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증거를 (1)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길을 묻는 관광객에게 길을 가르쳐 준 후, 십 분 뒤에, 한 시간 뒤에 ‘아, 그 사람 잘 갔으려나. 좀 더 자세히 알려 줬어야 했던 건 아닐까.’라고 곱씹는 대신 어련히 잘 갔겠거니 마음 놓을 수 있었다면.
인터넷 예매가 뭐냐며, 왜 5시간 뒤에 출발하는 기차마저 표가 없는 거냐며 발을 동동 구르시는 어르신을 두고 ‘안타깝지만 방법이 없네’라고 혀만 차고 넘길 수 있다면.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두고 나와는 별 관련도 없고 개입해 봐야 골치만 아프다며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였다면.
내 인생은 조금 더 편해졌을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나는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악플을 먼저 단 건 지들이면서, 왜 아버지를 욕할까요. 고소당하기 싫었으면 애초에 악플을 달지 말았어야지.』
『다 마음이 병들어서 그런 거지.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그렇지만… 화나잖아요. 아버진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래, 내가 유명한 게 잘못은 아니지. 하지만 어떤 악의는 이유가 없어도 생겨나고, 계기가 없어도 표출되는 법이야.』
『…그건 불합리해요.』
『세상이 다 그런 거지.』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든 후에는 꼭 이 순간의 기억이 따라온다.
『그렇다고 인간에게 실망했다며 회의주의자로 돌변하진 마라. 세상에 이유 없는 악의가 있는 것처럼 이유 없는 선의도 존재하지 않니. 네가 그러고, 네 엄마가 그러하듯 말이야.』
『…그렇지만, 그런 사람은 너무 적잖아요.』
『으음, 그건 그렇지. 하지만 적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건 아니잖니.』
『…잘 모르겠어요. 정말 의미가 있다면, 모두까진 아니더라도 더 많은 사람이 동참해 줘야 하는 거 아닐까요?』
『어… 음. 그건 사람들이 여유가 없어서…….』
『저는 그럼 여유 있어서 사람 돕는 거예요?』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그게 항상 옳은 일이 될 수는 없으니까, 숫자로 보면 안 되지 않을까?』
『다수결은 그럼 뭐예요.』
『그건 안건의 가부를 결정할 때 쓰는 거고, 옳고 그름을 따질 때는 숫자를 보면 안 되지. 왜, 범죄자 수가 아닌 사람보다 더 많다고 해서 그들이 올바르게 되는 건 아니잖아?』
『범죄자가 아닌 사람보다 많게 될 리 없잖아요.』
『그래? 근데 지금 그 말이야말로 나쁜 놈보다 착한 놈이 더 많다는 증거 아닌가?』
『그건… 좀 궤가 다른 것 같은데요.』
『하여간 대충 넘어가는 일이 없지.』
유리창을 통과하여 거실에 드리워지는 햇살. 창문 틈새로 들어온 바람에 얕게 흔들리는 흰 커튼. 아버지와 가운데서 얼굴을 맞대도록 누우면 발이 튀어 나가는 L자형 소파…….
『…사실 아빠도 잘 몰라. 악플을 달면 뭐가 재밌는지, 남을 일방적으로 깎아내리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악의를 내보여서 본인의 평판을 망치는 것 외에 어떤 이득이 있는지. 그렇지만… 이유 없는 선의가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는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떠올랐거든.』
발끝에 닿아 오는 햇빛처럼 따뜻하게, 은은히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온후하게 쏟아지던 목소리.
