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분위기를 타면 무서운 팀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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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 구단주 임상훈과 피닉스의 구단주 오영호.
둘에게 있어 야구단은 그저 홍보 수단이 아니다.
뼛속까지 야구광인 둘에겐 일종의 자존심이었고, 친구 사이인 서로에게 절대 지고 싶지 않은, 절대 져서는 안 될 것이었다.
하지만 둘 다 야구에 지난 몇 년간 관심이 시들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런 둘이 올해 야구에 다시 관심을 두게 된 건 비슷한 이유였다.
황인재의 등장과 동시에 시작된 오영호의 약 올림.
대기업의 회장이자 야구단의 구단주로서 유치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이들에겐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다.
임상훈 역시 휴식기 직전에 시작된 마린스의 약진과 노히트노런을 기점으로 다시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후반기에 처음으로 만나는 마린스와 피닉스의 경기.
“직관은 오랜만이지?”
제 구단의 에이스처럼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임상훈과 반면 약간 표정이 굳은 오영호가 사직 구장에 나왔다.
워낙 바쁜 두 사람이었지만 1년에 한 번씩 부산과 대전에 같이 직관을 오곤 했다.
처음엔 가을에서 만날 때 직관을 왔지만, 최근 플레이오프에서 마린스와 피닉스가 만난 적이 없다 보니 이렇게 시즌 중에 오게 됐다.
오직 관람이 목적이라 수행 인원은 마린스와 피닉스의 사장과 단장뿐.
“오단장, 지금 피닉스랑 전적이 몇 승 몇 패지?”
“예. 오늘 경기 승리 시 5승 6패입니다.”
“크흠, 아직 경기 시작도 안 했습니다. 저희가 이기면 7승 4패입니다.”
급하게 반박한 피닉스 단장의 말에 마린스 단장 오민찬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선발이 누군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에릭이 마린스 상대 평균 자책점이 얼만지 알아?’
잠시 단장끼리 무언의 신경전이 오간 후 경기가 시작됐다.
1회 초, 당연히 무사히 넘어갈 줄 알았지만 2사 2루에서 만난 황인재.
“저희 황인재 선수는 주자 2루 상황에서 타율이 4할 2푼, 홈런 2개, 그리고 8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번 이닝에 점수가 나올 확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피닉스 단장의 말에 오민찬이 미소를 지었다.
“저희 허하준, 김수호 배터리는 현재 43이닝 연속 무실점입니다.”
그 말에 피닉스 단장의 표정이 오묘하게 바뀌었다.
‘표정 관리 힘들지?’
아무튼 이번 승부 결과가 삼진이 나왔을 때, 피닉스 단장은 속으로 욕을 했다.
‘왜 하필 허하준 경기에 온 거야!’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피닉스의 선발 에릭이 잘 던지길 기도하는 것뿐.
기도가 통한 걸까?
에릭은 4회까지 퍼펙트 행진을 이어갔다.
“오늘 한국 야구 최초의 기록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엄청난 설레발이었지만, 그 말에 오영호의 입가엔 미소가, 임상훈의 표정은 굳고 말았다.
그리고 시작 된 마린스의 4회 말 공격.
‘제발! 강주호 제발!’
퍼펙트만 깨자는 생각으로 마린스 단장이 기도하던 것도 잠시.
“와아아아! 흡.”
강주호의 방망이가 공을 강타하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최초의 기록이 나오긴 하겠어. 퍼펙트 중에 홈런으로 기록이 깨진 투수, 뭐 그런 기록은 없나?”
“찾아보겠습니다.”
잠시 핸드폰으로 직원들에게 찾아보라는 문자를 보내는 사이,
“그렇지!”
갑자기 들린 함성과 구단주의 목소리에 급하게 경기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유유히 베이스를 돌고 있는 김수호가 보였다.
오민찬이 문자를 보내던 걸 지우고 확신을 갖고 말했다.
“백투백으로 깨진 건 최초일 겁니다.”
“그으래? 하하하하. 자네, 최초 축하하네.”
“....”
그 이후 피닉스의 자존심인 황인재가 3연속 삼진으로 침몰하자, 결국 피닉스 진영은 미소를 잃었다.
그렇게 경기는 2대0으로 끝났다.
5연속 완봉승이라는 대기록과 8위 등극.
“크하하하. 오늘 경기 참 재밌었어. 안 그런가?”
“시끄럽고 빨리 가기나 해.”
각 팀의 사장들이 구단주를 모시고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두 단장뿐.
“뭘 봐.”
졌으면 우리 집에서 꺼져.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간 피닉스 단장이 시비 걸 때마다 쌓였던 것이 전부 다 내려간 기분이 들었다.
“... 시발.”
결국 추한 한 마디와 함께 피닉스 단장이 사라졌다.
잠시 승리의 여운을 느끼고 있을 때, 오민찬의 핸드폰이 울렸다.
-피닉스 놈들한텐 뭐 하나라도 질 생각 하지마. 뭐든지.
구단주가 직접 보낸 문자.
조금 이르긴 했지만, 고민이 있었는데 잘 됐다.
