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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26화 (126/389)

◈126화 그걸로 충분한 (1)

【죄송합니다. 저희의 부족함으로…….】

적절한 수면 시간을 취하니 정오라.

아크메이지는 그 시간 동안 차마 들어오지 못한 채 바깥을 서성이던 이들을 확인했다.

그녀가 자기 전 기를 쓰고 설치한 결계들이 아니었다면 분명 하나쯤은 몰래 들어왔을 터였다.

그것은 저 황송한 표정과 은근히 그녀의 너머를 살피는 기색만 봐도 알 수 있다.

악마기사의 상태를 걱정한다기엔 그들의 얼굴에서 염려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니 분명 아이를 의식하고 있는 것일 테다.

뭐, 정황만 보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의 관리 실패로, 반역죄로 죽은 이의 자식이 손님을 습격한 상태니까.

그러나 이면을 보면 다르다. 아이는 분명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고, 그 과정에서 악마기사를 노렸다. 그것도 악마기사가 이 땅의 족장과 마찰을 일으킨 날 밤에.

계획이라고 보기엔 허술하나, 우연이라기엔 미심쩍다. 그리고 아크메이지는 이 미묘함을 결코 놓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이것이 족장의 노림수가 아니더라도 아이의 안위를 위한다면 보내지 말아야 했고 말이다.

악마기사가 아이에게 기회를 베푼 이상, 그녀는 그것을 지켜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괜찮습니다.】

【저, 아이는…….】

【저희가 알아서 처분하지요.】

【예?】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다 못해 보호하는 상황이 조금 우스울까. 하지만 뭐 어쩌겠나. 이미 말해 버린 것을.

그녀는 건조하게 웃고는 식사는 됐노라 거절하며 문을 다시 닫았다.

비가볼 족장이 그들에게 사기 쳤다는 사실도 알아 버렸겠다, 살인 교사 의심도 생겼겠다. 가능한 어떤 호의도 받지 않을 것이다.

【으…….】

그때 아이가 비척비척 일어났다. 노란색 눈에 빛이 맴돌자 꼭 흐르는 꿀처럼 선명한 금빛이 되었다.

【어!】

아이는 자신이 누워 있던 곳과, 제게 덮인 것을 확인하며 곧 우물쭈물거리기 시작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그 나이대 아이 같아 푸근해졌다.

【밥이라도 들겠나.】

식사는 다 거절했지만 미리 챙겨 둔 요깃거리가 있다. 그녀는 분위기도 풀 겸 제안했다. 아이는 껄끄러워할지언정 거절하지 않았다.

【…그, 저 사람은… 안 깨워도 괜찮은 거예요?】

【괜찮네.】

식사도 중요하긴 하지만, 굳이 자는 걸 깨워서까지 먹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는 좀 자야 했다.

독의 후유증인지 요 며칠간 잠이 늘긴 했으나, 여전히 평균에 비하면 수면 시간이 너무 적다.

“아니… 가장 안 자는 건 베르세르크 쪽이었나. 하여간, 전사들이란.”

【예?】

【아닐세. 들게.】

어쨌거나 악마기사는 좀 더 자도 좋다. 그녀는 악마기사의 잠을 방해하지 않았다.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뜨도록, 계속 눈을 뜨지 않았을 땐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 * *

‘화내. 불합리한 모든 고통들을 향해서 화를 내.’

‘눈 가리고 아웅도 이 정도면 됐잖아. 슬슬 분노할 때가 되지 않았나?’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 속는 것도 지쳤을 텐데.’

‘네 손에 피를 묻히도록 한 것들에게 분하지도 않아?’

‘네 심장을 찌른 아이가 바로 앞에 있잖아. 널 죽이려 한 것이잖아. 어떻게 용서하는 거야.’

‘현실 도피도 더 이상은…….’

