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다음에 (4)
“저건 설마… 악마에게 먹힌 것인가……!”
“뭐냐, 뭐냐? 호랑이가 까매졌다!”
나는 아크메이지의 침음을 들으며 피를 조금 더 닦아 냈다. 당황? 경악? 아쉽게도 그런 감정은 들지 않는다.
비류호가 대악마의 사체를 먹은 시점에서, 혹은 대악마가 예상보다 순순히 당한 점에서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해 둔 까닭이다.
아무렴, 대악마 같은 고위급 적은 쉬이 죽지 않는 게 국룰 아닌가. 사체를 불에 태우거나 정화하는 걸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진 부활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게 국룰이다.
누군가가 그 사체를 먹어 버리면 더 그렇다. 아군이 먹어도 불안할 것인데, 아군도 아닌 자가 먹었다? 그건 무조건이지.
[이번에야말로 저승길 동무로 삼아 주마.]
하나 각오한 것과 별개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차마 막을 수 없다. 저놈이 부활하지 않아도 내 상대는 충분히 많았다.
“악마 주제에 그것이 가능할 성싶으냐!”
“조심하십시오, 인퀴지터!”
“이번 역시 너 혼자만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인퀴지터가 멀쩡하단 점일까. 저번처럼 싸울 환경을 조성하느라 힘 뺄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뭔진 모르겠지만, 살아 있다면 그걸로 됐다! 크핫! 이번엔 반드시 베르세르크가 잡는다!”
상대할 것이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된 버서커도 신이 났다. 솔직한 마음으론 저 둘이서 이대로 싸우면 되지 않나 싶을 정도다.
그도 그럴 게, 버서커는 인간이라 신성력에 타격받지 않고 맷집도 좋아서 인퀴지터랑 상성이 잘 맞을 것 같거든.
그에 비해 나는… 상성은 고사하고 지금 몸 상태가 상태여야 말이지.
“쿨럭.”
“일어나지 말게!”
그치만, 안 되겠지? 잡았다고 생각한 악마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그걸 컨셉이 두고 볼 리 없잖아.
“비켜라.”
그래도 아까보단 출혈이 많이 멎었다. 아크메이지가 잠깐 동안 손봐 준 덕에 HP도 좀 회복되었고.
그러니 움직이는 게 맞다.
나는 아크메이지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그냥 자빠져 있지 그러나? 어차피 베르세르크가 잡을 건데!”
“말할 가치도 없군.”
음, 좋아. 섰을 때 몸이 흔들리지 않아. 약간의 어지러움은 있지만 평상시 이명 들리는 수준과 비교하면 또이또이하고.
이러면 문제 될 게 없다. 나는 검을 고쳐 쥐었다.
“온다!”
“이런……!”
때마침 모비 딕과 비류호의 짬뽕, 이하 모비호 역시 공격을 개시했다. 정확히 이쪽을, 보다 확실히는 나를 노린 공격이었다.
“어딜!”
인퀴지터가 분개하여 신성력의 파도를 일구어 냈으나, 안타깝게도 모비호가 한발 더 빨랐다.
물로 이뤄진 넝쿨로 스스로의 몸을 감싸며 포탄처럼 쏘아진 것이다.
넘실대는 빛무리를 뚫고 뛰쳐나온 것이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아크메이지는 스스로의 몸을 보호할 시간도 없었다.
아크메이지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팔로 머리를 감쌌다.
“타핫!”
다행히도 사냥감을 빼앗기기 싫었던 버서커가 먼저 나섬으로써, 그녀의 안전은 보장되었다.
버서커의 할버드가 강인한 근육하에 풍차처럼 휙휙 돌아가더니 이내 다가온 모비호를 강하게 타격한 것이다.
모비호의 몸체 각도가 틀어지며 다른 쪽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이런 경우를 대비 못 한 건지, 본인도 주체 못 할 속도로 쏘아진 건지는 잘 모르겠다.
모비호가 다른 쪽으로 미끄러지며 다급히 땅에 발을 박고 멈춰 섰다.
내가 나선 건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
“으앗, 너!”
버서커는 다 좋은데 학습을 잘 못하는 것 같다. 본인이 선타 치면 내가 후타 치는 걸 앞서 몇 번 겪지 않았나?
뭐, 본인 일이니까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
나는 그녀의 경악을 들으며 저편에 멈춰 선 모비호를 노렸다. 새까만 검격이 녹색으로 변한 넝쿨을 가르고 모비호의 잔상을 베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타난 모비호가 등 뒤에 장식처럼 너울거리는 지느러미를 팔랑거렸다. 이번에도 예쁘게 착지하지 못하고 땅에 긴 자국을 남긴 채다.
