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야구만 잘 하면 된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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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황인재가 잠깐 할 말을 잃은 듯 멈춰있다가 말했다.
“... 뭐?”
한 방 먹였다.
황인재가 한 말 만큼이나 나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내기가 시작된 이상, 이제 대화가 아닌 내기의 결과가 답을 말해줄 것이다.
그래도 혼자 맞는 말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건 열 받아서 나온 말이었다.
“... 그래. 인정. 그럼 이렇게 해.”
“뭐?”
“우리가 FA를 얻을 때까지 7년. 7년 동안 누가 더 많이 우승시키냐. 어때. 대신 동률이면 네가 이긴 거로.”
“아니. 그런 거 필요 없어. 어차피 내가 이길 거거든.”
“... 그래. 결과가 말해주겠지. 이제 할 말 없지? 나 먼저 간다.”
그 말을 남기고 황인재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날.
“... 어제 내가 뭔 말을 한 거지?”
어제 일을 떠올리자 온몸을 타고 번지는 오글거림과 숙취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황인재도 조금 취했었던 게 분명했다.
맨정신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근 몇십 년 동안 우승은커녕 한국시리즈에 올라간 적도 없는 두 팀의 우승 횟수로 겨루자고?
사실 0대0으로 무승부나 안 되면 다행이었다.
겨우 어제의 기억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갔다.
오늘이 출국 날이라 다들 바쁜지 이규영밖에 안 보였다.
“오, 올림픽 최고 스타님 일어나셨습니까?”
“그건 또 뭐예요?”
“이거 못 봤냐?”
[브리즈번 올림픽이 낳은 라이징 스타!]
- ....2위 양궁 금메달리스트 정윤영 1위 야구 대표팀 포수 김수호
“저예요 이거?”
“어. 지금 한국에서 인기 장난 아니라는데? 너 SNS 안 하냐?”
“예. 아무것도 안 해요.”
“와, 이 기회를 그렇게 놓친다고? 너 인스타 했으면 팔로워 몇 십만은 늘었을 텐데.”
“그런 게 뭐가 중요해요.”
“됐다. 20살이 무슨 나보다 답답하게 사냐.”
이규영이 보여준 기사를 보긴 했지만, 막상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에 도착하자.
“우와. 미쳤네....”
“이 정도 인파는 처음 보는데요?”
나름대로 국가대표 경력이 많은 우오준과 이규영이 놀랄 만큼 공항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수호 선수! 여기 봐주세요!”
“국가대표팀 포즈 한 번만 취할게요!”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해 인터뷰까지 마치자 마지막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길게 늘여진 줄과 수많은 팬.
모두 기쁜 마음으로 환영해주는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었다.
그렇게 모든 일정이 끝나고.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지금까지 고생했고, 다음에 만날 땐 적당히 잘하자.”
“네?”
“솔직히 올림픽 동안 했던 대로 치면 그게 사람이냐? 사람이 인간미가 있어야지. 아무튼 우리 만날 땐 살살 해줘.”
“어, 우리도.”
“나 선발로 나오면 안타는 하나만 쳐라.”
2주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정이든 사람들과 인사를 마치고 허하준, 강주호와 함께 우리의 집, 부산으로 향했다.
“훈련 날 보자.”
“고생하셨습니다!”
“오냐.”
나를 가장 먼저 내려준 허하준과 강주호가 떠나고, 집으로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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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팀이 복귀하던 무렵, 마린스 사무실에선 한창 울려대는 전화 때문에 북새통을 이뤘다.
“예예. 김수호 선수요? 지금 원하는 곳이 워낙 많아서요. 예, 예.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후우.”
전화를 끊은 마케팅 직원이 한숨을 내쉬자 옆에 있던 직원이 물었다.
“또 김수호?”
“예. 오늘 해 뜨자마자 받는 전화마다 김수호, 아니면 김수호랑 허하준 세트로밖에 연락 안 와요.”