「 ▲ 1시간 00분 자기 ▼ 」

「 ▲ 1시간 00분 자기 ▼ 」

「 ▲ 1시간 00분 자기 ▼ 」

.

.

.

“…사.”

꿈도 없는 잠은 생각보다 편안하다.

“…기사!”

피로하지 않더라도 뒤척임 없이 바로 잠들 수 있게 해 주는 시스템 역시 쓸 만하다. 아니, 이게 사실상 최고다.

“…마기사!”

현실이었다면 스트레스 때문에 역으로 잠을 설칠 일도 어떻게든 잠만큼은 편하게 잘 수 있으니까.

“악마기사!”

그러나 잠은 언젠가 끝나야 한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뭐냐.”

나는 느리게 눈을 뜨며 상황을 살폈다.

자고 깨고를 반복했더니 내가 얼마나 잔 건지 모르겠다. 목소리가 푹 잠긴 걸 보아 나절은 넘게 자지 않았을까 싶긴 하다만.

“…괜찮은 건가?”

“뭐냐고 물었다.”

얼마나 잔 거지? 나는 혹 급한 일 때문에 깨운 건 아닌가 하며 주변 기척을 확인해 보았다. 특별한 건 없었다.

“…그, 아닐세. 그보다 배는 안 고픈가?”

그래도 햇빛이 스며들어 오는 걸 보면 낮인가 본데. 내가 새벽 즈음에 잠든 것 같으니 낮이면 평타가 아닌가 싶지만…….

정말 그랬다면 아크메이지가 저렇게 식겁한 얼굴일 리 없다. 거기에 포만도, 생각보다 더 많이 떨어졌어.

나 혹시 하루 이상 잤나?

“식사할 때가 돼서 깨워 봤네.”

정말 그런 거라면… 생각보다 더 많이 잤다. 깰 때마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생각이 삼천포에 빠지는 게 비참해서 시스템 기능만 연타했더니만 이런 실수를.

마이 미스테이크다.

“강요는 않겠지만… 생각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들게.”

그러나 이미 벌어진 걸 어쩌겠나. 피로도가 0으로 화한 점에서 꼭 나쁜 일도 아니고.

나는 그러려니 하며 식탁에 합류했다. 캐붕에 대한 걱정이 조금 일었으나, 그것도 금방 접었다.

컨셉에 안 맞는 행위긴 했는데, 그래도 심장 근처를 찔린 직후잖아.

대충 후유증이라고 넘겨 주지 않을까? 솔직히 이 정도면 캐붕이고 자시고 뭐라 하는 게 더 이상한 것 같은데.

“더 이상 족장의 호의를 받는 건 악수일 것 같아, 내 가진 걸로만 차려 봤네. 해서 차림이 간소한데… 괜찮겠나?”

그사이 아크메이지가 밥상을 두고 살짝 변명했다. 지난 식사와 차이가 심해서 왜 그런가 했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나 보다.

하긴. 나 같아도 가정 폭력범에다가 아이들 목숨 가지고 협박한 미친놈의 호의는 받기 싫다.

그 새끼한테 추가로 뭘 더 얻어먹느니 그냥 간장에 밥 말아 먹는 게 낫지. 그럼그럼.

그런 점에서 이 정돈 얼마든지 OK다. 차림이 간소한 것도 남이 차려 준 밥상인데 어찌 불만을 토할까.

거기에 내가 편… 식을 좀 하긴 하지만 적어도 이 차림상에서 편식할 만한 건 없다.

나는 곡물 가루를 풀어 끓인 수프를 군말 없이 받아먹었다. 개떡같이 말했는데도 찰떡같이 알아들은 듯, 아이 역시 자리에 남아 있었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아크메이지와 꽤 친해진 건지 둘 사이가 제법 가깝다.

“그, 슬슬 출발할까 하는데… 좀 더 쉬고 가는 게 낫겠나?”

친하면 좋은 거지.