“버러지가, 쥐새끼가 되어 돌아왔구나.”
[피둥피둥 살만 찐 짐승 새끼의 몸도 그릇으론 나쁘지 않구나. 이렇게 좋은 몸을 그따위로밖에 쓰지 못한 건 우습지만.]
글쎄다. 초반쯤에야 어설펐지만, 중반부부터는 나도 나름 애먹었어서. 피지컬 전부를 사용하진 못했어도 능력 조합까지 더해 그 정도면 엄청 잘 쓴 것 아닌가?
너는 뭐 그 이상 할 자신 있어?
그럼 곤란한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땅을 박찼다. 사실 저 문답을 시작함과 동시에 박찬 것이라 지금 시점에는 이미 모비호 바로 앞이었다.
까앙!
내 칼날과 모비호의 손톱이 부딪쳤다. 짐승의 손톱이 아니라, 인간의 손톱이었다.
몸 전체가 까맣게 물들 때, 손톱과 손가락의 구분 또한 없어진 손은 새의 발톱처럼 뾰족하기만 하다.
살짝 베였는지 검은 피가 도신에 살짝 맺혀 흘렀다.
“흐랴!”
터엉!
연이어 그것은 나머지 손으로 버서커의 할버드를 쳐 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친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생채기 하나 남지 않은 손은 곧바로 검지와 중지를 맞붙인다.
팡!
손가락 끝에서 물줄기가 쏘아지며 버서커를 저격했다. 그녀는 피하려 했으나 발목을 붙잡은 넝쿨 때문에 어깨를 내줘야 했다.
버서커의 어깨에 동그란 자국이 남았다.
쾅!
하면 그동안 나는 놀고 있었나? 그건 아니었다.
나는 장검이 막혔다고 판단이 든 순간, 그것을 회수하여 연격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모비호는 버서커를 견제함과 동시에 내게도 덩굴을 뻗었다. 바닥으로부터 창처럼 쏟아진 가지는 하필 심장께를 노려서, 맞고 때리길 각오할 수도 없었다.
내 검이 가지를 자른 후, 발목 힘으로 넝쿨을 찢고 뒤로 물러났다. 후격을 대비한 행위였는데 다행히 그런 건 오지 않았다.
반면 버서커는 맞딜을 각오한 듯 발의 힘만으로 줄기를 뜯어 버리며 계속 공격을 시도했으나… 굉음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몇 번 합을 주고받은─살펴보는데 모비호 쪽 반응이 다소 늦되었다─모비호가 넉백 공격을 한 탓이다.
어쨌거나 밀려남으로써 나와 동일한 선상에 선 버서커가 모비호를 노려보았다.
[왕의 권역이 아닌데도 신체의 움직임이 자유로워. 마기의 운용은 여전히 불편하지만, 몸을 유지하는 데 마기가 들지 않는다는 건 꽤나 달콤하구나. 분노, 네놈이 어째서 이신異神의 창조물들만을 그릇 삼는지 알겠다. 감각이 달라도 이런 이점이 있다면 그릇 삼을 만해.]
그 시선이 보통 삼엄할 것이 아님에도 모비호는 태연했다.
여유롭다기보다는 글쎄.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들뜬 말투가 영 마음에 걸린다. 짐승이 아닌 큐어티의 형상으로 바뀌며 보다 알아보기 쉬워진 표정도 그렇다.
상기된 얼굴이 저것의 비정상을 알렸다.
“뭐라는… 거냐!”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버서커가 아니다. 그녀가 가장 먼저 덤벼들었다. 타이밍 뺏겼다.
[천한 잡것이!]
다소 헤벌레하던 모비호가 단번에 정색하며 마기를 뿜어냈다. 같이 덤비지 않길 잘했다. 하마터면 뿜어져 나오는 마기의 파동에 휩쓸려 나뒹굴 뻔했다.
[꺼져라, 이건 네가 끼어들 싸움이 아니다!]
“그런 말로…….”
[이건 나와 분노의 싸움이다!]
“……!”
그런데 지금 뭐라시는 건지.
아무리 진중한 표정이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남의 캐릭터 이름을 멋대로 개명하다니. 나도 네 이름 진짜 모비호로 고정해 버린다.
“…쳇.”
그러나 내 황당함과 별개로 버서커한텐 저 말이 제법 의미 있었나 보다. 심통이 잔뜩 난 얼굴을 할지언정, 무기를 아래로 내리며 뒤로 물러난 것이다.
대체 왜. 그런 말이 절로 나온다. 아니, 진짜 왜?
