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기회는 오는 게 아니라 잡는 것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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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변화구도 잡을 줄 아니?”
저 말의 뜻은 굳이 고민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예. 할 수 있습니다.”
“정말? 공 잡은 지 하루밖에 안 됐다면서.”
“어제 수비 코치님 계실 때도 잡았습니다.”
고작 체인지업 한 구였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래? 그럼 변화구도 한 번 호흡 맞춰볼까?”
내가 자신하자, 허하준의 미더운 표정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포심을 진심을 다해 잡은 게 도움이 됐나 보다.
“전 언제든지 준비됐습니다.”
“좋아. 구종은 스플···.”
“예. 스플리터, 커브, 체인지업, 슬라이더 아니십니까?”
“오. 아네?”
“저 진짜 선배님 팬입니다.”
“그래? 고맙다. 일단 가벼운 거부터 던져볼까? 사인은 알고 있지?”
“예.”
“구종만 사인할 테니까 위치는 네가 미트로 표시해.”
감독님은 나한테 허하준의 직구만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왕 배터리를 이룬 김에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다른 변화구는 차치하더라도, 허하준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스플리터는 꼭 한번 잡아보고 싶었다.
팬심 때문 만은 아니었다.
1군 타자들도 치기 힘들어하는 공.
중계로 볼 때 타자들이 왜 헛스윙하는지 알고 싶었다.
허하준의 스플리터처럼 다른 팀의 에이스들도 각자 최고의 무기가 있으니까.
천하의 황인재도 에이스들의 결정구에 고생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 전에 1군에 올라가는 게 먼저지만.’
내가 자세를 잡자 허하준도 준비됐는지 사인을 보냈다.
초구는 체인지업.
어제 이호민이 던졌던 낮은 곳에 미트를 세웠다.
셋포지션이 이어지고 허하준의 손에서 나온 공은 느린 포심처럼 날아왔다.
중간부터 떨어진 공은 내 미트 속으로 들어왔다.
“나이스 볼!”
다행히 어제 한 번 잡아본 코스와 구종이라 편하게 잡았다.
이어서 슬라이더와 커브 역시 생각보다 변화가 심하지 않아서 잡을 만했다.
드디어 스플리터 차례.
스플리터란 자고로 존의 낮은 쪽으로 오다가 땅바닥에 박힐 듯이 떨어질 때 가장 효과적인 공이다.
그런 코스를 내가 잡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없지만, 어차피 연습인데 어때란 생각으로 미트를 땅에 닿을 듯이 가져다 댔다.
“괜찮겠어?”
“예! 자신 있습니다!”
그래도 앞서 세 공을 잘 잡은 덕에 나름의 신용이 생겼는지 더 묻지 않았다.
허하준이 다시 자세를 취하고 역동적으로 공을 뿌렸다.
마치 포심과 같이 날아 오는 공.
이대로 쭉 오면 타자가 치기 좋은 코스로 들어오는 실투였다.
하지만 공이 거의 내게 다다랐을 때,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흡.’
내 생각보다 낙폭은 컸고, 공은 내 앞에서 땅에 닿고 원바운드로 튀었다.
급하게 막는다고 막았지만, 한 번에 포구하지 못했다.
스플리터를 던진다는 걸 알았지만 결국 대처하지 못한 거다.
포수로서도 이런데 만약 내가 타자였다면?
‘이걸 어떻게 참아.’
아마 무조건 삼진이었을 거다.
괜히 포심과 스플리터로 리그를 씹어먹은 투수가 아니었다.
“이야. 잘 막네?”
허하준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어때? 내 공 칠 수 있겠어?”
“제가 그 공을 칠 수 있었으면 1군에서 먼저 인사를 드리지 않았을까요?”
“하하하. 그것도 맞지.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나름 한국 최고 투수 중 한 명인데 이 정돈 던져야지. 오늘 고생했어.”
그러면서 글러브를 빼고 손을 내밀었다.
“저···. 선배님.”
“응?”
하지만 나는 악수하는 대신 공을 쥔 손을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스플리터 몇 번 더 받아볼 수 있을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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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얘.’
변화구를 잡을 수 있냐고 물은 건 당연히 스플리터를 테스트하기 위해서였다.
150km 중반의 묵직한 포심은 그 자체로 위력적인 공이지만, 스플리터와 함께라면 위력은 배가 된다.
반드시 점검해야 하는 공이었지만 내일 점검하는 건 반쯤 포기 했었다.
고작 하루 배운 포수가 자신의 스플리터를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보다 내 스플리터가 무뎌졌다는 게 더 현실적이겠지.’
