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모든 것이 순리대로 (1)
우린 대삼림을 빙 둘러 이동했다. 평상시, 대삼림 주민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동서부를 잇던 길이었다.
물론 이번에 우리가 한 일을 생각하거든 대삼림을 관통했어도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대족장이 우리에게 신세를 진 상황이니까.
그러나 그는 막 대족장에 오른 입장이다. 다른 부족에게 사실을 공표하고 이런저런 부분을 조율하느라 바쁠 터.
우린 그런 이를 곤란케 하기보다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혹시라도 나타날 악마숭배자를 대비한 경로기도 했다.
크어헝!
“우와악!”
뭐, 길 가던 과정에서 정작 경험한 건 기습이 아니라 대삼림의 위험성이었지만 말이다.
대삼림의 사람들이랑 움직일 땐 몰랐는데, 여기 맹수 진짜 많더라고. 독충이랑, 위험한 식물도 마찬가지고.
물론 이게 휴델렌보다 캄버러에 가까워진 탓일 수도 있긴 하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냐고!!”
애초에 우리가 캄버러로 가는 이유. 바로 이 맹수들 때문이거든.
요즘 들어 부쩍 개체 수가 늘었다나?
“뺀질이 놈, 가만히 있어라!”
“미친 인간아, 이걸 두고 어떻게 가만히 있는데요!!”
“계속 움직이니까 치기 힘들지 않느냐!”
“와악! 물린다, 물린다!!”
“와하핫! 어린 사냥꾼아, 기다려라!”
“으아아아아!!”
한편, 데브가 비명을 지르는 사이 인퀴지터와 버서커가 맹수에게 달려들었다. 둘 다 다른 놈을 처단하고 온 길이라 피가 산만하게 묻어 있다.
서걱!
“왁, 와악!”
“시끄럽다.”
그러나 내가 한발 빨랐다. 나는 데브를 물어뜯으려던 짐승의 목덜미를 뎅겅 베었다.
피가 데브에게 왕창 쏟아져 버렸지만 나한테 쏟아진 건 아니니 상관없다.
나는 뽀송뽀송한 몸으로 그들을 앞질렀다. 가장 가운데 서 있던 바람에 간신히 난장판을 피한 아크메이지는 다소 떨떠름한 눈치다.
“자네 괜찮나?”
“…이게 괜찮아 보입니까?”
고기만두가 피로 젖은 제 몸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크메이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작 표범 하나에 혼비백산이라니. 단련이 부족하다.”
“어린 사냥꾼아, 방심했나 보군!”
“아니, 방심이고 자시고 표범이랑 1대1을 붙을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된다고.”
그건 맞는 말이지. 당장 나만 해도 현실 몸이었다면 데브랑 같은, 아니 더 심한 처지였을 것이다.
나는 앞쪽으로 휘적휘적 나아가며 들려오는 말에 긍정했다.
“이런. 벌써 가나?”
“앗, 악마기사! 같이 갑시다!”
“아하하! 가자, 사냥꾼아!”
“…인간적으로 피 뺄 시간은 좀 주면 안 됩니까?”
그렇지만? 긍정은 긍정이고 갈 길은 갈 길이지.
거기에 아이템 효과 덕분에 덥진 않더라도 습하다는 감각은 남아 있다. 더불어 며칠째 씻을 환경이 잘 안 나와서 찝찝하기까지 하다고!
지금까지 짐승 외 존재의 기습이 없는 걸 보면 아마 악마숭배자는 이 숲에 없다고 봐도 무방할 터.
하면 캄버러까지 얼마 안 남은 이상, 난 하루라도 빨리 이 수림을 빠져나가겠다!
“에잇, 그래요. 약한 내 잘못이지. 나리, 같이 가욥!”
가자, 전속력 전진!
“으으. 진짜 너무하다고요.”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것도 슬슬 캠프를 차려야 할 시각에 강을 발견했다.
뒤집어쓴 피 때문에 몇 시간 사이 집요하게 노려진 데브가 강에 뛰어든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을 싫어하는 마음보다 피냄새를 맡고 모여든 짐승이 더 싫었던 모양이다.