“흐흐흐. 수호야, 형만 믿어라.”
김수호도 모르는 사이 형이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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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경기는 조금 아슬아슬했다.
7회에 황인재를 잡아낸 그 공까진 좋았는데, 그 이후 제구가 아슬아슬했다.
쫓기는듯한 피닉스 타선이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법한 경기.
허하준의 연속 완봉 기록은 이어갔지만, 슬슬 체력적으로 부담이 있는 것 같다.
올림픽 휴식기에 쉬지도 못하고, 이번 주에도 2번이나 등판했으니.
아마 다음 경기엔 기록을 이어가기 힘들지 않을까?
아무튼, 일어나지도 않은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서울로 가는 원정길.
모두 어제 경기의 피로가 남아있을 텐데 버스에는 피곤한 기색을 보이는 선수가 아무도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게, 모두들 피곤을 잊게 만드는 것 중 가장 효과가 좋은 승리에 취해 있었다.
14승 4패.
내가 합류한 후 총 6번의 시리즈에서 4번의 위닝 시리즈와 2번의 스윕승.
이전까지 29승 53패 1무였던 승패가 순식간에 43승 57패 1무까지 치솟았다.
1위 돌핀스부터 3위 수원 나이트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4위 챌린저스와는 9경기, 5위 스타즈는 이제 6경기로 사정권 안에 들어왔다.
이제 다음 목표는 7위 대구 에이스와 6위 광주 울프즈.
물론 8위도 아슬아슬하게 역전한 거였지만, 어쨌든 10위에 4할 이하였던 전과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일 것이다.
이제 남은 경기는 40경기 남짓.
지금 이 승률을 시즌 끝까지 이어갈 순 없겠지만, 이번 원정 경기를 보면 한동안은 유지할 법했다.
이번 원정은 현재 10등인 서울 호올스.
그다음은 2위 프렌즈와의 홈 경기가 있었지만, 솔직히 질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흥분에 뜬눈으로 달려 도착한 서울.
“밥 안 먹냐?”
“너 혼자 가. 어제 먹은 소고기가 소화가 아직 안 됐어.”
룸메이트인 이주학이 배를 두드리면서 곧장 침대에 누웠다.
확실히 어제 많이 먹긴 했다.
김호기가 말했던 직관 온다는 높은 분은 무려 구단주였고, 8위 등극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소고기 회식을 했다.
8위가 소고기면, 우승은 뭘까.
아무튼 월요일에 원정지에 도착하니 여유롭고 좋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경기 당일.
“여기 부산이었냐?”
“그러게.”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많은 팬이 원정 응원석을 꽉 채웠다.
최근 양 팀의 분위기를 대변하듯, 과장 없이 원정인 마린스 팬이 더 많았다.
서울에 마린스 팬이 많다곤 들었지만, 저번 원정 경기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오늘은 조금이지만 비도 오는 날씨였다.
아직 취소될 정도의 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단했다.
“뭘 이 정도 갖고. 마, 나 때는 부산에 태풍 온 날에도 팬들이 경기 하라고 난리였다.”
“진짜요?”
“어. 진짜로.”
강주호가 말하는 라떼는 보통 10년 전.
그만큼 성적이 좋았고, 부산 팬들은 열정적이라는 말이겠지.
아무튼 시원하기보단 습하고 불쾌한 비를 맞으며 시작한 경기였지만, 팬들의 응원은 정말 큰 힘이 됐다.
물론 그게 무조건 경기에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오늘 선발은 웰링턴.
“볼!”
아무 소득 없이 끝난 1회 초 공격과 반대로 웰링턴은 처음부터 볼넷을 내주며 제구 난조를 겪었다.
비 오는 날에 제구가 어려운 건 상대 투수도 마찬가지니까 괜찮았다.
문제는 나도 비 오는 날 포수는 처음이라는 건데.
1루 주자가 계속 리드폭을 넓히며 알짱거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웰링턴이 계속 볼을 던지자, 결국 뛰지 않고 2루까지 갔다.
두 타자 연속 볼넷.
최악의 시작을 맞이한 웰링턴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로진 바꿔달라 할까요?”
“로진?”
“네. 로진만 바꾸면 완벽하겠는데요? 오늘 위력이 진짜 좋아요.”
“고마워.”
내 말에 웰링턴의 굳은 표정이 살짝 풀렸다.
위력이 있는 건 맞는데, 제구가 너무 안 좋았다.
특히 오늘 제구에 애를 먹는 공은 바로 커브.
포심과 슬라이더는 그나마 존 언저리에 오긴 했지만, 커브는 영 아니었다.
사실상 이 정도 제구라면 오늘 커브는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러면 남은 공은 포심과 슬라이더뿐.
“커브는 비장의 한 발로 남겨놓죠.”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볼배합에서 커브를 빼자는 걸 나름 기분 좋게 얘기하고 내려왔다.
타석엔 3번 타자, 오윤택이 들어왔다.
국가대표급은 아니지만, 골든글러브도 받았을 정도로 준수한 공격과 수비를 자랑하는 우타자.
‘무조건 스트라이크에 넣어야돼.’
