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흘러가지 않는다며 (4)
데스브링거는 손쉽게 성으로 들어갔다. 10년 전 애새끼한테 뚫렸던 걸 잊어버렸는지 여즉 경계가 엉성해서 잠입은 어렵지 않았다.
비밀 통로까지 가는 경로도 마찬가지였다. 성주가 바뀌었음에도 화원의 위치나 별채 등 달라진 게 없어서 헷갈릴 이유가 없었다.
뭐, 딱 하나. 본래 썼던 길목에 창고가 지어지긴 했다. 그래서 화원 쪽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러나 별 문제 되진 않았다. 수풀 미로도 있고 엄폐물이 되어 줄 꽃과 나무도 많았던 까닭이다.
[칭찬하마. 네가 실수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집무실은 왜 1층으로 내렸으며, 그게 화원과 연결되어 있을 건 뭐란 말인가?
심지어 소성주랑 인상착의가 똑같은 인간은 왜 가족도 아닌 인간과 의미심장해 보이는 접촉을 하고 있는데? 소성주가 맞다면 저 인간, 약혼자 있지 않아?
외도인가? 외도인 거야? 한데 표정은 또 그게 아닌데?
[한낱 인간 주제에 재주가 제법이구나.]
하물며 도통 요상한 광경에 무슨 사정인가 알고자 고개를 살짝 내밀어 봤을 뿐이다. 그런데 그걸 또 외도 대상(추정)이 바로 알아차렸다.
넝쿨이 갑작스레 자라나, 나무 위에 있던 그를 바닥에 끌어내린 건 덤이다.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가 진입하기 전, 관측 아이템으로 마력 사용자가 없음을 확인했다는 점이라.
함에도 튀어나온 저치는 대체 뭔가 싶다. 마법사라서 마법 도구에 대응할 수 있던 건가?
[그러나 그것이 봐줄 이유가 되진─.]
“잠깐만!!”
각설하고, 딱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백금빛의 인간이 손을 들어 올리려 했다. 그것을 막아선 건 소성주(추정)였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시지요.”
그에 그치지 않고 소성주(추정)는 비굴할 정도로 눈꼬리를 내려 가며 웃었다.
그에 백금빛 존재가 손을 회수하며 마주 웃어 주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게 저치는 확실히 소성주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왜 그러느냐.]
“그, 그것이…….”
반면 소성주는 글쎄.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아양을 떠는 것치고 표정이 경직된 상태다. 제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 같진 않다.
“한, 한낱 도둑일 뿐입니다. 그는 따로 벌할 테니 제게 신경 써 주시지요.”
하면 오롯이 상대의 지위나 가진 바 힘으로 인해 소성주가 알랑거릴 수밖에 없는 구도가 나온 셈인데.
대체 정체가 무엇이면 소성주가 비굴해지는 걸까? 소성주조차 줏대 없이 굴도록 하는 계급이 세상에 얼마나 된다고?
[사랑스러운 것. 그러나 저것이 도둑일지, 혹 암살자는 아닐지 어찌 아느냐. 너만 해도 십 년 전 성주가 암살당하여 이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일 터인데.]
데스브링거는 그가 도망칠 수 있을지, 아닐지를 가늠해 보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솔직히 이번 말은 조금 타격이 있었다. 암살. 데스브링거의 눈이 침잠했다.
“그것은…….”
[도둑이든 암살자든 좋을 것 하나도 없는 존재긴 매한가지다. 하니 내가 처리해 주마.]
와중에 그는 도둑도 암살자도 아니다.
허락받고 들어온 건 아니니 침입자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어찌 됐건 그의 목적은 성의 귀물이나 누군가의 죽음이 아니지 않은가? 그냥 길을 지나려는 것뿐이지.
뭐, 이게 변명이 되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제, 제가!”
그때 소성주가 버럭 소리 질렀다. 투둑. 잠시 멎었나 싶었던 눈물이 그 뺨에 또 한 번 떨어졌다.