“으하하. 재밌는데 왜 그러나, 어린 사냥꾼아!”
“댁만 재밌으면 다예요?”
물에 젖은 옷은 널어 두고, 모포로 몸을 돌돌 만 데브의 등을 버서커가 팡팡 두드렸다.
확실히 데브가 미끼가 되어 준 덕분에 버서커가 심심할 겨를이 없긴 했다. 데브 입장에선 속 터질 일이지만.
“그래도 오늘 먹을 양식은 얻지 않았나.”
“손질 다 해 왔습니다!”
“제가 말을 말아야지…….”
데브는 모포를 꾸물꾸물 더 여몄다. 바위 위에서 몸을 동그랗게 만 채 그러고 있으니 진짜 만두 같았다. 다소 처량한 만두.
“자, 자. 그러지 말고 이거나 먹어 보게.”
아크메이지가 데브를 살살 달래며 사탕을 건넸다. 설탕이 귀한 세계관임을 고려하면, 굉장한 선물이었다.
“제가 먹을 거에 넘어가는 어린앤 줄 아십니까…….”
“그래도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은 나아지잖나.”
그걸 아는 데브 역시 투덜댈지언정 사탕을 거부하지 않았다. 슈거하이가 직빵으로 돌았는지 데브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별개로 오늘따라 야생동물의 습격이 많긴 많았군. 일곱 번이나 공격을 받다니.”
“이것도 캄버러 도시의 일과 관련 있는 걸까요? 아니면 저 뺀질이에게 접근했던 존재의 수작?”
“어느 쪽이든 가능성은 있지요.”
“사제여, 고기 탄다.”
“앗.”
그동안 아크메이지와 인퀴지터는 열심히 스튜를 끓이고 고기를 구웠다.
평소엔 데브랑 번갈아 가며 맡는데, 오늘은 그가 저 모양이니 인퀴지터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나? 나는… 놀랍게도 요리를 맡아 본 적이 없다. 컨셉상 안 도와줄 걸 알아서인지, 아니면 못할 것 같아서 안 맡기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편하기도 편하거니와 요리를 원체 못해서 불만은 없다. 불 조절이 편한 현대에서도 맨날 태워 먹는데 여긴 어떻겠어.
“아, 사냥꾼아. 옷 다 말랐다.”
“정말입니까요?”
음식이 다 되었을 즈음, 빨았던 옷도 다 말랐다. 데브는 냉큼 옷을 갈아입었다.
멀리 가서 입기엔 맹수가 걱정됐는지 모포 안에서 꿈지럭대는 게 상당히 웃겼다.
그렇다고 갈아입기 편하게 가림 천을 만들어 줄 생각은 없지만.
“자네도 들게.”
아크메이지가 흐뭇하게 웃으며 음식을 나눠 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고기 비중이 줄어든 스프는 편하게 먹을 수 있다.
“전우여, 저번부터 궁금한 건데 너는 고기를 안 먹나?”
그러다 잠깐. 나는 스프를 마시다 말고 버서커와 시선을 마주했다. 야생동물처럼 선명한 눈매 속 호박안은 나를 유심히 관찰하는 양 굴었다.
“네 알 바 아니다.”
뭐, 내가 메뉴 택할 때면 항상 고기를 빼고 먹었으니까 못 알아채는 것도 이상한 건 없나. 다들 반쯤 직감한 건지 고기는 걸러서 주기도 하고.
“고기를 안 먹으면 몸이 못 버틸 텐데.”
그러나… 역시 먹고 싶진 않다.
“네, 알 바, 아니라 했다.”
원래도 소화기관과 입맛 문제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거니와, 이제는… 이곳에 와서는…….
나는 싸우다 보면 입에 종종 들어오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피비린내 물씬 풍기던 것들을 상기했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이런.”
내가 그릇을 내려놓자, 아크메이지가 다소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미 달아난 입맛이다. 더는 먹을 생각이 안 들었다.
“그러면 키 안 클 텐데.”
“…저기요. 나리 나이가 몇인데 키가…….”