나는 조금 멍한 정신으로 수프를 입에 밀어 넣었다. 먹먹함 속에서 전해져 온 아크메이지의 말이 귀를 거쳐 뇌에 도달했다. 두 번 곱씹은 뒤에야 말뜻이 이해가 갔다.

드디어 산군 만나러 가나? 아니면 족장이 쓰레기인 걸 알고 그냥 산군이고 자시고 다 때려치운 건가.

개인적으로 후자면 좋긴 하겠는데, 이거 마탑 퀘스트니까 아마 전자겠지?

“필요 없다.”

나는 알아서 납득하곤 적당히 답을 내주었다. 내가 오래 잔 게 부상 때문이라 생각하고 배려해 주는 거라면 그다지 필요 없거든.

출발을 미룰 정도로 몸 상태가 나쁜 건 아니니까.

“정말… 음. 알겠네. 하나 무리하진 말게. 쉰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니.”

그렇기야 하겠지만, 컨셉이 허락해야 말이지.

나는 기계적으로 수프를 다 비웠다. 뜨거운 수프는 속을 데우는 듯했으나, 미묘한 오한은 가시질 않았다.

【저… 무슨 이야길…….】

【아, 별거 아닐세. 어제 아카타, 자네에게 들려준 그 얘길세.】

【아…….】

주변 공기가 따뜻해도, 아무리 뜨거운 음식을 먹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서러움이 가져오는 한기였다.

“그럼 이만 출발하세. 챙길 거 다 챙기고…….”

…그래도 정신 차려야 한다. 나는 또다시 삼천포로 빠지려는 생각을 지우며 표정을 고쳤다.

컨셉은 어느 순간에도 지친 심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GAO니까… 아니 KAO였던가? 갑자기 영문 표기 헷갈리네.

쾅!!!

근데 이걸 이렇게 다른 쪽으로 집중하게 해 준다고?

나는 퀘스트로 인한 흐름이라지만 참 너무한 거 아니냐며 얼굴을 구겼다.

암, 사소한 것에서 거대한 스케일로 사건이 확대되는 것이야 이해하지만, 이런 식의 연속 이벤트는 좀 아니지 않나.

대삼림에 들어온 후 폭발 소리만 벌써 세 번째다! 이 정도로 패턴을 우려먹으면 플레이어들 다 질려서 노잼 할 거라고!

“…정말 바람 잘 날 없는 곳이군.”

저 봐라. 아크메이지도 현타 온 얼굴이지 않나.

나는 시나리오 라이터가 월급도둑 한다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물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알아보니까 그쪽 일거리 정말 많더만.

【무슨 소리가…….】

【아카타, 자네는 잠시 여기 있게.】

아크메이지가 아이를 잠시 달래는 사이,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상황을 파악하고자 주변으로 돌아가는 눈은 금세 가늘어진다.

땡땡땡!!

【습격이다!】

【자타브 놈들이 왔다!】

굉음에서부터 반쯤 직감했지만, 아무리 봐도 습격 같지?

“자타브는 정말 병력이 넘쳐 나는가 보구만…….”

나는 마을 입구 쪽으로 달려가는 이들을 보며 흐린 눈을 (속으로) 했다.

거기에 아크메이지의 말이 더해지면, 습격임이 맞는 것도 모자라 습격자가 자타브임을 알 수 있다.

그래. 세르항 부족에 있었을 때 한바탕 날 일하게 만든 그놈들 말이다.

정말 호전적이기 짝이 없는 부족이었다. 카타나인지 카티나인지 대족장 뽑는 시기라고 사방팔방 찌르고 다니네. 이렇게 정치 견제해도 되는 거야?

“더 이상 이 싸움에 끼어들 이유가 없네. 차라리…….”

그때 아크메이지가 골을 짚은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사기는 그쪽이 먼저 쳤으니 굳이 인사할 필요는 없겠지. 그냥 이 틈을 타 몰래 떠나세.”

