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다음에 (3)
어깨에 통증이 살짝 스쳤으나 이 정돈 간지러운 수준이다. 나는 그것을 익숙히 외면하며 다음 걸음을 내디뎠다.
발판 삼을 만한 건 딱히 없었으나, 그렇다고 방도가 없지는 않았다.
내 군홧발이 위쪽 덩굴의 아랫면을 디딘 후, 몸을 아래로 다시 쏘아 보냈다.
내 몸 주변에 검은 기류가 생겨나며 비류호를 다시 따라잡았다. 비류호 또한 나를 노리고 입을 벌렸다.
카가각.
또 한 번 우리의 몸이 교차하고, 각자의 몸에 상처를 새겼다.
비류호의 살갗은 터진 북처럼 찢어발겨진 상태고, 내 허리엔 내장이 보일락 말락 할 정도의 깊은 발톱 자국이 있다.
「독 14%」
와중에 독 게이지는 가파르지 않을지언정 꾸준히 적립되고 있으니.
나는 사방에서 진동하는 꽃향기를 두고 검을 고쳐 잡았다. 꽃은 시들기 직전 가장 향기가 강하다더니만 그 말이 진짠가 싶다.
파스스슥.
그러나 아직 쉴 수 있는 타이밍이 아니다. 나는 어김없이 썩어 가는 발판을 피해 달렸다.
허리의 상처는 걱정할 것 없다. 붕대와 옷은 금방 수복될 것이고 그건 응급처치 대용이나 다름없다. 그거면 족하다.
[크허허어엉!]
포효 한 번으로 상처를 낫게 만든 비류호가 잽싸게 나를 쫓았다. 쩌저적. 검은 균열은 놈의 상반신 대부분을 삼킨 채다. 탁한 붉은색 눈동자가 점차 광기에 휩싸이는 듯 보였다.
다만 이지를 대가로 힘을 가져오는 중인지, 솟아오르는 넝쿨의 수가 더 늘어났다. 그 속도 또한 빨라 이젠 슬슬 경시하기 힘들다.
생존본능을 쥐어짜는 것도 정도껏이지, 활로 찾다가 내 머리 빠개지겠다.
쿵.
결국 몇 번 더 합을 교환한 끝에 나는 선택했다.
가는 줄기들로는 더 이상 길을 못 잡겠다 싶어, 성인 남성 셋이 달라붙어도 휘감지 못할 기둥을 밟은 것이다.
[걸, 렸나……!]
파사사사삭!
“……!”
하나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등라가 무너져 내렸다. 재처럼, 아니 수천 마리의 나비처럼 흩어지는 모양새가 예쁘기만 예뻤다.
그러나 그 사이로 모여드는 줄기는 결코 곱지 않다. 사람을 해적 룰렛 장난감으로 만들려는 것도 아니고, 틈 없이 쏟아지면 내가 곤란하지 않겠는가.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다양한 각도로 공중제비를 돌며 검을 휘둘렀다. 내가 마치 팽이라도 된 기분이었으나 그게 최선이었다.
덮치려 드는 모든 가지를 쪼개 버린 몸이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여 끝내 덩굴 무리의 가장 안쪽까지 도달했다. 그렇게 바랐던 지상이었다.
비록 사방이 나무뿌리로 막혀 있다 해도.
철퍽!
심지어 땅이 뒤집어진 여파인가. 물이 고인 진흙이었다.
착지할 때 충격은 좀 덜어졌으나, 여기서 싸울 걸 생각하면 그저 착잡하다.
쿵!
비류호가 나를 따라 땅에 착지했다. 촤라라락. 어림짐작하건대 50m 상공. 이 구덩이를 완전히 막아 버리려는 양, 덩굴들이 모여들어 천장을 형성했다.
틈조차 없는 넌출의 모임은 빛마저 안쪽으로 들여 주지 않는다. 세상이 깜깜해졌다.