『뭔데요?』
『왜, 얼마 전에 TV에서 봤잖아. 1만 5천 년 전 유골에서 다리 절단 수술흔이 발견됐다고.』
『아, 그거요. 그게 왜요?』
『너는 그때 그 뉴스를 두고 ‘와, 저 시대에도 수술을 했어?’라고 놀라워했지만… 어떤 인류학자는 다른 부분에서 놀라움을 표현했어.』
『……?』
『자, 봐. 별의별 기술이 있는 이 시대에도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소소한 불편들을 겪지. 하면 이마저도 없는 1만 5천 년 전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또 다리 잃은 사람을 부양했을 사람들은? 그땐 그 사람의 혈연만 나설 게 아니라 몸담은 부족 전체가 나서서 도왔어야 했을 텐데.』
『…그렇죠?』
『근데 말이야. 그 고생들은 사실 그들이 다리 잃은 사람을 버리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야. 그 사람을 부양하지만 않으면 굳이 그들이 더 고생할 필요는 없었단 거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 사람을 버리지 않았어. 도리어 치료해 주고 그 상처가 아물 때까지 보살펴 줬지. 그건 어떤 의미였을까?』
『그건…….』
『자, 거기서 그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생각한 거야. 사람들은 문명의 시작점을 이집트니 메소포타미아니 뭐 그런 곳으로 꼽지만, 사실 정말 최초의 시작점은 인간이 타인을 돕던 그 순간이 아닐까. 많은 동물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다친 동족들을 방치할 때, 우리 인간은 그를 돌보고 치료하며 함께 생존하길 택했기에 지금의 시대를 만들 수 있던 건 아닐까? 라고.』
나라는 인간을 쌓아 올린 30분.
『아까도 말했지만, 요즘 사람들이 왜 비정함과 냉정함을 이성으로 포장하며 예의마저 벗어던지는 건지 아빠는 잘 몰라. 남을 돕는 건 멍청한 짓이라 폄하하는 이유도, 사이다란 말로 무례를 정당화하는 까닭도 잘 모르겠어. 아빠는 그게 단 한 번도 좋게 보인 적 없으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 그것들에게서 나오지 않는단 건 알아. 그것만은 확실해.』
『…….』
『그러니, 얘야. 이기심을 이성과 착각하는 것들의 말은 무시해. 자신의 재미를 위해 남을 괴롭히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은 채 자신을 우선하는 인간들에게도 눈길 줄 필요 없어. 그것들은 1만 5천 년 전의 인간들만도 못한 멍청이들이거든. 수가 아무리 많아도, 동조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도 영원히 그럴 거야.』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아, 물론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우리 아들이 남들을 위해 몸 바치란 건 아니다? 모름지기 세상은 나를 챙겨야 남을 챙길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 힘이 부치면 그냥 너부터 챙기렴. 남을 돕는 건 그다음부터야.』
내가 길 묻는 사람을 보낸 후, 그 사람의 안부를 더는 떠올리지 않는 사람이 된다면.
『그렇지만… 만약 네가 너를 챙기고, 그럼에도 또 여유가 남았다면. 그리고 그런 네 주변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도와주려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변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두고 안타까움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된다면.
『한 번쯤은 손 뻗어 주렴. 많은 걸 해 주라는 건 아니야. 넘어진 사람을 그냥 일으켜 주는 정도로도 좋아. 그냥, 그런 선의라도 내보여 주렴.』
우는 아이를 골치 아프단 이유 하나만으로 방관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혹시 아니? 그 한 번으로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뀔지.』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네가 너를 챙긴 뒤의 일이야. 알았지?』
…나는 그 생각에 이제 답한다.
『너는 네 엄마랑 너무 닮아서, 이럴 때 좀 걱정이 된단 말이지. 그래서 사랑하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스스로의 몸을 너무 안 챙겨.』
『나름 챙긴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너랑 네 엄마 생각이고… 아빠가 보기엔 인내하는 선이 미치도록 깊단 말이지. 내가 돈이라도 많이 벌어 놔서 참 다행이야…….』
그럴 수 없는 인간이 바로 나일진대 이런 상상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 * *
눈을 뜨지마자 더러운 엄니가 보였다. 내 몸이 황망히 구겨지듯 휘었다.
휘익!
엄니가 이끌고 온 강맹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마구 휘저었다. 주변에서 윙윙거리는 파리와 나방이 내 몸에 다닥다닥 붙어 온갖 것을 갉아먹는 게 느껴졌다. 무시하기엔 제법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어쩐지 잘 피하는데도 심상 세계에 핏물이 계속 들이차더라.
나는 진흙 위에 안착하며 혀를 찼다. 주르륵. 수분을 잔뜩 머금은 진흙이 내 몸을 뒤로 미끄러트렸으나, 균형을 잃는 일은 없다.
나는 그새 회복된 건지, 아니면 메피스토펠레스가 꿍쳐 둔 걸 푼 건지 모를 마기를 움직였다.