“자네, 왜 돌아오는 건가?”
당혹을 맛본 건 나뿐이 아니었다. 뒤에서 버프 걸어 주던 아크메이지도 황당해했다.
그럴 만했다. 딜러 하나가 판 던진 걸 떠나, 그녀는 막 헤이스트 마법의 영창을 다 한 차였다. 기껏 버프 걸어 줬더니 판 던지면 혈압 오르지.
“전사들의 싸움이다. 노르다 전사는 정당한 두 사람의 결투에 끼어들지 않는다.”
“그, 그게 지금 나올 건 아닌 것 같네만.”
“그럼, 그게 언제 나와야 하지?”
그, 그러게 말이다……. 저걸 전사라고 쳐줄 수 있나 싶다가도 쟤가 ‘전사 아니다!’ 싶을 정도냐면 그것도 좀 모호하긴 해서.
그도 그럴 게 악마란 출신이 문제지, 쟤가 치졸하게 군 건 없잖아……?
…없겠지? 정말 치사하게 군 건 인질 잡았던 비류호지, 쟤는… 쟤는……. 잠깐, 쟤도 데브한테 뭔 짓 했잖아! 그런 건 안 쳐주는 거냐?
아니면 전사가 아니어도 결투면 다 되는 건가? 기준을 모르겠네.
나는 버서커의 잣대를 가늠해 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언뜻 보기에 단순한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속내를 알기 어렵다.
하니 내가 해야 할 건 그녀를 보고 황망해하는 게 아니라, 홀로 모비호를 상대하는 것이다.
“자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켜봐라, 마법사. 아니면 못 믿는 건가? 전우의 승리를?”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무슨 일입니까?!”
기실 이게 편할 수도 있다. 버서커와 나는 합이 안 맞고, 인퀴지터는 나까지 대미지가 들어오니까.
[자, 판이 마련됐구나. 와라, 분노.]
“비천한 언어와 말로 내 귀를 더럽히지 마라.”
음, 생각해 보니까 편할 수도 있다 수준이 아니라 완전 이득인데. 어차피 보스몹은 항상 혼자 잡아서 새삼 남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죽어라, 악마.”
해서 나는 버서커와 아크메이지, 인퀴지터가 나누는 대화를 무시한 채 모비호와 맞부딪쳤다.
그그극. 내 칼날과 상대의 손톱이 약간의 힘겨루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모비호가 한 발짝 더 다가오며 오므려진 오른손을 내밀었다. 송곳처럼 모인 손톱이 내 뺨을 살짝 긁었다.
서걱!
그런데 빈손으로 공격할 수 있는 건 모비호뿐이 아니라 말이다. 나는 손톱에 마기를 담은 채 아래에서 위로 할퀴었다.
모비호가 재빨리 물러섰다. 이미 예상한 바였다. 공격이 닿지도 않았는데 왜 저리 휘청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모비호의 움직임에 맞춰 검을 앞으로 찔렀다.
연속적으로 생겨난 마력창 역시 상대가 도망칠 수 있는 모든 가짓수를 노려 내려꽂힌다.
쿠구궁!
모비호 또한 가만히 당해 주진 않았다.
그것은 눈살을 살짝 찡그리더니, 몸을 직접 피하기보다 바닥으로부터 넝쿨을 쏘아 올렸다.
전조 증상으로 바닥 일부가 들썩였던지라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 몸이 나선으로 솟아오른 가지들을 피해 스텝을 밟았다.
[죽어라!]
연이어 허공에서 형성된 얼음창들이 내게 쏟아졌다. 직선으로 던져지는 게 아니라 약간의 유도 기능도 갖췄는지 놈들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그나마 내 속도가 더 빠르고 장검으로도 박살 낼 수 있어서 큰 문제는 안 되었다. 약간 귀찮을 뿐이지.
챙, 채쟁.
각설하고, 금속에 의해 박살 난 얼음이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바닥에서 자라난 가지들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아, 제법 의미 있는 장애물이 된다.
하여 나는 섣불리 모비호에게 덤벼드는 대신, 빙 둘러 달리며 가시들을 베고 모비호를 관찰했다.
놈은 약간 삐뚤어지게 선 채로 움직임 없이 원거리 공격만을 계속 사출하는 중이다.
이런 원거리 공격보단 본인이 같이 덤비는 게 더 위력적인 걸 아는 내 입장에선 의아한 태도였다.
스르르륵.
하지만 그 의아함도 곧 해결되었다.
새까맣게 물들었던 놈의 몸이 간간이 희어지며 그 안쪽을 내보인 까닭이다. 그때마다 모비호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게 비류호가 다시 깨어나려는 걸 막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까앙!
