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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55화 (155/389)

155화 흘러가지 않는다며 (5)

데스브링거는 다급히 비밀 통로 내부를 달렸다. 들어오기 전 악마기사의 얼굴을 봤던 만큼 최대한 빨리 이동해야 했다.

“으아, 죽겠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것이 있다면, 그건 저들이 비밀 통로를 쉬이 들어올 수 없으리란 점이다.

암, 현 성주 일가도 모를, 오직 그만 알고 있는 진입 방식을 저들이 어찌 알고 사용한단 말인가.

벽을 부숴서 진입하려거든 입구 쪽 통로 일부가 무너지도록 설계되어 있으니 어지간하면 여기서 맞닥뜨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비밀 통로 벽에 손을 짚었다. 체력이 나쁜 편은 아니라지만 두 시간짜리 비밀 통로를 질주로 쉼없이 빠져나가려니 좀 죽을 것 같다.

“나가면 사제들이 우글우글한 거 아닌가 몰라.”

그렇게 되면 그땐 그냥 포기해야 한다. 단방향 통로─들어온 입구가 안쪽에선 열 수 없는 구조인지라─라서 돌아갈 방도도 없으니까.

“후우.”

그래도 설마 나가자마자 있겠어? 그는 누군가가 들으면 ‘플래그 대차게 꽂네’라고 할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껏 신체를 단련해 온 보람이 없진 않은지, 잠깐 숨을 돌렸다고 다시 살 만해졌다.

“그래도 이제 도시 밖이니까…….”

그놈의 마기 잔향이 걱정이긴 하지만, 그것도 기한은 있다고 들었다. 언제 끝날진 모르겠지만 계속 도망다니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는 그런 생각과 함께 슬슬 보이는 끝을 향해 다가갔다. 흙으로 덮어 위장해 둔 만큼 나가려면 그것들을 부술 필요가 있었다.

“아차차.”

그는 흙벽을 파헤치기 전, 잠시 몸을 더듬었다. 혹시라도 근처에 사제 무리가 있을지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그가 벽 너머 상황을 확인 하기 위해 아이템을 든 순간, 익숙하면서도 가장 보기 싫었던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쉣.”

도려낸 것처럼 뻥 뚫린 구멍. 악마기사만의 특징이었다.

“아니, 무슨……!”

심지어 그것은 굉장히 가깝게 관찰되었다. 흙벽 바로 너머에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듯 구멍은 점점 더 커지기까지 했다. 데스브링거의 눈이 커졌다.

쾅.

간발의 차로 그는 무너지는 흙벽을 피했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돌과 모래, 풀뿌리가 뒤섞인 채 잔뜩 쌓여 있다.

야광명주가 내던 희미한 빛 대신, 눈 시릴 정도로 쨍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기 있었나.”

동시에 그 빛을 가리는 검은 인영이 그의 앞에 섰다.

음영이 너무 명확하게 진 까닭인가. 야광주의 작은 빛으로도 선명히 빛을 발할 수 있는 단 한 개의 부위─눈동자─가 더없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데스브링거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말해라.”

악마를 사냥할 때가 아니면 하루에 다섯 마디 이상 말하는 법이 없던 이가 오늘만 벌써 몇 마디나 내뱉은 것인지.

“왜, 네 몸뚱이에 마기가 들어간 건지.”

평소였다면 ‘나리 열 마디 이상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네요?’라고 깝죽거렸겠지만 지금은 차마 그럴 수 없다.

강제라곤 하지만 그가 악마랑 계약을 해서 그런가. 그냥 공포 그 자체라서, 도저히 까불거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다.

데스브링거의 시선이 자동으로 내리깔렸다.

“나리…….”

뭐, 이 경우 비단 그가 두렵다는 이유만으로 그러는 건 아니다.

그는, 악마기사가 살의에 차 있는 것과 별개로 그 적의가 제게 향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싶지 않았다.

공포와는 별개의 논지였다.

그 적의가, 살의가. 그리고 그런 감정들을 넘어, 만약 실망 같은 감정이 그 눈에 떠오르기라도 한다면…….

“나리.”

아, 우스운 소리. 먼저 죽이려 든 사람이 누군데 이제 와서 실망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기 싫다는 건지.

한낱 짐승도 구해 준 사람과 해를 끼친 사람은 구분하는 법이다. 하므로 인간이 되어서 이런 몰염치한 생각이나 해선 안 될 것이다.

그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전부 치워 버렸다.

대신 또 한 번 자신의 주제를 되새겼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그가 쓸모없는 인간임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악마의 왕을 저지하기 위해 모인 파티의 일원임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린 이상, 결론이 어떻게 나든 이 파티엔 더 이상 발붙여선 안 된다는 것을.