“악마기사께선 충분히 키가 크지 않으십니까? 저는 미들족 중에서 악마기사만큼 큰 분을 딱 한 분밖에 못 뵈었습니다만.”
“그렇지만, 악마기사는 아직 키 클 나이 아닌가?”
“슬랜드족은 서른까지 크네만, 미들족은 아닐세.”
“…그런가??”
대신 자리를 떴다. 겨우 만난 강인데, 몸 빡빡 씻어야지.
* * *
“아, 도시가 보입니다.”
“이야, 안개 봐라… 괜히 청연둥지라 불리는 게 아닌가 봅니다요.”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딱 2주를 채웠을 때, 우린 캄버러에 도착했다.
크헝!
“으악, 마지막까지!”
“으하하, 죽어라!”
운이 좋았달지, 걱정했던 악마나 악마숭배자의 습격은 끝까지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급증한 맹수의 수를 절절히 경험했을 뿐.
“마기에 물든 것은 아닌데… 기이한 일이로군. 대다수가 고양잇과 종류인 것도 참 수상스럽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러게 말입니다.”
악마가 아닌 것은 다행이나, 상위 포식자에 해당하는 동물이 갑작스럽게 늘어난 것 또한 좋은 소식은 아니다.
그것들이 보통 서식하는 환경을 떠나 영역이 겹치건 말건 떼거지로 몰려오는 것도.
해서 우리는 약간의 걱정을 품은 채 도시에 입성했다.
신분 검사 끝에 입성한 캄버러는 휴델렌보다 덜 아름답지만 크기는 더 큰 듯싶다. 정오인데도 도시 곳곳에 흐르는 안개가 묘하게 지상이 아닌 곳의 느낌을 내었다.
“우와. 모험가가 장난 아니게 많은데요.”
와중에 거리에는 무장을 한 이들이 심심찮게 돌아다녔다. 장비가 통일되지 않은 걸 보면 아마 높은 확률로 모험가일 사람들이었다.
“도시에서 짐승 토벌에 현상금이라도 걸었나 보군.”
“짐승보단 악마 사냥이 재밌지 않나?”
“안전한 건 이쪽이지 않나.”
하긴, 일반인들은 고블린에도 쩔쩔매는 형편이다. 마기침식이라는 위험도 감수해야 하고.
그럴 바에야 보수는 적어도 상대적으로 안전한 짐승 사냥에 사람이 몰릴 법하다. 규격 외의 실력자인 버서커는 별로 이해 못 한 눈치지만.
“베르세르크는 악마 사냥이 더 재밌다.”
“같이 다니다 보면 심심찮게 겪을 테니 걱정 말게.”
각설하고, 우리는 짐을 풀기 위해 신전으로 향했다. 정보 역시 그곳에서 1차로 얻었다.
온갖 사람이 모여드는 신전은 모험가 길드만큼이나 정보가 잘 모였다.
“이상 사태에 대한 원인은 아직입니까?”
“안타깝게도… 짚이는 건 아직 없습니다. 최근에 땅이 마르는 건 확인했지만, 그게 원인이라기엔…….”
“땅이 마른다?”
“비류호飛流虎께서 모습을 감추신 이래, 이 시기가 되면 종종 산과 들이 마르곤 합니다. 공기가 버석해지고 사막으로부터 모래가 날아오지요.”
그러나 교단 또한 명확한 동기를 아직 못 찾은 모양이다.
“이번은 메마름의 강도가 조금 큰 듯합니다만, 이례적인 수준은 아닙니다. 불과 칠 년 전에도 이랬으니까요. 무엇보다 이 현상의 여파는 저희보다 에드니엄이 더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쪽이 사막과 더 가까우니까요.”
“그럼 에드니엄의 상황은……?”
“그곳은 짐승의 습격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최근 소성주님의 결혼 문제로 꾸준히 교류 중이니 진위는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메마름을 원인으로 지목하긴 어렵겠습니다. 다른 것을 고려해 봐야겠군요.”
“예… 염두에는 두겠으나, 아마 가능성은 낮을 것입니다.”
“하면 동물들이 몰려오는 방향은…….”