지난 5년간 전화가 아예 오지 않아 오히려 먼저 연락했던 것보단 나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선수는 한 명뿐이라 골치가 아팠다.
다행히 그 고민을 해결해 줄 사람이 등장했다.
“지금부터 오는 김수호 광고는 다 정리 해놨어?”
“예. 여기 있습니다.”
“이거 추가해. 위에서 내려왔어.”
마케팅 팀장이 말하는 위는 단장이 아닐 거다.
그보다 더 위.
부산 마린스의 모기업.
“모기업에서 광고를요? 와, 진짜 김수호 프렌차이즈로 키우려고 작정했네요.”
프로 구단의 모기업이 선수에게 광고를 주는 건 선수의 유명세를 이용하기 위함도 있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함도 있다.
특히 마린스의 경우 프렌차이즈가 유력한 선수에게만 주는 특징이 있었다.
특히 최근 광고를 받은 선수는 강주호, 강기호, 허하준이 전부.
그다음이 바로 김수호였다.
다시 대화를 이어가려고 했지만, 조금의 휴식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다시 전화가 울렸다.
“장난 아니네요.”
“좀만 힘내자.”
가뭄이 심했는데 물이 들어오면 불평 대신 노를 저어야 하지 않겠나.
물론 물이 해일급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말이다.
이런 현상은 이 직원들한테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김수호 선수 유니폼 재고가 너무 부족한데요?”
“일단 공장에 전부 연락해서 가능한 김수호 위주로 찍어보라고 해!”
“이번에 국가대표 세 선수를 기념하는 유니폼 바로 품절 됐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왔는데 어떡할까요?”
젊고 잘생긴 외모와 예비로 시작해 올림픽을 우승으로 이끈 스토리.
그리고 그 무엇보다 뛰어난 실력 덕에 김수호에 대한 방송국의 수요는 엄청났다.
방송국 역시 올림픽 특수를 누리는 곳 중 한 곳이니까.
그리고.
“...매진입니다!”
“와아아아!”
“얼마 만이야!!!”
긴 휴식기 끝에 다시 개장 준비를 마친 사직 야구장.
휴식기 이전에 거둔 호성적과 마린스에서 출전한 세 명의 선수 모두 좋은 활약을 펼쳤기에 이뤄낼 수 있었던 매진.
심지어 재개하려면 아직 며칠의 여유가 남아있는 데 벌써 매진이 됐다.
그 중심엔 김수호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김수호에 대한 마린스 직원들의 애정은 하루하루 높아져만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간만이군.”
“예. 회장님.”
마린스의 구단주이자 모기업의 회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편하게들 앉아. 하하. 우리가 뭐 못 볼일로 만난 것도 아니고.”
지난 노히트노런 경기 이후 처음으로 모인 구단주와 사장과 단장.
이번 자리는 무려 구단주가 직접 만든 자리였다.
정확하진 않겠지만 구단 역사를 따져봐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건 현재 구단주의 기분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구단주는 묵은 체증이 쭉하고 내려간 기분이었다.
친구이자 라이벌인 피닉스의 모기업 회장이 황인재를 내세워 자랑할 때 배가 아팠던 걸 몇 배로 갚아줬으니 말이다.
황인재도 올림픽에서 활약한 건 맞았지만, 김수호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마린스 회장은 이런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김수호한테 광고가 꽤 들어오지?”
“예. 아무래도 지금 제일 뜨거울 때니까요."
"기껏 우리 쪽에서 나온 선순데 다른 놈들 좋게 만들어줄 순 없지. 조건 다 비교해보고 최고 수준에 맞춰줘."
"예. 알겠습니다."
보상의 의미도 있지만 기껏 자신이 운영하는 구단에서 최고의 광고 모델이 나왔는데 활용해야 하지 않은가.
“그래서 후반기에 가을 야구는 할 수 있겠나?”
구단주의 질문에 사장과 단장 모두 긴장했다.