“제가 울고 있지 않습니까. 저를, 저를 달래 주셔야지요…….”
백금빛 존재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이런… 그래야지, 내 순서를 잘못 알았구나. 당연히 네가 우선인 것을.]
자신이 왜 이걸 봐야 하는진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저 살리려 저러는 것 같으니 감사하긴 하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던 걸까?
데스브링거는 겉보기엔 연애와 한없이 가까운 광경을 보며 떨떠름해졌다. 한시가 촉박한 상황이라 도저히 떫은맛을 감출 수 없다.
압도적 지위의 존재를 향해 억지로 구애의 춤을 추는 소성주? 불쌍하긴 한데 그렇게 불쌍하지 않았다. 암, 권력 계급의 최상위층이 아닌가.
그가 살아온 세계는 살기 위해 마음 파는 걸 넘어, 마음을 완전히 짓이겨야만 했던 세상이다.
그런 그들을 보고 자란 그에게, 소성주는 안타까울지언정 동정의 대상은 아니었다. 저 인간은 최소한 누릴 것은 다 누리고 당하는 것일 터이므로.
[저건 경비를 불러 처리하도록…….]
어쨌거나 결말은 연행인가? 기실 저 지하 감옥 깊은 곳에 처박혀도 탈출할 방도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일이 꼬였다.
그가 탈출하기 전, 사제들이 성에 찾아와 그를 수소문이라도 하거든 상황이 골치 아프게 변할 텐데.
[…달갑지도 않은 것이 연이어 몰려오는구나.]
“……?”
그러나 땅이 꺼져도 꼭 추락하란 법은 없나 보다.
데스브링거는 혹시 혼란이 일어 그에게 기회가 오는 건 아닌지 기대를 품었다.
[신의 병정들이다.]
아니었다. 땅이 꺼지면 당연히 추락해야 했다.
“교단에서 왜…….”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방문인지─당연한 일이겠지만─소성주도 당황을 표했다. 그 순간에도 그 눈동자에는 살그머니 희망이 고개를 들고 있다.
[무언가를 쫓고 있는가 본데…….]
백금빛 존재가 소성주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더니 곧 ‘아’ 하는 소리를 흘렸다.
[너로구나. 저들이 온 원인이.]
그리고 그것의 시선은 다시 데스브링거에게 닿았다. 마치 맹수와 같은 눈동자에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호랑이가 제 앞에 장애물 하나 없이 서 있는 기분이다.
[협약에 따라 너를 내버려 두었지만, 내 앞마당을 어지른 지금은 다르다.]
협약?
신경 쓰이는 단어가 살짝 지나갔다.
[당장 붙잡아─.]
어쨌거나 이대로 붙잡히는 건 확실하다 싶어 체념하려던 차다.
백금빛 이가 말을 중도에 뚝 끊었다. 휙 돌아간 고개가 고운 아미를 찌푸리고 얼굴에 짜증을 한가득 담았다.
[감히…….]
또 뭐가 나타난 건지 알 도리가 없다. 한낱 인간, 그것도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데스브링거와 소성주가 각자만의 방식으로 의아함을 풀었다.
쾅!
곧, 굉음과 함께 화원 한구석이 뒤집혔다. 멀리 떨어진 그나 소성주에게마저 파편이 튈 정도의 강도였다.
파스스스.
당연하게 모래바람이 일었다.
[괜찮으냐.]
“예, 예. 막아 주셔서 괜찮기는 한데…….”
데브는 튄 파편을 옷자락으로 대충 막아 내며 모래바람 사이를 살펴보았다. 그 사이로 시꺼먼 먹색이 언뜻 보였다.
더불어 시간이 좀 지나, 구름이 잦아들거든 먹색에 비하면 많이 맑은 회색이. 그보다 더 흰 피부가. 신의 피라고도 불리는 적포도줏빛 같은 것이.
[후우.]
“아…….”
“저 사람은…….”
펄럭.