그는 무너지려는 감정을 갈음하며 입꼬리를 비실비실 올렸다. 웃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상황의 X같음을 버티기 위한 행위였다.

“전─.”

그래도 이것 하나는 말해 주고 가자. 그는 웃으며 무엇가를 토로하려다가 말을 채 못 마친 채 손을 들었다.

주륵.

코피가 갑작스레 터졌다.

“쿨럭.”

심지어 토혈도.

“…네놈.”

고작 ‘아무 말도 못 한다’라는 말을 하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제약에 걸릴 줄이야.

그는 직방으로 찾아오는 고통에 몇 번 더 객혈했다. 죽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프긴 그 정도로 아팠다. 정말 빌어 처먹을 기분이었다.

“흐.”

한데도 웃음은 오히려 잘 튀어나왔다. 어처구니없는 제 운명이 슬슬 웃겼는지도 모른다.

데스브링거의 입술이 어렴풋한 곡선을 그렸다.

“그냥, 나리. 베십쇼.”

웃음이라기엔 너무 애달프고, 설움이라기엔 어딘가 후련한 곡선이었다.

“말하기도 귀찮으니까요. 그냥… 그냥 베십쇼.”

데스브링거의 손이 쫙 펼쳐진 채 양쪽으로 올라갔다. 항복 의사를 밝히는 자세였다.

투둑.

코피는 계속해서 흘러 후드 안쪽을 흠뻑 적시는 중이다. 짙은 녹색 천임에도 바깥에서 그 얼룩이 보일 만큼 흠뻑.

“그게 나리의 일이잖습니까?”

악마기사의 숨이, 언뜻 흐트러졌나 했다.

“그러니까 그냥…….”

“너는.”

악마기사는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나 끝까지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늘로 인해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은 그가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도록 한다.

“너는…….”

다만 악마기사는, 검을 든 손을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악마기사라면 그를 단칼에 베어 죽일 수 있는 사람임에도 그랬다.

“나리.”

그것으로 하여금 데스브링거는 한 가지 사실을 깨쳤다.

악마기사에게 제 존재가 조금이나마 의미를 갖긴 했구나. 어쩌면 나도 약간은 동료로 인정받았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깨달음이었다.

“베지 않으면.”

한데 그게 뭐라고 기쁘단 감정이 드는지.

“제가 찌를 겁니다.”

정말이지, 그게 뭐라고…….

“농담 아닙니다요.”

그러나 그 모든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데스브링거는 알았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기억에 남지 않는 쪽이 더 낫다. 동료로 인정받았다는 기쁨은 찰나이나, 동료가 죽었단 감각은 영원토록 남게 되므로.

“진심이에요.”

그렇기에 그는 무어라 항변하는 대신 마음 깊은 곳에서 알맞은 타이밍을 쟀다. 숙고해 보니 꼭 악마기사에게 죽을 필요는 없겠다 싶었던 것이다.

암, 특정 정보를 담으면 사망하도록 설계된 제약이다. 그렇게 효율적인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굳이 악마기사에게 살해당할 이유 있나?

제약을 통해 목숨을 끊으면 악마기사의 손이 더럽혀질 일도, 그가 악마기사에게 공격당한단 슬픔을 안고 갈 일도 없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그러니 절─.”

휘익.

그러나 악마기사는 그 타이밍을 재기도 전에 검을 휘둘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조금은 혹은 하염없이 슬퍼졌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그냥 조금 애달팠다. 정말로 아무 이유 없이.

그래서 그는 흘러넘치는 주마등 사이로 단 하나의 기억을 찾아 그 앞에 무릎 꿇었다.

이것이 그가 떠올릴 수 있는 최후의 것이라면, 심장이 저며지는 아픔보단 누군가와의 추억이 좀 더 낫겠다 싶었던 까닭이다.

또한 수많은 추억 중 단 하나를 꼽으라면, 그건 역시 에밋이었다. 에밋뿐이었다.

반평생을 잊고 살았던, 언제부턴가 떠올린 적이 없은 지우야말로, 그가 증오했던 모든 악인과 분노했던 모든 불합리함보다, 순수했던 시절 가장 사랑했던 에밋이야말로 그의 최후에 걸맞았단 말이다.

우뚝.

“……?”

함에도 고통은, 죽음은 한참이 지나도록 다가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떠올린 친구는 언제나와 같은 눈으로 그를 고고히 쳐다만 볼 뿐, 다가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하여 잠시 눈을 떠 보면, 그 바로 앞에는 바르르 떠는 칼날이 하나 있으니.

차마 닿지도 못하고, 옷자락 하나 베지도 못한 칼날을 보며 데스브링거는 시선을 조금 더 올렸다.