더는 마력으로 변환되지 않는 그것은, 조금 더 검고 질척일 뿐 다루는 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듯 움직인 마기가 안쪽에 파고든 벌레들을 불살랐다. 사각사각. 머리카락, 그러니까 가발을 처먹는 놈은 못 태웠다.
“망할!”
에쿠아가 준 선물을 이딴 벌레 새끼한테 날려 먹을 순 없다. 나는 정체고 뭐고 냅다 가발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악마의 피를 얼마나 머금은 건지, 손가락에 잠깐 닿았던 가발이 영 뻑뻑했다. 가발의 통기성을 고려하면 기존 머리도 처지가 크게 다르진 않을 터였다.
팡!
다만 이 와중에도 응급조치가 취해진 몸은 괴수의 앞발을 피해 또 한 번 뛰었다. 내 몸이 성벽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쿠우웅!
발길질 한 번에 대지가 요동을 치고 성벽 일부가 함몰되었다. 체급 자체가 무기인 괴수의 위용이었다.
‘몸 수복은 해당 부위에 마기를 집중하면 돼.’
“내 생각인 척 말하는 거 그만두지 그래. 그거 좀 불쾌해.”
[서운하게.]
별개로 조언은 조언이고, 짜증은 짜증이다.
내가 회피에 급급해하면서도 면박을 한차례 주자, 시야 한편에서 무언가가 스르륵 솟아났다. 뒤편이 얼핏 비칠 정도로 반투명한 악마의 형상이 대지에 우뚝 섰다.
“뭐야.”
[왜? 이 정돈 괜찮잖아? 날 본다고 네 정신력이 깎이는 것도 아니고.]
“불쾌지수는 높아지거든?”
[오, 그 정돈 참아 달라고. 나름 널 도와주려 나온 거니까.]
도움? 시야 한쪽에서 깝죽거리는 것이 도움?
“난 너보다 파우스트가 좋은데.”
[이런, 안타까워라. 그 애는 지금 못 나오는데. 정 보고 싶으면 나중에 부탁이라도 해 보라고? 영혼도 깨지고 계약 패널티도 받았으니 굉장히 힘겹게 나와야겠지만.]
내가 눈썹을 찌푸리며 무어라 말하려 할 때, 악마가 한발 빨리 입을 열었다.
[일단 회복부터 해. 상처가 더 커질수록 마기가 많이 들고, 지금은 마기를 한 톨도 낭비하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잘 안되는데.”
[모으기만 했으니까 그렇지. 모은 마기로 상처를 메운다 생각해. 마기가 소실된 뼈와 근육, 피와 살을 대체한다 상상하라고.]
분하지만 그 조언은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나는 순순히 그 말을 따라 마기를 움직여 보았다.
우드득. 과정을 자른 동영상처럼 상처가 사라지는 심상 세계와 달리, 새살이 돋아나며 상처를 메우는 광경이 잠깐 이어졌다.
심장이 찢어져도 살 수 있다는 게 괜한 말이 아니었다.
[회복했으면 라텔을 쥐어. 아니면 바닥에 너저분히 쓰러진 검이라도 쥐든가. 마기로만 공격하는 건 비효율적이야.]
…와중에 무기를 들라는 말 역시 확실하게 지금 필요한 행동이긴 한데 왜 이렇게 듣기가 싫지.
나는 입술 끝을 꿈틀거리며 내 관절을 감싸고 있는 흰 물체를 건드렸다. 뼈같이 보이는 주제에 유연한, 그러면서도 딱딱한 것이 손바닥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이거, 길이 제한 있냐.”
[가장 넓게 확장했을 때 0.5mm 두께로 100평가량을 덮었어.]
오… 얼마나 큰 건지 가늠이 안 된다. 1평은 대충 눈대중으로 가늠할 수 있는데, 100평은 또 얼마나 되더라.
나는 눈을 깜빡이며 계산해 보다가, 이내 때려치웠다. 100평까지 확장되는 놈이면 아무튼 내가 바라는 건 충분히 이룰 수 있었다.
촤악!