아주 약간은 구분할 수 있으나, 그걸로 주변을 파악하느니 눈 감고 싸우는 게 마음 편할 시계였다.
[공, 포에 떨어라……!]
그 가운데서 얄팍한 기척이 내 근처를 맴돌았다. 어쩐지 말투가 어눌해진 느낌이다.
[죽… 어……!]
어디 보자. 쟤가 분명 대악마를 날름 처먹었었지. 거기에 점점 커지던 검은 구멍과 지금 묘해진 말솜씨를 보면…….
음, 아무리 봐도 마기침식 같은데.
나는 그런 잡념을 떠올리며 점점 짙어지는 꽃 내음을 느꼈다.
「독 20%」
저쪽과 다르게 광기 게이지는 안 올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독이 오르고 있으니 하나도 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약간의 숙고 끝에 결정을 내렸다.
[커헝!]
까앙!
X같은 것에 서열을 매겨 봤자지.
나는 내리꽂힌 발톱을 쳐 내며 뒤로 물러났다. 후욱! 역시나 후속타가 들어오며 내가 있던 자리를 갈랐다.
반격? 그건 조금 더 두고 보기로 했다. 내 감각이 아무리 기민하단들 맹수보다 밤 시야가 좋진 못한 까닭이다.
눈이 조금 더 어둠에 적응해야 한다. 혹은 소리나 그 외 몇 가지 단서만으로도 비류호를 찾을 수 있게 되거나.
여튼간 지금은 섣불리 움직이기 보다 차근차근 나아가는 게 최선이다.
채쟁!
그러나 아주 조금, 아주 조금… 상대가 얄밉기는 했다.
암, 대악마를 처먹은 영수쯤 되면 당당하게 정면으로 덤벼 오란 말이야. 어둠이나 발판이나 하독 같은 수법으로 장난치지 말고.
「독 32%」
[크히힉!]
아! 독 게이지도 그렇고 웃는 소리도 진짜 짜증나!!
나는 비류호가 저런 캐릭터였나 고민하며 검 자루를 단단히 쥐었다. 끼이이익. 대악마를 잡았을 때도 버텼던 검은 슬슬 비명을 지르고 있다.
지갑 사정으로 인해 안 바꿨더니만 조금 실수였나 보다. 목숨보다 돈이 중요하진 않은데.
채챙!
그러나 돈이 없는 걸 어떡하겠는가. 다리 수리비로 지출한 게 너무 컸다.
그렇다고 가오 상하게 아크메이지나 다른 애들한테 손 벌릴 수도 없고.
나는 내구도를 다급히 체크하며 또 하나의 공격을 막아섰다.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이 정도 내구도면 얼마 안 가 부서진다.
촤악!
“……!”
[죽… 어라……!]
뭐, 검이 부서지기 전에 과다 출혈로 죽을 것 같긴 하다.
나는 온몸에 새겨졌을 자상의 개수를 의식했다.
옆구리에 새겨진 것만큼 깊은 상흔은 없으나 숫자가 숫자다. 지금은 괜찮은데 나중 가서 괜찮을지 모르겠다. 전적을 고려하면 안전권일 가능성도 있지만.
쿠구구구구.
한데 어둠을 틈타 한 방이라도 준비하려는 모양이다.
바람이 불지 않아야 할 공간에서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고, 그에 맞춰 엄청난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건 눈이 보이건, 안 보이건 놓치는 게 바보다.
“거기냐!”
이 순간을 대비해 미리미리 검에 마력을 응축해 놓았다. 끼이익. 쇳소리와 함께 세 개의 참격을 출수했다.
다른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만큼, 온정신을 집중해 한계까지 벼려 낸 검기는 더없이 좁고 세밀하다.
서걱!
“……!”
베었다, 라는 감각이 손끝에 들어찼다. 보통의 묵직한 맛이 아니라 흩어질 것처럼 가벼운, 솜사탕을 가른 것처럼 모호한 감각이.
[크하핫!]