“왜…….”

댕그랑. 칼날이 바닥으로 떨어져 자갈과 부딪쳤다.

“왜, 당신이 그런 얼굴을─.”

퍼억!

통렬한 일격이 명치를 올려치고, 그대로 정신을 뚝 끊어 버렸다.

.

.

.

“헛.”

정신은 금방 돌아왔다. 아니, 금방 돌아왔나?

데스브링거는 의자에 단단히 묶인 저 자신과, 확 뒤바뀐 주변 풍경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귀한 대리석이나 최대한 흰 돌로 건축된 내부. 뒤구르기 하면서 봐도 신전이었다.

“어! 깼습니다!”

심지어 불쾌한 감각이 난무하는 존재들로 사방이 가득 차고 숨이 턱턱 막혀서야.

마치 공기마저도 그를 적대하는 것 같다. 온몸이 짓눌리는 양 무겁고 숨을 억죄어 온다.

하물며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볼 적이면, 사제 옷을 입은 몇 명이 유독 불유쾌하게 다가왔다. 고위 계급을 상징하는 옷차림으로 보거든 전부 신성력을 보유한 자 같았다.

데스브링거는 이게 마기로 인한 거부감인가 하며 눈을 껌뻑였다.

그렇다면 악마기사는 이걸 매일 경험한다는 것인데… 그는 대체 어떻게 버티는 건지 모르겠다.

압박감은 둘째 치고서라도 가장 신성력을 많이 가진 인퀴지터의 경우, 온갖 벌레─바퀴벌레나 지네, 유충 따위─가 바글거리는 시체를 보는 것 같은 꺼림직함이 들지 않나.

이걸 매일 본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기가 질렸다.

“깼나?”

그러나 해당 사항에 대한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무렴 일행들이 죄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딴 잡념을 가질 수나 있겠는가.

“뭐, 뭡니까요…….”

살려 줘. 차라리 그가 기절했을 때 죽였으면 좀 좋아? 그러면 고통 없이 잡념 없이 죽었을 텐데.

아닌가, 심문인가? 신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끌고 온 건가? 그렇다기엔 악마기사가 마지막으로 보였던 표정이 좀…….

“뭡니까요? 지금 그게 할 말인가?”

와중에 샌님이 으름장을 놓듯 그의 발언에 딴지를 걸었다.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딴죽을 걸 거면 그가 왜 여기 있는지부터 말해 주든가. 심문할 거면 제대로 질문이나 하든가.

“뭐요. 그럼 그게 할 말이지 아닙니까?!”

“네놈!”

“그만하게. 인퀴지터께서도 그만하시지요.”

그래도… 그래도 저 망할 샌님이 차가운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것보단 평소처럼 투닥이는 지금이 더 낫긴 하다.

진실 여부와 관계 없이, 샌님이 그런 눈을 하는 걸 봤다간 정말 무너져선 안 될 것이 무너질 것 같았던 탓이다. 악마기사에게 실망 어린 눈길을 받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자네…….”

아, 그런 점에서 역시 아까 죽는 게 나았는데.

그는 타이밍이고 자시고 당장 계약 위반을 강제로 행해 목숨을 끊을까 고민했다.

가야 한다면, 저들의 배신감 어린 눈이나 질책하는 기억 대신 투닥거리며 보내던 시간만을 가지고 가고 싶었다.

비록 마지막에, 지금이 아니라 악마와 계약하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순간에 왁왁대며 싸우긴 했지만. 그래도…….

“악마와 계약했나?”

그때 아크메이지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대답할 수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할 수 있더라도 하지 않을 테고.

암, 그가 고할 수 있는 사실은 제한적이며, 가능한 말로는 저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대답하게.”

“뭘 바라는 겁니까요? 이미 아시면서.”

그렇기에 그는 차라리 악을 자처했다.

오히려 이게 나은지도 몰랐다. 친구의 복수를 하겠답시고 수십, 수백 명을 죽게 만든 죄인에겐 이런 죽음이 딱 어울리지 않는가?

“자네 정말…….”

“그냥 고문실로 보내시지요.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자는 악마의 사주를 받아 여러분과 함께한 것이 분명합니다.”

배신자로 몰려 한낱 의미조차 갖지 못하는 죽음이야말로.

“아닙니다!!”

일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방을 갈랐다. 인퀴지터의 것이었다.

“그는 아닙니다!”

“어린 사냥꾼을 고문실로 보낼 거면 베르세르크부터 상대해야 할 거다. 나는 용납 못 한다.”

베르세르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심드렁한 얼굴로 구석에 앉아 할버드를 만지작거렸다. 그것이 협박의 의미임은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저자는…….”

“아, 몰라 몰라. 베르세르크는 경고했다.”