내 손바닥에서 뻗어 나간 흰 물체가 한쪽으로 길게 쏘아지며, 바닥에 엎어져 있던 호박색 검을 낚아채 왔다.
[알차게도 아끼는구나. 근데 그럴 거면 그냥 라텔로만 싸우지 그랬어?]
“뭔 소리야.”
[…라텔로 저걸 주울 때 드는 마기조차 아깝다고. 뭐, 마기로만 저걸 주워 오는 것보단 낫나.]
“진짜 뭔 소리야. 마기로만 저걸 주워 올 수 있다고?”
[그럼 지금껏 네가 상대의 몸을 베고 관통시킨 건 무슨 힘이라 생각한 거지?]
내 반문에 악마가 한심하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미는 것만 물리력은 아니야. 당기는 것도 물리력이지.] 설명은 또 해 준다는 게 웃긴 일이었다.
[마기를 다루는 실력은 제법이면서 상상력은 더없이 얕구나. 관련 능력을 기르는 건 어떨까, 그레트헨?]
“네가 입만 닥치면 더 풍부하게 발휘할 수 있을 것 같긴 해.”
[그래? 그럼 영원히 유연성 없게 살아야겠구나.]
까앙!
손에 들어온 검이 다가오던 엄니를 쳐 냈다. 마기를 흠뻑 머금어 타오르는 검이 상대를 베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건 또 처음이었다.
부웅. 내 몸이 검과 함께 날아갔다. 몸 안쪽이 진탕이 된 듯 둔감한 압박감이 내장을 지르눌렀다. 회복이야 금방 할 수 있지만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에릭… 베헤모스의 엄니와 뿔은 건드리지 마. 작정하면 못 벨 것도 없지만, 가성비가 안 좋아.]
“그걸 지금 말해?”
[기껏 공략 방법을 알려 주는데 이걸 남 탓 한다고? 이제 보니 양심도 없었구나, 그대.]
퉤. 나는 올라온 핏덩이를 뱉어 낸 후 자세를 다잡았다. 피부 위를 기고 코나 귀 따위의 구멍에 계속 고개를 들이미는 벌레들이 제법 거슬렸으나 애써 외면했다.
[저 잡놈은 더럽게 멍청하지만 그 이상으로 몸이 질기고 단단해. 그러니 여러 군데 때리지 말고 한곳만 노려. 눈이나 귀 안쪽 따위의 여린 살점을 노리면 금상첨화지.]
내 뒤에 선 악마가 짐승을 사냥하는 법을 사근사근 읊었다.
[공격할 때는 참격 대신 일점에 집중한 찌르기를 써. 살갗을 뚫은 후에는 안쪽에 마기를 주입해서 불을 지르는 것도 제법 괜찮아. 가죽이 두꺼워서 열기도 배출 못 하는 머저리니까.]
정말 짜증나긴 하는데 도움은 됐다. 나는 이 좆망겜, 아니 좆망현실이 드디어 밸런스 패치를 하는구나 하며 발에 힘을 주었다.
콰앙!
내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감과 동시에 거대한 괴수가 앞발을 내리질렀다. 지반이 한층 내려앉고 성벽이 또 한 번 피해를 입었다.
“아오, 냄새.”
하나 나만큼은 다치지 않고 몸을 빼냈다. 베헤모스의 배 아래쪽에서 내 다리가 계속 질주했다. 대지가 흔들리며 균형을 몇 번 흩트리려 들었으나 예리하게 곤두선 신경이 그것을 막았다.
왜애애애애앵!!
다만 털인지 이끼인지. 배에 치덕치덕 내려온 실들 사이에서 수만 마리의 벌레가 날갯짓을 했다. 비행기 소음보다 더한 소리가 내 귀를 괴롭혔다. 일부는 입이나 코에 들어오기도 했다.
으악. 나는 쌍욕을 참으며─욕하려고 입 열었다간 더 들어올 것 같았다─검을 휘둘렀다. 벌레가 너무 많아서 칼질 한 번에 수십 마리씩 썰려 나갔다.
[…불태워 버려.]
그러나 바다에 각설탕을 던져 봐야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벌레는 베어도 베어도 다시 꽉 채워졌고, 결국 악마가 하나의 선택지를 권했다. 눈에 들어찬 경멸과 짜증이 벌레 소굴을 향하는 게 보였다.