‘함정이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다음 행동을 취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류호의 눈은 바로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그것의 두 눈은 맹수 특유의 반사판으로 인해 형형히 빛난다.
후욱!
“……!”
연이어 비류호의 몸뚱이가 나를 ‘통과’하고, 바로 뒤에서 차갑고 축축한 감각이 전신을 때렸다. 촤아악! 파도 특유의 시원하고 청량한 소리가 동굴 내부를 가득 메웠다.
푸르르륵.
숨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내 입에서 공기 방울이 토해졌다.
반사적으로 검을 땅에 박지 않았다면, 지금쯤 팔다리를 두드리는 수류에 휘말렸을 것이다.
별개로 이 망할 호랑이 새끼는 왜 갑자기 물 속성 스킬을 쓰는 건지. 혹시 처먹은 게 하늘고래라서 물 타입 추가된 건가? 무슨 메가진화야?
콱!
와중에 풀을 자라게 만드는 능력은 그대로다. 독 게이지는 이제 절반을 넘겨 가파르게 상승 중인데.
악마를 날로 먹었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이 자식 양심은 있나 싶다.
나는 어깨를 관통할 뻔한 나무줄기의 존재를 느끼며 겨우 욕을 삼켰다.
더불어 수류에 휩쓸리는 게 저것에게 입는 피해보다 덜할까 혹은 이쪽이 덜할까 하는 사고도 거쳤다. 오판하면 곧바로 위기와 직결될 거다.
콰악!
하나 숙고할 기회는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빠른 속도로 자라난 가지가 다른 쪽 목덜미를 스치는 걸 느꼈다. 발목은 이미 줄기에 옭아매진 상태다.
차라리 물에 몸을 던지자. 나는 재빨리 결단을 내린 후 검을 뽑고 다리를 움직였다. 콰직. 내 몸이 바로 흐름에 휩쓸렸다.
다만 그때를 노렸다는 양, 저편에서 곧바로 하나의 기척이 느껴졌다. 내 팔이 어거지로 팔을 움직였다.
서걱!
이번에도 벤 것은 분신 비슷한 것이었나 보다. 손맛이 약하다.
푸르륵.
나는 사방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보며 발장구를 쳤다.
견제는 견제고 대처도 대처지만, 본질적으로 난 인간이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다.
[죽… 어!]
그러나 천장에 손이 닿은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곳은 숨 쉴 공간 없이 물로 가득 차 버렸다.
‘이건 좀 위험한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흐아아압!”
콰아아아아앙!
내 본능이 경종을 격렬하게 친 순간, 찬란한 금빛과 함께 거대한 충격이 천지를 흔들었다.
천장이 부서지며 빛이 들어오고, 물이 중심부로부터 동심원을 그리며 수위가 뒤바뀐 것이다.
운 좋게도 나는 테두리 부분에 있었는지, 높아진 수위와 함께 몸이 위로 떴다. 다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부서진 부분을 잡고 버티기를 시도한 건 덤이다.
“악마기사!”
그러나 그럴 필요는 딱히 없었다. 희푸른 사슬이 날아오며 내 손을 얽은 것이다.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온 감각이 곤두섰으나, 그렇다고 내 머리가 탐구를 멈추진 않았다.
나는 내 팔뚝에 휘휘 감긴 사슬을 더욱 단단하게 잡았다.
촤르르르륵!
사슬과 함께 당겨진 몸이 낚싯줄에 붙잡힌 생선처럼 저 위로 솟구쳤다.
“흥!”
곧 주문을 외고 있는 아크메이지와 부루퉁한 표정의 버서커가 보였다. 다들 어떻게 알고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굿 타이밍이었다.
“대련 두 번, 아니 세 번이다!”
그런데 자리에 한 사람이 안 보이네. 그렇다는 건 나무 천장을 박살 내며 난입했던 사람이 역시 인퀴지터라는 거겠지.
나는 팔뚝에 매어진 사슬을 떨쳐 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보호하소서!”