현재 9위인 마린스로선 9경기 차이 나는 5위와 승차를 메꾸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올림픽 휴식기 동안 놀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예. 자신 있습니다.”
“그래?”
잠시 정적이 이어지고, 의자를 툭툭 두드리면서 생각하던 구단주의 입이 열렸다.
“올 시즌 5위. 그 정도만 해낸다면 만족스럽겠군.”
사실상 5위를 노리라는 뜻이었다.
작년에 기록한 9위보다 크게 달라진 것 없는 팀 전력이었지만 단장이 자신 있게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허하준이 그 친구 포스팅이 내년이지?”
“예. 내년 시즌 끝나고입니다.”
“스읍. 내가 올림픽을 봤는데 그 친구만 한 투수가 없더라고. 아쉽구먼.”
하지만 허하준은 이미 메이저리그를 가겠다고 말한 상황.
아쉽지만, 방법이 없었다.
“가기 전까지 최대한 협조 해줘. 괜한 소리 흘러나오게 하지 말고.”
“예.”
“그래. 두 명 다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니 믿음직하구먼. 자네들만 믿겠네.”
그렇게 구단주가 사라지고, 사장이 단장에게 물었다.
“가을 야구 자신 있습니까?”
“예. 진출만 하면 우승까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신감이 없는 것보단 나았지만, 질문의 요지는 그게 아니었다.
“진출이 문제 아닙니까.”
“그렇죠. 하지만 올림픽 직전에 분위기를 이어간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단장이라는 직함 치곤 참 초라한 답변이었지만, 이 말밖에 할 게 없었다.
“김수호, 그 친구가 증명해준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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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지만, 호주에 시차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몸이 근질근질했기 때문에 다음 날부터 바로 훈련장에 출근했다.
올림픽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전엔 대중교통을 타고 출근해도 아무도 못 알아봤다면, 5초에 한 명씩 사인을 부탁할 정도로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사직구장에 가까워질수록 빈도가 잦아져 진지하게 다음부터 택시를 타야하나 고민됐다.
물론 당장 그럴 돈도 없었지만.
“오, 수호야. 오늘 안 오는 거 아니었어?”
“선배님, 안녕하세요.”
처음 만난 선수는 4선발이자 구단의 마당발 김호기.
“내가 들었는데 너 요즘 인기 장난 아니라며?”
“올림픽 스타 그 기사요?”
“아니, 그거 말고. 구단 직원들이 너 때문에 맨날 야근한다고 웃으면서 울더라.”
웃으면서 우는 건 뭐지?
“커피라도 사가야 할까요?”
“흠. 수호야.”
“예?”
“네가 내 포지션을 넘보면 곤란해. 안 그래도 직원들이 너만 생각해도 배부르다는데 커피까지 사가면 나 진짜 굶어 죽어.”
어쩐지 들어본 적 말을 하는 김호기가 실실 웃었다.
“아무튼 축하한다. 진짜 멋있더라.”
그다음에 만난 사람은 채지훈.
“마, 니 결승에서 울었나?”
“제가요? 아닌데요.”
“스읍. 주호 행님이 그렇다는데?”
“사실 뒤풀이 때 주호 선배님이 조금 우셨습니다.”
“행님이? 진짜가? 그걸 와 지금 말하노.”
내 말을 들은 채지훈이 급하게 돌아가려고 짐을 쌌다.
아마 강주호를 놀리려고 찾아가려는 것 같은데.
“아, 맞다. 받아라.”
“뭐에요?”
“선물이다 선물. 금메달 축하한다. 하, 아빠한테는 이런 거 한 번도 안 하더니.”
채지훈이 건네준 걸 열어보니 삐뚤빼뚤한 글씨로 우승 축하해요 라고 사탕과 함께 적혀있었다.
어린 딸이 하나 있다고 하시더니 그 애가 준 것 같았다.
사탕을 뜯어 먹으면서 진짜 훈련장에 도착했다.