거기에 이 자식, 근접전이 약간 어눌하다. 아까 눈에 띄게 휘청인 점이나 깔끔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점, 총체적으로 반응이 늦된 시점에서 이상하다 싶었지만 정말 몸을 잘 못 쓰는 거다.
아마 놈의 원래 몸이 아니라서 적응이라도 못한 게 아닐까 싶은데… 이유가 무엇이든 놈이 허술하다면 그걸로 족하다.
[떨어져라!]
더구나 이렇게 넉백을 자주 쓰는 것으로 증명까지 해 줬다면 더더욱.
나는 거대한 물줄기에 맞아 뒤로 물러났다. 일반적인 물은 아니라서 몸이 젖기보다 찢어졌다.
생채기 수준이지만 옷과 붕대를 찢고 살갗에 상처를 수백 개 남긴 시점에서 찢어졌단 말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멈출 것인가?
그럴 리가 있나.
나는 근접전으로 싸움을 몰아가기 위해 밀려남과 동시에 다시 땅을 박찼다.
[큿!]
내 노골적인 의도를 읽어 낸 모비호가 다급히 다음 스킬을 준비했다.
모비호의 발 아래서부터 물이 솟아오르더니, 범람하듯 주변 땅을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창, 창, 창. 파도처럼 쏟아져 오는 물줄기가 청명한 소리와 함께 단계적으로 매끈하게 얼어붙었다. 저기에 착지했다간 내 균형이 무너질 것이다.
“같잖은.”
그 시점에서 나는 가시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이거, 이때 발판으로 쓰라고 준 거였다.
서걱!
실제 의도가 아니더라도 일단 난 그렇게 이해했다.
하여 나는 위력이 형편없어지더라도 최대한 범위를 넓게 검기를 쏘아 보냈다. 나선의 가시들 윗부분이 뭉텅이로 잘려 나가며 발을 디뎌도 괜찮을 형태를 띠었다.
내 몸이 그 위로 올라갔다.
[광대가 따로 없구나!]
글쎄다. 이렇게 칙칙하게 입은 광대는 본 기억이 없는데.
나는 발판 아닌 발판을 밟으며 모비호에게 돌진했다. 얼음 뭉치는 끝없이 생성되어 나를 노렸지만 상관없다. 마력 없이도 파쇄할 수 있다.
끼이익.
그러곤 장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확인하며 나는 검을 내던졌다. 장검이 부서지기 전에 끝을 보자는 마인드였다.
마력을 흠뻑 머금은 칼이 마치 창처럼 날아갔다.
[통하지 않는다!]
말과는 달리 위협적으로 느끼긴 했나 보다.
모비호는 계속해서 생성하던 얼음창을 일시적으로 멈추고 검을 막는 데 집중했다. 넝쿨이 순식간에 자라나 방패를 형성한 것이다.
쾅!
칼날이 방패 깊숙이 박혔다.
동시에 내 손은 등의 투헨더를 잡아 뽑는다.
들끓는 마력이 은빛 도신에 주입되며 첨예한 갈래 세 개를 토해 냈다.
나무 덩굴 방패가 세 개로 조각났다. 그 너머로 보이는 모비호는 그답지 않게 납작 엎드려 있다.
가장 효율적인 회피 방법이긴 했으나, 의외였다.
나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저렇게 피할 거란 생각은 안 했는데.
[죽어라.]
다만 의외든 뭐든, 싸움에 있어 예측 실패는 언제가 대가를 요구한다.
나는 맹수처럼 돌진하는 상대를 확인한 찰나, 판단을 내렸다. 이건 피할 수 없다.
쨍강!
하나 피할 수 없다 한들, 그게 포기를 뜻하진 않는다. 나는 결단이 선 순간 투헨더를 버리고, 쪼개져서 아래로 추락하려던 방패 조각의 한 부분을 붙잡았다. 아까 내가 내던졌던 장검이다.
방패 조각째로 들려 온 것이 나와 모비호 사이에 껴서 그것의 공격 일부분을 막아 주었다. 물론 그럼에도 왼팔 어깨를 붙잡혀, 그대로 손톱이 박히긴 했다.
약간의 고통과 「독!」이라는 메시지가 동시에 떠올랐다.
[어리석은.]
더불어 장검에 박혀 있던 덩굴이 갑자기 새로운 가지를 뻗으며 내 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악마기사!”
“나가지 마라.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뒤편에서 인퀴지터의 다급한 음성과 그녀를 말리는 버서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죽어라!]
이걸 어쩐다. 마력으로 몸을 강화하여 부수기에는 너무 두껍게 자랐는데.