“아쉽게도 한 방향으로만 오는 게 아닌지라…….”
나는 그들의 대화를 두고 응접실 비스무리한 공간의 벽에 등을 기댔다.
아크메이지와 인퀴지터, 데브는 방의 한가운데에 있는 책상을 둘러싸고 주교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이거 맛있다!”
“더 드릴까요?”
“오!”
버서커도 책상 근처에 머물렀다. 대화보단 간식거리가 목적인 듯싶지만, 어쨌든.
그보다 이곳은 갈수록 껄끄러워지는 느낌이란 말이지.
나는 하락세가 더 커진 HP창을 보며 팔짱을 꼈다. 아직까진 떨어지는 양보다 차는 양이 더 많지만, 앞으론…….
[저…….]
그때 하얀 미사포를 쓴 사제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키는 제법 컸고, 미사포 안쪽으로 보이는 얼굴은 전체적으로 허여멀건 인상이었다.
[감정이 많이 쌓이신 듯한데, 영광을 곁에 두어 마음의 안식을 맞이하시지요.]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인상착의다 싶을 무렵, 상대가 그런 말을 내놓았다. 아무래도 내가 심통 난 얼굴을 한 게 걸렸나 보다.
‘저 개자식이.’
뭐, 그 배려가 무색하게, 나는 천 하나 쓴다고 평온이 오겠냐 싶어 하는 무교인이다만.
[부디 형제님께 영원한 안식이 찾아오길.]
그래도 베일을 쓰면 표정을 덜 신경 써도 되는 게 확실히 좋다.
‘죽여. 저 망할 새끼를 죽여!’
나는 묘한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일단 미사포를 머리에 얹었다.
미사포는 원래 하얀 거 아닌가? 검정 미사포도 있나? 그런 의문은 미뤄 두었다.
‘빌어먹을 머저리 놈이!’
장례미사에는 검정색 베일을 쓴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거니와, 준 사람이 사제니만큼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응? 악마기사, 그 미사포는 어디서 났습니까?”
아닌가? 나는 신관과 대화하던 인퀴지터와 시선을 마주쳤다가 식겁한 김치만두의 얼굴을 보고 가설을 철회했다.
반사적으로 신관이 있던 자리에 시선이 갔으나, 그는 이미 떠난 후였다.
“검정색은 불길… 하진 않지만 그래도 교단에서 검정색 미사포는 결코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것을…….”
너네 사람이 주고 간 건데…….
나는 그 문장을 컨셉에 맞게 다듬어 툭 대답했다. 주변에 있던 모든 이가 딱딱히 굳은 얼굴을 했다.
“검정색 미사포는, 악마가 계약자를 세례할 때 쓰는 물건입니다. 혹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망하는 상대에게 선물하기도 합니다. 네겐 악마나 쓸 검은 베일이 어울린다는 의미로.”
그러나 다음 문장엔 나도 얼굴을 굳혔다.
미친.
“미사포를 건네준 사제의 얼굴을 알려 주십시오!”
나는 이미 인퀴지터의 손으로 넘어간 검은 베일을 노려보며 이를 빠득 갈았다.
그러곤 천천히 단어를 씹어 뱉었다.
“종이를 내놔라.”
이곳에 몽타주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없다면 내가 최초로 만들어 주마. 감히 내 컨셉의 성질머리를 건든 놈아.
“여, 여기 있습니다.”
내 살기등등한 표정에 주교가 슬그머니 종이를 내주었다. 내 손이 그것을 빠르게 낚아채, 신경질적으로 펜을 휘갈기기 시작했다.
“어!”
웹툰을 십 년쯤 그리다 보면 아무리 손이 느린 사람도 그림 그리는 속도가 붙기 마련이다. 하여 3분도 채 걸리지 않아 한 인물의 초상이 나왔다.
상대의 특징이 명확해서 헷갈릴 것도 없었다.
“이 사람은…….”
한데 데브가 묘하게 아는 눈치다.
침음을 삼킨 이가 다소 잠긴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저번에, 제게 접근했던 놈입니다.”
미친. 완전 미친.