인성이 벌레만도 못하길래 이 정돈 아늑하게 여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했다. 아끼라 아끼라 노래를 부르던 마기를 여기다 쓰라 하네.
[분노를 가득 담으면 자연적으로 불꽃이 일 테니까, 그대로 불태우라고. 저 잡것들을!]
싫어. 마기 아까워.
나는 악마를 엿 먹이겠다는 일념하에 불꽃은 끝까지 참았다. 대신 그 드넓은 배를 통과하여, 베헤모스의 엉덩이 부분에 도달했다. 쿵쿵대는 뒷발과 이리저리 돌아가는 몸뚱이를 헤쳐 가며 도착한 목적지였다.
[이 미친 그레트헨이……!]
촤아악.
나는 진흙 위를 미끄러지며 몸을 틀었다. 더러운 엉덩이가 시야 대부분을 차지하고 베헤모스의 꼬리가 위에서 휘익휘익 돌풍을 일으켰다.
“흡.”
함에도 나는 그것에 굴하는 대신, 무기를 단단히 쥐었다. 호박색 검은 남의 것이므로 라텔이 대신 손바닥에 들이찼다.
스르륵. 마기를 골조 삼아 라텔의 형태가 바뀌었다. 창. 마기를 머금은 흰 창이 금수의 이빨처럼 사나운 빛을 발했다.
[여린 살점을 노리라곤 했지만…….]
검고 하얀 창이 베헤모스의 항문을 향해 날아갔다.
[역겨운 선택, 잘 봤어.]
그오오오오오!!
어느쪽 악마건 열 뻗치는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뭐. 꼬우면 네가 싸우든가.”
[…네가 이렇게 유치한 인간인 줄은 몰랐는데.]
“인간은 원래 다 유치해. 어른스러운 척해야 하는 순간이 얼마나 있냐에 따라 가려질 뿐이지.”
나는 항문에 창이 박히는 순간, 날뛰는 말처럼 펄쩍펄쩍 뛰기 시작한 베헤모스를 피해 물러났다. 그 난동에 의해 항문의 여린 살점에 아주 조금이나마 박혀 들어갔던 라텔이 도로 튕겨 나왔다.
살점인지 무엇인지 모를 검은 덩어리가 라텔의 표면에 묻어 있었다.
“으.”
[왜 그런 얼굴이지? 날 엿 먹이기 위해 라텔을 똥꼬 후비개로 쓴 그레트헨?]
그보다 이 자식. 진짜 빡쳤나?
아이 이용해 먹는 꼬라지가 분뇨보다 더한 더러움을 자랑하기도 하고. 내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어지간한 건 웃으며 대응한 걸로 보아 이 정도 모욕도 대충 넘기리라 생각했는데.
나는 라텔에 묻어 있던 검댕이를 악마 쪽으로 털어 내며─안타깝게도 유령처럼 통과시켰다─놈의 가려진 면상을 슬쩍 살폈다. 제대로 빡친 건지 그냥 조금 불쾌한 정도인 건지 아직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왜 그렇게 보지? 내게 엿을 더 주고 싶나? 나는 이미 너에게 당할 만큼 당했는데.]
“염병하네. 그거 가지고 당했다고 말하면, 나나 그 애가 받은 고통은 뭐가 되는데?”
쾅! 나는 몸을 돌린 베헤모스의 돌진을 피하고자 몸을 띄웠다. 방향은 정면. 다가오는 베헤모스와 내 몸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난, 네가 마땅한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어.”
그러나 나는 베헤모스와 충돌하는 대신, 그것의 엄니를 밟고 그 위를 내달렸다. 애애애애앵. 시야를 가리려 드는 파리 떼는 약하게 일으킨 불꽃이 와해했다. 시야가 탁 트이고 내 몸이 빌딩급 체고의 괴수를 마구 올랐다.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의 처벌까진 바라지도 않아. 그냥, 그 애가 분풀이 할 수 있을 최소한의 수치만큼이라도.”
곧 커다란 눈이 보였다.
“그리고 시발, 내가 너 때문에 처먹은 고구마의 절반만이라도 업보를 돌려받기를 바라.”
라텔이 다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