세 갈래의 코트 자락이 마치 깃처럼 흔들리는 순간, 먼지구름 사이로 그 모든 것의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역시 악마들을 신용하는 게 아니었다.]
“찾았다.”
재에서 비롯된 눈동자가 칼을 뽑았다.
* * *
[두 번의 신호를 줬음에도 이 땅에 발을 디딘 순간 죽였어야 했어.]
얼떨결에 쫓았다가 얼떨결에 놓쳤을까.
뺨을 타고 흐른 핏방울과 함께 인퀴지터에게서 겨우 상황 설명을 들었다. 그마저도 데브가 마기를 품게 된 것 같다는 짧은 문장이었다.
당연하게도 그것만으론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저 쫓기로 결정했다. 성까지 온 것도 이쪽 방향에서 마기가 느껴지노라, 사제들이 그리 말했기 때문이었다.
무단 침입이야 나중에 아크메이지나 인퀴지터가 커버 쳐 주겠거니 하는 계산속이었고.
[비린내를 풍기고 마를 가졌음에도 관대히 넘어가 주었건만,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날뛰어?]
그런데 지금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까앙.
나는 내가 착지한 곳 주변의 인물들을 파악하기가 무섭게, 그중 한 명의 공격을 받았다. 소성주랑 엄청 가까이 붙어 있던 존재였다.
“자, 잠시만!”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
진솔한 심정으로 둘이 찰싹 달라붙어 있고, 심지어 소성주의 눈물도 닦아 주고 있어서 ‘어? 바람?’인가 싶었는데.
그 생각이 심화되기도 전에 그 상대랑 칼날을 맞대게 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나만 칼이고 상대는 길게 늘어진 손톱이긴 한데, 아무튼.
“하.”
거기에 악마 신용 어쩌구나 비린내 어쩌구는 그렇다 쳐도, ‘마를 가졌음에도’란 말이 나왔다.
상황이 이따위인 와중에도 컨셉이라면 무시할 수 없는 발언이 튀어나왔단 소리다.
“누가 누굴 보고 주제를 운운하는 건지 모르겠군.”
하면 뭐 어떡해?
“짐승 노린내나 풍기는 것이.”
대화로 풀 수 있을 것 같은 오해도 망쳐 버리는 지옥의 주둥아리 발사해야지.
[한낱 인간 따위가 나를 능멸해!]
“안, 안 됩니다!”
나는 뒤편에서 슬쩍 도망치려는 데브를 보곤, 한 걸음 물러난 후 다시 덤벼드는 이를 살폈다. 내 안의 우선순위는 데브이나 이쪽도 썩 만만찮아 보이는 상대다. 쉽게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아무렴, 외형만 봐도 그렇다. 소성주를 두고 외모의 끝판왕이라 여겼건만, 이쪽도 만만치 않은 생김새이지 않은가. 옷차림과 색 조합으로 인해 언뜻 더 화려해 보이기도 했다.
한데 이렇게 화려한 사람이 과연 지나가는 인물일까?
더군다나 생긴 걸 자세히 뜯어 살피거든 인간미란 게 없다. 외모의 미추를 떠나 어딘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더구나 ‘한낱 인간’ 발언이 더해져서야.
아무래도 인간이 아닌 것 같지?
까앙.
나는 또 한 번 검을 맞대었다. 다만 상대의 경우 다른 쪽 손도 무기인지라, 막힌 쪽을 대신해 다른 쪽 손을 휘둘렀다.
길다란 손톱이 내 머리를 노리려 했다.
휙.
나는 그것에게 뺨 한편도 내주지 않고자, 몸을 뒤로 빼고 그것의 명치를 걷어찼다. 얼굴에 그어진 상처는 하나로 충분했다.
[……!]
상대 또한 내 발차기를 피해 냈다. 그러나 본인의 육신이 공격당할 뻔한 게 어지간히 치욕스러운가 보다.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더니 길어진 송곳니를 드러냈다.
“비류호!!”