또다시 볼로 시작하면 그땐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스트라이크!”
반쯤 존에 대놓고 들어오긴 했지만, 이번 경기 첫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이제 이 다음 공이 중요한데.
초구는 웰링턴의 제구가 안 좋으니 지켜본 것 같고.
제구가 안 되는 날 몸쪽은 가급 적 피하는 게 좋다.
물론 타자도 이 사실을 알고 바깥쪽을 노리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따악!
2구, 타자가 다시 한번 바깥쪽 존에 들어오는 포심을 때렸다.
1 2간을 뚫고 우익수에게 빠르게 날아간 타구.
오히려 너무 잘 맞아서 2루 주자가 못 들어왔다.
‘그냥 들어와 보지.’
사실, 흔들리는 투수를 두고 굳이 모험할 이유가 없긴 했다.
무사 만루.
그리고 타석엔 4번 타자, 강신이.
호올스 타자 중 만루에서 가장 만나기 싫은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리그에서 손꼽히는 배드볼히터.
그 명성답게 초구에 빠지는 슬라이더에도 곧바로 배트가 나왔다.
“스트라이크!”
이어서 던진 2구는 볼, 3구가 파울이 되면서 1-2 카운트.
평소였다면 적당한 유인구로 방망이를 유도 했겠지만, 오늘은 그런 유인구가 없다.
그래도 아직 카운트에 여유가 있고 혹시나 싶어 커브 사인을 냈다.
이번에도 바깥쪽.
웰링턴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공을 던졌다.
웰링턴의 손에서 빠져나온 공은 바깥쪽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이건.
‘너무 바깥이잖아!’
홈에 그려진 좌타석의 선 끝에 닿을 정도로 완만한 궤적을 그리면서 날아오는 공.
‘빠지면 최소 1점.’
블로킹은커녕 평소보다 훨씬 이르게 바운드가 되는 바람에 거의 몸을 내던지다시피 하며 팔을 쭉 뻗었다.
‘잡았다!’
그리고 그때, 1루에 있을 때부터 넓은 리드폭을 유지하던 3루 주자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무너진 자세에서 던지는 송구.
부정확하게 들어가서 공이 빠지면 기껏 잡은 게 헛수고가 된다.
하지만 자신 있었다.
몸을 반쯤 일으킨 상태에서 곧바로 3루에 공을 뿌렸고, 공이 오준혁의 글러브에 정확하게 들어가는 것과 3루 주자가 황급히 귀루하는 게 보였다.
이제 남은 건 심판의 결과뿐.
“아웃!”
“우와아아악!”
“김수호! 김수호! 김수호!”
“Fucking Bro!”
공이 빠진 줄 알고 홈에 백업을 온 웰링턴이 환한 미소를 보이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미트를 가져다 대고 혼자 일어났다.
투수의 손에 흙을 묻힐 순 없지.
“완벽한 피치아웃이었어요.”
어쩌다 보니 내가 말한 것처럼 비장의 한 발이 되어버린 공이었지만, 결과가 좋았으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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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만루에서 1실점.
포심과 슬라이더, 그리고 제구가 완전 엉망인 커브만 던질 수 있는 상태에서 그 정도면 굉장한 선방이었다.
비록 유니폼에 프로텍트(포수 보호 장비 중 몸에 착용하는 것) 부분만 빼고 흙이 묻어서 보기 흉했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거 어떻게 잡은 거냐?"
"개쩔었지?"
“솔직히 이달의 수비에 나올 듯.”
“어. 인정.”
“재수 없는 놈.”
이주학이 투덜거리면서 도망갔다.
지가 말해 놓고 뭐야.
아무튼 이주학이 투덜거린 이후 비가 더 거세졌다.
결국 2회 초, 강주호가 아웃 당한 이후 경기가 잠시 중단됐다.
“후, 존나 찝찝하네.”
“수건이라도 드릴까요?”
“어, 고맙다.”
최치호한테 수건을 갖다주면서 물었다.
“오늘 우취는 없겠죠?”
“어. 올해엔 기준이 좀 빡세.”
올림픽 기간 때문에 우천 취소나 중단은 가능한 없다고 들었다.
춥진 않았지만, 슬슬 몸이 굳는 게 느껴질 무렵 비가 얕아지기 시작했다.
40분가량 중단이 된 후 겨우 경기가 재개됐다.
상대 선발 투수가 몸을 푸는 걸 보면서 나도 몸을 풀었다.
“알고 있지?”
“당연하죠.”
강주호가 쉬는 동안 내게 알려준 팁이 있다.
우천 중단은 타자보다 투수에게 더 치명적이다.
타자야 그냥 몸 풀면 끝인데, 투수의 어깨가 식으면 위력적인 공을 뿌리기 힘들다.
특히 가장 치명적일 때는 바로 지금.
-따아악!
몸을 풀고 난 이후 던진 첫 번째 공.
공이 담장을 넘기자 환호성이 빗소리를 뚫고 그라운드를 울렸다.
우리가 팬들에게 힘을 받는 것만큼.
비를 홀딱 맞으면서 경기가 재개될 때까지 기다려준 팬들에게 주는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