자범퇴.
더그아웃에 돌아가자 강기호가 나를 불렀다.
“어때? 좀 급하지?”
“예. 예상대로예요.”
절벽 끝에 몰린 건 우리가 아닌 나이츠.
오늘 경기에서 져도 끝은 아니지만, 2패를 하고 역스윕에 성공한 팀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걸 생각하면 급할 수밖에 없다.
타자들의 절박함과 긴장, 그리고 부담감이 스윙에 묻어나왔다.
“좋아. 방망이가 안 나올 때까지 이대로 볼 배합 유지하자. 쟤네 가을 많이 해본 팀이야. 금방 정신 차릴 테니까 집중하자.”
강기호가 요구한 건 타자가 급할 땐 천천히, 반대로 지켜볼 땐 빠르게 볼 배합을 하라는 거였다.
그 타이밍을 잡는 건 타자를 바로 옆에서 보는 내 몫.
“예. 알겠습니다.”
분명 어려운 일이지만, 자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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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새로 나온 사인인가?’
타석에 서면 바라볼 곳이 투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투수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대략 이해할 수 있다.
근데 이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저 정도면 그냥 올라가는 게 낫지 않을까.’
초구부터 사인이 마음에 안 드는지 고개를 수없이 돌리는 모습.
아니, 저 정도면 마음에 안 드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던지기 싫다는 것 같은데.
“마운드 좀 갔다 올게요.”
결국 이기찬이 심판에게 말하고 급하게 마운드에 올라갔다 왔다.
잘 풀리진 않았는지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나한테는 좋은 소식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충 짐작하자면, 지난 경기인데.
호투하던 휴고 버터필드가 나한테 이루타를 맞은 걸 시작으로 강주호, 잭 미켈에게 백투백 홈런을 맞고 흔들렸다.
고작 한 달밖에 안 됐던 경기니 기억에 남을 법하다.
아무튼 이기찬이 올라간 효과가 있는지 진정했고 공을 던졌다.
“볼!”
하지만 바깥쪽으로 한참 빠진 공.
그리고 연달아서 볼이 하나 더 들어왔다.
이제 완벽한 히팅 카운트다.
투수로선 3볼이 되기 전에 스트라이크 하나 정도는 잡고 싶을 터.
하지만 투수가 대놓고 흔들리는데, 굳이 쳐 줄 이유는 없다.
오직 하나의 노림수만 가지고 집중했다.
그 외의 공이 온다면 존에 들어와도 버린다는 생각으로 공을 기다렸다.
‘왔다.’
휴고 버터필드의 구종은 포심과 체인지업, 그리고 포크볼 정도.
슬라이더도 던지지만 제구가 그리 좋지 않아서 가끔 던지는 걸로 안다.
2-0에 몰린 상황에 제구가 안 좋은 슬라이더는 배제.
거기에 느린 변화구인 체인지업과 포크볼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내가 원하던 공, 바로 카운트를 잡기 위해 들어온 포심.
-따아아아악!
완벽하게 의식하고 있던 공이 온 덕분일까.
내 몸은 자연스럽게 최현우와 조절했던 타격폼을 그대로 재현했다.
-와아아아아아!
방망이를 타고 퍼지던 진동은 곧 함성과 함께 소름으로 바뀌었다.
“야, 안 가냐?”
“아, 죄송합니다.”
순간 넋을 잃고 타구를 보느라 타석에 서 있었더니 이기찬이 날카롭게 말했다.
근데 뭐, 저 타구를 보면 그럴 만도 하지.
타석에서 계속 타구를 본 덕에 어디에 떨어지는지 볼 수 있었다.
아니, 볼 수 없다고 하는 게 맞나?
공은 경기장 안이 아니라 바깥에 떨어졌으니까.
“크, 이젠 영화까지 찍냐? 멋있네.”
“고의로 그런 거 아니에요.”
“괜찮아. 포스트 시즌에서 그런 것 좀 해줘야 팬들이 좋아하지. 저기 봐봐라.”
강주호의 턱짓에 3루를 보자 곧 함성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우, 나도 오랜만에 한 번 해볼까?”
그렇게 말한 강주호였지만, 결과는 뜬공이었다.
“2년만 젊었어도 넘어갔다.”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눈, 눈 임마.”
하, 진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