비명에 가까운 소성주의 외침이 귀를 쩌렁쩌렁 울렸다. 비류호. 내가 기억하기론 동부 일대의 옛 주인이자 그곳에 자리 잡은 태곳적 짐승이었다.
“소성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소성주님, 괜찮으십─!”
“치, 침입자?!”
“위험합니다, 소성주님!”
이야. 해룡과 산군에 이어 비류호까지 기어이 만나는구나. 역시 스토리 진행 필수 보스라 이거죠? 반드시 거쳐야만 된다 이거죠?
“안 돼, 이곳에 오면……!”
[마에게 육신을 팔아넘긴 것이!]
그렇지만 타이밍 너무하지 않아? 나 아직 데브랑 해결할 일이 남아 있거든? 데브가 왜 떠나려 한 건지, 왜 마기를 품게 된 건지 지금 그 사실들만으로 머리 아프거든??
왜 하필 지금 만나는 건데? 조금 미뤄 줄 순 없는 거야?
“…날 모욕하지 마라!”
그러나 이 상황에서 상대를 무시하고 가는 것도 컨셉에 안 맞는다. 그 이전에 상대가 날 보내 줄 것 같지가 않다.
나는 안 그래도 바쁜 마당에 온갖 재가 덮친다 생각하며 칼을 제대로 쥐었다.
“돌아가세요!”
소성주는 이 틈을 타 경비들을 물리려고 발악 중이다.
“하지만 침입자들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타깝게도 나와 비류호─아마도─의 존재로 인해 쉽지만은 않았다. 경비들의 직업 정신이 너무 투철해도 탈이었다.
“어린 사냥꾼아, 여기 있. 어? 전우여!!”
거기에 버서커가 경비들을 제치고 달려와 고개를 불쑥 내밀기까지 했다. 사태는 더욱 난항에 빠졌다.
“침입자가 여기까지!”
“소성주님, 대피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신전이라지만 허락 없이 이곳에 다다르다니!”
“이 일은 기억할 것입니다……!”
이야 혼란하다, 혼란해. 나는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비류호를 상대하며 힐끔힐끔 주변을 파악했다.
비류호가 재빠르긴 하지만 못 견딜 수준은 아니고, 달려드는 패턴도 단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태곳적 짐승들처럼 체구가 거대해서 조금만 움직여도 피해가 나는 타입 또한 아니고 말이다.
무엇보다 본인도 주변에 손해 입히긴 싫은지 제대로 싸운다는 느낌이 안 들어서. 나 역시 주변에 피해 갈까 봐 마력을 안 쓰고 있으니 피차 동일한 조건인 셈이다.
저쪽도 안 통하고, 나도 안 통하고. 성질만 부리고 있고…….
[순순히 죽을 것이지, 쓸데없는 발악을…….]
하지만 서로 안 통해서 지지부진해지는 것도 짜증났던 모양이다.
상대가 얼굴을 더욱 일그러트리더니 눈을 표독스럽게 세웠다.
마력이랄지, 압도적인 기운이 온갖 바람을 일으키며 상대에게로 모여들었다. 그것의 백금빛 머리카락은 X래곤볼의 초X이어인처럼 위로 삐죽 설 것처럼 마구 펄럭이는 중이다.
하물며 나풀나풀거리는 옷자락 사이로 살짝 보이던 손과 맨발은 순식간에 털이 돋아나 마치 짐승의 것처럼 변한 상태다.
쿵!
한데 달라진 건 그뿐이건만, 갑작스레 땅이 가라앉았다. 마치 그것의 무게가 증가한 것처럼.
[기어이 내가 힘을 쓰게 하는구나.]
그리고…….
[죽어라.]
“……!”
“물러나라!”
그것이 허공을 손가락으로 할퀸 순간, 호랑이의 손 같은 환상이 나타나 나와 내 뒤편을 할퀴었다.
흔한 이펙트여서 별로 신기하진 않았지만 여파는 강대했다.
“끄악!”
“커헉!”