그렇다고 그라운드 크래쉬를 행하자니 공간이 없다. 그것의 원리는 칼날에 마력을 응축한 후, 응축한 마력을 단번에 대지에 주입해 주변으로 퍼트리는 식이니까…….
잠깐, 그거 결국 공간 없어도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멍청이였나? 다른 건 다 응용하면서 이건 응용 안 하게?
따지자면 주변에 나선의 마력을 퍼트리는 것도 이것의 응용이지만… 약간 바보가 된 듯한 심정은 지울 수 없다.
나는 허탈함과 함께 여즉 쥐고 있던 칼날에 마력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 마력이 어느 정도 모인 찰나, 그것을 터트렸다.
그것까지가 딱 2초. 모비호가 수백 개의 얼음창으로 사위를 감싼 후 내게 발사했을 때의 시점이었다.
“이런 건.”
칼날에서부터 팔, 상체, 다리 순으로 마력의 칼날이 쏟아져 나오며 소매 쪽 옷과 등라 전반을 찢어발겼다. 마치 칼바람이 나를 중심으로 부는 듯했다.
“통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들은 내 옷가지와 나무 파편으론 만족을 못 했으니.
그것들의 다음 목표는 내게 쏘아지던 수백 개의 얼음창이 되었다. 파사삭. 분쇄기에 들어간 것처럼 얼음창이 전부 바스러졌다.
[……!]
“아, 악마기사!”
“거봐라, 베르세르크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수천, 수만 개의 얼음 조각이 허공에 흩날리며 세상을 순백의 설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들이 품는 냉기는 내 호흡을 일시적으로 하얗게 얼려 버린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나는 얼음 가루를 뚫고 장검을 길게 내려찍었다. 브레이커. 경악한 모비호가 비슷한 방식으로 팔을 휘둘렀다.
서걱!
완전히 자르진 못했으나 베었다, 그 팔뚝의 절반을.
부정한 검은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네겐 불꽃도 없을 텐데!]
어, 없어도 돼.
나는 우스꽝스러운 말투를 속말로 담으며 아래쪽 허공에 팔을 뻗었다. 구태여 브레이커를 쓴 것은 대지를 울려, 그 충격으로 투헨더를 붕 띄우기 위함이기도 했던 까닭이다.
물론 무게로 인해 그렇게 높이 뜨진 않으나, 그 정돈 검을 아래로 내려찍느라 낮아진 허리와 아래로 뻗은 팔로 충분히 커버된다.
깡!
내 오른손이 칼자루를 붙잡고 다급히 끌어 올렸다. 제대로 휘두를 생각은 아니고, 방패 대용이었다.
대각선으로 내 앞을 가로막은 칼날이 모비호의 손톱을 막아섰다.
이걸로 다시 내 턴인가? 나는 장검으로 전면에 봄바드를 쏘아 냈다가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며 전방을 쓸었다.
마력은 이제 진짜 끝물이었지만 놈이 새롭게 생성한 얼음창을 눈으로 셀 수 있는 시점에서, 그리고 그 몸의 일부가 흰 알멩이를 내보인 시점에서 감이 왔다.
저 녀석도 이제 끝이다.
[아직, 아직 끝이……!]
“끝이다.”
빔과 칼날. 그 어드메의 것이 모비 딕과 비류호가 소환해 낸 대부분의 것을 소리도 없이 잘라 냈다.
모비호는 겨우 피해 내고 일부는 경로 바깥에 있어 파괴되지 않았으나, 이 정도면 괜찮은 수확이었다.
모비호의 흰색 부분이 기어이 얼굴 절반을 차지하며 본래의 주인을 불러내었다.
[이 비류호는 아직─!]
미처 없애지 못한 얼음창이 내 목덜미와 옆구리, 허벅지를 스쳐 지나갔으나 이것으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
나는 절박한 비류호의 얼굴을 보며 방금 휘두른 방향과 반대되게 검을 다시 움직였다.
모비 딕이, 혹은 비류호가 발악하듯 호랑이로 모습을 바꾸며 내게 달려들었으나 이미 늦었다.
“죽음으로 사죄해라.”
서걱!
참격이 거대한 호랑이를 갈랐다. 한계에 달한 칼날은 평소처럼 뚝 부러지는 대신, 끝부분부터 분해되듯 조각조각 흩어진다.
쿠웅!
이제 남은 건 도신이 사라진 칼자루와, 머리 그리고 몸통으로 나뉜 호랑이의 사체다.
“네가 장난질했던 모든 것에게.”
쿨럭.
동시에 겨우 참고 있던 피가 내 무릎을 꺾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