하지만 허하준도 포심을 능숙하게 포구하는 김수호의 모습에 욕심이 생겼다.
거기에 스플리터 이전에 세 변화구를 나름 잘 잡길래 약간 기대한 것도 사실이었다.
‘잘 잡네.’
결과적으로 김수호는 그의 기대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군더더기 없는 블로킹.
자신의 앞에 뚝 떨구면서 공에 실린 힘을 죽이는 블로킹이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은 있지만 이 정도면 실전에서 던질 만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만족하고 돌아가려는데.
‘저건 뭐냐고.’
갑자기 스플리터를 더 던져달라는 부탁을 했다.
고작 하나 던지고 끝내기 아쉬워서 부탁대로 던지기 시작했는데,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일까.
날카롭게 날아간 공은 자신의 예상대로 홈플레이트 앞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타자는 물론, 포수마저 당황하게 했던 모습 그대로의 공.
하지만 고작 하루 차 포수는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공을 받아냈다.
‘... 내 공이 고작 열 번 보고 완벽하게 잡을 만한 공인가?’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충격이었다.
허하준은 다시 돌아온 공을 잡고 투구를 준비했다.
그의 눈에 김수호가 미트를 낮게 잡은 모습이 들어왔다.
즉, 다시 한번 낮게 요구하는 모습.
최근 자신의 스플리터를 받아본 포수들에겐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낮게 떨어지는 스플리터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다들 안다.
하지만 결국 포수가 못 잡으면 끝이다.
그리고 마린스의 포수진은 몇 년 전 한 선수가 은퇴하고 스플리터의 위력을 끌어올릴 마땅한 포수가 없었다.
그런데 고작 임시 포수가 그 모습을 보여줄 줄이야.
‘재밌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스플리터는 정확히 떨어져야 한다.
늦게 떨어지면 패스트볼 타이밍에 휘두른 방망이에 맞아 그대로 장타를 허용하기 십상이고, 일찍 떨어지면 그대로 땅바닥에 튀면서 포수에게 어려운 블로킹을 강요한다.
그리고 이번에 허하준은 스플리터를 일찍 떨어트릴 생각이다.
즉, 그의 블로킹이 요행인지, 실력인지 확인하고자 했다.
그런 생각은 꿈에도 모르는 김수호는 그저 허하준이 공을 뿌리길 기다렸다.
셋포지션이 이어지고 김수호를 향해 공이 날아갔다.
공은 그의 생각대로 더 일찍 떨어졌다.
홈플레이트보다 한참 앞에 떨어진 공은 지금껏 김수호가 잡았던 공보다 더 큰 변화를 일으키며 김수호에게 날아갔다.
그리고 김수호는 배터리 코치에게 배운 완벽한 자세를 선보이며 보란 듯이 안정적으로 막아냈다.
“나이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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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막았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제구가 흔들렸는지 스플리터가 한참 앞에 떨어졌다.
그러자 이전에 받아냈던 공보다 훨씬 높이 튀어 올랐다.
당황도 잠시, 변화를 감지한 순간부터 무릎은 자동으로 땅에 닿았고, 공이 튀는 걸 확인하고 몸으로 무사히 막아냈다.
“나이스!”
“예?”
“너 진짜 하루 배운 포수 맞아? 실력은 하루짜리가 아닌데?”
“아···. 예 하루 맞습니다.”
“마지막에 어떻게 막은 거야?”
“그···. 배운 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허하준이 잠시 멍하게 바라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맞네. 배운 대로 했겠지. 미안하다. 내가 괜한 걸 물어봤네.”
“아닙니다.”
“겸손은.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그만 들어가자. 진짜 고생했다.”
“선배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얼른 가자! 내가 저녁 맛있는 거 사줄게. 내가 아는 곳 있는데 거기가 진짜 맛집이거든.”
“알겠습니다! 먼저 준비하시면 빨리 치우고 가겠습니다.”
“어? 아, 그치. 같이 치우지 뭐.”
“아닙니다. 제가 혼자 해도 됩니다.”
“어차피 같이 가야 하는데 나 혼자 먼저 가면 뭐하냐. 빨리하자.”
그렇게 뒷정리를 끝내고 허하준과 숙소 앞에서 만나기로 한 뒤 씻기 위해 방으로 돌아왔다.
“으어어어. 심심하다.”
“노래방 갈래?”
방 안에는 할 것 없어 보이는 잉여 두 명이 바닥에 붙어 있었다.
“어, 늦었네. 훈련 잘했냐? 아까 점심 때 보니까 아주 VIP 좌석에서 밥 먹던데.”
“진짜. 거기서 밥 먹으면 맛은 느껴지냐?”