마지막 순간에 내가 물러나지 않고 마력으로 받아친 덕분에 그리고 훨씬 뒤편의 버서커가 사람들을 마구 밀쳐 낸 덕분에 고작 두 명만 공격에 휩쓸렸다.
그러나 고작 두 명일지라도 그 피해가 적다곤 할 수 없다.
한 명의 팔이 잘려 나가고 한 명은 어깨부터 골반까지 깊은 상흔을 갖게 되었다면 더욱 그러하다.
“비류호─!!”
소성주가 비명을 질렀다.
[……!]
소성주의 비명에 비류호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자 마구 몰아치던 마력이 멎었다. 차차 변하던 그 몸뚱이 역시 내가 최초로 관측했던 형상으로 되돌아왔다.
백금빛 미인이 기나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네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구나.]
당황은 한 듯하나,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는 어투였다.
비류호는 새침하니 도도한 형상으로 손짓을 했다.
그러자 상처 입은 두 사람의 주변 풀들이 마구 부풀기 시작했다. 잔디 사이로 무언가가 쑥쑥 뻗어나와 꽃을 피운 것이다.
[하나 잘되었다.]
“어떻게…….”
[이참에 제대로 공표하도록 하여라. 너는 나의, 이 비류호의 것임을.]
“어떻게 이럴 수가…….”
그냥 꽃은 아닌지, 그것이 봉오리를 펼치는 순간 은은한 향이 주변으로 퍼졌다. 피를 쿨럭거리거나 비명을 지르던 부상자들이 한결 편안한 얼굴을 했다.
상처가 치료되는 것 같지는 않고 대충 진통 효과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병 주고 약 주기라 하기엔 수지가 너무 안 맞지만.
[지금은 마음이 복잡한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오마.]
근데 지금 뭐라고 인마? 지금 내 컨셉한테 시비는 걸 만큼 걸어 놓고 볼 장 다 봤다면서 그냥 가는 거냐?
“버러지가.”
컨셉에게 싸움을 걸어온 것도 그렇지만, 놈이 한 발언 중 쉽게 넘어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나야 마에 물들 건 사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악마를 신용하는 게 아니었다’란 말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조력자든, 등한시하여 묵과하는 관계든 놈에게 악마와 관련된 끈이 있는 게 분명했다. 놓칠 수 없다.
“어딜 가려는 거냐.”
하여 나는 검에 마력을 둘렀다. 까만 기운이 은빛 검날에 맺히자 장검이 끼이익 소리를 내었다. 얘도 슬슬 맛이 가려는 모양이다.
“아, 안 돼요!”
그러나 당장 안 부러졌다면 됐다. 나는 소성주의 외침을 반쯤 무시한 채 비류호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하얀 손이 마력이 둘러진 검을 그대로 잡아 막았다. 완전히 타격이 없진 않은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쯧.]
함에도 막은 건 막은 것이다.
상대는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게 손을 쓰는 것으로 이어지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내 뒤편에 있는 소성주가 걸린 모양이다.
결국 비류호는 내 검을 뿌리쳤다. 힘이 어마어마해서 거부할 수도 없었다.
[이번만 봐주도록 하겠다.]
그렇지만 상대가 검을 뿌리치면 뭐하나. 그것을 버틸 힘은 없어도 검을 놓치지 않을 아귀힘은 내게 있었는데.
나는 옆으로 날아가려는 검을 따라 몸을 회전했다. 쳐 내는 힘을 이용해 몸을 축 삼아 뱅글 돈 것이다.
휘익!
그러나 내 검이 비류호를 긋는 것보다, 비류호가 두 발짝 물러나는 게 더 빨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검기를 쏴 버릴 걸 그랬나. 그러나 검기를 쏘자니 그것을 상대가 피했을 때의 여파가…….
[하니 조속히 이 땅을 떠─.]
“크핫! 강자다!”
호쾌한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쾅! 굉음과 함께 거대한 할버드가 땅을 울렸다.