과정이 너무 생략된 까닭에, 내 입장에선 황당하기까지 한 말이었다.

저기요. 기반 설명 없이 그렇게 말하면 제가 이해를 못 한다고요. 웬 사기?? 설마 저 애 진짜로 아타르트가 보낸 암살자야??

“뭔 소리냐.”

나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내가 암만 주변에 관심 없는 컨셉이라곤 하나 이건 물어봐야 했다.

무려 ‘사기’라는 단어가 나왔으니 당연하다. 내 컨셉은 당하곤 못 산다.

“아… 자네가 못 들었다는 걸 내가 잊었군.”

아크메이지는 나이가 드니 너무 깜빡깜빡하는 것 같다며 사과한 후─그래도 내가 봤을 땐 아크메이지보다 내 기억력이 더 나쁜 것 같다─어제 일을 가볍게 설명해 주었다.

듣고 나니 얻은 감상은 아타르트가 진짜 제대로 된 개자식이란 것이다.

가정 폭력범이란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싸했는데, 우리에게 내건 의뢰 조건까지 사기? 처음부터 싹수가 노란 새끼였네, 이거.

‘죽여야 하는 거 아니야?’

진짜 죽여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순간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아차, 하며 풀었다.

상대가 아무리 인간 말종 분리수거는커녕 재활용도 안 될, 개선되지 않을 쓰레기 새끼라고 하지만 죽이는 건 인권에 어긋난다. 주로 내 인권에.

아무렴 저 쓰레기 놈 처치하자고 내 손을 더럽히는 건 내 손에게 너무 모욕적이잖아.

애초에 폭력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태도도 나쁘고.

그렇지만 저놈이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할 범죄자란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개입할 여지가 없어서 두고 봐야 하는 피해자들을 두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컨셉이라면 이때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을 해야 하는데, 계속해서 사감이 더해지며 놈을 족치자는 쪽으로 기운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그, 자네 혹시…….”

내 표정이 좀 구렸나 보다. 아크메이지가 땀을 뻘뻘 흘리며─그녀는 땀을 흘리지 않지만 대충 그래 보인단 의미다─내게 말을 걸었다.

【젠장, 마법이!!】

그러나 타이밍이 엇나갔다. 또 한 번 굉음이 울려 퍼지며 폭발이 일었다. 건물 안이었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시야가 트여 있어서 과정이 더욱 잘 보였다.

“뚫리겠군.”

아주 정확한 답변이었다. 이곳의 제사장은 전부 반역에 가담한지라 적들의 마법에 대항할 인력이 없었다.

그러니까, 손님이자 사실상 용병으로 와 있는 아크메이지를 빼면 말이지?

【손님!!】

저 봐라. 냅다 달려오는 거.

나와 아크메이지는 달려오는 인원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물론 우리가 너무 느긋이 굴었던 것은 아니다. 말이 설명이고 고민이지, 바깥에서 1분도 채 안 서 있었거든.

그런데 뭐. 남을 발견하고 부르는 게 근거리에서만 가능한 건 아니지 않는가. 그뿐이었다.

【배신자들이 자타브를 끌어들였습니다. 부디 도움을─.】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네.】

아직 결론도 안 내린 상황이나 아크메이지는 냉정하게 쳐 냈다. 내가 혹시라도 아타르트 죽이러 갈까 봐 서둘러 결정한 것 같기도 한데… 진실은 그녀만이 알 따름이다.

【마탑에서 연락이 와서 말일세. 우리 사정도 급해졌네.】

【저흰 이대로면 당하고 맙니다!】

【돕지 못하는 건 나도 정말 슬프게 생각하네.】

어조에서 느껴지는 냉랭함이 아주 시베리아 벌판 같다.

【어째서……!】

【미안하네. 아이는 어제 말한 대로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겠네.】

별개로 나는 지금이라도 아타르트를 족치러 갈까 말까 하다가, 어차피 이대로면 비가볼은 무너지겠거니 하고 말았다.