그와 함께 아크메이지가 소규모 보호막을 형성했다. 딱 나만 보호하는 막이었다.
파아아앗!
내가 그 지점에 의문을 가지려던 찰나, 거대한 금빛 물결이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세상 모든 부정을 정화하고 악을 멸할 힘이었다.
‘빌어먹을.’
마력이 뭉친 막이 분명 신성력의 전반을 막고 있음에도 절로 무릎이 꿇렸다. 왈칵. 피가 토해졌다.
“자네, 괜찮은가?”
이게 물어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긴가민가한 상태일 것 같진 않은데.
나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딴죽을 걸었다. 눈의 핏줄도 터졌는지 시야도 조금 붉었다.
“상처가 많군.”
“약해 빠졌다. 이제부턴 베르세르크가 싸운다.”
아니, 이건 내가 약한 게 아니라…….
나는 속으로 부정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진정한 고수는 어둠 속에서도 잘만 싸우느니. 이건 어쩌면 실력 부족인 게 맞을지도 모른다.
“아까도 말했지만, 할 수 있다면 해 봐라.”
그러나 컨셉에겐 결코 인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저 신성력에 직격당한 비류호가 멀쩡할 것 같지도 않고.
심지어 저 힘, 아직도 중심부에서 흘러나오고 있잖아. 여파만으로 식물들이 보랏빛에서 건강한 녹빛으로 돌아올 정돈데, 과연 악마를 삼킨 비류호가 살아 있을까?
나는 그런 궁리 끝에 새침한 태도로 흐른 피눈물과 코피를 닦았다.
HP는 이제 바닥쯤에 간당간당히 걸쳐 있다. 아크메이지가 마력 방어막을 치지 않았다면 즉사했을지도 모르겠다.
“쯧.”
아, 그러고 보니 흰바람이 빈사 상태 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반사적으로 오른 어깨 부근을 매만졌다. 건틀릿과 옷 몇 겹 덕에 봉인구의 존재를 느끼긴 다소 힘들었다.
하나 옷 안쪽에서 잘그락거리는 느낌이 없는 걸로 보아 아직 깨진 것 같지는 않다.
“베르세르크가 못 할 것 같나?! 할 수 있다!”
아, 그래. 할 수 있으면 하라고. 누가 뭐랬나.
어차피 신성력이 계속해서 퍼져 나오는 이상, 나는 이 막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다. 독 게이지도 더는 오르지 않을지언정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느리고.
“자 자, 진정하고.”
나와 버서커 사이의 자존심 싸움이 더 길어지기 전, 아크메이지가 버서커를 달랬다. 넘실거리던 신성력의 물결이 멈춘 건 그때였다.
마기가 정화되며 티 없이 맑은 빛깔을 되찾은 세계가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일부 부위는 맑아지는 대신 불태워지는 식으로 정화되어, 물이 빠져나갈 틈을 만들어 낸 상태다. 쏴아아아. 뿌리들 사이로 물이 새어 나가며 구덩이 안쪽을 내보였다.
광휘를 머금은 이단심문관이 구덩이 한가운데서 막 일어서고 있었다.
비류호는 시체마저 불태워진 것인지 도통 보이지가 않는다.
“뭐야, 호랑이는 벌써 해치운 건가?”
앗, 그 문장은……!
쿠구구구궁.
버서커가 그렇게 뇌까린 순간, 대지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곤 인퀴지터의 바로 앞쪽 땅이 퍼엉! 하고 터지듯 솟구쳤다. 그 가운데서 튀어나온 건 온몸이 타들어 가고 있는 비류호다.
[어떻게, 어떻게.]
쩌적, 쩌적.
그것의 가슴팍에 있던 균열이 더욱 커졌다.
[어떻게……!]
더욱. 더더욱.
[아!]
그 몸을 온전히 삼켜 버릴 정도로.
[…내가 이대로 끝날 줄 알았어, 분노?]
호랑이의 등 뒤로 피백을 닮은, 반투명한 고래의 지느러미가 팔락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