모양이 빠질 정도로 급하게 몸을 뺀 비류호가 눈을 부릅떴다. 그가 방금까지 있던 자리는 할버드에 의해 산산조각 난 채다.
“전우여, 저번에 베르세르크의 사냥감을 빼앗아 간 것, 지금 돌려받는다.”
하지만 그런 거 신경 써 주는 사람이 여기 있을까 보냐. 나는 버서커를 보며 장검을 털어 내듯 손목을 움직였다.
“꺼져라.”
“흥. 베르세르크는 네 말 안 듣는다. 나 싸울 거다.”
소성주 뒷목 잡는 소리 들리는 건 아마 기분 탓일 거다.
우리 둘이 비류호 앞에 나란히 섰다.
[하찮은 인간들이…….]
우리의 작태에 비류호는 짜증이 났는지 고운 목에 핏대를 세웠다. 마력이 은은히 부는 게 금방이라도 힘을 끌어올릴 것 같다.
“악마기사! 베르세르크!”
하나 상황은 새로운 이의 등장으로 변했다. 인퀴지터가 사제들을 이끌고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우리의 시선을 가져간 틈을 타 비류호가 냉큼 손을 휘저었다.
콰드드득!
부상병들 옆에 꽃이 자라났던 것처럼, 삽시간에 엄청난 두께의 넝쿨이 자라났다. 우리를 묶기 위한 것이 하나, 우리의 진로를 막아 버리는 것이 하나였다.
“같잖은……!”
“오, 뭐냐 이건? 풀이 쑥 자랐다.”
물론 그것이 큰 효과를 봤다고 하긴 어렵다. 나는 검으로 베면 그만이고, 버서커는 몸에 힘줘서 뜯어 버렸으니까.
진로를 막기 위해 벽처럼 세워진 것도 비슷하다. 우리 둘이 힘을 합하지 않아도 뚫는 것엔 어려움이 없다.
“사라졌나……!”
“엥.”
그렇지만 그 찰나면 비류호가 몸을 빼기 충분하다. 어떻게 사라진 건지 떠나가는 모습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무 일 없이 끝났나…….”
반면 우리와 다르게 소성주는 눈에 띄게 안도했다. 부상자들의 쿨럭거림에 금세 표정을 굳히긴 했지만.
“사제님! 이곳에 부상자가!”
“예?!”
그는 가장 먼저 달려온 사제들을 불렀다. 신성력을 동원해야만 살릴 수 있는 부상이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인퀴지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상처의 위급함을 발견하고 후다닥 방향을 틀었다.
숨이 꼴깍꼴깍하던 이들이 그녀의 손길 아래 겨우 생사의 경계를 넘었다.
“쯧.”
살았다면 그걸로 다행이다. 비록 우리는 비류호를 놓쳐 버렸지만.
나는 참 두껍게도 남은 식물의 벽을 밀어 넘어트리곤 상황을 되짚었다.
비류호는 잡지 못했지만 그에 대해 잘 알 사람은 여기 남아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면 되고. 처음 목적했던 데브는 우리가 비류호와 대치하는 동안 도망쳤는데…….
“전우여, 어딜 가나?”
대항하느라 시간을 좀 까먹긴 했지만 막 몇십 분 단위는 아니다. 잘한다면 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 악마기사, 그… 뺀질이 녀석이…….”
“맞다! 어린 사냥꾼을 찾아야 한다!”
나는 인퀴지터를 바라보았다. 병자들의 숨을 간신히 붙여 둔 인퀴지터는, 막 다른 사제에게 환자를 인계한 참이다.
“방향.”
“……! 저쪽입니다!”
그래 저쪽이란 말이지.
나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아야 할, 그런데도 어딘가 욱신거리는 듯한 뺨의 상처를 상기하며 발을 내디뎠다.
잡히면 우리에게 죽을 확률이 높은 만큼, 그냥 보내 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접었다.
나는 아직 고기만두에게 그 무엇도 듣지 않았다.
보내 줄 때 주더라도 최소한 이유는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