아타르트가 나쁜 놈이라고 끼어들기엔, 이 상황에 너무 많은 것이 얽혀 있었다. 빌어먹게도.

【…만약, 손님께서 요청을 거절하실 경우에 한해 족장님이 남기신 전언이 있었습니다.】

빌어먹게도.

“오지 않겠다면, 어차피 패배할 것. 마을의 아이들을 전부 죽이겠다. 【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개자식은 나쁜 짓을 하나만 하지 않는다.

* * *

“어우, 씨. 겨우 왔더니 여긴 또 왜 개판이야…….”

“싸움! 전투! 베르세르크는 저곳에 끼고 싶다!”

“투사 나리는 좀 참아요. 아니, 애초에 손해뿐인 싸움에 왜 끼려고 하는 거야??”

지금껏, 데스브링거의 인생에 최고로 말 안 듣고 안 통하는 이 1위는 악마기사였다. 그러나 베르세르크가 합류한 이래, 그 순위가 살짝 변동될까 말까 한다.

이 양반은 진짜 평상시엔 괜찮은데 싸움만 관련되면 눈이 돌아간다.

악마기사는 악마 관련 소재에 눈 돌아가고 평상시에도 대화가 잘 안 되니 아직은 그가 1위지만.

“분명 더 많은 싸움을 찾아 합류했다. 그런데 매번 싸우지 말라고만 한다……. 너희 거짓말쟁이다…….”

“저는 그렇게 말한 적 없는뎁쇼.”

합류한다니 어어, 합류하는구나 했을 뿐, 합류하라고 설득하는 데 나선 적은 없다.

데스브링거는 그렇게 책임을 탈피하며 흰바람이 내준 아이템을 눈에 가져다 대었다.

생명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기운을 탐지해서 벽 너머의 존재도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아이템인데… 잠입 경로를 짤 때야 도움이 되겠지만 사람 찾는 덴 영 불편하다.

다들 윤곽선만 따서 각종 색으로 칠한 것처럼 보여서─.

“어!”

마력 사용자들은 찾기 쉬울 거라더니 이게 이런 의미였나.

일반인의 색이 흐리흐리하여 배경과 구분이 잘 안 가는 수준이라면, 마력 사용자들은 색이 진해서 보다 뚜렷이 보이는 정도다.

그리고 악마기사와 아크메이지는…….

“이건 뭐 헷갈릴 것도 없네.”

가진 바 기운이 너무 거대해서, 인간의 형상을 띠지도 않았다. 아니, 아크메이지는 윤곽선이 뿌예졌을지언정 그래도 인간의 형상이었는데, 악마기사는 그냥… 그냥…….

그 공간을 둥글게 도려낸 것 같았다. 관측조차 허가하지 않는 것처럼.

“근데 왜 이쪽으로 나오시는…….”

설마 이 싸움에 참전하려는 건가? 아니, 뭐. 산군이 걸려 있으니까 협력한다면 이상할 건 없긴 한데, 가능한 정치에 개입하지 않기로 한 거 아니었나.

“…어린 사냥꾼.”

그런데 왜─.

“엎드려라.”

일순, 제 몸을 짓누르는 무게에 데스브링거는 숨을 삼켰다. 제 위에서 느껴지는 근육의 무게가 생각보다 더 무거웠던 탓이다.

그러나 그건 그다음 벌어질 장면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

소리라고도 할 수 없는 파동이 천지를 뒤흔든 순간, 후드 자락과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베르세르크가 제 몸을 눌러 주지 않았다면 고생깨나 했을 풍압이었다.

“대체 뭔…….”

그리고 그는 보았다. 제 머리 위, 울창하게 뻗어 있던 나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몬타타 섬의, 그 도시, 그 성에서 성의 반쪽이 아랫부분을 조금 남기고 가루가 되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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