“야! 김수호!”
“어···. 누구세요?”
“뒤질래?”
누가 내 어깨를 잡고 말을 걸길래 뒤를 봤더니 까맣게 탄 피부에 새하얀 이빨을 자랑하는 이상한 남자가 서 있었다.
목소리는 익숙한데, 설마?
“이주학?”
“그래! 왜 못 알아보는 척해?”
“내가 아는 주학이가 아닌데?”
지금 피부를 보면 하스 동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너 없는 동안 2군 수비 코치님 밑에서 존나 굴렀어.”
그래도 용케 1군에 남아있었네.
다행히 내 동기들 전부가 이렇게 변한 건 아니었다.
“호민아, 오랜만이다.”
“어서 와. 축하한다.”
“와, 씨. 나 대할 때랑 너무 다른 거 아니냐?”
“아니, 근데 그.... 좀 기괴하게 생겼어 너.”
“기괴? 생긴 거 가지고 그렇게 말하기 있냐?”
“야, 웃지 마. 무서워.”
“아, 쫌!”
여전히 타격감 좋은 이주학을 놀린 후에 다른 선수들과도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제 진짜 돌아온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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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라.”
“오, 수호.”
감독님이 찾는다는 말에 방문한 감독실에는 감독님과 강기호 둘이 있었다.
“축하한다. 근데 넌 피곤하지도 않냐? 바로 훈련장으로 출근하고.”
“비행기에 계속 있었더니 찌뿌둥하더라고요. 감독님 안녕하세요.”
“그래, 앉거라.”
감독님이 찾는다 길래 고생했다느니, 축하한다는 말과 같은 얘기를 할 줄 알았다.
당연히 그런 얘기는 나왔고, 이후에 나온 얘기는 솔직히 놀라웠다.
“CF요?”
“하하. 타이밍이 좋네요. 그 얘기는 제가 하죠.”
내가 되물었을 때 문이 열렸고, 마린스의 단장인 오민찬이 들어왔다.
“오랜만이죠? 김수호 선수.”
“예. 작년에 뵙고 처음인 것 같습니다.”
“내가 원래 위에 있을수록 선수들과 자주 안 마주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서운해 하지 말아요.”
단장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그럼 감독님이 대충은 설명해주신 것 같으니까 제가 조금만 보충 설명해드릴게요. 이게 지금까지 김수호 선수한테 들어온 제안이에요.”
사실 CF라는 말은 확 와 닿는 게 없었지만, 막상 액수를 들으니까 놀라긴 했다.
어느 정도냐면, 내 계약금보다 많았다.
그것도 좀 많이.
그리고 그 중에서 마린스 모기업의 광고가 가장 조건이 좋았다.
"사실 저희 입장에선 모기업 광고를 하는 게 제일 좋아요. 아무래도 상징성도 있고, 스케줄도 최대한 맞춰줄 수 있고."
"예. 조건도 제일 좋네요. 그걸로 하겠습니다."
"시원해서 좋긴 한데, 더 안 봐도 괜찮아요?"
"예. 저도 광고 때문에 훈련에 지장이 가면 안되니까 이것만 하면 될 것 같아요."
욕심이 나긴 하지만, 광고 때문에 오히려 훈련에 지장이 가는 건 최악이었다.
내 말에 단장이 마음에 드는 듯 웃었다.
“아, 그리고 해당 CF에서 쓰는 차도 줄 거에요. 내용은 국가대표 포수가 쓰는 만큼 안정감 있다, 이런 내용?”
“저 면허가 없는데요?”
“면허는 따면 되죠. 아, 거절은 안 돼요. 김수호 선수 생각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온 거라.”
거절할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김수호 선수, 이런 말 알죠? 부산에선 야구만 잘하면 된다.”
“예. 유명하죠.”
“근데 우리 모기업 회장님도 부산 사람인 거 알아요?”
“예?”
“야구만 잘하면 돼요. 야구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