“휴델렌도 모자라 이곳까지 따라왔단 말인가……?”
“잠깐, 저 망종에게 접근했다면… 혹시 휴델렌에서 출발할 때 들었던 그?”
어쩐지 찝찝하더라!
콰직!
“버러지가, 감히……!”
“악마 따위가 신의 땅에 기어들어 왔단 말입니까!”
어쨌거나 이번 일로 나와 인퀴지터까지 도화선에 불 붙어 버렸다.
이번 에피소드가 어떻게 흘러갈진 몰라도 이놈은 잡히면 진짜 죽게 될 거란 이야기다.
‘레비아탄, 그 새끼는 반드시 족친다.’
반드시.
* * *
[커헉!]
[이럴 줄 알았지. 그러게 교단의 영역까지 가는 건 너무 과하다니까. 마기를 숨기는 건 장기도 아니면서.]
피를 토하는 이를 보며 보랏빛 머리칼의 존재는 혀를 끌끌 찼다. 끝으로 갈수록 검정색에 가까워지는 머리카락 옆에서는 까마귀가 푸드덕거리고 있다.
[흐, 흐흐. 글쎄. 내가 가서 본 걸 너도 봤다면, 그런 말 못 할걸.]
[그래, 그렇겠지. 신전 내부를 내가 볼 일은 없으니까. 모비 딕, 너나 보러 가지.]
부드러운 곡선의 다리를 꼰 채 낮은 담장에 앉아 있던 존재는 시큰둥히 그 말을 들었다. 그에 객혈하던 이, 모비 딕이 흐흐 웃었다.
[놈이 나를 못 알아본 채 얌전히 검은 미사포를 받아들인 걸 봤다면 판데모니엄, 네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어?]
[…지금 뭐라고?]
[하핫, 하하핫!]
보랏빛 머리칼의 존재, 판데모니엄의 반응에 모비 딕은 대소를 했다.
탐욕을 숨기지 못하고 황홀해하는 판데모니엄의 표정을 그리고 방금 보았던 멍청한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의 고통 따윈 한없이 가볍기만 했던 까닭이다.
불쾌함을 참고 교단의 땅덩이에 발을 내민 가치가 있었다.
[멍청한 그레첸. 꼴도 좋지. 그릇 하나 못 삼켜서 나조차 못 알아보고 욕이나 넙죽 듣는 모습이라니.]
[아… 그 정도란 말이지. 듀크가 한 말이 있어서 설마설마하긴 했는데… 탐나네. 이번에라도 가져 봐?]
모비 딕은 여즉 가라앉지 않는 통증을 두고 피를 더 뱉었다.
힘을 억누르고 억누른 상태에서 독을 몇 컵이나 삼킨 꼴이니만큼 며칠간은 이 꼴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지만… 상관없다.
⌈레비아탄⌋
제 진명이 어딘가에서 호명되었는지, 손등 부위에 문자 형태로 들끓는 열기 역시 무시했다.
호명될 때마다 이따위 일을 겪기 싫어, 왕과 대악마들끼리만 기억하도록 조작된 이름이 갑작스레 불렸다면.
하물며 방금 전 분노와 마주치다 못해 그를 도발하고 왔다면.
부른 사람은 얼마든지 좁힐 수 있지 않은가.
모비 딕은, 아니 진실된 이름을 이르길, 레비아탄은 손등에서 느껴지는 열감을 외면한 채 제 뱀의 턱을 간질였다.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죽이고 말겠어, 그레트헨.]
[아아, 안 돼. 걘 내 거라고.]
[흥. 탐나면 네가 먼저 차지하든가.]
왕에 버금가는 강자란 이유로 단 하나만을 대가 삼아 온갖 자유와 권리를 부여받은 망할 그레첸. 그따위는 한낱 물고기에 불과하다며 매번 위에서 내려다보던 망할 그레트헨.
[그렇지만 알아 둬. 난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니까.]
언제고 이기고 싶어서, 이길 수 없어서. 항상 입술만 깨물게 만들던─.
[메피스토펠리스, 그 개자식은 반드시 죽인다.]
빌어 처먹을 메피스토펠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