“그, 대리자의 동료분이시여…….”

“과격한 발언이긴 하지만… 저도 비슷한 의견입니다.”

“대리자시여?”

정말이지, 왜들 저러는지 모르겠다.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인력이 그인 만큼 그냥 버리면 될 텐데.

그러면 편할 텐데.

그란 사람은 이렇게까지 고집할 필요 없는 가치의 존재인데.

“전, 전 물론 증거도, 그 외 확신할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사이, 샌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전 그란 사람을 압니다. 저 멍청이는 분명 뻔뻔하고 덜 도덕적이지만… 그것이 악마와 손잡을 수준은 아닙니다.”

우스운 말이었다. 그녀는 그를 안다고 말하지만, 그가 보기에 그녀는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여전히, 영원히.

“그는 지금껏 악마를 퇴치하고자 하는 저희의 여정에 진심을 다해 힘을 보태 왔습니다.”

함에도 너는…….

데스브링거는 이를 악물며 그가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가 악마와 계약한 것이 밝혀지거든, 그를 망설임 없이 죽일 사람으로 악마기사와 인퀴지터를 꼽았다. 융통성 없는 두 사람이야말로 정에 연연하지 않고 악을 처단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그 모든 순간에는 한 점 거짓이 없었습니다.”

아니었다.

“곁에서 그것을 지켜봐 온 제가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 편견이야말로 가장 틀린 판단이었다.

“하지만 대리자님…….”

“말하지 않는 것엔 마땅한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저 바보는… 저 바보는 비밀이 많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게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가장 망설임 없이 움직일 거라 여겼던 두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그러니 고문과 처단은 부디 미뤄 주시기 바랍니다. 조사는 사건의 해결을 위해 반드시 해야겠으나, 그것이 고문으로까지 이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누가, 누구보고 바보라고 하는 거예요…….”

그는 가장 격렬하게 그를 변호하는 이를 보며 기어이 눈물을 떨구었다.

뒤편에서 무관심하다는 양 서 있는, 그러나 그가 악마와 계약했음을 들었을 것임에도 침묵하고 있는 이를 두고도 울었다.

이유 없이 그냥 그러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변호하는 베르세르크도, 그를 푸근히 내려다보는 아크메이지도 마찬가지였다.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울컥울컥 솟아올랐다.

“바보는 본인이면서…….”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저들이 찝찝하지 않게 악으로 죽고자 했건만, 당신들은 왜 이럴 때조차 협조 안 하는지 모르겠다.

“흥! 눈물이나 닦고 말해라!”

“손이나 풀어 주고 말하든가, 멍청한 샌님이…….”

이렇게 지독할 정도로 말 안 듣는 사람들인 걸 아니까, 막 돌진하다가 꼴라박지 말라고 뒤따라온 거지만.

“내가 보기에도 이이가 진정 배신자인 것 같진 않네.”

“아크메이지님마저…….”

“생각해 보게. 그가 진정 내통자였다면 끝까지 일반인으로 남아 우리 곁에 남아 있으려 했을 걸세. 그래야 의심 한번 받지 않고 끝까지 함께할 것 아닌가.”

“하지만, 계약은…….”

“반면, 그는 최근 악마로 추정되는 존재에게 노려진 적이 있지. 만약 그것이 함정을 파 계약을 강제로 맺거나 했다는… 그런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

“강제로 계약을 맺는 방법이 있다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 없다고 해서 미래에마저 없으리란 법은 없네. 자네도 알지 않나. 최근 역병을 퍼트리는 저주항아리가 개발되었다는 것을.”

데스브링거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크메이지가 주교를 설득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한마디를 할 때마다 멎을락 말락 하던 눈물이 다시 이어졌다. 정말이지 괴롭다. 너무 괴롭다…….

“그렇지만, 그것이 정말이라면 그는 왜 말을 하지 않습니까?”

“인퀴지터께서 말한 대로, 사정이 있는 것 아니겠나? 악마기사의 말에 따르면 무언가를 말하려던 순간 피를 토했다고 하니. 어쩌면 이건 계약의 형태를 띤 새로운 저주일지도 모르네.”

기쁘다.

“저기요, 나리들.”

그렇기에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입을 열었다. 이것이 그를 죽일지, 혹은 계약의 허점을 기어코 뚫어 내 성공할지는 알 수 없었다.

“믿는 건 자유지만…….”

애초에 이걸 당신들이 믿어 줄지도 잘 모르겠다. 작금의 그는 말해야 할 부분을 죄다 침묵하고 있는 수상한 사람에 불과하니까.

“저, 압니다요.”

그래도, 그는 전하기로 했다. 주륵. 핏물이 조금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악, 마의 위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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