“부러우면 내가 감독님한테 말해줄까?”
“응 꺼져. 오늘 저녁도 거기서 먹는 거 아니야? 이번엔 옆에 타격 코치님도 계시는 거지.”
“으. 상상만 했는데 숨 막힌다.”
날 약 올리는 두 명이었지만, 이미 허하준과 밥을 먹기로 한 내겐 같잖은 도발이었다.
“뭐야. 그 표정은?”
“설마 밖으로 나가냐?”
음주 운전 파동으로 상동에 있는 모든 선수는 한동안 외출 금지였다.
하지만 허하준이라는 이름은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어. 부럽냐?”
“야. 부러워하지 마. 그래봤자 감독님이랑 가는 거 아니야?”
“아닌데?”
“뭐? 그럼 누구랑 가는데?”
“허하준 선배님.”
“뭐?”
그러자 이호민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얜 나보다 더 심한 허하준의 팬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팬이라기보단 우상에 가까운 존재랄까.
“지... 진짜? 왜? 너만? 나는?”
“밖에 간다고? 나도 데려가!”
각자 다른 이유로 흥분했지만, 결론은 자신도 데려가라는 거였다.
“내가 어떻게 결정하냐. 허하준 선배 맘이지.”
“한 번은 말해볼 수 있잖아. 어? 수호야. 우리 사이가 그런 말 한 번 못할 사이는 아니지 않냐?”
“수호 형님.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발 절 여기서 꺼내주세요.”
귀여운 놈들.
원하는 반응을 봤으니 이제 선물을 줄 차례였다.
“옷 입어. 나가자.”
“와아악! 진짜? 진짜지?”
“젠장! 김수호! 믿고 있었다고!”
아까 같이 뒷정리하면서 현재 상동 외출 금지와 이호민, 이주학 얘기를 해놨다.
감독님 역시 허하준의 말에 흔쾌히 수락했다.
막연한 생각이지만 단순히 허하준이 에이스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구설수에 오른 적 없고, 항상 코치진에게 믿음을 줬기 때문이 아닐까?
모범이 되는 선수.
허하준은 그 말이 잘 어울리는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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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겠습니다!”
허하준의 차를 타고 온 곳은 낡은 식당이었다.
하지만 이호민은 그냥 허하준과 같이 있다는 사실에, 이주학은 밖에 나왔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난 그냥 음식이 맛있었고.
“그러니까 너희 셋이 순서대로 1차, 2차, 3차라는 거지?”
“예! 그렇습니다!”
“진짜? 신기하네. 나도 여기에 처음 온 게 내 동기 둘이랑 선배 한 명이었거든.”
“선배님은 1차 지명이지 않습니까?”
“어. 은성이랑 호기 셋이서 왔었지.”
“엇, 그분들도 2차, 3차 지명되셨던 분들인 걸로 알고 있는데.”
“맞아.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음식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내일 시합 있으니까 오늘은 이쯤 끝내자.”
“예!”
“그래서 너넨 수호가 포수에 재능 있는 거 알고 있었어?”
“예?”
처음 예라고 대답한 건 이호민이었고, 뒤늦게 예라고 한 건 이주학이었다.
“너희도 몰랐어?”
“어···. 어제 던져보긴 했는데, 확실히 잘 잡긴 하더라고요.”
“그렇지? 확실히 재능이 있어.”
갑자기 대놓고 띄어주니까 술도 안 마셨는데 얼굴이 화끈거린다.
“내 공을 몇 번 보고 제대로 잡는 포수는 지금껏 몇 명 없었거든? 근데 얘는 바로 잡더라고.”
“정말입니까? 그게 누굽니까?”
“보자. 강기호 선배, 양준 선배, 그리고 얘.”
강기호는 마린스의 전설적인 포수이자 현재 1군 배터리 코치였고, 양준은 리그를 대표하는 국가대표 포수였다.
“그럼 선배님 말씀은 수호 얘가 그 선배님들이랑 동급이라는 겁니까!?”
이주학이 그 말을 듣자 눈이 커지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당연히 아니지. 고작 하루 만에 그 두 명이랑 동급이면 얘가 지금 2군에 있겠냐.”
그것도 맞는 말이다.
어쨌든 전설적인 포수 두 명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근데 한 이 년이면 수비에서 동급이 될 수도?”
“네?”
“아냐. 늦었다. 이제 일어나자.”
“잘 먹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자리는 마무리됐다.
하지만 허하준이 마지막에 한 그 말은 자기 전까지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게 여러가지 이유로 잠을 설친 다음 날.
드디어 포수로서 데뷔 경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